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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경건주의 영성과 한국교회 [원문]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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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연구(8) * 


 

17세기 독일 개혁교회 경건주의의 무신론주의 이해를 중심으로

주도홍 교수(백석대)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4월 18일(2014년) 개최한 ‘제37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경건주의 영성과 한국교회
(17세기 독일 개혁교회 경건주의의 무신론주의 이해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 세계 속에 파묻혀 살아가며 교회 안에서 무신론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무신론을 제기하는 근거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7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개혁교회 경건주의 창시자 테오도르 운데어아익(Theodor Undereyck, 1635-1693)을 중심으로 언급되는 무신론주의Atheismus는 경건주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이다.

 

 

곧 교회 내적innerkirchlich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는 17세기 독일 경건주의 영성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창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개신교도이든지 가톨릭 신자이든지 했기에 그 안에서 무신론자를 찾는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특별한 것이었고, 나아가 조금은 과격한 구분이기도 했다.

 

17세기는 역사 속에서 인본주의적 계몽주의가 경건주의와 함께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 ‘30년 전쟁’(1618-48년)을 지나면서 유럽인들은 황폐화된 세상을 직면해야 했으며 무언가를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정적인 물음은 ‘과연 신은 존재하느냐?’였다.

 

결국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져들었으며, 어떤 이들은 교회적 제도적 신앙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조명해야 하는 원천적 고뇌를 하였다. 과연 우리가 찾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작동되는가? 17세기 독일교회 성도들은 묻고 또 물어야만 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여러 각도에서 던져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17세기 경건주의는 나름대로 교회 안팎의 무신론에 대해 분석하며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리며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같은 시대 태어난 루터교회 경건주의 창시자 슈페너(Ph. J. Spener, 1635-1705)도 다르지 않았는데, 자기가 속한 루터교회를 날카롭게 진단해야만 했다. 루터교회 경건주의의 창시자로서 슈페너는 세 가지 관점에서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저서 『피아 데시데리아, Pia Desideria, 1675)에서 제시하는바 진단-비전-처방이라는 등식에서였다. 슈페너에게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있는데, 정확한 교회를 향한 진단과 더불어 제시되는 새로운 거듭난 교회로의 긍정적 비전이다.

 

비록 현재는 암울하고 여러 가지로 교회가 중병을 앓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리고 주의 종들이 한 마음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교회는 새로워질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거듭날 수 있다는 비전 제시가 슈페너에게서 돋보인다. 거기다 슈페너는 매우 차분하게 초대교회로 돌아가길 요청하며 현실에 입각한 6대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우리 삶에 가져오자.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선한 일을 원할 때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알기에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가운데 넘치게 하자는 것이다.

2. 만인제사장설의 구체화를 실현하자. 중세교회는 일반성도들을 잠들게 하여 결국 교회가 힘없이 잠든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지체가 하나님의 귀한 영적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일깨워 함께 교회를 세우도록 하자. 여기에 경건주의는 이제 신학까지를 평신도에게 가져가기를 기꺼이 하였다.

3. 신앙과 지식 그리고 행위의 조화를 이루자. 사변적 지식, 행함이 없는 믿음은 활력 있는 교회를 기대할 수 없기에 이제 교회는 종교개혁 신학 위에 서서 신앙과 지식의 조화를 이루며, 신앙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교회로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이다.

 

 

 

 

 


4. 논쟁신학을 중지하자.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각기 자신의 고백만을 내세우며 분열의 신앙고백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나 되지 못하며 서로 정죄하는 개신교회로 나누어졌다. 이 때 슈페너는 우리가 함께 받아들인 종교개혁 신학을 근간으로 더 이상 나누어지지 말고 하나로 힘을 합쳐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을 요청했다. 논쟁의 결과는 피폐한 심령을 낳게 하며 성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5. 신학수업을 경건훈련과 함께 병행하자. 신학공부가 결국은 교회의 모습을 좌우하게 되는데, 단지 머리로만 신학을 연마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학수업을 경건훈련과 함께 병행하여 보다 다른 차원의 신학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교수가 친히 참여하고 인도하는 제자훈련식의 경건모임이 그리고 중요한 선진들의 경건서적의 독서가 요구된다는 것이며, 그저 지식으로만 평가하는 신학수업이 더 이상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6. 설교는 내적 영적 인간을 겨냥하며 그들을 위로하는 죄악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설교자의 지식이나 수사학, 그리고 인간적 철학을 설파하는 강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설교의 갱신이야말로 교회의 갱신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교회의 타락은 강단의 타락에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하여 전달될 때 교회의 타락은 불 보듯 뻔하다.

이쯤해서 한국교회를 떠 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과연 21세기 한국교회는 제대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은 제대로 된 것일까? 왜 한국교회는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인가? 왜 한국교회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17세기 경건주의가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없을까? 본 글은 먼저 운데어아익의 생애, 교육, 목회, 저작을 살펴본 후, 그에게 있어 나타나는 무신론사상Atheismus에 대해 언급하며 독일 경건주의 영성을 추적하며 들추어낼 것이다. 특히 독일 개혁교회 경건주의der Reformierte Pietismus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특히 필자의 졸저 『개혁교회 경건주의』를 중심으로 함께 생각하려 한다.

 

 

 

 

 

 

2. 무신론 개관

 

무신론은 성경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 서신 에베소서 2:12의 “하나님도 없는 자”에서 나오는 atheos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지적으로 또는 행위로 부정하는 자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 불쌍한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다. 17세기 경건주의에서 일컫는 무신론자와는 조금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건주의는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으로 나누었는데, 특이하게는 교회 안에 숨어 있는 무신론을 ‘숨어있는’ 또는 ‘비밀스런’ 무신론으로 추적한다.

 

먼저 폭을 넓혀 역사에 등장하는 무신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신론은 먼저 초월적이며 초자연적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과 그에 따른 삶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초월적 존재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당연히 신의 숭배 내지는 신앙은 있지 않으며, 나아가 신을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게 된다. 이러한 무신론적 태도는 신론Theismus을 대항하는 반신론Antitheismus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신을 부정하는 불신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무신론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신론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이다.

 

무신론은 인간의 사고만큼 오래된 것이며, 인간의 신앙만큼 오래된 것으로서,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서구 문명화의 꾸준한 표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G. Minois) 고대 헬라철학에서 무신론Atheismus은 키케로Cicero에게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종교개혁 시대가 끝나는 16세기 말 독일 문헌에서 Atheisterey라는 말이 등장하여, 18세기 초까지 독일에서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중세에서 무신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할 때, 예를 들어 이슬람을 그렇게 일컬었다.(Walter R. Dietz) 또한 중세는 용병대나 교회에서 출교된 소수를 일컬을 때 무신론자라 불렀다. 이러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기독교 신앙의 시대인 중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달랐는데, 중세에서의 제도적이며 객관적 신앙의 무게중심을 주관적 신앙에 가치를 부여하며 무신론이해에 있어 역사적 전환점을 가져왔는데, 먼저는 둘로 나누어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서로 관용해야 했으며, 또한 종교개혁 서클 안에서 루터교는 개혁교도와 다른 교회 무리들을 쉽게 무신론으로 정죄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정치와 교회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 신앙의 자유의 폭과 깊이를 넓혀가야만 했다. 기독교적 유럽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신을 부정하는 또는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적 개념 무신론을 사용하게 된 것은 비로소 16세기 17세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M. Lochman)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자연신론자Deisten, 범신론자Pantheisten, 스피노자주의자Spinozisten를 무신론자로 불렀다.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는 당시 교회와 성직자들을 대적하여 많은 비판적인 글들을 썼는데, 때로는 조롱하는 듯 독설을 가지고, 때로는 역설적으로 공격하였지만, 결코 그는 무신론자로 공격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신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 인식할 수 없기에 신을 믿지 못하는 불가지론자Agnostiker가 무신론자의 대열에 서기도 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았다. 또한 무신론에 대한 긍정주의의 태도인데,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무신론은 모든 초자연주의 이해들을 반하는 것으로서, 초자연적 실체, 힘, 또는 그것이 신적인 것이든지 신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어떤 능력에의 숭배와 연관되어진다
 
여기에 정영숭배, 신령주의, 단신론적 또는 다신론적 종교들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 들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두 사람은 포이어바흐(L. Feuerbach)와 마르크스(K. Marx)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을 받아들여 종교비판으로서 소외론Entfremdungstheorie을 제기했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헤겔G. W. Friedrich Hegel)의 이상주의 이해를 받아들였다.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역사적이거나 초월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각성의 산물로, 곧 하나의 판타지이며, 인간 본성의 반영으로 인간의 욕구나 소원이 만들어 낸 산물이 신이며 종교라는 것이다(Projektionstheorie).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이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Homo homini Deus est” “Der mensch ist dem Menschen ein Gott.” “Der mensch ist der Anfang der Religion, der Mensch der Mittelpunkt der Religion, der Mensch das Ende der Religion.”(L.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포이어바흐의 투사이론을 받아들인 마르크스는 종교는 초월적이 아니라, 실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결코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가운데서의 앙상블 같은 실체인데,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사회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종교비판으로서의 인간 소외론을 가져온다. 21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자연과학적으로 그 초자연적 실체가 증명이 될 때, 종종 ‘새로운 무신론’Neuer Atheismus으로 일컫기도 한다.

 

 

3. 운데어아익의 무신론 이해

 

운데어아익의 네덜란드 선생 푸치우스(G. Voetius)에게 있어 무신론자는 모든 초자연적인 실체를 부인하는 자, 일반 서적과 역사의 차원에서 성경을 의심하는 자, 신학자를 일상의 삶에 관심이 없는 자로 무시하는 자, 자신의 의견과 삶의 쾌락을 과대평가하는 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치우스의 대적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인본주의자, 데카르트주의자, 그리고 분열주의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무신론을 향한 이해는 이후 대략 100년 동안 다르지 않았는데, 운데어아익의 무신론 이해 역시 선생 푸치우스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30년 종교전쟁’(1618-48년) 중 독일 뒤이스부르크Duisburg에서 1635년 태어난 운데어아익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신학수업을 배경으로 독일 개혁교회의 목사로서 교회사에서 소중한 발자취를 남겼으니, 어두워져가는 독일 개혁교회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로서의 하나님의 소명에 성실히 응답하였다. 먼저 운데어아익은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확히 진단하여야만 했는데, 바른 처방을 가능하기 위해서였다. 운데어아익이 어떻게 무신론을 이해했는지 그의 네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에 나타난 무신론

 

“사람들이 슬픈 죄악의 길에 들어선 후, 굶주린 영혼을 그 어떠한 것으로도 평안케 할 수 없으며, 충족시킬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그리스도의 신부』, 1쪽)

 

운데어아익의 처녀작 『그리스도의 신부』(1670년)의 저술 동기도 잘못된 신앙 타성에 젖어있는 이름크리스천Scheinchristen의 문제의 심각성을 파헤치며 그들을 살아 있는 크리스천으로 깨우는데 목적이 있다고 밝힌다. “영적 사랑과 삶의 부재 가운데 있는 라오디게아의 딸들”의 각성을 위해 운데어아익은 영국 청교도주의 영성을 가져왔던 것이다. 물론 개혁교회의 근본을 다시 기억하게 하며, 그 기반 위에서 영국의 역동적인 청교도들의 신앙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운데어아익이 『그리스도의 신부』에서 가져온 교회사적 인물들로는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돌트신경, 호른벡, 퍼킨스, 윌리엄 에임스, 다이크, 살데누스, 볼톤, 아른트, 뮐러, 텔린크, 벡스터 등이다. 교회사의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청교도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존경받는 자들, 독일의 종교개혁 영성의 대표적 인물로서 루터교의 요한 아른트 하인리히 뮐러까지를 인용하며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은데, “그들은 신학적으로 우리 편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면서, “그러한 거룩한 인물들은 본인에게 있어 높은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많은 신실한 목회자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고 인용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운데어아익은 이 ‘이름크리스천들’을 다르게는 “실질적 무신론자들”praktische Atheisten로 일컫는데, “경건의 아름다운 명목 하에 나름대로 진리에 입각하여 외적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고 능청을 부리지만 힘없는” 생활 가운데서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실천적 무신론자들이야말로 운데어아익이 보기에는 마귀들, 적그리스도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들인데, 드러나지 않은 상태 가운데서 스스로 “잘못된 안정감 속에서 더 깊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죄악의 잠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운데어아익에게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해악”den groesten Schaden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중생과 성화의 삶이 없이 살아가는 교인들이다. 운데어아익은 실천적 무신론자를 목회자에게서도 발견하게 되는데, “능력도 기백도 생활의 모범도 없이 자신들의 목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고발하며, 운데어아익은 “참으로 탄식을 감출 수 없는 영적으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위험한 마지막 때”라고 절규한다. 이러한 원인으로 운데어아익은 두 가지를 드는데, 신앙적 무지와 눈먼 확신이다. 그들에게는 “중생도 없고, 성화도 없고, 회개와 자아부정인 삶의 부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의 신부』를 통해 정리해 볼 수 있는데, 운데어아익이 말하는 무신론자는 교회 내적인 무신론자들이다. 당시 독일에서 교회 밖의 사람들, 곧 비 기독교인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운데어아익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삶은 천국의 맛보기로 격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되는 회개와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의 진정한 크리스천과 무신론자로의 운데어아익의 구별은 날마다의 회개를 전제로 할 때 어쩜 과격한 이분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교회 내적 무신론의 중요한 근거로는 신앙적 무지와 눈 먼 확신이다.

『할렐루야』에 나타난 무신론

 

17세기 독일 브레멘 마르티니 개혁교회의 담임목사 운데어아익은 자신의 저작 『할렐루야』(1678년)에서 당시의 어두워져가는 교회를 진단한다. 『할렐루야』 헌정사에서 “기독교 속의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은 슬프게도 부서져 가도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진정한 모습을 소유하기보다는 점점 껍데기밖에 없는 힘없는 허수아비가 되어가도다.” 그렇지만 영적 슬픔 가운데서도 운데어아익은 영국에서 경험했던 청교도들의 경건한 삶을 자신의 비전으로 제시하길 잊지 않았다. 결국 운데어아익은 이러한 청교도의 경건을 독일 개혁교회에 실질적인 아이디어로 가져와 이식하게 되었다.

운데어아익이 교회의 타락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근원적 악”Grunduebel은 두 가지로, 앞 선 『그리스도의 신부』와 유사하게 기술하는데, 신앙에서의 무지와 예정교리에 근거한 잘못된 안정감이다. 이를 향한 처방으로 운데어아익은 개혁교회의 목사로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근거하여 순전한 개혁교리를 신앙의 본질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칼빈과 네덜란드의 선생 코케유스의 신학을 가져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대한 칼빈”은 “성경을 원어연구에 근거해서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실성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성경의 많은 진리를 제시하였다.”고 격찬한다.

운데어아익이 『할렐루야』에서 당시의 크리스천을 예리한 눈으로 서술하는데, 경건주의의 엄격성을 확인하게 된다.

 

 

1. 맹목적이며 신앙 경험도 없이 미신적으로 구원과 거룩을 추구하는 자들서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여기에 속한다. 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자들로서, 당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3. 실생활에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크리스천들인데, 그들을 운데어아익은 “숨은 무신론자”heymliche Atheisterey라 일컫는다. 4. 진정한 신앙의 가장 근원적 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로서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성령도 능력도 없는 크리스천이다. 5.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 “초자연적 빛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을 갖는 자로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성도의 삶을 누리는 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보다 더 간절히das wahre Mehr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며das Mehrbegehren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영적 연합을 누린다.

영적 연합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지상 성도의 하나님과의 연합은 아직 “절대적으로 완전한 통치의 상태”dominium absolute perfectum는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의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성찬이 영적 교제의 중심에 있다. 운데어아익에게 있어 성찬을 향한 도나투스의 완벽주의, 라바디(Jean de Labadie)의 분열주의와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성찬이 중요한 하나님과 영적 연합은 불신자들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다섯 분류 중 앞 네 가지 종류의 크리스천은 진정한 크리스천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무신론자로 일컫는다는 사실이다.

『평신도』와 무신론

 

운데어아익의 소책자 『평신도』(1681)는 신앙에는 들어섰으나 여전히 무지한 단순성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가장 초보단계”에 있는 크리스천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운데어아익은 문맹으로 인해 신앙적 무지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목회자적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가르치려한다. 운데어아익에게 있어 목사의 가르침은 강단 위에서 뿐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리공부나 제자훈련을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경건한 소그룹은 운데어아익에게 사랑의 의무이다. 그들은 대부분 농촌시골 교구에 속한 성도들로서 이들이야말로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평범한 독자들”이라고 간주한다.

 

쉽게 말해 그러한 크리스천을 향한 운데어아익의 앞에서 제시되었던 정죄나 강력한 비판은 발견되지 않고, 무지한 양들을 향한 선한 목자의 태도를 견지할 뿐이다. 이 저서에서는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이들에게 운데어아익이 가르치려는 신앙의 두 단계는 첫째, 죄악의 비참을 인지한 후 그리스도와 연합이며, 둘째, 하나님의 선하심에의 참여이다. 신랑신부의 혼인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비유로 제시된다.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에는 세 가지 사랑이 요구되는데, 하나님 사랑, 자기 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은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의 전제이다. 자기 사랑의 근거로는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무신론자』에 나타난 무신론이해

 

운데어아익의 무신론은 그의 선생 푸치우스의 영향을 보여주는데, 그가 얼마나 강하게 그의 영향을 입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푸치우스의 무신론에 관한 저술은 Disputationes de Atheismo(무신론 논쟁, 1639년)으로 “이 문제를 다룬 최초의 학적 논문”(H.-M Barth)으로까지 일컬어진다. 푸치우스의 글은 유럽의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용되었는데, 특히 그의 무신론의 범주는 계속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푸치우스는 이론적 무신론, 실질적 무신론, 직접적 무신론, 간접적 무신론으로 나누었다.

 

운데어아익의 무신론은 독일 브레멘에서 1689년 출판된 그의 “최고의 저작”beste Schrift 방대한 1036쪽의 『어리석은 무신론자』에서 보다 선명하게 서술되는데, 운데어아익의 무신론 이해의 총체로 일컬을 수 있다. 책 제목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리석은 무신론자/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무지에 의해 확신에 이른 자/ 크게 두 부분으로 다룬다. 첫 부분에서는/ 의지와 서둘러서/ 자신과 남에게/ 하나님에 관한 생각들을 부정적으로/ 보라는 듯이 거부하는 자들을 다루며/ 둘째 부분에서는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은연중에/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자로서 생활하는/ 그런 자들을 다룰 것이다. 브레멘 마틴 교회 목사 테오도르 운데어아익이 쓰다.”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책의 서두에 가져온 러브(Chr. Love)와 코케유스(J. Coccejus)의 말은 저자가 본서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잘 보여준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자들은 이 세상에서 무신론자이다.”(Chr. Love) “진정한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 나지 않은/ 모든 자는 동일하게 어리석은 자이다.”(J. Coccejus) 운데어아익은 “실질적인 행위 가운데서,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무신론”의 정체를 밝혀, 독자들로 하여금 시인하게 할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는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적 삶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끌어줌에 본서의 저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본서는 총 18장으로 나누어진 1부(1-430쪽)에서는 이론적 무신론을,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2부(431-974쪽)에서는 실질적 무신론을 다룬다. 이론적 무신론자는 그들의 모든 생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이며, 실천적 무신론자는 교회 내적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 가운데서 발견되는 자이다. 운데어아익이 무신론을 다루는 것은 무엇보다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지를 밝히려 함에 목적이 있다. 이러한 무신론자의 범주에 운데어아익은 분열주의자, 광신주의자, 퀘이커교도 그리고 라바디주의자까지를 포함하는데, 운데어아익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조금의 오해라도 물리치며 자신의 신학노선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물론 데카르트주의와 그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신론주의까지 자신의 신학에서 구분하고 있는데, 사변적spekulativ 무신론자와 실질적practical 무신론자가 함께 포함된다. 사변적 무신론자는 지식적, 고의적 무신론자로 이 이론적 무신론자야말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Haesser GOttes이다. 실질적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일컫고, 인식하면서도 생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실질적 무신론자가 자신의 영적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러기에 동시에 문제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신론자를 어리석은 바보로 또는 동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 실질적 무신론자는 이론적 무신론자보다 보다 큰 문제인데, 이론적 무신론자는 공개된 반면, 실질적 무신론자는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으로 행세하지만, 비밀리에 어리석음과 거짓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운데어아익은 “대충 거의 크리스천”die beynah Christen으로 부르며 자연인과 더불어 거듭나지 못한 크리스천을 무신론자의 범주에 넣는다.

 

운데어아익에게 있어 무신론자의 반대로 일컫는 용어는 신테이스트Syntheist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Mit-Gott-Sein라는 말로 무신론자Atheist 곧 하나님이 없는 자Ohne-Gott-Sein에 대치되는 말로 사용한다. 운데어아익은 신테이스트가 누구인지를 설명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좇으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뒤따르며/ 아니면 하나님을 따라 살며/ 하나님께 생의 기쁨을 두며/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에게 들어붙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모든 죄악의 길을 미워하며/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하는 자이다.” 그렇다고 신테이스트가 지상교회의 일원으로서 아직 완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4. 운데어아익의 처방

 

운데어아익은 무신론의 폐해를 주목하며 먼저 정확한 진단을 한 후, 이제 보다 나은 삶과 교회로의 처방을 잊지 않는다. 그러한 처방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신이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배우고 체험했던 바를 실천하는 것으로, 운데어아익만의 독창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학창시절 네덜란드 경건운동 ‘나데레 레포르마치’와 영국의 청교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 터득한 지혜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운데어아익의 네덜란드 학창시절 만난 화란 개혁교회의 양대 선생 위트레히트대학교의 푸치우스와 레이덴대학교의 코케유스의 가르침은 자신의 가는 길에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운데어아익에게 있어 화석화된 습관 기독교Gewohnheitschristentum는 무엇보다 17세기 독일교회의 문제였다. 타성에 젖어 더 이상 활력을 잃어버린 채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는 교인들은 교회를 점점 더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참으로 탄식을 감출 수 없는 영적으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위험한 마지막 때”, “설교자들은 능력도 기백도 생활의 모범도 없이 자신들의 목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절규한다 이러한 무력한 목회가 교회 내적으로 실천적 무신론자를 양성하고 있다고 운데어아익은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처로 운데어아익은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인 소그룹 경건모임collegium pietatis을 도입해야 했다. 이 아이디어 역시 그가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푸치우스로부터 배웠고 자신이 학생으로서 그러한 경건모임의 일원이 되어서 직접 그 유익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경험했다.

 

사실 푸치우스는 23년이라는 오랜 목회생활을 뒤로 하고 위트레히트Utrecht대학교의 교수로서 취임하면서 행한 교수취임 연설은 여타 다른 학자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학문과 함께 하는 경건에 관하여”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였다. 신학수업이야말로 경건훈련이 함께 하는 공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신학은 그저 지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학문이었을 뿐이었기에 이러한 푸치우스의 교수취임 강연은 큰 하나의 도전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그의 소신과 함께 푸치우스는 신학생들의 경건훈련을 위해 엄정성prezisheit과 함께 하는 교수들이 직접 참여하는 소그룹 경건모임에 열정을 쏟았다. 그가 1677년 저술한 『두 사람/ 세 사람 아니면 조금 더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작은 모임에 관하여』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푸치우스야말로 경건모임의 열정적인 전도사로서 제자였던 운데어아익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 소그룹 경건모임의 시대적 요청에 대해 푸치우스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악한 사상들이 혹독하게 덤벼드는 이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혼들의 경건을 고양하기 위해서 마땅히 이러한 모임들이 허락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상게서, 20쪽) 여기서 푸치우스가 말하는 악한 사상이야말로 17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안에 침투한 무신론사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당시 이러한 소그룹 경건모임에 대해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대해 푸치우스는 말한다.

 

 

“본질적으로 성도의 경건을 위해서 좋은 것을/ 어쩌다 파생되는 작은 잘못 때문에/ 그 모든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상게서, 23쪽) 그러면서 푸치우스는 교회의 공적 집회와 경건모임의 상관관계를 언급한다. “이것은 저것을 중지시켜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훨씬 더 서로서로 간에 보완관계에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손에 손을 잡고 공적 집회와 사적 경건 모임이 함께 힘을 합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받쳐주는 경건모임들이 되어야 한다.”(상게서 26쪽) 곧 서로 간에 시너지를 발휘하여 교회를 영적 부흥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 경건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함께 읽고/ 들었던 설교를 다시금 경건을 위해 반복하여 함께 대화하며 상고하고/ 서로를 가르치고/ 위로하고/ 권면하며/ 경건을 고양시키고/ 기도/ 찬송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나누는”(상게서, 42쪽) 경건모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그의 제자 운데어아익이 젊은 20대 목회자로서 독일 뮐하임Mueheim 교회에서 1660년 초반 독일 경건주의 표식이기도 한 ‘교회 속의 작은 교회’ 모임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실천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겠다. 물론 이 소그룹 경건모임을 시작하는 일은 영적으로 시들어버린 교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뿐 아니라, 루터교 성주의 불신으로 가득한 눈을 피해 일하기는 일종의 그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였다. 여기서 운데어아익은 많은 반대와 오해와 핍박을 감내해야만 했다. 운데어아익을 향해 가해졌던 비방들은 “오류”, “퀘이커교도들의 짓” 또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상한 새로운 것”, 이단사설 거기다 분열주의 라바디의 추종자 등이었다. 경건주의자 운데어아익을 대적한 이러한 비방들은 계속되는 카셀과 브레멘에서의 그의 목회 내내 아니 그가 1693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목회지 브레멘에서의 지난한 오해는 브레멘 사역의 출발에서부터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결과는 무혐의로 어렵게 사역을 시작해야 하는 그의 생의 십자가였다. 그런데도 운데어아익은 소그룹 경건모임에 이토록 집중하였으며 중단하지 않고 초지일관 최선을 다했을까 궁금해진다. 물론 운데어아익은 천부적으로 갖고 있었던 독자적 성향과 함께 주저 없이 거대한 비전과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이 일을 추진하였다.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 이 일에 매진하였으며, 주일 오후에도 정기적으로 경건모임을 가졌다. 운데어아익의 부인도 여자 경건모임을 이끌었는데, 내용은 교리공부였으며 매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한 시간을 그리고 방학 때에는 오후시간을 내어 경건모임을 가졌다. 이는 당시 노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노회는 1681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 사모 마가레타의 경건모임은 허락하였고, 타 교회 교인들까지 참여하는 운데어아익의 경건모임에는 제동을 걸기도 했는데, 이는 교회 정치적 결정이었다 할 수 있다.

왜 운데어아익은 경건모임에 이렇게 강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는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신부』에서 운데어아익은 경건모임을 “서로를 향해 가장 요구되는 의무”, “사랑의 책무”, “사랑의 실천 현장”(『그리스도의 신부』, 638쪽)으로 규정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함께 ... 거룩하고 또는 영적으로 유익한 대화와 담화로써 유익을 주며, 경건을 북돋워야 한다.”(『그리스도의 신부』, 484쪽)고 말한다. 그러면서 운데어아익은 경건한 대화야말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과 고독”을 “기꺼이 요구되는 바르고 달콤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묘사한다.(『그리스도의 신부』, 438쪽)

 

 

이러한 공동체야말로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그리스도의 신부』, 628쪽)인데, “가능한 어떠한 경우이든지 마땅히 행해져야 할” 것으로 “교회의 큰 집회의 모방으로서 말씀의 낭독/ 기도/ 찬양/ 성경공부/ 그리고 권면 등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세상 직업을 향하여 행해지는 하나의 작은 교회eine kleine Kirche”(『그리스도의 신부』, 628쪽)라는 것이다. 이러한 집회의 성경적 근거로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제시한다.(『그리스도의 신부』, 633쪽) 운데어아익은 계속해서 자신의 저서 『할렐루야』 에서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할렐루야』 ‘제40장 사랑의 책무들’Liebespflichten에서 운데어아익은 경건모임이야말로 자신의 회심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가장 강력한 이웃사랑의 수단으로 제시한다. 경건모임은 무엇보다도 이웃의 회심과 경건생활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이미 성도된 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감사와 은혜에 보답하는 사랑으로 필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정의 경건모임도 모여야 하는데, 각 가정의 아버지는 가정 구성원의 경건생활을 위해 가정목사Hauspastor의 역할을 마땅히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데어아익은 이러한 소그룹 경건모임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교재를 저술해야 했는데, 당시에 교회를 어지럽게 한 무신론자 내지는 교회내적 실천적 무신론자를 주목하며 목회적 마인드에서 기록된 저술로서, 부분적으로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신부』, 『할렐루야』 는 자신의 경건모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재를 목적으로 집필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중 『그리스도의 신부』는 영국에서 쏟아져 나왔던 청교도 경건서적과 같은 맥락에서 독일 경건서적의 효시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운데어아익은 여기서 수도 없이 많은 청교도의 경건서적들을 소개한다. 또한 운데어아익은 경건주의 찬송가를 도입하였는데, 그의 제자인 네안더(J. Neander, 1650-1680)가 1680년 개혁교회 찬송가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이룬 『언약찬송가』Budeslieder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성경교재, 경건서적, 찬송에 이르기까지 경건모임을 위해 아니 경건모임의 발전과정에서 맺어져야만 하는 열매들이었다.

 

 


5. 맺는말

 

지금까지 17세기 독일교회에서 바라본 무신론사상에 대해 독일 개혁교회 경건주의의 창시자 테오도르 운데어아익 목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루터교의 경건주의 창시자 필립 야콥 슈페너와 마찬가지로 독일 경건주의를 개혁교회 안에서 형성한 테오도르 운데어아익도 당시 독일의 정신적 황무함을 무신론으로 진단하며 묘사하고 있다. 이론적 무신론, 실천적 무신론으로 대별하지만, 운데어아익은 무엇보다도 교회내적 무신론자인 실천적 숨어있는 비밀스런 무신론을 추적하며 어떤 자들이 여기에 속한 자들인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사실 당시 인본주의적 계몽주의가 등장하므로 이론적 무신론자의 본격적 등장이 시작되었지만, 운데어아익에게 있어 밝혀내야만 했던 것은 비밀스러운 교회내적 무신론자들이었다. 이들이 더욱 파괴적인 것은 교회 안에 있기에 사람들은 안일하게 대처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들은 누룩처럼 교회를 타락으로 그리고 무력함으로 이끌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무신론은 결국 목회자들까지를 변질시켜 결국 전체 교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결과 경건주의자 운데어아익은 세례를 받았으면서 전혀 그리스도적 삶을 살려고도 살지도 아니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진정한 신앙인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자신의 목회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석화되어가는 힘없는 ‘습관화된 기독교’를 깨우는 영적 작업인 소그룹 경건모임이었다. 이 경건모임이야말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웃을 위한 사랑의 의무로 강조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정당한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교회 속의 작은 교회운동’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 운데어아익은 성경과 함께 교재도 그리고 찬송가도 새롭게 만들어 도입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독일교회가 ‘30년 전쟁’과 계몽주의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정신적 황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는 20세기 후반부터 물질주의, 쾌락주의, 안일주의, 명예주의, 다원주의 등 여러 가지 많은 도전 앞에 유혹을 받으며 깊은 나락에 떨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교회의 위상은 실추되어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에 밀린 것은 옛 이야기이고, 불교에도 밀려 이제는 어떤 종교가 기독교를 제치고 제3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시간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어떤 학자는 2020년이 되면 기독교인은 400만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그 진단과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못한다. 그저 여전히 목회성공 기준이 세속적이고 물량적이다. 쉽게 말해 세상이 말하는 성공기준과 목회의 성공기준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일치한다. 큰 교회건물, 많은 교인 수, 많은 재정이면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인들도 세상적 성공을 신앙의 척도로 여길 정도로 속물이 되어 버린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21세기 오늘 한국교회에게 메가 처치는 성공적 목회의 상징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예수님, 바울, 베드로는 어떻게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한국의 초대교회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걸까? 그들은 그 어떤 거대한 건물도 남긴 적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메가 처치가 무너져간다는 소식이다. 한 예로 메가 처치의 원조격이던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가 부도가 나 문을 닫았다. 다르지 않게 최근 한국의 거대교회들의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바른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교회다운 거룩한 노력을 다시 기울여야 할 줄로 생각한다. 17세기 독일교회의 부흥을 위해 운데어아익이 추구했던 경건모임은 20세기 옥한흠의 작은 교회운동인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교회를 깨웠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어디서 우리의 병을 치유해야 할지 처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초대교회들이 가졌던 순전한 소박한 영성으로 돌아가는 일이어야 한다. 작은 부분부터 기본을 다시 쌓아가는 일이다.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본을 세워 말씀을 함께 공부하며 기도하며 나누는 교회 속의 소그룹 경건모임을 도입을 기본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후 형성되는 거룩한 삶을 세상에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저 물질 넘치는 풍요로운 사회가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참 인간으로 바른 성도로 세상에서 세상을 변혁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누리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 한국교회는 21세기 오늘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꿰뚫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려는 소명의식을 갖는 일이 요청된다.

 

민족의 반쪽이 깊은 어둠에 갇혀 있음을 기억하고 명심하는 일은 한국교회가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할지를 명확히 가르쳐준다. 세계선교도 중요하지만, 70년 동안 잃어버린 민족의 반을 되찾는 일은 너무도 긴급하다. 내 민족이 구원을 받는 일에 무지하며 무관심하며 방치할 때 한국교회의 각성과 개혁 아니 성숙은 허울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숙제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성숙은 요원하다 하겠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인간의 아이디어인 이념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의 복음에 굳건히 서서 자신을 개혁하며 세상을 변혁하며 미움의 분단을 넘어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는 통일에 분명한 몫을 감당하는 주의 몸 된 교회여야 하겠다.

 

우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따르는 거룩한 교회로 거듭날 때 한국교회는 새로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17세기 운데어아익이 독일교회를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내렸던 것처럼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며 교회부흥을 이뤄냈던 것처럼, 21세기 한국교회도 바른 진단을 내려야 할 것이며 앞선 선진들의 귀한 역사의 교훈을 들으며 지혜를 얻어 기본에 충실한 옳은 처방전을 갖고 실천하여 다시 새로워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연구자의 각주 및 참고문헌은 원활한 게재를 위해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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