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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의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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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 총신대학교

 

2014년 6월 14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2014년 6월 13일 오전 7시 분당한신교회(담임:이윤재 목사)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들어가면서

기독교 신앙이 들어간 곳에는 언제나 자신의 민족의 복음화에 대한 염원이 뒤이어 찾아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조차 찾을 수 있는 현상이었다. 유대인의 복음화가 먼저요 그 다음 이방인의 복음화였다. 이런 현상은 주님의 제자들과 바울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복음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민족 복음화와 복음의 세계성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양면이 기독교 세계에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 민족의 복음화에 대한 염원을 민족주의나 민족운동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는 시각에 따라 이견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은 누구에게나 있다. 기독교 신앙과 나라사랑은 늘 병립하여 존재하여 왔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은 청교도들은 신대륙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했고 실제로 그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이 미국의 독립과 발전에 이룩한 공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만큼 지대하다. 미국 독립운동에 장로교 회중교회 침례교회가 직접 동참했고 독립운동에 서명했던 위더스푼이 장로교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리더십을 발휘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독교 신앙과 나라 사랑은 병존해 왔다. 이런 현상은 청교도 후예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아시아 국가들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일본에서 명치유신 직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애국을 의미했다. 한국에서 초창기 신앙인들은 애국자들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애국은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에게 별개가 아니었다. 애국적인 동기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나라 사랑을 실천하며 한국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춘생문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라와 임군을 위한 구국 기도운동이 널리 일어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과 나라 사랑이 모종의 관계를 지니며 한국교회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고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간절히 염원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이후 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에 대거 신민회에 참여한 것이나 1919년 삼일운동이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발화한 것, 그리고 수많은 물산장려운동이 국채보상운동 금연금주 절제운동와 같은 애국애족운동이 교회 안에 일어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애국애족운동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려고 한다. 본 연구는 새로운 연구가 아니라 이미 많은 이들이 연구를 했던 것을 필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 신민회 활동/105인 사건을 통해 본 이승훈의 애국심

남강이 안창호를 만난 것은 1907년이었고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일본에 편입시키던 1910년 9월이었다. 한일 합방이 된 뒤 평양에 갔다가 산정현교회에서 한석진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이만열, “남강 이승훈의 신앙” 303) 그날 한석진이 외친 저녁 예배 설교는 “십자가의 고난”이었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1907년 안창호를 만난 후 바로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1910년 남강은 오산교회를 설립하고 오산학교 교장에 훗날 평양신학교 교장이 된 라부열 선교사를 모셨다. 순서를 볼 때 이승훈은 민족의식에 먼저 눈을 뜨게 되었고, 이어 기독교 신앙을 접하였다. 기독교 신앙이 이미 그 안에 존재하기 시작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더욱 생동감 있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이후 이승훈의 생애 속에는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하나로 통합되어 표출되었다. 나라 잃은 민족적 수난 속에서 좌절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상의 수양을 쌓아야 하고 그 수양을 쌓으려면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김도태 239, 이만열 304에서 재인용)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이승훈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오산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신앙을 가진 교직원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한 인물에게 실천적 힘을 심어 준 것이 신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의식을 더욱 견고하고 실천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1910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후 그에게 기독교 신앙과 나라사랑은 별개가 아니었다.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5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4년간 옥중생활을 경험한 것이 말해주듯 철저한 신앙의 사람이면서도 윤경로가 말한 대로 “그의 삶 전체가 당시대의 민족이 당면하고 있던 ‘역사적 과제’ 앞에 실천적으로 참여했다.(윤경로 ”신민회와 남강의 경제활동“ 75)

 


그 구체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신민회 활동이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된 뒤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이동휘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조직되었을 때 이승훈은 평안북도 신민회 조직의 전적인 책임을 맡았다. 이승훈이 신민회에 가입한 것은 안창호의 영향이 컸다. 도산을 만난 이후 학교를 설립하고 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도산이 조직한 신민회에도 가담하면서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남강 이승훈의 기업활동” 73)

의식 있는 민족지도자들이 먼저 민족을 깨우고 실력을 양성한 후 국권을 회복하려는 뜻을 가지고 조직한 것이 신민회였다. 그것은 대한신민회통용장정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신민회 목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本會의 目的은 我韓의 腐敗한 思想과 慣習을 革新하야 國民을 維新케하며 衰頹한 發育과 産業을 改良하야 事業을 維新케하며 維新한 國民이 統一聯合하야 維新한 自由文明國을 成立케 함

신민회는 회원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규칙도 정했다: 첫째, 회원은 조국정신을 굳게 지키고 조국 광복에 헌신하여 충성을 다할 것, 둘째, 회원은 조국을 위했던 선현선열(先賢先烈)을 반드시 사모하고 계술(繼述)할 것, 셋째, 회원이 만일 본회를 배반하였을 때는 어느 때든지 그 생명을 빼앗길 줄 알 것, 넷째, 회권은 본회의 비밀을 엄수할 것이며 만일 탄로났을 때는 해당자는 혀를 깨물고 말하지 말 것, 다섯째, 회원은 달고 쓴 생활과 힘들고 편한 활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할 것.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신민회 입회의 기본 조건이었다.

신민회의 초대 중앙위원은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 전덕기 집행원 안창호였고, 서울 총감은 전덕기, 평북총감 이승훈, 평남총감 안태국, 황해총감 김구, 함경총감 이동휘, 경상대표 김진호, 충청대표 최익, 강원대표 주진수, 기타대표 김도희, 본부직원 임치정(대한매일신보영업국장) 김홍숙, 신민회언론기관으로는 대한매일신보였다. 신용하 교수가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에서 지적한 대로 신민회는 양기탁을 중심으로 한 대한매일신보, 전덕기를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와 청년학원, 이동휘와 유동열을 중심한 무관출신, 이승훈과 안태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실업가와 민족자본,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미주 교포의 공립협회 등 다섯 세력이 축이 되었다.

평북지역 신민회 책임을 맡은 이승훈은 선천 정주를 정점으로 의주 곽산 철산 용천 등지에 신민회 평북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를 통해 양준명, 이용화, 오희원, 황국보, 이명룡 등 평북지방은 물론 서북지방 일대의 대표적인 토착 자본가들과 상공업자들, 그리고 이용혁, 곽태종, 선우혁, 차균설, 임경엽, 강규찬 등 선천의 신성학교와 정주의 가명학교의 영향력 있는 교사들이 신민회에 대거 입회하였다.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은 우수한 학생들이 신민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이승훈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가입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자연히 서북지방에서의 신민회 활동에서 이승훈은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다 1911년 1월 안악사건에 연루시켜 이승훈을 구속하고 제주도로 유배시키면서 그의 신민회 활동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신민회 조직과 활동을 주도했던 평북 이승훈, 평남 안태국, 황해도 김구, 함경도 이동휘 등 서북지방 출신들로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서북양기탁 윤치호를 제외하고 모두 서북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한편으로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된 강력한 항일단체인 신민회를 타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서 가장 교세가 활발하고 교육기관이 많으며 배일사상이 강한 선천 정주 평양 등 서북출신 기독교 지도자 제거에 착수했다. 김양선은 왜 일제가 평양 정주 선천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는가를 이렇게 증언한다:

 

신민회의 조직은 일본의 침략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루어졌으므로 회원은 애국사상이 강한 사람으로서 엄밀히 선출되었고 치밀한 조직을 세워 2명 이상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고 회원의 생명과 재산은 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강력한 비밀결사로 한국 유일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신민회계의 평양 평양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는 애당초 항일독립을 목적하고 세운 학교였고, 평양 숭실학교와 선천 신성중학교는 기독교 학교 중에서 배일사상이 가장 강한 학교였다. 그리고 평양, 정주, 선천 교회들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알려졌다. 안창호는 평양에서, 이승훈은 정주에서, 양전백은 선천에서 솥발같이 서서 강력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한국 통치의 암적 존재인 기독교 세력을 삼제(芟除)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남강 이승훈은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안태국 유동열과 함께 105인 사건으로 10년 언도를 받은 6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제는 이승훈을 데라우치 총독 살해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죄한 것이다.

2. 3.1독립운동을 통해 본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

데라우찌 총독 모살미수사건으로 서울로 이송된 이승훈은 대구 감옥에서 1년을 경성감옥에서 4년 도합 5년을 복역하고 1915년 3월 가출옥했다. 출옥 후 이승훈은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발행된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에는 이승훈이 재학생 명단에 있었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1917년 8월 21일 남강은 오산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지 7년 만에 일이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배우고 장로로 임직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기독교에 헌신을 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 안에 기독교 신앙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지만 민족의식은 여전히 그의 중심 관심사였다. 1918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여운형과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 하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외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중추세력” “일곱 그룹의 지도 인물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삼일운동 준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 33인의 종교적 분포가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인 15인, 불교인 2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3·1운동의 주도권이 기독교 측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거니와 3·1운동의 시위만세 역시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개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 1회 만세 시위처가 모두 기독교회가 주동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시위 역시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 3·1운동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한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마는 기독교회라는 주도체가 있어서 출발되었고 진행되었고 정부기구의 조직에 까지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일본 위정자들의 기독교회와 교인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거의 거족적인 수에 미친다. 그러나 대량 검거에 있어서는 확실히 기독교인을 더 많이 체포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전 촌락이 만세를 불렀는데 기독교인만 잡아 갔다. 경찰과 헌병들은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붙잡고 기독교인 여부를 묻고 기독교인인 때에는 용서 없이 구타하고 모욕을 주었으며 기독교를 말살하고 교인은 총살한다고 위협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큰 참화를 입은 곳도 교회와 교회학교였다. 수원(水原) 제암리(堤岩里) 교회당 학살사건, 강서(江西) 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定州) 교회 학살사건, 강계(江界)교회 학살사건, 위원(渭原) 교회 학살사건, 서울 십자가 사형사건, 북간도 노루바위(獐岩里)교회 및 서간도 각지 교회 학살사건, 정주 오산학교 피소사건 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영원히 잊지 못할 가장 가혹 처참한 박해였다.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역사적 혜안이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교인만이 현시점에서는 국제 정세에 가장 정통하여 민족자결의 횃불을 들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시간적으로 보아 이때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하리만큼 그 안목이 트였다. 예수교인의 이와 같은 박력 있는 행동과 의의 있는 존재 양식이 없었더라면 이 백의민족이 호소하려 하고 수호하려고 하는 이념이 총을 쏘듯이 전국에 무섭게 작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이다. 물론 저들은 선교사들에게서 어떤 묘한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회의 공동체 안에는 어떤 크고 어려운 일이라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미주, 만주, 중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서 세계정세에 재빨리 반응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동인과 여건이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3·1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이승훈이 기독교 측의 구심점이었고, 천도교 측은 최린이 주도하였다. 이승훈은 조서 과정에서 “금번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야소교 측은 피고가 주장하여 운동한 것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야소교 측은 내가 인수하여 주도 하였고, 천도교 측은 최린이가 주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실제로 처음 삼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 서울, 평양, 정주 세 곳이었는데 그 중요한 발판을 놓은 인물은 105인 사건의 동지 선우혁, 양전백, 이승훈이었다. 105인 사건을 통해 옥고를 치른 선우혁, 양전백, 이승훈의 거룩한 의기투합은 기독교계를 움직이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33인으로 삼일운동을 주도한 남강 이승훈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언도 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 출옥했다.

 

 

조만식이 무대에 등장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평양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과 함께 3.1독립운동 사건으로 조만식도 투옥되었다 풀려났다. 산정현교회사기는 “조선독립운동사건(朝鮮獨立運動事件)으로 목사 강규찬(姜奎燦), 집사 김예진(金禮鎭), 교인 조만식(曺晩植)씨 등이 체포(逮捕)”되었다가 조만식이 1920년 3월 13일 출소했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 이유가 가장 많은 박해와 피해를 입은 것도 기독교인들이었고 교회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1920년 편하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지난해 우리가 보고한 대로 나라 전체가 정치적 불안으로 들끓었습니다. 교회 역시 자연히 그런 불안한 상황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도적인 많은 목회자들과 다른 기독교 사역자들이 투옥되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징역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보통의 지도자들 없이 최선을 다해 지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옥됨으로 교세 격감했[다].

 

3.1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김양선이 지적하는 것처럼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3.1운동에 적극 협력하였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수 베커 박사는 독립선언 발표 장소에 대한 적절한 의견을 제시해 주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우리의 받은 참상을 사진에 담아 일본의 폭정과 야만적 행동을 세계에 폭로시켰고, 숭실전문학교 제 5대 교장 마우리 박사는 자기 집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은닉 보호하고 독립선언문을 번역하여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탓으로 평양 감옥에 구금되어 징역 6개월의 구형을 받았다. 동양선교회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강경에서 독립운동을 협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였고 선천 신성중학교 교장 윤산온 박사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했다 하여 국외 추방을 당하였고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펫 박사는 세계선교대회에서 한국독립을 협조하자는 연설을 행하였다. 서울 감리교 선교사 노블 박사, 빌링스 박사 등도 3·1운동에 크게 협조하였다. 그리고 중국 상해 Y.M.C.A. 총무 질레트 박사와 피셔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에 크게 협력하였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함께 만나 3.1운동을 준비하고 계획한 것도, 모든 선교사들이 같은 마음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지만 위 인용문이 보여주듯 이 일이 성사되기까지 여러 선교사들이 배후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독립운동 서명자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기독교는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중심 세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105인 사건으로 5년간 복역했던 이승훈은 3.1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선봉에 서 있었다. 신민회/105인 사건으로 유죄 언도를 받았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3.1운동에도 적극참여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훈 역시 기독교 신앙을 통해 애국애족을 실천했다.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은 별개가 아니었다. 이승훈을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3.1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3.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본 조만식의 나라 사랑

기독교 신앙이 나라 사랑으로 표출된 또 하나의 사건이 물산장려운동이다. 이 일에 앞장선 것은 평양산정현교회 당회였고, 그 중에서도 산정현교회 교인 조만식은 그 일을 주도했다. 조만식이 민족주의자로 부상한 것도 사실은 3.1독립운동 때문이 아니라 출옥 그가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을 통해서였다.

조만식은 산정현교회 교인으로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풀려난 후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섰다. 이 사건은 기독교인들의 애국애족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 김동원, 김찬두, 양성춘, 오윤선 등 평양 산정현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처음 출발할 때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 정신은 세 가지였다. 첫째,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물산장려운동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내 살림 내 것으로” 모토 하에 시작되었다.

곧 조선물산장려운동은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전국적인 확산과정에서 동아일보는 이 운동의 신실한 후원자였다. 동아일보는 마치 물산장려운동의 대변지라고 할 만큼 처음부터 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소개하였다. 동아일보는 ‘다소 품질이 뒤지고 값이 불리해도 적어도 입는 옷 먹는 음식 마시는 술 가정 그릇 등 일용품은 국산을 씀으로써 가능하면 하나라도 더 한국인의 공장이 서게 하고 무궁화 삼천리를 이천만 민족의 낙원으로 만들자’고 격려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22년 서울에서 자작회와 토산품애용부인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1923년 1월에는 경성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결성되었다. 평양산정현교회 조만식, 김동원, 김찬두, 양성춘, 오윤선 등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견인했다면 서울에서는 한말지사 설태희 이득년, 한말석학 유길준의 아우 유성준, 서울 명상 김윤수 실업인 장두현 등이 주역으로 활동했다. 일제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물산장려운동의 행렬은 “요원의 불길처럼” “영동에서 대전에서 평양에서 밀양에서 전주에서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조직적인 활동보다 이심전심의 애국심과 반일의식에 불이 붙어 이 운동이 시작된 지 5개월 동안 전국 일백오십칠 개 단체가 결성됐다. 일제의 조직적인 박해와 핍박,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며 한국인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확실히 물산장려운동은 평양산정현교회와 조만식이 중심이 되어 저변 확대된 애국적 민족운동이었다. “고당은 기독교를 단순히 영혼 구원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데 국한시켜 놓지 않고 사회 속에 진리를 구현하는 산 종교로 부각시키는 데 힘썼고 기독교 정신을 민족 부흥운동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했다.”

산정현교회 당회원과 교우들이 중심이 되었다. 조만식, 김동원, 김찬두, 양성춘, 오윤선 등 산정현교회 당회원과 집사가 물산장려회를 주도하였다. 당시 김동원, 김찬두는 산정현교회 장로였고 조만식, 오윤선, 양성춘은 산정현교회 집사였다. 이 운동의 초기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는 것도 야소교서회였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은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포의식과 민족의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은 3·1독립운동의 영향 하에 진행된 애국애족운동이었다. 민족애가 자작회로 나타나든 국산애용부인회로 나타나든 그 중심에는 나라사랑이 그 저변에 깊이 깔려 있었다. 홍이섭이 물산장려는 “순국산품만의 사용이라는 표제적 효과보다도 단합해야 산다는 자작을 민중의 가슴에 심어주었다.”며 이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민족정신의 고취에서 찾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기독교민족운동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남강 이승훈과 조만식이었다. 신민회/105인 사건, 3.1독립운동. 그리고 물산장려운동은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나라사랑의 본보기였다.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측면은 바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애의 조화였다. 1907년 안창호를 만난 후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남강은 바로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들어갔다. 안창호가 축이 되어 시작한 신민회에 가입한 것도 안창호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남강은 안창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1910년 한일병탄의 사건이 일어난 후 이승훈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독교 신앙과 나라 사랑이 조화를 이루었다. 고당 조만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3.1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애국애족운동으로 승화시켰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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