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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구세주를 믿는 마을, ‘구세동교회’ 들어보셨나요?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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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서 북간도 유적답사 연구보고

 

2014년 4월 기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이덕주 교수, 감신대)가 지난 5일 개최한 ‘제324호 학술발표회’에서 중국 화룡시에 존재했었던 이른바 ‘예수 마을’로 불리던 구세동교회에 대한 유적답사 연구가 보고됐다.

사실 구세동교회는 이덕주 교수의 ‘한국 교회 처음이야기’라는 책에 언급돼 있다. 이와 관련 IVF의 후원으로 지난 1년 동안 이덕주 교수와 김호운 씨(호서대 박사과정 수료)는 함께 구세동교회에 대한 역사를 연구했으며, 이날 학술발표회를 통해 그 내용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구세동교회는 중국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 5조에 있었던 예수 마을이다. 함북 길주 출신의 이종식과 그 가족, 친척 10여 명이 창세기에 기록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창 12:1)라는 말씀처럼 낯선 곳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 구세주를 믿는 마을, ‘구세동’

이미 고향을 떠날 때 교인이었던 이들은 중국인에게서 땅을 사서 마을 이름을 ‘구세동’이라고 했다. 구세동은 ‘구세주를 믿는 마을’, ‘세상을 구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만 하다.

사실 구세동교회는 장은평교회보다 약 2년 늦게 개척됐다. 장은평이라는 마을도 예수 믿는 사람들만 들어와 살았다. 그리고 장은편 마을과 마찬가지로 구세동도 ‘경신대토벌’때 일본군이 들어와 예배당은 물론 마을 전체를 불 질렀고, 살육을 감행했다.

장은평처럼 구세동엔 지금도 조선족만 살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민속마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초가집과 연자방아와 같은 것을 구세동이나 장은평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구세동엔 교회가 없다. 해방 후 예배당은 폐쇄됐고, 교인 가족들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곳곳에 ‘예수 마을’이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 우선 마을 입구 언덕의 공동묘지엔 일제 강점기 별세한 교인들의 무덤들이 십자가 문양을 새긴 비석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덕주 교수는 “묘지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예배당이 있던 자리엔 십자가만 걸면 예배당으로 바뀔 만한 민가가 나온다”며 “그 집 주인은 몇 년 전부터 인근 토산 조선족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 말고도 매주일 10명 이상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은 구세동 마을에 신앙이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구세동에 거주하고 있는 지역 촌장에 따르면 당시 구세동이라는 예수 마을은 세 가지 전통이 있었다. 첫째, 교인 아닌 사람들은 마을에 들어와 살지 못한다. 둘째, 네 것과 내 것 없이 살았다. 셋째, 일주일에 하루는 철저하게 쉬었고, 6일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만 예배당에 갈 수 있었다.

이 교수는 “구세동 마을은 구약에 나오는 레위인의 성읍이나 도피성 같은 곳이었다”며 “일제 시대 정치와 경제적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난 교인들이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 일궈낸 신앙촌이었다. 만주 땅에서 그들이 꿈꾼 것은 정치적 자유나 경제적 부요만이 아니었다. 성경과 신앙의 원리를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곧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로서 ‘하늘나라’였다”고 평가했다.

 

 

# 구세동교회의 역사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는 구세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3년(계축)에 간도 구세동교회가 설립되다. 이종식 등 10여 명이 당지에 내주하여 중국인으로(부터) 토지를 매수하고 동명을 ‘구세’라 하며 합심 협력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인이 증가되며 교회가 성립되었고….”

‘마을 대부분의 주민들’이 기독교를 믿은 것이 아니라 주민 전부가 기독교를 믿은 것이다. 구세동은 이렇게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특히 보고에 따르면 1915년 8월 25일 원산 부샹리 샹동예배당에서 회집한 ‘함경로회 제5회 회록’에 구세동교회 장로 1인을 청원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918년 8월 12일에 이종식이 장로로 장립된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에 따르면 다시 이년 후인 1918년 장로 한 명이 장립되고, 또 다른 한 명의 장로 택함이 허락을 받았다.

1919년 ‘함북로회 제3회 회록’을 보면 구세동교회에는 정명주, 이종식 2명의 장로가 기록이 되고 있다. 또한 1918년 11월에 회집한 ‘두도구특별회록’을 보면 김내범 목사가 두도구, 장은평, 구세동, 태양동 네 교회의 전임목사로 취임했다.

1919년 9월 13일 간도 와룡동 예배당에서 회집한 ‘제4회 함북로회’에서 구세동교회의 회원으로 제3회에 이어 정명주 장로고 계속 참여했고, 구세동교회의 전임목사로 있던 김내범 목사가 영생동교회로 옮겨감으로 새롭게 목사를 청원하는 일이 있었다.

 

 

회록의 ‘간서시찰보고서’에 새롭게 장ㄹ입한 장로 한 명과 구세동에 ‘여학교’가 새로 설립된 것도 언급돼 있다. 1920년 2월 14일, 간도 두도구예배당에서 회집한 ‘제5회 함북로회’와 1920년 9월 18일 회령예배당에서 회집한 ‘제6회 함북로회’는 새로 장립된 리권수 장로가 구세동교회의 회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1921년 ‘제7회 함북로회’ 회원으로 참석한 구세동교회의 장로는 리종식이었다. 특히 “구세동교회에서 청년들이 주일 오후마다 근처에 다니면서 전도하기를 열심히 함”이라는 구세동교회 청년들의 전도활동 기록도 남아 있다.

이덕주 교수와 함께 발표했던 김호운 씨는 “이 때는 1920년 경신대토벌 이듬해인데도 구세동교회 교인들의 신앙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감사절 연보를 많이 할 수 있었던 당시 구세동교회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구세동교회 공동묘지 답사에 대한 발표도 이어졌다. 내용에 따르면 전체 묘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림 잡아 100기 이상이다. 그 중 비석이 있는 묘지는 30기다. 그 중 하나는 삼각형 모양의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사용하고 있고, 2기는 나무비석, 3기는 다음지 않은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특히 30기 묘지에서 남자 묘 15기, 여자 묘 10기, 합장료 4기, 확인불가는 1기이다. 29기 비석에 거론된 인물은 이름이 없는 여성들과 이름이 거론된 조상들을 포함해 170명 정도였다.

한편, 이날 발표했던 이덕주 교수와 김호운 씨는 “구세동교회의 유적답사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추가로 조사 연구할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며 “역사를 공부하는 신학도로서 사라져가는 신앙선배들의 발자취를 조사하고, 보존 연구해 후세에 남겨야 하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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