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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초기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신학적 검토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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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학연구소 / 조덕영 박사 

 

2014년 7월 23일 기사

 

 

초기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신학적 검토
Theological Consider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Spread of the early Christianity

Ⅰ. 들어가는 말
 


한반도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일까? 한국 개신교는 ‘전래론’의 입장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부부 입국) 두 선교사가 한반도 제물포(현 인천)항에 공식 입국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을 한국개신교의 출발로 잡고 있다. 한국교회가 1985년 기독교한국선교100주년 기념행사를 공식 거행한 것도 바로 그런 관점을 수용한 결과다. 하지만 공식 전래가 아닌 ‘수용론’의 입장에서 한신대 연규홍 교수처럼 만주 땅에서 스스로 성서를 읽고 기독교신자가 되고자 했던 4명의 한국 청년들이 첫 세례를 받은 1876년을 한국개신교의 첫 시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1년 먼저 1884년 입국한 의료 선교사 알렌의 활동으로부터 한국교회사의 시작점을 잡으려는 시도도 있다. 1909년 8월 27일 평양에서 열렸던 ‘한국선교 25주년 대회’에서 보고된 초기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명단이 알렌(1884년 9월 20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1885년 4월 5일), 스크랜톤(1885년 5월 1일), 헤론(1885년 6월 21일) 등의 순으로 정리됐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또한 알렌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며 고종과 명성왕후를 비롯한 고위층의 신임을 얻게 됐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선교사들의 초기 사역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측면도 있었다.

 

 

천주교는 이보다 100년 더 빨랐다. 천주교 전파는 먼저 천주교 관련 서적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양학문에 대한 남인(南人) 학자들의 관심에서 시작된 서양 서적 탐구활동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실학자 이수광, 유몽인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처음 소개하였다.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는 아담 쉘과 교리에 관한 토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에 이르다가 마침내 정조 7년(1783년) 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갔던 이승훈(李承薰, 다산 정약용의 매형)이 1784년 그곳에서 친히 영세를 받고 이듬 해 돌아와 이벽(李蘗, 정약용의 이복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 정약전(정약용의 둘째 형)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꾸림으로써 한반도에 자생적 천주교 모임이 태동하게 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이 같은 한반도 선교사(宣敎史)는 김광수, 김양선(金良善), 민경배(閔庚培), 박용규, 배본철 같은 관련 학자들에 의해 그 막후 사정이 대체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문제는 그 이전의 한반도 기독교 전래사이다. 어떤 이유때문인지 그 이전 한반도 기독교 전래사는 잘 정리되어 있지를 못하다. 한국기독교회사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박용규 박사도 한국기독교교회사의 주요 사건 연표에서 첫 사건을 635년 알로펜(Alopen)을 통한 네스토리우스주의(景敎)의 당(唐) 전래와 845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Ibn Khurdhiba, 820-912)가 On Every Routes and Kingdome(諸道路 및 諸王國志)에서 신라를 언급하므로 한국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 논고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이전에 들어 온 한반도 기독교 전래에 대한 신학적 검토를 시도하는 것을 목적에 두고 있다, 즉 교회사가(敎會史家)들이 다루는 공식적 한반도 선교 이전의 기독교 전래 가능성과 그들의 기독교 신앙 전래에 대한 신학적 평가와 검토가 주목적이 되겠다.

 

 

Ⅱ. 창조 섭리로서의 역사 연구의 중요성

기독교는 창조 신앙에서 출발하는 종교이다. 모든 천지만물의 출발과 기원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둔다.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벨직 신앙고백 제 13 조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 선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저버리시거나 혹은 운명과 우연에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거룩한 뜻에 따라 만물을 지배하시고 다스림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섭리는 성경 뿐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 신학자 박해경 박사도 창조와 섭리를 하나의 교리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박 박사는 두 교리는 구별은 되나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교리임을 분명히 하였다. 창조론 연구도 단순히 창세기 1-3장에 머무르는 근시안적인 관점을 넘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창조 섭리 전반에 걸쳐 종합적 시각으로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버렐(Sidney A. Burrel)은 서양 근대사 속에서 종교가 수행한 역할을 중심으로 역사에서 종교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특별히 기독교가 그랬다. 윌리엄 호던(William Hordern)은 타종교가 자연과 신비적이거나 합리적 경험 속에서 신의 계시를 찾는 데 반해 성경 신앙은 주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그것을 찾는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창조 뿐 아니라 십자가 고난이나 부활과 같은 성경 속 사건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확신에 기초한 종교이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의 실제성은 하나님이 내리신 대명령과 대사명(大使命) 속에서 선교의 이름으로 확산되어 갔다. 한반도 기독교 전파도 주후 1700년대나 1800년 대 불쑥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와 창조 섭리의 연속성에서 볼 때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기독교가 한반도에 공식 전파되기 이전에 일찌감치 중국에 자리 잡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활발한 선교적 탐색과 접근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실제로 그 가능성과 실제적인 역사적 증거들에 대해 많은 주장들이 끊이지 않아왔다. 본 논문은 바로 그 사실의 신빙성 여부와 기독교 전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신앙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원인 그리고 교리적 정합성 검토를 시도해 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

Ⅲ. 한반도 초기 기독교 전래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한계

한반도 초기 기독교 전래를 다루는 데 있어 문제점은 구전 자료나 문헌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일부 개인적 주장과 고고학적 유물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있다. 정통 교회사학자들이나 관련 학자들이 이 분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외면하는 사이 초기 기독교 전래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쏟아졌다. 초기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해 정통학자들과 딜레탕트 그리고 재야학자들이 뒤섞여 다양한 견해들을 쏟아낸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지난 제 13회 창조론오픈포럼에서 이미 간략히 다룬 적이 있다. 즉 진보 신학측에서 1963년 윤성범이 “단군신화는 삼위일체의 흔적이다”라는 논문을 통해 토착화신학과 단군 신화논쟁을 촉발한 것과 함석헌이 우리 민족이 기독교신앙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수천 년 동안 민중의 가슴 속에 한님(환인) 곧 ‘하느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 진보신학의 윤성범, 유동식, 김경재 등이 이 같은 함석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2003년 허호익 박사가 단군신화의 문화사적 해석과 천지인 신학을 전개한 책을 출간한 것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단군신화의 전승 초기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가를 추적한 단군신화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향적인 이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시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기독교와 한반도 관련사에 대한 고찰로 한글의 히브리어 기원설을 주장한 조철수 박사, 사도 도마의 동아시아 선교를 다룬 정학봉 박사, 삼국시대 전래된 불교와 기독교(경교)의 관계를 다룬 임정의(林政義) 박사, 경북 영주의 분처(分處)바위와 안동 학가산(鶴駕山) 유적을 고대기독교 유적이라 주장한 유우식(兪禹植), 김해 가야를 기독교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기독교는 계시와 역사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임을 표방한다. 이 계시와 역사와 진리는 마치 삼위일체처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역사한다. 육적(창조)·영적(구속) 족보의 종교인 기독교가 역사의 진리 추적을 외면한다는 것은 수세적이고 비겁한 학문적 자세이다. 이제 성경과 우리 민족 역사의 다리를 놓는 작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진리요 참 역사인 성경적 신앙의 초석을 놓는 작업을 시도할 때라고 본다. 진리에 바탕을 둔 바른 해석만이 복음 전파에 있어 참된 힘과 참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본 논고는 바로 이 같은 논문의 연장 선상에서 초기 기독교 복음의 한반도 전래 가능성과 타당성을 검토하고 기독교가 전파된 적이 있었다면 왜 그 선교의 연속성이 두절된 것인지 그에 대한 신학적 검토를 시도하고자 한다.

Ⅳ. 초기 기독교 복음의 한반도 전래 가능성과 신학적 검토

1. 사도 도마의 선교 가능성과 신학적 평가


도마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도마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는 고백을 통해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 제자 중 가장 먼저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음을 보인 최초의 제자였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그가 예수 제자요 사도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tory) 3권에서 전승에 따르면 도마가 파르티아(Partia)를 선교 지역으로 할당받았음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도마의 한반도 선교 가능성은 도마가 파르티아 뿐 아니라 파르티아에 인접한 인도까지 와서 선교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추적한 대표적 국내 학자로는 한신대 명예교수를 지낸 이장식 교수와 침례교의 정학봉 목사가 있다. 이장식 교수는 자신이 고대 한반도 기독교 전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55년 케나다 퀸스(Queen's) 대학에 유학 중 교회사 과제물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동양에 전파된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책을 발견하면서부터 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도 도마에 대한 관심도 그 일련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목회와 신학교 교수직을 병행한 정 박사는 침례교 목회자이면서 장로교 신학교 교수를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학자로 다작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다룬 자신의 저서에서 도마의 한반도 선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사도 도마가 순교하기 전 제 3차 선교여행 또는 동아시아 선교 과정에서 중국의 깊은 곳까지 선교하고 인도로 돌아왔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중국의 깊은 곳을 바로 한반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등 역사교사를 지낸 유우식 장로가 최초 발견하였다는 두 지역을 소개한다. 바로 경북 영주시 평은면 왕유리의 바위석상(일명 분처 바위)과 경북 청송 주왕산 기암(旗岩) 주변의 초대기독교 유적지라고 주장되는 곳이다. 분처 바위는 과거 필자의 지인으로 최근에는 디지털 복원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KAIST 박진호 연구원이 필자가 알려준 정보를 바탕으로 호기심을 잦고 1990년대 초반 군 입대 전 직접 관련 장소를 답사하여 사다리를 이용하여 이끼를 제거하고 관련 지역의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유우식 장로는 분처 바위 인물상 우편에 있는 4개의 정방형 문양이 바로 도마와 그의 신체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자요 청소 주왕산 유적에서는 바위에서 “예수”(禮需)라든가 주님을 상징하는 “주왕”(周王)이라는 글들이 새겨진 것을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정 박사는 이들 유적이 발견된 지점이 가야 연맹의 북쪽 끝인 점과 김수로왕이 김해 가야를 세운 주후 42년이 사도 도마가 비슷한 시기에 당시 세계의 끝인 동쪽 땅 끝에서 선교했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이들 유적을 확실한 도마 관련 유적으로 보고 있다.

 

 

유우식 장로는 1986년 분처 바위 유적을 발견 하기 이전 이미 1984년 6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관한 제 27회 전국역사학대회 한국사부(韓國史部)에서 “중원고구려비와 관련사의 고찰”의 요지(要旨)를 요약 발표하는 과정에서 환인(桓因)을 아브라함으로, 환웅(桓雄)을 야곱으로, 호태(好太)를 태신(太信)으로 개구리를 비유(譬喩)된 부활 신앙으로, 노객(奴客)을 여자의 아이(子)를 구주(救主)로 섬기는 사람으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기독교로, 신라매금(新羅寐錦)을 실성(實聖)으로, 실성의 실을 성신숭배(즉 기독교신자)의 뜻으로, 충주 노은면과 앙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국망산(國望山)을 호태왕(광개토대왕)이 바라 본 산으로, 고모루(古牟婁) 성을 중원고구려비가 위치한 입석(立石) 마을의 뒷 산에 있는 장미산성(薔薇山城)으로 비정하여 발표 도중과 뒤에 참석자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장로가 주장하듯 호태왕이 기독교신자인 노객주(奴客主)였고 기독교선교에 열심인 신자였고 전쟁 수행이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필자의 고향인 충주 지역이 중원고구려비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 많은 기독교 유적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또한 중국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나 삼국사기에도 그런 사실의 편린이라도 나와야 한다.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유우식 장로는 “분처 바위”를 찾기 위해 1986년 2월 23일 밤 열차편으로 청량리 역에서 영주역에 도착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평은면사무소에 들려 기도 응답으로 ‘바위로 유명한 곳’을 찾아 왔노라고 수소문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시작된 분처 바위에 대한 답사와 연구에 있어 유 장로는 수시로 “주님께 땀 흘린 기도와 성령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여 실증사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연구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서술 방식이 개인의 신앙적 열성과 노고를 증거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관련 학자들에게는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표현이기에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 문자명문도 어떤 문헌이나 구전을 따른 추적 발견이 아닌 금식기도원에서 성령의 감동과 명령을 받아 영주로 내려가 확인하였다는 식의 서술은 역사 교사답지 않은 신앙을 전제한 진술로 보여 정통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외면하는 동기가 되는 듯하여 안타깝다. 다만 1986년 2월 23-24일부터 1988년 8월 15일에 이르기까지 13회에 걸쳐 분처 바위를 비롯해 영주-안동 지역을 답사한 유 장로의 열성만큼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사가 이장식 교수도 도마의 인도 선교와 관련하여 유 장로의 발견 주장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다만 유 장로가 탁본으로 확인하였다는 “명전행”(明全行)이나 “야소화왕인도자도마·명(耶蘇花王引導者刀馬·明 )이라는 글자에 대해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다른 탁본에서는 이 같은 한자(漢字)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자 문화권인 한반도에서 석상을 조각한 사람이 한자에 매우 서툴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이 교수는 유 장로가 석상에서 찾았다는 나귀 탄 예수의 모습이나 막달라 마리아의 뒷모습도 고증이 쉽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독교가 기독교적 문화나 문명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기독교의 본질은 계시에 따른 말씀과 믿음의 종교이다. 문화와 문명과 유물의 증거는 반드시 말씀과 믿음에 대한 전파의 흔적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단순한 기독 유물이 아닌 신앙 고백공동체에 대한 구전이나 문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형상숭배 종교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유물(聖遺物)조차 신앙의 유익한 도구로 보지 않는다. 성유물이란 것은 결국 인간을 유물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 뿐이다. 칼빈은 성유물에 대한 꼼꼼한 비판을 통해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그릇된 성유물들이 만연하였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칼빈은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고 암흑과 어리석음의 지배 아래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숨긴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였다. 그런 면에서 확인이 쉽지 않은 일부 개연성이 있는 유물만으로는 기독교 전파에 대한 구체적 실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만에 하나 기독교전파에 대한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 사도 도마의 복음이 아닌 논란이 많은 유물로 도마의 흔적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이장식 교수의 말대로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겠지만 판단을 앞세우고 접근할 때는 과학적이지 못할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같은 유물이 사실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증거는 분명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2. 가야 연맹에의 기독교 전래 가능성과 신학적 평가

가야 연맹 기독교 전래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주로 김해 가야를 기독교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명 구지가로 알려진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라는 하늘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 설화와 여섯 가야의 건국 설화를 조국현 목사는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옵소서 만일에 나타나시지 않으시면 구이거나(불로 심판받음) 먹히옵니다(외세의 침략으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가락국기의 모든 내용들을 기독교와 관련 지어 해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정교하다. 가락국기 전체 구조를 가야는 정말 기독교 국가였다고 만들어버린다. 가야국명은 “간나라”가 되어 “큰나라”-“신의 나라”로 해석 된다.

 

수로왕과 아유타국 공주의 결혼은 신의 뜻이었고 아유타국은 도마가 선교한 인도의 국가로 해석된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맞기 전부터 기독교와 관계된 사람으로 모태 신앙인이었고 김수로왕릉 정문에 있는 신어문(神魚紋) 즉 쌍어문(雙魚紋)도 기독교 문양이요 “가락”이라는 이름조차 허 황후 모국인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의미로 읽힌다. “파사 석탑”이나 금관가야 제 8대왕 질지왕이 주후 452년 건립했다는 “왕후사”도 불교적 유물이 아니라 기독교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는 본래 고려 제 11대 임금인 문종조(文宗朝) 1075-1084년에 편찬된 가야의 역사책으로 저자는 금관주(金官州:김해지방)의 지사(知事, 지금의 지방장관)였던 문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 내용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가락국기” 안에는 개벽한 이래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군신의 호칭도 없고 그저 간(干)으로 불린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력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 아래 백성들이 모두 10,000호에 75,000명이었다는 진술로부터 시작되어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주후 42년) 있었던 일명 구지가로 알려진 위에서도 소개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어라는 하늘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 설화와 여섯 가야의 건국, 가락국 수도와 궁궐 건립, 수로왕과 신라 탈해왕(脫解尼師今)과의 다툼 이야기, 아유타국 공주 출신의 허황옥(許黃玉)과의 혼인과 아유타국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혼수품, 계림(雞林, 신라) 등의 직제를 모방하여 촌스러운 관제의 정비, 수로왕릉과 사당(祠堂)에 얽힌 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김해지방의 연혁, 수로왕묘(廟)에 할당된 토지 결수, 왕후사(王后寺) 창건 관련 내용, 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歷), 신라에 투항한 연대에 대한 고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이 대부분 설화적이고 후대에 조작된 흔적이 많아서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점이다.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계승을 부자상속으로 처리한 것은 당시의 다른 삼국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사용된 김씨(金氏) 성을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수로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김해김씨의 족보를 주로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허황후가 정말 인도 출신이라면 신하들의 이름도 인도식이어야 옳다. 그런데 신보(申輔) ·조광(趙匡) 등 고려시대 이후에 처음 사용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서술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수로왕릉 묘역 안에 사당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 시대 초기 그런 사당은 전혀 남아있지를 않았다. 《세종실록》 20년 10월 기묘조에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선(李宣)은 보고하기를 자신이 “김해에 이르러 읍성 서쪽 길옆을 살펴보았는데, 가락 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서,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 기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세종대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즉 쌍어문을 기독교 유물로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한 해석법이 아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 왕들의 평균 재위 년 수가 신라 약 18년, 고구려 약 25년, 백제 약 22년 인데 비해 김해가라는 수로왕 즉위년인 주후 42년부터 제 10대 왕인 구형왕 562년까지 평균 52.1년이나 된다. 전기 5왕이 재위 기간이 총 365년, 평균 73년 인데 비해 후기 5왕은 총 155년, 평균 31년 간이다. <가라비문>에 보면 전기 5왕 당시 국구들은 김해가라 특유의 관명인 반면, 후기 5왕 시절 국구의 관명은 신라 관명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김해가라의 권력구조가 전·후기 사이 바뀌었다 것을 의미한다. 즉 김해가야의 역사 단절 기간이 상당히 길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수로왕의 재위 기간도 157년으로 대폭 늘어났다. 후기 김해가야는 자신들의 전기 역사 멸망의 단절기를 숨기고자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이는 동시에 시조 신화를 후기 가야 시대에 맞추어 당연히 각색하였을 것이다.

가락국기가 기록된 삼국유사는 승려인 일연이 저술한 것처럼 기독교적 근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 각색의 증거가 나타난다. 만일 불교적 각색이 훗날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하더라도 불교적 각색 이전에 존재하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핍박과 그 시련에 대한 편린이라도 나와야 정상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석가처럼 서방의 어떤 ‘나무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한 한 인물’을 신봉하는 종교가 한 때 가야 지방에 있었다는 등의 전형적인 강력한 기독교적 특징을 보여주는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 구체적인 증거 문헌이나 구전 증거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 들어 나타난 고대 가야 기독교 국가설에 대한 일련의 주장들은 그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안쓰러운 해석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사도 도마상 진위 논쟁처럼 가락국기에 나타난 기독교적 증거 논쟁도 설령 이들 증거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유물만 가지고서 검증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종교이다. 이런 구체적 흔적이 없다. 따라서 가야 기독교설에 나타난 증거라는 것이 설령 어느 부분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정통 기독교의 모습을 유지하는 신앙 집단이라기보다는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된 일그러진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되겠다.

 

 

3. 경교의 전래 가능성과 신학적 평가

경교(景敎)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약 451)를 중심으로 시작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를 지칭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던 기독론 논쟁에서 안디옥파에 속한 네스토리우스 밑에 있던 아나스타시우스는 다른 파(派)에서 온 자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Theotokos)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논쟁에 조금 늦게 도착하여 뛰어든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따라 마리아를 사람을 낳은 자(Anthropotokos) 또는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로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사실, 논쟁의 중심에 있던 양측 어느 쪽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쪽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렇게 된 연유는 신학적 논쟁 이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떤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였던 키릴을 황제에게 고소한 일에 대해 네스토리우스가 그 처리를 맡게 되었을 때에 양측이 감정싸움을 벌이게 된데서 기인한다. 431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연 에베소공의회에서 안디옥의 요한(네스토리우스 측)이 육로로 도착하기 전 키릴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말았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면직 파문되었으나 선교적 열심히 강했던 그를 따르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틴, 아라비아 및 인도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들 네스토리우스파가 당 태종 때인 7세기 중국 대륙에서 경교(景敎)로 불려졌다. 그 교회는 파사사(波斯寺)라 불렸고 당 현종(玄宗) 때에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여 각지로 그 세력이 뻗어갔다. 당 멸망 후 핍박 시기를 거쳐 몽골 원나라 치하(治下)에서는 야리가온(也里可溫, Arkaun)으로 불려지며 그 신앙이 허락되어 신자와 교회가 증가하였다.

한반도 초기 기독교 전래에 대해 침묵하던 국내 주요 교회사학자들도 경교 전래에 대해서는 그 충분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김양선 목사는 신교(新敎)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경교(景敎)가 신라와 고려조에 전래 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경교가 635년 중국에 전래된 이래 845년 외래 종교에 대한 대박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200여 년 간 경교는 당(唐) 전토의 유력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당과 밀접하게 교류를 하던 신라는 당 수도 장안(長安)에서 유행하던 것이라면 신라에 수입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경교도 유입되었을 거라고 보았다.

 

 

당의 수도 장안에 알로펜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인 선덕여왕 4년 당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수많은 신라 사신들과 상인들과 유학생들이 당에 드나들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경교를 몰랐을 리가 전혀 없다. 일본 고대 기록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김양선 목사는 고든(E. A. Gordon)의 저서를 인용하여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이나 페르시아 무인상, 경주 석굴암 전실(前室)양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 중 두 상을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보았고 석굴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십나한상(十羅漢像), 범천(梵天) 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의 의문(衣紋)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등을 모두 경교의 영향으로 서술하였다.

 

195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경교식 십자가도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다보탑을 비롯한 불국사 전체가 한반도 불교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독특한 양식을 지니는 것은 실제적 설계자가 어떤 영향으 ㄹ받은 인문이었는지 자세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국내 교회사가 중 한국의 고대기독교 전래를 최초로 다룬 인물 중 한사람인 이장식 박사는 <아시아기독교사>를 다루면서 당대(唐代) 기독교전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묘사하기는 하나 경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자제하고 있다. 민경배 박사도 <한국기독교회사>에서 근대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을 다루면서 당을 통하여 접촉된 경교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비록 국내 문헌에 경교 전래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어떤 식으로 든 한반도 안에 경교의 전파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만 그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살리지 못하고 소멸된 것이 분명하다. 즉 한반도의 신앙적 풍토 아래서 복음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교나 민속종교 등과 더불어 융합되면서 토착화의 길을 걸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4. 천손 사상(단군신화)은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인가?

이 문제는 주로 윤성범 박사가 단군 신화를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로 해석한 데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성범은 단군설화가 환인·환웅·단군 삼신이 모두 다 남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을 삼위일체의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응 시킨다. 고조선의 시대는 교회 시대 이전의 시대이다. 신화도 당연히 고조선 멸망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교회 시대 이전 구약 성경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희미한 계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시의 점진성 아래서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것을 단군신화가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황당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윤 박사는 신화의 종교현상학적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자의 주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것을 객관화 할 수는 없으므로 기독교진리와 우리 문화와의 접촉점 또는 친근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고 선을 긋고 있다. 또한 윤성범은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라는 용어조차 삼위일체의 흔적이라는 용어보다는 삼위일체의 잔해(殘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앙적인 적극적 접촉 용어로서가 아닌 마치 신앙의 본질과 멀어진 부스러기처럼 취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신앙은 사실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그만큼 삼위일체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교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성범은 이 교리의 흔적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 잔해(殘骸)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모를 리 없음에도 삼위일체와 단군신화의 유비관계에 이 단어를 적용하여 자신의 연구도 단지 ‘잔해’ 수준이라고 표현하는 듯 물러선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삼위일체 신앙의 품격을 심각하게 격하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필자가 보기에 윤성범은 삼위일체 신앙의 신성함을 훼방치 않음으로서 보수적 신앙과의 공연한 충돌을 피하려다가 그만 이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단군신화가 기독교적 영향을 받은 증거로 6세기 중국에 들어온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려 한 것도 단군 신화에 대한 깊은 역사적 이해 아래 그가 이 문제에 접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조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오히려 그가 고조선(古朝鮮)과 한반도 삼국 초기 역사를 불신하는 일제 식민 사관에 무의식적으로 영향 받았음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고조선은 우리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등장하는 국가가 아니다.

 

 

이미 중국 사서(史書)인 <사기(史記)>의 조선열전, <한서(漢書)> 지리지, 가장 오래된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분명한 역사적 국가였다. 이외에도 고조선 관련 내용은 중국의<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수서(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 통전(通典)>, <통감> 등 여러 중요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즉 고조선 역사에 대한 문제가 있다면 고조선의 실체가 정말 있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고조선 역사의 문제는 고조선 초기 역사를 어디까지 상향할 것인가 하는 것과 초기 고조선 신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경교와 전혀 무관한 주전 108년 경이었다. 따라서 이만열 박사도 단군을 역사로 인식하는 문제와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문제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면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통해 실증주의적 사관을 전파한 학자답게 과학적 역사 인식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즉 단군신화를 고조선 멸망 이후 등장하였다고 본 윤성범 식 판단은 식민사관의 영향인 것이다.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개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고대부터 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있어왔다.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는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설명할 때, 그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설명하는 형식과 자료를 의미한다. 즉 자연의 예증이나 사변적 유추에서 그 흔적들을 찾게 된다. 일반적으로 ‘베스티기움’은 ‘흔적’이라고 번역한다.

윤성범의 연구가 큰 논란이 일었던 것처럼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우매한 도전을 하느냐는 비판 앞에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연구나 설명은 늘 위축되거나 주춤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에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신론에 있어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준 터툴리안(Tertur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나무 줄기․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시내․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하였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지시가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미국창조과학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이 집중된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많은 신학자들이 제한적이기는 하나 삼위일체를 유비적으로 해석하려 들었던 것처럼 단군 신화의 천손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조건 불경한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랑에도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책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군신화 나타난 신화적 구조는 어떤 거창한 신앙이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삼위일체의 흔적으로서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보다는 국가 체제가 특별한 존재성을 가진다는 왕통 보존과 권위적 요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단군 신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더욱 변질된 천손 사상이 되어 철저한 천황 권위 강화에 악용된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설령 일부 유대교적 유일신 사상이 가미되었더라도 그것은 기독교가 수용 가능한 범위를 훨씬 벗어난 너무도 많이 변질된 신학 사상일 뿐이다. 고조선은 주전(主前) 이미 역사적으로 등장한 국가이다. 필자는 고조선의 역사성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군 신화는 다르다. 단군 신화는 정상적 창조론이나 삼위일체의 흔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토테미즘과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 혼재된 고대의 신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갈등과 탐욕의 인간 역사의 패턴을 볼 때 단군 신화는 곰 토템과 호랑이 토템을 가진 씨족간 결합의 모습을 더욱 보일 뿐이다.

삼위일체 흔적이 구약에 있다하더라도 계시의 점진성 아래 삼위일체에 대한 뚜렷한 모습은 초대 교회 시대부터 시작된다. 그것도 많은 초대 교부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립된 것이다. 그런 기독교적 교리를 단군 신화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단군신화의 창조론, 삼위일체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볼만큼 성경과 다른 윤색과 변질 투성이인 것이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론이나 구원론의 모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 속에서 진리를 모색한다. 그 한계치를 벗어난 기독 운동은 변질이요 오히려 해롭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단군 신화나 삼일신고 등의 천손 신화를 비신화화하여 기독교적 관련성을 찾으려는 일부 시도는 학문적 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기독교적 가치 평가의 범위를 벗어난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5.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18-19세기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는 다양한 접촉이 있어왔다. 진위 여부를 떠나 가야가 기독교국가요 도마가 실제로 한반도에 들어왔었다면 당연히 일본 열도도 그 영향권 아래 들어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발해와 통일신라와 고려를 통해 경교가 들어 왔었다면 선교의 속성상 경교도 당연히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유입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예수와 공자도 일본 열도에 들어와 살다 일본 땅에 묻혔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문서가 남아 있을 정도이니 종교에 대한 문화적 수용력이 얼마나 포용적인지 알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통해 들어간 도마나 가야 기독교나 경교의 특별한 흔적은 한반도 속에서의 흔적이 뚜렷한 증거가 아직 없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고조선의 신화나 가야 건국 신화의 흔적이 일본 열도에 남아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였음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이런 흐름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일본 열도의 바닷길은 한반도보다 더 크게 열려있었다. 이 길을 따라 일찌감치 종교개혁이 시작된 16세기(1544년) 이미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포르투갈 상선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뱃길을 따라 복음도 함께 들어왔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가 1549년 일본에 입국한지 2년 만에 100여명의 열도 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전한 기독교를 가장 먼저 허용한 권력 집단은 놀랍게도 백제 성왕의 자녀인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야마구치(山口) 지역의 지배자 오우치(大內) 가문이었다. 자비에르 선교사와 그 일행들의 활약으로 규슈 지방으로부터 당시 수도였던 교토 인근에 이르기까지 일본 속 기독교 신자는 1605년 무렵 75만 여명까지 늘어났고 121명의 선교사가 일본 땅을 밟았다. 일부 개신교도 네덜란드, 영국 상선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열도에 발을 딛게 되었다. 반도에 표류했던 귀화인 박연이나 하멜도 상선을 타고 일본을 오고가던 네덜란드인들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아래 보호받으며 성장하던 일본 기독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에 의해 핍박에 들어선다. 일본 최초 순교자가 나온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였다. 중국정복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야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로 이어졌다. 기독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야망의 도구일 뿐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구주(九州) 평정시 나가사끼(長崎)를 그리스도교회에 기부하겠다고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다. 전국을 평정한 후에는 명(明)과 조선(朝鮮) 출병을 위해 포르투갈 함선 2척을 구입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명(明) 출정 준비 중 일본의 반은 그리스도교가 될 것이고 명을 정복하면 백성들 모두 그리스도 교인들이 되도록 명령하겠다고 현혹하였다. 가톨릭교도들이었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앞에서였다. 아이러니한 아픈 악과 불의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 침략을 실행에 옮긴다. 한일 간의 악연은 이렇게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말 악한 자였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장중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 주권 아래 일어난다고 악과 불의의 역사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라고 말하면 안 된다. 사람은 악을 도모한다. 그리고 그 악과 불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거스르는 분명한 반역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방해하며 좌절시키려는 악과 불의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역 세력의 악함조차도 주권적 섭리로 제압하고 승화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의 핵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악을 도모하였으나 임진왜란은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의 한반도 입국과 포로로 잡혀간 일본 안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한(恨) 많은 일본 땅에서 오따 줄리아(儒立亞)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선교사 같은 삶을 살다 순교한 인물도 나왔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소년 카이오는 난파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교토로 올라가 절에서 살다 병으로 쓰러져 고열로 시달리다 환상 중에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1614년 그는 국외로 추방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따라 지금의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 우콘이 그곳서 병사한 후 그는 조선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구주(九州)로 돌아간다. 전도자의 삶을 살던 그는 결국 잡혀 나가사키의 옥(獄)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1624년 11월 5일 기쁘게 화형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 그는 낯선 일본 땅에서 악을 선으로 갚았다. 조선 무관(武官)의 아들이었던 권 빈첸시오는 전쟁고아로 1603년 세례를 받고 예수회 신학교 교육을 받고 정식 전도자가 된다. 그리고 세스페데스 신부 이후 조선 선교를 위한 파송이 결정된다. 해로를 통한 입국이 좌절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육로 입국 기회를 노리던 그는 청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다시 한반도 고향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리고 카이오처럼 1625년 니시사카 형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복음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렇게 한반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포로로 잡혀갔던 타국 일본 열도에 순교의 피를 뿌렸다.

한일 두 민족의 주역이 한 뿌리라는 것은 서로가 부정하려해도 고고학적, 문화적, 유전학적, 언어적, 문헌적으로 모두 증거 된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 문명 공동체를 나누면서 한일민족을 함께 취급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두 민족의 주류는 결국 넓은 대륙에서 만주를 거쳐 반도와 열도에 정착한 유목민들의 후예였다. 2천 년 전 전후 단군 신화를 지닌 집단은 반도를 거쳐 꾸준히 열도로 유입되었다.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4국 백성들도 지속적으로 열도로 진출하였다. 특별히 백제 유민들은 야마토왜(大和倭) 정권을 세워 고대 일본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 태생의 백제 무령왕과 일본 게이타이 천황이 형제(또는 사촌) 지간인 것이 두 왕실집단 간의 친연성을 암묵적으로 증거한다. 일본역사서인 《일본서기》가 일본역사는 뒤로 하고 한반도 백제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특별히 일본 출신 무령왕의 아들 성왕을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칭송하며 신사(神社)에서까지 받드는 것은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 역사서가 백제 성왕의 허무한 죽음을 애석해 하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신라·당 세력과 백제·왜 세력 간의 백촌강 대전투 이후 열도와 한반도는 드디어 완전히 분리 되었다. 백촌강 전투 이후 663년 9월, 백제땅 주류성(州柔城)이 마지막으로 함락되었을 때, 《일본서기》는 야마토왜(大和倭), 즉 나라(奈那)의 ‘난바’(難波)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류(州柔)가 함락되었으니 이제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탄식하였다.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고대 백제인들의 새로운 나루터(難波津)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나타난 천황가의 일본 황실 조상 귀신(鬼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인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의 천손(天孫) 강림 신화에도 보면 “이곳이 한국을 바로보고 있으니 큰 길지(吉地)”라고 말하여 일본천황의 원적(原籍)이 한국임을 분명히 하면서 고향 한반도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백촌강 전투를 기점으로 한반도와 열도는 영원히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 전시실 입구가 백촌강 전투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의미심장한 복선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마드 기질을 가진 두 민족이 반도와 열도라는 갇힌 환경으로 갈라져 만들어낸 결과와 열매는 너무도 달랐다. 지난 세기 한민족은 좁은 한반도를 떠나 많은 유랑민과 이민의 행렬이 온 세계로 흩어져 여전한 노마드 기질을 보여준 반면, 더는 진출할 땅이 없는 열도에 갇혀버린 일본인들은 고립된 섬에서 대륙의 끝자락 한반도로 다시 자신들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뿌리의 땅인 한반도와의 화해와 협력이 아닌 역사적 애증과 결합하여 힘과 폭력과 감정과 역사에 대한 억지 해석에 기초한 잔인하고 교활한 침략의 형태로 나타났다. 김용운 박사의 말대로 한일 양국은 인종적으로 같은 족속으로 시작되어 2천년의 역사 과정에서 같은 씨에서 다른 꽃이 핀 (애증의) 두 나라가 되어 버렸다. 마치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처럼. 결코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려 들지 않는 이 두 나라를 어찌할 것인가.

역사를 이어 온 그 상처와 아픔을 어찌할 것인가. 줄리아와 카이오와 권 빈첸시오 뿐 아니라 또 다른 임진왜란의 희생자들 그리고 일제 36년, 한반도 안에서 일어난 그 많은 희생과 순교의 피는 또한 어찌할 것인가.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인가. 검으로 흥한 자 검으로 망할 뿐이다.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윽박지른다고 용서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였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치 않으시는 분이다. 세상은 세상의 방식으로 되갚기를 원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한 원한과 저주와 갈등만 양산할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세상적 한일 관계와 기독교적 한일 관계는 같은 듯 다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목의 종교다. 용서하는 것은 아프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공의와 진리를 당당히 요구하되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 역사의 창조 섭리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분명 선교와 기독교적 사랑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십자가 사랑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 시키는 기독교적 화해 밖에는 길이 없다.

 

 

Ⅴ. 나가면서

초기 한반도 기독교 전래에 대한 검토 결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과거 한반도 속으로 복음이 끊임없이 전래되어 들어왔음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한반도가 단순히 신화와 미신과 잡신의 토착신앙과 불교로 대표되는 종교문화뿐 아니라 일부 기독교적인 영향과 그 문화 전파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비록 일부 전래가 가능했다하더라도 너무 그 영향력이나 흐름이 미약하여 신앙적 공동체나 교리적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어떤 단단한 공동체적 흔적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해 소멸되어버린 아쉬움이 분명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종교적, 선교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일부 기독교 전파의 흔적은 있었더라도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그것이 문헌이나 구전(口傳) 속에서 고대 한반도 <예수 공동체>에 대한 뚜렷한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분명한 새로운 증거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이 분야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찾기 위한 관련 학자들의 더욱 진전된 연구가 거듭되기를 소망해 본다.

 

위의 내용은 창조신학연구소(소장:조덕영 박사)와의 협약에 의해 제공되는 연구자료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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