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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주기철 목사와 민족주의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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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고신대)

 

2014년 6월 14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6월 13일 오전 7시 분당한신교회(담임:이윤재 목사)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1. 시작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民族)이라는 말만큼 가슴 뭉클하게 하는 말은 흔치 않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민족’을 말하고, 민족을 앞세우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반대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말하면 반 이단적 변절자로 공격 받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오랜 기간 동안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압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하의 우국지사나 독립운동가들은 한결같이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정인보에게 있어서 그것은 ‘얼’이었고, 박은식에게 있어서는 ‘국혼’(國魂)이었다. 그들은 민족 교육을 강조했고, 민족문화를 중시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학리사상에서도 ‘민족’ 혹은 ‘민족주의’적 접근은 신뢰를 받았고, 민족을 말해야 탈 서구적인 선도적 지식인인 양 이해되기도 했다. 최근까지 민족의 문제는 진보적 지식인의 표상처럼 되었다.

심지어 ‘민족’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했다. ‘민족교회론’이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민족신학’을 말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싸웠던 이들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적 평가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일예가 손양원,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의 신사참배 거부 행위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 행위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경계해야 할 위험한 요소가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신사참배 거부행위를 거시적 안목으로 평가하여 한국교회의 민족적 기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들이 신앙적 동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와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반일 민족운동에 기여하였다는 점은 인정될 수 있고, 민경배 교수는 이것을 내연과 외연의 관계, 곧 신앙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진정한 동기기 무엇이었던가를 정립하는 일이다. 역사가에 있어서 해석에 앞서 사실(fact) 규명이 우선적인 과제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민족적 과제를 위해 투옥되고 순교의 길을 갔는가? 민족적 동기가 신사참배 거부의 진정한 그리고 근본적인 동기였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타 민족에 대한 공격적 성격을 지닌다.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정의(justitia omnibus)일 수 없고, 따라서 보편적 가치일 수 없다. 18세기 이후 민족주의적 팽창은 양차대전의 원인이었고, 20세기의 민족주의는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경우에서 보는 바처럼 전체주의적 파시즘체제로 굳어갔다. 분명한 사실은 민족주의는 보편적 가치일 수 없고, 민족을 이데올로기화 할 때는 폭력성을 동반한다. 그 일예가 독일의 나치스나 일본의 군군주의인데, 이들은 민족을 이념화함으로서 타 민족에 대해 폭력을 정당화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복음은 민족이나 민족주의 한계 안에 안주할 수 없고, 탈 민족적, 탈 인종적이며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이 예시하는 바처럼 나사렛 종파는 처음부터 유대주의적 한계를 넘어 이방세계로 확장되었고, 하나님은 유대주의적 한계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을 지속적으로 수정하여 주셨다. 요나의 니느웨 파송이 그러했고,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의 방문을 앞둔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했다.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강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기철 목사는 그의 목회와 설교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2. 주기철 목사의 목회사역과 민족주의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昌原郡) 웅천면(熊川面) 북부리(北部里)에서 주현성(朱炫聲) 장로와 조재선(曺在善) 여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1906년 개통(開通)학교에 입학하여 7년 간 수학하고 1912년 졸업하였다. 이광수(李光洙)와의 만남을 통해 민족 현실을 인식한 그는 1913년 종형 주기영과 함께 정주 오산(五山)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졸업과 동시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약 1년을 수학하고 중퇴한 그는 실의의 날을 보내 던 중 1917년 말 경 김해출신의 안갑수(安甲守, 1900-1933)와 혼인하게 된다.
 
1920년 5월 27일에는 마산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경남노회의 추천을 받아 1922년 3월에는 평양의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3년 6개월간 수학한 그는 1925년 9월, 제19회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30일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그후 주기철은 3지역의 교회, 곧 부산 초량교회(1926-1931), 마산 문창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에서 목회하게 된다. 산정현교회 시무중인 1938년 2월 검속이후 약 5년간 옥중에서 투쟁하던 그는 1944년 4월 21일 밤 순교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목회 여정에서 소양 주기철은 민족에 대한 관심은 경시하지 않았으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한 것으로 드러난다. 소양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1월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931년까지 6년간 시무했다. 초량교회는 소양의 전임 정덕생(鄭德生, 1915-1925) 목사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짙었고 교회 안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영적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덕생 목사 재임기(1917-1925)에 부산의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는 초량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대종교 신도였다. 또 부산의 독립운동가이자 안희제와 함께 일하던 석산(石山) 윤현진(尹顯振, 1892-1923)도 초량교회 교인이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 방출에 기여한 바 적지 않다. 안창호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심은사(沈恩賜, 沈保羅라고도 불림)도 초량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안희제는 “입신 학습인이 되어 정목사를 통하여 신앙과 애국을 결부시킬 혁명 투사의 자질을 형성시켰고, 내심으로 독립될 나라에 지상의 천국이 임할 것을 전도 받았다.” 일반적 경향이지만 당시 독립지향의 민족주의자들이 교회의 조직과 방어 속에 자신을 감추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일제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소양 또한 민족운동의 정신적 보루였던 오산학교 졸업생으로써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소양은 민족독립이 교회가 수행해야 할 주된 과제이거나 사명일 수 없다고 인식했다. 그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신앙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전임자와 다른 순수한 목양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조국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민족 문제에 접근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것이 민족의 현실을 타계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그의 정신은 그의 목회생활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로 부임하였다. 산정현교회는 1906년 10월 4일 장대현 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서 남문밖교회, 창동교회에 이어 평양 제4교회로 통칭되기도 했는데, 이 교회에는 김동원, 조만식, 오윤선, 유계준 등 저명한 민족 지도자들이 출석하던 교회였다. 민경배 교수는 산정현교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아성이라고 불렀다. 1936년 7월 이 교회에 부임한 주기철의 취임 첫 설교 “세 가지의 신앙”은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한국교회에는 3가지 유형의 신앙이 있다고 전재한 다음,

첫째로 민족운동, 정치운동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신 분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산정재(산정현) 교회에서도 첫째, 둘째에 속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이제라도 이 자리를 나가주시오.

 

라고 외쳤을 만큼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복음운동이며, 민족적 과제는 이차적이고도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도덕적 생활이나 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을 경계하였다. 그는 복음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복음운동이 도덕 혹은 윤리운동으로 평가절하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의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적 동기에서 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주기철이 이미 1930년대에 “주목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니란 말이냐, 일본국민이기는 하다.”라고 한 말이나, 1940년 창씨개명이 요구되었을 때 비록 불기피한 현실이기는 했으나 신천기철(新川基徹)로 개명된 점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비 자의적이라 할지라도 창씨개명 그 자체를 민족주의적 근거에서 통석하게 여긴 흔적이 없다. 이런 경우는 소양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함께 반대했던 손양원, 한상동 등도 동일하다. 이들은 ‘참된 믿음이 곧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그들의 신앙행위가 곧 애국의 길이었을 뿐이다. 소양은 독립운동 하기 위해 감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신앙적 투쟁은 민족독립과 민족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을 따름이다.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의도된(intended) 행동과 획득된(acquired)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불의한 시대에 있어서의 신앙적 결단은 그 시대를 밝히는 도덕적 측면을 지니게 되고, 그 시대가 압제받는 시대였다면 민족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3. 주기철 목사의 민족주의 국가와 교회, 저항권 사상

1) 주기철목사와 민족주의

일제하의 상황에서, 특히 주기철 목사의 학교 교육과 목회활동기간, 그리고 그의 구금에서 순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담론은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이 분야의 권위자인 칼 도이치나 한스 콘(Hans Conn)이 지적하는 바처럼 개념적으로 다의적이며, 특정한 민족국가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민족주의란 언어, 역사, 문화, 관습을 공유하는 민족 집단(ethnic group)이나 국가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련의 집단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족주의는 해 민족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구한말에서 1905년까지는 ‘민족’이란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한 침탈이 가속화되는 1905년 이후, 특히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민족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된다. 근대적 자주 국가 건설이라는 희망이 사라진 1910년 이후 민족은 감성적이면서도 본능적인 흡입력 지니게 되고,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한일병합부터 해방까지 민족, 자주, 민족 독립운동 세력은 정치적 국민보다는 언어, 역사,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운명 공동체로서의 민족개념을 강조하여 이 당시의 민족주의는 ethnic nationalism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민족주의가 자유,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일제하에서 민족주의는 저항적 성격, 반침략, 반봉건을 포괄하게 되는데 대체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 대두되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주기철 목사는 본인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와 학창시절, 그리고 목회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06년 인척 주기효가 설립한 개통학교에서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등을 통해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했고, 오산학교에서 이승훈, 조만식, 유영모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를 접했을 것이 분명하다. 식민지배기 오산에서 수학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민족, 민족의식에 무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소양은 민족이 처한 현실을 관조하는 민족의식이 있었고,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 풍조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기철의 목회와 설교, 신사참배 거부가 민족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을 암시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도리어 그의 신념체계, 행동양식을 결정했던 것은 신앙적 동기였다. 따라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을 민족주의적 동기로 관찰하는 것은 주목사의 신앙적 의의 추구와 그 고난의 여정을 왜곡하거나 폄하하는 결과가 된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것은, 그리고 그 결과로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은 민족적 울분이나 반일적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 강요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은 이중적인 비(非) 민족주의적이었다. 도리어 그의 신앙적 동기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는 인종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를 넘어서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신도(神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성립한 17세기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두된 소위 ‘일본적 중화주의’(日本的 中華主義),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나타난 ‘일본주의’(日本主義), 그리고 근래에 다시 보게 되는 ‘일본인론’(日本人論)은 연원적으로 말하면 일본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자기 민족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 민족 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기초가 신도였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신도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신화를 근거로 하여 자기 민족은 ‘신의 나라’(神の國) 백성으로 그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이런 우월 의식의 반영일 따름이다.

신도에 근거한 이러한 우월의식은 일본의 동아시아 대외관계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것이 소위 화이의식(華夷意識)인데,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천왕을 타국이나 타 미족에 대한 우월의 근거로 삼아 소위 ‘정한론’(征韓論), 조선 침략론(朝鮮侵略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제의 소위 ‘대동아공영권’ 확보라는 차원의 전쟁 정책은 바로 이런 논리의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신도주의는 일본 민족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비교될 수 있다. 유대교적 선민사상이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근간이듯이, 신도는 일본 민족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신도적 민족주의가 극단화된 것이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발전하여 전쟁정책으로 발전한 것이다. 즉 일본이 말하는 대동아 공영권이란 것은 아시아적 보편주의가 아니라, 신도적 민족주의의 표현일 뿐이다. 신사참배는 그 이념적 기초로 요구되고 강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일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곧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기철 목사가 일본의 민족주의를 반대한 것은 정치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역시 신앙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기철목사의 삶의 여정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비(非) 민족주의적인 하나님의 의(義)라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일본에는 위대한 칼빈학자인 와타나베 노부오(渡辺信夫), 장로교목사이자 학자인 도카 카즈야(登家 勝也) 등이 중심이 되어 ‘주기철 선생 기념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일본인 임에도 불구하고 주기철 목사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것은 주기철 목사의 행위가 민족주의적 동기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2) 교회와 국가

주기철 목사는 비록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서양사상적으로 볼 때 ‘황제교황주의’나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구분만 말하는 재세례파의 입장(Anabaptism)을 반대하고 도리어 ‘장로교 정신’(Presbyterianism)을 강하게 주창했음을 알 수 있다. 장로교전통을 대표하는 칼빈은 루터가 말한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구별이라는 입장을 따르면서도 여기서 진일보하여 이 양자 간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고, 동시에 양자는 유기적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런 입장은 국가와 교회 양자의 구분과 각 영역의 독자성을 잃고 있는 교황주의와 에라스티안주의 그리고 재세례파의 입장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주기철은 장로교 전통을 따라 국가권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국가나 국가권력의 교회 지배나 간섭을 배제했다. 주기철 목사가 “예언자의 권위”에서 강조한 바는 국가권력의 한계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기독교 대회 의장이었던 도마다 미쯔르(富田滿, 1883-1961)와의 대화 속에 나타나 있다.

1938년 6월 30일 신사참배를 독려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도미타가 산정현교회에서 얼마 전 감옥에서 나온 주기철과 만났다. 이념적으로 도미다는 국가와 교회관, 식민지관, 그리고 전쟁관에서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를 계승한 자였다. 도미타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단순한 국민의례라고 규정한 이상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특정 종교행위를 강요한 일이 없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면서 “순교는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변호하였다. 주기철은 차분하고도 논리정연하게 국가 권력으로 한국인의 신앙행위를 탄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면서 도미타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특히 그는 신사참배는 종교행위이며 따라서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국가권력의 한계를 규정했다. 그리고는 “나는 도미타 목사를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며 일본교회 지도자로 알았는데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교회의 고유한 영역을 국가의 지배 하에 두고 있는 도미다의 부당한 처신에 대한 공개적인 지적이었다.

또 다른 경우가 1938년 8월경에 있었던 주목사에 대한 설교권 금지 조치였다. 일경이 주목사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주목사는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일경이 다시 “(설교를) 그만 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국가권력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한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각기 다른 사명을 지니고 있고, 국가가 교회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반대로 교회가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주기철 목사는 국가와 국가권력의 한계를 선명하게 설정하고 국가 권력이 교회와 신앙문제에 개입하거나 탄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주기철목사의 삶과 설교 속에는 칼빈의 장로교 전통과 17세기 스코틀랜드 언약도들(Covenanters)이 보여주었던 국가-교회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3) 저항권 사상

비록 주기철은 ‘저항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은 없다. 사실 한국교회도 이런 용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한국교회가 지난 1970년대 이후 정치권력과 대결하고 민주화운동에 관여해왔지만 1980년대 초까지 ‘저항권’ 사상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서구 교회의 신앙유산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던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물며 1930년대의 한국교회가 서구교회, 특히 칼빈주의적 장로교 전통에서 발전되어 온 저항권 이론을 이해했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비록 서구 신학적 개념으로 ‘저항권’ 사상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주기철목사의 경우에는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하서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경우가 그의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였다.

 

북조 이스라엘 7대 아합왕 시대는...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바알의 분별이 없어졌고,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권력 계급이 횡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백성들을 견책하여 특히 왕가를 향하여 사정없이 공격하였습니다. ... 엘리야의 권능, 선지자의 권위는 이러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바알도 없고 아합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뿐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의 경우를 들면서 부당한 국가권력의 간섭과 부도덕에 대해 저항했던 경우를 말하면서 그 ‘저항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의 신사참배 거부와 저항, 그리고 순교 자체가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대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칼빈, 베자, 낙스, 멜빌로 이어지면서 보다 구체화되는 저항권 사상은 위정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했는데, 근본적으로 무엇에 복종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불변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법에는 예외 없이 절대적인 복종해야 하지만, 위정자에 대한 복종은 상대적이며 조건부적일 수밖에 없다. 위정자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경건’(십계명의 1-4계명)과 ‘사랑’(십계명의 5-10계명)이란 두 가지 한계 안에 있다. 위정자가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강요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의 대행자로서 위정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위정자의 요구가 명백히 종교적인 것, 곧 하나님 섬김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부도덕한 일을 강제할 경우 경우에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함으로(행5:29) 저항 할 수밖에 없다.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은 그 요구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부당한 강요라는 확신에 기초한다. 주기철 목사는 일본 국민이라는 점 자체를 부인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난 국가권력이 신교(信敎)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명백하게 침해한다고 확신했을 대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 저항했던 것이다. 비록 주기철 목사는 서구교회의 ‘저항권’이론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삶과 설교를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점은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이 개인적인 고집이나 경상도식의 우직스런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충성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4. 요약과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주기철 목사의 삶과 목회, 설교,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의 문제, 특히 주기철의 신시참배 거부 행위가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주기철 목사는 신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과 순수성을 훼파하려는 외부적인 압력에 대해서는 자기 해체적인 싸움을 전개했지만, 동시에 그는 가난한 영혼들을 감싸 안고 목양하며 건실한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해 가고자 했던 영혼의 목자였다.

이 글 후반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사상에서 간과되어 왔던 점들, 곧 교회-국가간의 관계, 저항권 사상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소양은 자신의 삶과 설교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의 바른 관계가 어떠하며 또 어떠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각각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인지하고,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거나 반대로 교회가 국가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는 개혁교회 전통을 따랐다. 비록 주기철목사는 ‘저항권’이라는 용어는 사용한 흔적이 없으나, 국가권력이 신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아니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요구나 강요에 대해서는 저항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점들이 주기철목사의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교회관의 일단을 보여준다.

주기철목사의 삶과 설교, 저항과 순교의 가장 주요한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것이 그의 저항과 순교의 동기였다. 비록 그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인 시대정신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회활동(social action)을 움직였던 신념은 하나님의 계명에의 충성이었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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