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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한경직 목사의 경우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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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국 교수(장신대, 교회사)

 

2014년 6월 14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6월 13일 오전 7시 분당한신교회(담임:이윤재 목사)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한경직 목사의 유고와 유품자료를 정리한 김은섭 목사에 따르면, 한경직(1902-2000)이 노년에 살았던 남한산성 ‘한경직 우거처’에 들어서면 은빛 십자가와 “나라사랑”이 새겨진 작은 돌이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의 침실 장롱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는데, 그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침대 곁에 있는 십자가와 장롱에 붙은 태극기를 가장 먼저 바라보았을 것이라 한다. “십자가와 태극기는 한경직의 삶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상징이라.”는 김은섭의 설명이다.

 

 

1. 일제 강점기시대(1910-45),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민족에 대한 사랑

1) 오산학교에서 배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


한경직의 민족의식은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싹이 텄고, 그의 민족사랑은 오산학교 재학시절 학교의 교육이념에서 배웠다. 오산학교의 교육이념인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은 –한경직의 기억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너 혼자만 잘 살지 못한다, 민족이 같이 살아야 너도 잘살 수 있다, 나라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나라를 바로 세우고 나라를 바로 지켜야 한다.” 이 민족 사랑은 기독교 신앙교육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산학교는 날마다 예배(채플)를 드렸는데, 설교를 통해 학생들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꾸었다. 학생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신앙 인격을 닦고 깨끗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렇게, 청소년 한경직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이 기독교 신앙교육을 통해 형성되었다.

한경직은 오산학교에서 애국애족 정신을 머리로만 배우지 않았다. 그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신 스승들을 통해서 그분들을 삶의 모델(멘토)로 삼았다. 그 스승들은 이승훈과 조만식이었다, 한경직은 이 분들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였다. 이승훈은 1911년에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사건’으로 수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일제가 한국에서 반일 민족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합법성을 가장한 재판 제도를 채용한 대규모 탄압 사건이었다. 당시에 이 사건의 이름은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 사건”이었다. 이승훈은 1919년 ‘3.1만세운동’에서도 기독교의 대표로 활동했다. 그는 이때에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고초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주 병석에서 누워 지내야 했다. 병석에서 이승훈이 제자 한경직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일본 사람이 이 나라 강토를 점령하고 주인행세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첨하며 살길을 꾀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 사람을 살다가 죽겠다.” 이 말씀이 한경직을 사로잡았다. 그 까닭은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살아오신 스승이기에, 한경직은 이승훈의 고결한 인격과 순수한 애국심을 본받아 자신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고당 조만식은 한경직의 오산학교 재학시절에 교장 선생님이셨다. 조만식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일본식 양복과 구두를 벗어던지고 한복을 입고 갓신을 신었다. 이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 일하고 한국 사람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위를 본 제자 한경직은 스승을 따라 스승처럼 살겠다고 결심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경직은 오산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나이 16세였다. 만세운동 기간에 학교 건물이 불에 타서 소실되어 버렸고 또 만세운동에 참여한 교직원들이 수감되었다. 이에 학교가 잠시 동안 교문이 닫혔고, 오산학교 제10회 졸업생들은(한경직) 졸업식도 못한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2)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숭인상업학교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가르침

한경직은 숭실대학을 졸업했고(1925), 미국으로 유학가서 엠포리아대학을 졸업했고(1926),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고(1929), 그리고 1932년에 귀국했다. 고국을 떠난 지 7년 만에 돌아온 그의 눈에는 고향산천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또 고향의 경제사정도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그 해 여름 내내 그는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들이 모두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그 길이 무엇인가? 농촌을 개발해 경제 발전을 이뤄 이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일본 제국주의에서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자신의 진로를 모색했다.

고민하던 그에게 열린 길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 당시의 평양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직영하는 숭실대학, 장로회신학교, 숭의여자중학교가 있었고, 평양의 여러 장로교회들이 연합하여 세운 숭덕학교(남자), 숭현여학교, 숭덕여고가 있었으며, 또한 한국 교인들의 힘만으로 세워진 숭인상업학교(남자 중학교)가 있었다. 숭인상업학교는 평양 도당회가 직영으로 운영했다. 이 학교에 한경직은 민족 자부심을 갖고서 부임했다. 학교의 이사장이 은사 조만식 선생이었고 또 교장은 오산학교 1년 선배 김항복 장로였다. 한경직은 –오산학교에서 배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3) 민족주의적 견지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

1933년에 신의주제2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한경직은 온 교우의 협력과 헌신 속에서 일 년 만에 새 예배당을 지었다. 그 이후로 교회가 일취월장 부흥했다. 그런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한경직과 교회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신앙적 견지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신사참배는 조상신을 섬기는 일종의 신앙의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민족주의적 견지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라고 말하지만 일본인들은 천조대신(天照大神) 등이 존재한다고 믿어 거기에다 절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사참배를 반대한 한경직은 신의주경찰서 유치장에 20일 이상 갇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경찰이 무슨 영문인지 자진해서 그를 석방시켰다. 교회에 와보니, 일제가 이미 제직들을 모아놓고 신사참배에 동의하도록 가결시키고 말았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한경직의 마음에 고통과 번뇌가 일어났다. “교회 문을 닫고 나갈 것인가, 잠시 머리를 숙이고 교회를 유지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 끝에, 결국 교회유지를 위하여 그와 신의주의 교역자들이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한경직을 정부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에서 내쫓았다. 그 길로 한경직은 보린원으로 가서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교회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고아들과 같이 김을 매고 소마차를 끌며 조용히 지냈다.

 

 

2. 8.15해방(1945) 직후, 기독교의 정신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국가 건설을 지향

1945년 8·15 해방직후인 10월에 한경직은 북한 신의주에서 남한 서울로 왔다. 신의주 해방 공간에서 그는 치안질서를 맡아 ‘신의주자치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가 경찰권을 행사했었다. 그러나 이때 소련군을 따라 입국한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자치위원회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경직은 공산당의 신변위협에 직면하여 간신히 신의주를 빠져나와 남한을 향해 달음질 쳐 서울로 왔다.

그해 12월 초순 서울에서 한경직 목사는 20명 남짓의 교인들과 “베다니교회(베다니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영락교회를 창립했다. 이때 남한 사회는 여러 정치 세력들이 권력 투쟁을 하는 가운데 새 나라의 체제(國體)를 모색하던 시기였는데, 한경직은 강단에서 건국(建國)의 여정을 제시했다. 그는 “건국과 기독교”란 제목으로 설교했고(1947.12.2.), 이 설교에서 그는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까닭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갓 벗어난 신생 한국이 참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3. 오늘날 세계화 시대, 세계 어디서 살든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잊지 말아야

한경직은 세계화 시대를 사는 한국 민족의 민족의식을 강조했다. 세계 어디서 살든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잊지 말아야하는데 “인간답게 살려면 (자신의) 뿌리를 잊어선 아니 되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 사람들이, 더 넓은 땅으로 가서 무한히 발전해야 하고, 외국에 나가 살더라도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이 한국 민족임을 잊지 말고 애국 애족 정신으로 그 지역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가령,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시민권을 가진 그 나라에서 마땅히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고 다만 한국 사람이라는 뿌리를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하던 수 십 년 동안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서러움과 슬픔을 뼈저리게 경험한 한경직은 “조국이 잘 돼야 우리가 다른 나라에 나가 살아도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나라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훈계했다. 그런데 또한,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 그 신앙 정신으로 나라를 바르게 세우고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구체적으로, “정의와 공의가 승리하고, 자유 민주주의가 실행되며, 민족이 통일되는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라”는 당부였다.

종합적으로, 한경직 목사의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은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울어진 적이 없었고 기독교 신앙정신으로 민족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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