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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특징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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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만 교수(국제신대)

 

2014년 6월 23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6월 20일(2014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영성과 한국 교회’를 주제로 개최한 ‘제38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1. 들어가는 말
 

1970년대 이후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하 WCF라 표기한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스콜라신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것이다. 홈스 롤스톤 (Holmes Rolston)은 WCF의 언약신학을 설명하면서 WCF는 칼빈 이후로 개혁주의 스콜라신학으로 발전된 형태를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 도날드 맥킴 (Donald McKim)도 WCF는 개신교의 스콜라신학의 형태를 가졌는데, 명확성과 정확성을 추구함으로 인하여 추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WCF와 스콜라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는 말하기를, WCF는 분명하고 정확한 용어 사용을 위해서 그리고 논리적 제시를 위한 논쟁의 방식인 스콜라주의 방식으로 작성되었지만, 그 문서 자체는 엄밀하게 스콜라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WCF와 스콜라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폴 헬름 (Paul Helm)은 WCF의 각 장에서 논리적 순서가 있으며, 합리적인 결론들은 그 방법에 있어서 스콜라주의로 보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제시하는 방식의 문제이지 신학적 근거가 스콜라주의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최근까지의 WCF에 대한 연구는 스콜라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논쟁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WCF가 논리적 순서와 논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WCF에 대한 논의는 왜 이 문서가 논리적 순서와 논쟁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작성되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WCF를 작성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신학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며, WCF가 논쟁하는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WCF를 이 시대에 연구하는 방식은 스콜라 신학과의 관련성의 여부보다는 WCF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그 논쟁의 주제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신학적 특징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서 이 시대의 적용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WCF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WCF가 가졌던 구조의 특징과, WCF가 논리적 논쟁의 중심이었던 신학적 오류들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구방법을 택한 것은 WCF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특징 혹은 영적인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적 배경과 WCF

WCF를 작성하였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구성되었던 것은 우선 정치-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WCF를 비롯하여, 예배모범, 대요리문답서와 소요리문답서는 의회의 명령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1638년에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는 영국 국교의 기도문서 사용 요구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당시 영국 왕이었던 찰스 1세는 스코트랜드를 공격하기 위해서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의회의 부정적인 태도로 인하여 연기하였다. 그후 스코트랜드 장로교회와 영국 국교회는 1640년에 다시 충돌하였다.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소집하였지만, 의회는 왕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영국의회는 왕과 정치-사회적인 것은 물론 이거니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감독정치 폐지를 요구하는 Root and Branch 청원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청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감독정치로 인하여 오류와 무지가 교회에 쉽게 들어오며, 이로 인하여 부패와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641년 11월 22일에 하원은 바른 교회 정치형태를 요구하는 항의 문서를 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1642년 7월에 의회는 교회와 국가의 개혁을 왕에게 요구하였다. 물론 왕은 의회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1643년 5월 13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위한 요구가 하원에 제출되었다. 의회는 왕의 반대를 무시하고, 6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집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였다. 이 법령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목적과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명시하였다.

우선 총회의 구성 목적은 신앙의 순수성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써 교회 정치가 완전하게 개혁되어야 하며, 지금의 상태의 교회정치는 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정치 형태는 성경적이어야 하며, 모든 잘못된 교리를 정화하고, 영국과 스코트랜드 교회와 외국의 개혁교회와의 일치의 필요성을 말하였다. 그리고 법령은 총회장으로서 윌리엄 트위세 (William Twisse)를 지명하였다. 법령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열렸다. 총회의 첫 번째 작업은 39개 조항 (Thirty Nine Articles)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39개 조항의 개정 목적은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우스주의와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정 작업은 1643년 10월 12일에 15장까지 완성하였다. 16장 개정작업을 시작할 즈음에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의가 제안 되었다. 그런데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 동맹과 언약’ (Solemn League and Covenant)은 신앙고백서와 교회정치 형태, 예배 모범, 교리문답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엄숙동맹과 언약’은 개혁신앙을 보존하고, 교리, 예배, 치리, 정치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세우며, 신앙고백서로 최고의 개혁교회 견본이 되게 하고, 바른 교리에 어긋나는 교황제도와 미신, 이단, 분리, 불경건을 근절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엄숙동맹과 언약’으로 인하여 9월 25일부터 스코트랜드 신학자들이 총회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의회는 1643년 10월에 총회로 하여금 예배모범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총회는 39개조항의 개정 작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 예배모범을 작성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스코트랜드 총회회원의 참석으로부터 총회는 합의된 개혁신학을 세우기 위해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와 예배 모범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엄숙 동맹과 언약’으로부터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으로서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정한 이유는 총회 회원들 간에 이 분야에서 가장 깊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총회는 1643년에서 1644년 사이에 교회정치와 예배모범 (Form of Government)을 작성하였고, 1644년 8월 20일에 신앙고백서 작성위원들을 지명하였고, 위원들은 1646년 11월 26일에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의회의 명령에 의해서 신앙고백서에 증거 성경구절을 넣어서 1647년 4월 5일에 WCF를 완성하였다.

총회는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과 함께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개혁신학 내에서 특정 주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신학자들의 회의였다. 예를 들어서 총회원들 가운데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타락전선택설 (Supralapsarianism)을 지지하는 자와 타락후선택설 (Infralapsarianism)을 지지하는 자들이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회는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정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총회는 특정 학파의 특정한 신학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실제적으로, 총회원이었던 에드워즈 레이놀즈 (Edward Reynolds)는 WCF 3장의 내용을 논의하면서, 논쟁적인 것과 스콜라주의적인 것을 신앙고백서에 넣지 말자고 하였다. 그러나 총회는 개혁신학에서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범위 안에 있어야 했다. 즉, 영국, 스코트랜드, 아일랜드의 개혁교회는 물론이거니와 대륙의 개혁교회와도 일치되는 개혁신학의 표현들을 의도했고, 그것을 찾았다.

 

 

총회는 1163번의 회의를 통해서 진행되었는데,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정확성과 분명성을 위해 상당한 시간의 논쟁을 거쳤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에서 작성된 WCF는 개혁신학 안에서 공동으로 합의될 수 있는 문서이다. 즉, WCF는 공동의 일치 혹은 합의를 위해서 절충된 문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총회는 고전적인 개혁신학의 범주에서 어긋난 오류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영국교회에 혼동을 주고 경건을 위협하였던 오류들 가운데 으뜸은 알미니안주의이었다. 알미니안주의는 찰스 1세 왕과 윌리엄 라우드 (William Laud)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도 연관되어 있었으며, 신학적 혼동을 일으킨 신학이었다.

물론 총회원들은 그 당시 알미니안신학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있어서 또 하나의 분명한 오류는 로마가톨릭주의이었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시대로부터 내려온 신학논쟁이었다. 그래서 총회원들은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을 통해서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드러내고 배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적 배경으로 총회 당시에 유행하였던 도덕률폐기론주의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은혜를 강조하면서, 신비적 환상적 체험에 몰두하였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로 인하여 WCF의 장과 항목에서 이것의 오류를 지적하는 문구들이 삽입 되었다. 물론 총회는 이러한 오류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시니안주의를 심각한 오류로 보았으며, 언약사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재세례파의 오류를 심각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오류들을 반대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신앙고백서의 문구들을 주의 깊게 서술하였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영국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신학적 상황에서 열린 것이다. 의회와 찰스 왕의 갈등 구조 속에서 열렸는데, 특별히 켄터베리 대주교이었던 윌리엄 라우드 (William Laud)로 인하여 신학적인 것이 되었다. 즉, 영국국교회가 감독정치를 지지하였고, 이것을 주장하였던 라우드의 전횡으로 인하여 의회와 왕이 대립하였으며, 라우드는 감독정치는 물론이거니와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였던 자로써,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열리게 만든 신학적 배경을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오류를 제거하고 순수한 개혁신앙을 보존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개혁신학을 세우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것의 실제적인 방안은 WCF와 예배모범, 그리고 교리문답서들을 작성하는 것 이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작성된 WCF는 개혁신학의 일치는 물론이거니와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정확하고, 분명하며, 포괄적인 서술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3. WCF의 구조에서 나타난 특징들

WCF는 그것을 작성하였던 총회원들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절충된 문서이다.

즉, WCF는 개혁신학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내용과 서술로 작성되었다. WCF는 새로운 신학의 형태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하는 것을 서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WCF가 서술하고 있는 신학적 내용은 개혁신학에서 언급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가장 먼저 39개 조항을 개정하는 작업으로 시작한 것과 엄숙동맹과 언약을 통해서 총회가 해야 할 일을 정하고, 또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3개 위원회로 나누어서 그 주제를 배분한 것으로부터 WCF는 구조에 있어서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각 위원회에서 보고한 것을 마지막 작성 단계에서 그 배열을 정하였기 때문에 WCF의 구조 자체가 유럽 대륙의 신앙고백서들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WCF의 장별 구조에서 나타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WCF 1장: 성경

WCF 1장은 성경에 대한 것이다. 벤자민 월필드 (Benjamin Warfield)는 WCF 1장이 성경을 다루고 있는 것은 신앙고백서들 전체 가운데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리의 체계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신앙고백서의 제 1장에서 성경을 다루고 있는 것은 WCF가 처음은 아니다. 총회에 초청되었지만 참석하지 않았던, 제임스 우서 (James Ussher)와 그가 작성하였던 Irish Article (1615)에서 성경을 가장 앞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WCF 1장에서 성경을 두게 된 이유는 총회에 참석하였던 스코트랜드 신학자인 조오지 길레스피 (George Gillespie)의 주장 아래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WCF 1장에서 성경을 다루면서 교리와 신학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이유는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과 도덕률폐기론주의, 케쿼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교리를 서술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전통을 중요시 하였으며,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과 퀘커주의자들은 환상적 체험을 성경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들을 논박하기 위하여 WCF 1장에서 성경에 대한 서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WCF 1장 2절에서 신구약 성경의 책별 목록이 열거되고, 3절에서 외경에서 대해 서술한 이유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외경을 자신들의 정경 안에 두었기 때문이다.

 

 

2) WCF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WCF 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God's Eternal Decree)를 다루었다. WCF 2장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룬 다음에 하나님의 작정을 다룬 것은 WCF의 구조상에서 나타난 특징이다. 예정의 신비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기 위하여 장을 할애한 것은 WCF의 구조에서 나타난 특징이다. 총회의 총회장은 윌리엄 트위세 (William Twisse)는 타락전선택론자이었다.

그는 타락전선택론이 논리적으로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대하는 자들은 타락전선택론이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본다고 하였다. 결국 총회는 이러한 논쟁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논의 속에서 작정에 대한 단어도 복수보다는 단수로 서술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다룬 것은 그 당시의 교회의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즉 영국국교회가 알미니안주의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3) WCF 7장: 하나님의 언약

WCF 7장은 언약신학을 다루고 있다. WCF 7장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설명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며,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와 두드리 패너 (Dudley Fenner)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이후에 윌리엄 퍼킨스, 제임스 우서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WCF가 작성될 당시, 언약신학에 대해서 존 볼 (John Ball)의 "A Treatise of the Covenant of Grace" 작품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볼 역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WCF 7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서술되었다. WCF 7장 1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낮추시어서 (condescension) 피조물인 인간에게 오셔서 언약을 베풀어주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언약의 요소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같이 강조하였다. WCF 7장 2절 이하로 하나님의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였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일어남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은혜언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한편으로 율법을 은혜언약 가운데 포함시켰다. WCF 7장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그 당시의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배경으로 인한 것이다. 우선 인간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였던 알미니안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며, 한편으로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였던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의 목적이 있었다.

 

 

4) WCF 10-18장: 구원의 서정과 증거들

WCF 10장에서 18장까지의 서술들은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청교도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윌리엄 퍼킨스의 황금사슬 (1592)로부터이다. 퍼킨스가 구원의 서정 방식을 택한 이유는 예정을 설명하려는 변증적 목적이 있었다. 인간의 행위 혹은 협력이 구원의 요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퍼킨스의 구원의 서정 방식은 치밀하게 조직적이기 보다는 구원의 원인적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며, 그 내용은 은혜의 실행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윌리엄 에임스 (William Ames)로 이어졌다. 따라서 WCF의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퍼킨스와 에임스의 저작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WCF 3장에서 하나님의 작정, WCF 7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WCF 8장에서 은혜언약의 중재자로서 그리스도를 다루었다. 이러한 구조와 순서들은 구원의 근거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WCF 10장에서 유효한 부르심을 시작으로 하여 구원이 실제화 되는 것을 진행적 (ongoing)으로 그리고 완성을 향하여 (outworking) 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WCF 10장의 유효한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에게 어떤 것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별히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WCF 11장은 칭의를 다루었는데, 유효한 부르심과 연결하였다. 칭의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그들을 이끌어내신) 결과로 설명하였다. WCF 11장 1절은 로마가톨릭의 칭의교리와 알미니안주의의 칭의교리가 오류인 것을 드러내고, 2절은 도덕률폐기론주의의 오류를 논박하는 것이다. WCF 12장에서는 양자됨을 설명하였는데, 의롭게 되었다면 또한 양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WCF 13장에서는 성화를 다루었는데, 이중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성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평생에 지속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분명히 이러한 설명은 성화를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을 논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WCF는 10장에서 13장까지 분명하게 구원의 서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WCF 14장과 15장에서 구원의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다루었다. 이렇게 WCF는 성화 다음으로 믿음과 회개를 다루었다. 그러나 20세기의 WCF를 해설하였던 윌리엄슨 (G. I Williamson)은 믿음과 회개를 WCF 10장의 유효한 부르심 다음으로 편집하여 놓았다. 아마도 윌리엄슨은 논리적 순서에 더욱 염두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WCF에서 성화 다음으로 믿음과 회개의 순서로 설명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과 회개 그리고 거짓 믿음과 회개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의 경건을 무너트리는 위선자들을 참된 신자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WCF 14장의 제목도 구원의 믿음이며, WCF 15장의 제목은 생명의 회개이다. WCF는 역사적 믿음과 일시적 믿음을 구원의 믿음으로부터 구별하였으며, 율법적 회개를 생명의 회개 혹은 복음적인 회개로부터 구별 하였다. 그리고 WCF 16장은 선한 행위를 다룸으로 진정으로 의롭게 된 자가 혹은 진정한 믿음과 회개를 한자들에게 마땅히 드러나야 하는 실제적 효과와 증거들을 설명하였다. 물론 이 부분은 로마가톨릭을 논박하기 위한 부분이다. 더욱이 WCF 16장은 보통의 분량보다 많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서술하였다. 그 다음으로 WCF 17장은 성도의 견인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WCF 14장에서 부터 다루고 있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의 증거와 효과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신앙고백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적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도의 견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성도의 견인을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WCF 18장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1절에서 직접적으로 위선자들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거짓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논박하였다. 따라서 WCF 10장에서 13장까지 구원의 서정의 구조를 가지지만, WCF 14장부터 18장까지는 진정한 믿음과 회개에 대한 증거와 열매 측면에서의 논증으로 볼 수 있다. 신학적으로 WCF 18장은 구원의 확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로마가톨릭과 최종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부정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5) WCF 20, 23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

WCF 20장은 기독교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와 믿음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분명 이 조항은 인간의 권위에 복종해서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는 교리를 믿거나 그런 계명에 복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 당시 세상 통치자와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예배의 형식 혹은 의식과 예전이 강요된 상황을 고발하는 것이다.

즉, 영국 국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횡적인 횡포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WCF 23장의 국가 공직자에서도 같은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WCF 23장 3절에서 국가공직자는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는 권한이나 천국 열쇠의 권세를 취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그 당시 에라스티언주의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내용이다. 즉 국가 공직자가 교회의 내부 문제에 관여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신앙의 논쟁과 양심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대회와 총회의 권한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WCF 20장과 23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를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영국국교회와 로마가톨릭의 관습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4. WCF의 오류들에 대한 논박들

WCF를 작성할 때, 개혁신학의 범주 안에서 영국, 스코트랜드, 아일랜드는 물론이거니와 해외의 개혁교회도 공감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논쟁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 용어들도 절충하였다. 그러면서도 정확하고 분명한 개혁신앙의 서술을 하였다. 이것은 총회에 방향을 설정하여준 엄숙동맹과 언약 (1643)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엄숙동맹과 언약은 개혁신앙을 보전하고, 가장 최고의 개혁교회 모범에 해당되는 개혁신앙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 아래에서 총회원들은 WCF를 작성하는 것에 있어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오류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WCF를 작성하면서 개혁신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신학들에 대해서 논박하고 그것의 잘못된 것을 명확하게 하였다. WCF에서 오류로 보고 그것을 논박하였던 것은 로마가톨릭주의, 알미니안주의, 도덕률폐기론주의, 소시니안주의 등이었다.

1) 로마가톨릭주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로부터 거의 모든 청교도들은 로마가톨릭주의의 오류에 대해서 논박하였다. 1578년 존 레이놀즈 (John Reynolds)는 로마가톨릭주의와 논쟁을 시작하여, 그 당시 교황주의자로 유명하였던 로버트 벨라르마인 (Robert Bellarmine)과 논쟁하였다. 그리고 1583년에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로마가톨릭이 오류와 미신적인 것들을 낱낱이 파헤친 작품을 출판하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1603년에 조오지 도우네임 (George Downame)은 A Treatise concerning Antichrist를 출판하여 로마가톨릭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회중이라고 하였으며, 벨라르마인에 대해서 반박하는 논증을 하였다. 윌리엄 퍼킨스는 개혁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다르다는 것을 논증하는 A Reformed Catholike를 1597년에 출판하였으며, 제임스 우서는 1624년 교황주의자들을 논박하는 An answer to a challenge made by a Jesuit in Ireland를 출판하였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회원에게 영향을 준 자들이었다. 더욱이 로마가톨릭과의 충돌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린 상황에서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총회원들은 회의 가운데 그들을 교황주의자 (papist)라고 부르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류에 대해서 논의하였고, 그것은 개혁신앙과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총회원들은 교황주의 혹은 로마가톨릭을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WCF에는 교황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WCF 1장 3절의 언급은 외경과 교회의 전통을 믿음과 신앙의 규칙으로 삼는 로마가톨릭에 대한 논박이다. 그리고 WCF 6장 5절은 본성의 부패를 믿지 않는 로마가톨릭의 교리를 배격하고 있다. 계속해서 WCF 11장 1절과 2절은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왜곡시켰던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다. WCF 14장 2절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동의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 WCF 15장 3절에서는 고해성사 혹은 고행을 통해 죄를 보상하는 행위를 회개로 간주하는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거부하고 있다.

 

 

WCF 16장 3-5, 7절은 선행을 구원의 근거로 보는 로마가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직접적인 서술이다. WCF 20장 2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나 믿음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예식을 강요하는 로마가톨릭의 오류에 대한 직접적인 논박의 말이다. 이러한 논박은 WCF 21장 1, 2절의 예배에 대한 설명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WCF 21장 4절의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조항도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한 지적이다. WCF 27장의 성례, 28장의 세례, 그리고 29장의 성찬은 로마가톨릭의 교리가 위험한 오류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29장 4-8절에서는 화체설을 오류라고 하였다.

2) 알미니안주의

영국 교회에서 알미니안주의는 16세기 말 캠브리지대학의 윌리엄 바렛 (William Barett)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제임스 1세가 칼톤 (Carlton), 홀 (Hall), 데이브난트 (Davenant), 와드 (Ward)를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는 돌트 회의 (Dort Synod, 1618-1619)에 파송하였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 당시 이미 알미니안주의는 영국 국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증거로서 제임스 1세는 1622년 지침서를 발행하였는데, 예정론, 선택, 유기, 그리고 불가항력 은혜의 교리들에 대해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624년 리차드 몬태규가 A New Gagg for an Old Goose를 출판하였는데,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논문이었다. 제임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1625년에 즉위하였다. 이때 윌리엄 로드는 찰스 1세의 조력자가 되었다. 로드는 1633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는데, 철저한 알미니안주의자 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영국국교회는 로드의 영향력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영국국교회는 알미니안주의와 로마가톨릭의 의식이 어울어진 라우드주의 (Laudianism)를 따라가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는 로드의 국교회의 의식의 강요에 대항하여 국민언약을 맺었다. 더욱이 1643년에는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교회가 ‘엄숙동맹과 언약’을 맺어서 로드와 찰스 1세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의 오류에 대해서 철저히 논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WCF의 장들 가운데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WCF 3장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조건적으로 보고, 하나님의 선택을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WCF 7장 2절에서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라는 명제를 거부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서술이다. WCF 9장의 자유의지에서는 회개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배격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WCF 10장 2절에서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와 그것의 불가항력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논박하는 것이다. WCF 11장 2절에서 믿는 행위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라고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하나님은 믿음자체나 믿는 행위나 그 외의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여기지 않으시고’라는 말로 배격하고 있다. WCF 17장의 성도의 견인교리는 알미니안주의를 직접적으로 논박하는 것이며, 18장 1, 2절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설명에서 사용된 거짓된 스스로의 소망 (false hopes, fallible hope)이란 용어들은 유효한 역사를 반대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는 강력한 말들이다.

3) 도덕률폐기론주의

1630년대에 영국 교회에서 일어난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이 형태를 갖춘 교회를 조직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존 이튼 (John Eaton)이 도덕률폐기론주의자로서 1630년대 초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서, 토비아스 크리스프 (Tobias Crisp), 존 심슨 (John Simpson), 존 살트마쉬 (John Saltmarsh)가 이튼을 이어서 도덕률폐기론주의를 가르쳤다. 이튼은 1642년 Honeycomb of Free Justification by Christ Alone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이로써 도덕률폐기론주의는 영국 교회에서 확대 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영국교회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도덕률폐기론주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논의에서 탁월한 역할을 하였던 이는 가타커 (Gataker)이었다. 물론 총회원이었던 안토니 버게스 (Anthony Burgess)는 총회기간 가운데 Vindiciae Legis: or A Vindication of the Morall Law and The Covenants, From the Errours of Papists, Arminians, Socinians, and more especially, Antinomians (1646)와 The Tru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serted and Vindicated from Errours of Papist, Arminians, Socinians, and more especially Antinominas (1648)를 출판하여 도덕률폐기론주의가 오류인 것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WCF는 도덕률폐기론주의를 더욱 주의 깊게 다루었다. WCF 7장 5절에서는 율법을 은혜언약으로 설명하면서 도덕률폐기론주의를 논박하였다. WCF 11장은 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믿음과 믿음의 확신에 대한 주의 깊은 서술이라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은 총회에서 도덕률폐기론 논쟁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WCF 13장은 성화를 선택 사양으로 보는 도덕률폐기론주의가 오류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WCF 19장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19장 5절에서 ‘도덕법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한다’는 서술은 직접적으로 도덕률폐기론주의를 논박하는 것이다.

4) 소시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는 청교도들을 위협하였던 오류이다. 1614년에 소시니안 교리책인 Racovian Catechism이 영국에서 불태워졌다. 그러나 소시니안주의는 계속해서 유행하였다. 그래서 1640년대와 1650년대에도 소시니안 교리서를 화형식으로 태우는 일이 있었다. 소시니안주의에 대한 경계는 1642년에 조오지 워커 (George Walker)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부정하는 존 구드윈에 대한 고발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1643년에 프란시스 체이넬 (Francis Cheynell), 토마스 에드워즈 (Thomas Edwards)가 그 오류를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였던 존 비들 (John Biddle)의 가르침은 유행하였다. 그는 결국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1647년에 소시니안주의의 책자를 발행하였다.

따라서 의회는 그의 책을 불사를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소시니안주의는 총회기간 가운데에 강력한 오류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총회원이었던 버게스는 소시니안주의가 오류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WCF는 이러한 소시니안주의를 논박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우선 WCF 2장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시니안주의에 대해서 논박한 것이다. 그리고 WCF 3장 2절은 하나님의 작정이 일시적이라고 주장하는 소시니안주의에 대한 논박이다. WCF 6장 6절은 죽음이 죄의 형벌이 아니라고 하는 소시니안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WCF 11장 1절과 2절에서는 칭의를 죄 사함의 의미로 국한시키고 있는 소시니안주의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WCF 11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그리고 충분하게 만족시켰다는 것을 부인하는 소시니안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5. 나가는 말

1970년대 이후에 WCF에 대한 논의는 스콜라신학과 관련한 것이었다. WCF가 스콜라신학의 영향으로 비춰진 것은 교리를 서술하는 것에 있어서 논리의 사용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WCF의 스콜라신학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WCF 작성에 있어서 정치,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 배경으로 된 것을 간과하게 만든다. WCF의 현대적 적용을 위해서는 그 역사적인 배경과 신학적 배경을 더욱 살펴야 한다.

그것은 영국 국교회에 대한 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영국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개혁 신앙의 고백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서는 외국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도 일치되는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WCF는 개혁신학 내에서 절충된 고백서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개혁신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혹은 오류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성된 WCF는 개혁신학의 공통적인 주제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성경,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언약, 구원의 서정,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와 같은 특정 주제들을 다루었으며, 동시에 로마가톨릭주의, 알미니안주의, 도덕률폐기론주의, 소시니안주의와 같은 오류들을 논박하였다. 이러한 WCF의 특징은 영적으로 무지한 자를 깨우치기 위한 용도로 충분하다.

그리고 WCF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오류들에 대한 논박으로 인하여 중요한 교리들의 정확성과 분명한 내용을 얻기에 유용하다. 물론 WCF가 논박하였던 오류들은 이 시대의 교회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WCF는 단지 17세기의 역사적 문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교리적 분별을 위해 여전히 유용하다. 이러한 WCF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계속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200주년 기념대회 (1843)에서 레이스 하퍼 (Leith Harper) 교수는 WCF의 유용성을 말하였다.

 

 

그는 WCF는 포괄적이면서 간결하고, 정확하다고 하였으며, 또한 필수적인 진리와 신학체계의 분명한 원리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표준문서 250주년 (1897) 대회에서도 로버트 댑니 (Robert Dabney)는 WCF가 개신교 역사 속에서 가장 완전하며, 자세한 신앙고백서로써 오늘날 여전히 그 가치가 높다고 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총회 350주년 대회에서도 (1993) 사무엘 로간 (Samuel Logan)은 WCF가 최고점에 도달한 개혁신학 신앙고백서라고 하였으며, 웨인 스피어 (Wayne Spear)도 WCF는 작성 된지 350년이 지났지만 최고의 신앙고백서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WCF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유용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선 한국교회에 개혁신학을 강조하고 있는 교단들이 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교단들 가운데 일부분은 보편주의의 영향을 받아 1903년 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쓰고 있다. 즉, 개혁신학의 분명한 범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알미니안주의, 도덕률폐기론주의가 유행하고 있지만, 이것을 오류라고 말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다.

이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경건을 무너트리는 효과에 대해서 신학적 인식이 없다. 물론 미국의 경우에는 마이클 홀톤이나 데이비드 웰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알미니안주의와 도덕률폐기론이 오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국의 이러한 상황은 교회로 교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교인들도 교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교인들이 많다. 토마스 맨톤 (Thomas Manton)이 지적하였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 당시의 영국 국교회와 같은 상황이다. 이러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고, 잘못된 신학 혹은 오류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하는 WCF는 한국교회에 진정으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 기사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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