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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누구인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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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녹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 김중락 교수(경북대)

 

2014년 9월 1일 기사

 

“녹스는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순종했고, 말씀에 항상 열정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유럽에서 가장 뒤늦게 시작됐지만 스코틀랜드가 사상적으로 후진적인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사상을 따라는 자들은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험난한 길을 거쳐야만 했다.
 


당시 세인트 앤드류의 주교직을 차지하고 있던 제임스 비턴(James Beaton)과 훗날 그의 뒤를 잇게 될 추기경 데이비드(David Beaton)는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종교개혁사상을 억누르고자 했다.
 
1528년 유럽 여행 중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전파하던 패트릭 해밀턴(Patick Hamilton)이 이단으로 몰려 화영을 당한 것은 이러한 박해의 대표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순교는 오히려 선교의 확대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1540년대 초까지 종교개혁사상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특히 1530년대 중반 이웃국가인 잉글랜드에서 이미 종교개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상당한 자극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에스파냐 출신의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일어나게 됐으며, 완전하지 못한 개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스코틀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 조지 위사트와 존 녹스의 개종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종교개혁가 존 녹스(John Knox)가 신교로 개종한 것은 바로 이 시기 즈음일 것이다. 녹스의 어린 시절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1505년에서 1510년 사이 스코틀랜드 동남쪽에 위치한 해딩턴 근교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루터가 9개조를 발표했을 때, 녹스는 7살에서 12살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녹스는 고향에서 문법학교를 다닌 후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글래스고 대학에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학자 존 메이저(John Major)가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메이저는 1533년 세인트 앤드류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 때 녹스도 스승을 따라 대학을 옮긴 듯하다.
 
1540년 공문서에는 녹스는 ‘사제’와 ‘교회 공증인’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이는 그가 1530년대 말 대학에서 학업을 끝내고 가톨릭 사제자격을 취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540년 녹스는 교구 사제보다는 귀족 자제들의 가정교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녹스의 개종은 당시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종교개혁가 조지 위사트(George Wishart)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인다. 위사트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로 1536년에는 스위스 신앙고백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잉글랜드와 대륙을 전전하던 위사트는 154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전국을 돌며 종교개혁사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녹스는 이 무렵 개종을 했고, 이후 위사트를 스승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하지만 당시 정국은 비턴 추기경이 어린 여왕 메리를 대신해 권력을 잡고 있었고, 선교도에 대한 박해의 끈을 더욱 조이고 있었다. 결국 위사트는 1546년 1월 비턴 추기경의 명령으로 체포돼 그해 3월 세인트 앤드류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 비턴 추기경의 암살과 녹스의 고난
 
위사트의 순교는 수많은 신교도들을 격분시켰고, 일부 과격한 이들은 비턴 추기경의 암살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같은 계획은 단순히 신교를 박해하는 추기경에 대한 암살을 넘어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의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1546년 3월 29일 18명의 신교도들은 추기경 관저인 세인트 앤드류 성을 장악한 후 비턴 추기경을 살해했다. 하지만 성은 곧 포위됐고, 그들은 성에 갇히게 됐다. 바닷가에 위치한 성의 견고함 때문에 신교도들은 장기간 버틸 수 있었고, 때때로 포위가 느슨해지는 경우에 성 외부와의 출입도 가능했다. 1547년 4월 녹스가 성으로 들어가 합류한 것도 이러한 상황적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머지않아 잉글랜드의 함대가 당도해 자신들을 구출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 함대가 당도해 성을 장악하고, 신교도들을 체포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녹스는 성의 설교자로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성에서 설교자로 활약한 것은 3개월에 불과했다. 프랑스 함대가 세인트 앤드류에 도착하면서 성은 함락됐고, 녹스와 그의 일행은 1년 7개월 간 포로생활을 했다.
 
1549년 2월 녹스는 풀려나자마자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하는 잉글랜드로 갔다. 당시 잉글랜드는 종교개혁가들이 헨리 8세의 개혁을 더 진척시키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놋스는 버윅과 뉴캐슬 등에서 설교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녹스의 체류는 길지 않았다. 1553년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장녀이며, 에드워드 6세의 누나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면서 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은 철저한 가톨릭교도로 성장했고,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고자 했다. 당시 그녀는 수많은 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했기 때문에 ‘피의 메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1554년 3월 녹스는 대륙으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녹스는 프랑스 북부 디에쁘(Dieppe)에서 일정 기간 동안 잉글랜드 망명가들의 설교자로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과 불화가 생기자 곧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또 다른 잉글랜드 망명가들이 있는 교회의 목회를 맡았다. 녹스는 제네바 체류 기간 칼뱅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스승 위사트의 가르침을 보완하고, 장로교 제도를 확실히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일 녹스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든 ‘제 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잘 나타나 있다.
 
# 내전과 귀국, 그리고 종교개혁
 
녹스가 제네바에서 체류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 가운데 신교로 개종한 이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정치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신교도 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1558년 말 잉글랜드에서 메리 여왕이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와 동시에 신교정책으로 되돌아가면서였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정치, 종교적 대립은 신교세력을 지원하는 잉글랜드와 구교세력을 지원하는 프랑스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이 녹스의 정신적 지지를 크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신교도들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귀국한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신교운동의 중심이며 상징이 됐다. 그는 퍼스(Perth)를 중심으로 신교를 설파했고, 신교도 귀족들은 무력으로 녹스를 보호하고자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정국은 메리 여왕의 모후인 프랑스 기즈 가의 메리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교도 세력을 억누르고 녹스를 처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녹스는 신교도들에게 적극적은 저항을 독려했다. 당시 칼뱅파 종교개혁은 모든 국가에서 무력저항을 수반했는데, 스코틀랜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560년 6월 구교 정권의 핵심이었던 섭정 메리가 갑자가 사망하면서 내전은 끝이 났다. 프랑스 역시 자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더 이상 깊이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신교도는 승리했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있어 결정적인 장애물은 사라졌다.
 
그해 7월 19일 에든버러의 중심교회인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는 국가의 공적 감사예배가 행해졌고, 설교자는 당연히 존 녹스였다. 1560년 8월 1일에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는 녹스와 개혁가들이 마련한 새로온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법으로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주교들의 권한을 폐지했으며, 가톨릭적인 의식과 교리를 폐지하고, 미사를 금지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공식적인 신교국가가 됐다.
 
# 제 1치리서의 존 녹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의 입법으로 공식적인 신교국가가 됐지만 새로운 개혁교회의 조직을 완성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존 녹스는 의회의 힘을 빌어 장로교회를 법적으로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치리서였다.
 
결국 의회는 녹스를 비롯한 5명의 목사를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를 초안하도록 위임했다.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제 1치리서’다. 제 1치리서는 대부분 교회의 정치를 다루고 있으며, 교리와 성사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당시 대립하던 가톨릭교회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성사는 세례와 성찬식으로 한정하고, 성찬식은 성경의 예처럼 단순하게 하되 테이블에 앉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가톨릭의 화체설 의식을 염두에 둔 규저응로 보인다.
 
또한 ‘제 1치리서’는 목회자에 대해 매우 정교하게 규정하고 있다. 목회자는 선정(Election), 심사(Examination), 위임(Admission)의 3단계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 팽배해 있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제 1치리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주된 이유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에 대한 처리 문제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차지한 가톨릭교회 재산을 개혁교회에 내어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1560년 12월 20일에 열린 에든버러 총회(종교개혁 이후 첫 총회)는 이를 수정 후 승인했고, 1561년 1월 추밀원(공식적인 의회는 아니었음)도 이를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기존의 모든 교회제도를 일소하고 개혁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주교들에 대한 치리는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당시 주교들 중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한 이들도 있었고, 종교개혁에 중요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귀족 집안의 인물들도 있었다. 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일은 자칫 종교개혁 지지층 내에서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추밀원이 ‘제 1치리서’를 받아들이면서도 현재의 주교와 수도원장, 부수도원장 등 성직록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생애 동안 사역과 설교와 성사를 계속하며, 수입을 소유한다는 조건을 단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 종교개혁의 새로운 방해들: 여왕
 
신생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가장 큰 위협은 메리 여왕의 태도였다. 메리 여왕은 1558년 프랑스 왕세자 프랑소와와 결혼했고, 이듬해 여름 프랑소와 2세가 즉위함에 따라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1560년 12월 프랑소와 2세가 사망하게 되면서 자신의 왕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을 완성한 스코틀랜드는 1561년 8월 여왕의 귀국을 크게 환영했지만 여왕은 귀국한지 5일 만에 홀리루드 왕궁에서 미사를 열고 참석했다.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법적으로 장로교가 됐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신교를 신봉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여왕이라는 지위는 잔존하고 있던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에 대한 비난은 언제나 녹스의 몫이었다. 그는 왕궁으로부터 1km 남짓 떨어진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설교를 통해 여왕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고, 이에 여왕은 녹스를 왕궁으로 소환해 신하로서 여왕에게 도전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했다. 녹스의 비난 설교와 여왕의 소환은 이후 3년 동안 수 차례 이어졌다.

 

 

결국 녹스에 대한 여왕의 첫 보복은 1565년 그녀의 결혼 무렵에 있었다. 여왕은 단리(Darnley) 경과 결혼했는데, 일부 신교도 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존 녹스 역시 이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설교를 통해 넌지시 이를 비추기도 했다. 이에 여왕은 자신이 에든버러에 있는 동안 녹스에게 설교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녹스가 이 명령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상황은 녹스의 마지막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566년 3월 여왕의 남편 단리 경이 여왕의 비서인 데이비드 리지오에게 질투를 느끼고 그를 살해했다. 결국 여왕과 단리 경의 결혼은 아들 1명을 남긴 채, 파탄에 이르렀고, 다음 해 단리 경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자마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결혼했는데, 그는 단리의 살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 귀족들은 여왕과 보스웰의 범죄라고 판단해 반란을 일으켰고, 여왕은 폐위돼 레반 호수 가운데 있는 성에 감금됐다.
 
1567년 7월 24일 겨울, 갓 돌을 넘긴 여왕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왕으로 선포됐고, 즉위식의 설교는 녹스가 맡았다. 그러나 1568년 5월 여왕이 성을 탈출했고, 녹스와 소중한 친분을 나누던 일부 귀족들도 정치적 이유로 여왕의 편에 가담하게 되면서 스코틀랜드는 내전에 휘말리게 됐다.
 
1571년 봄 에든버런 성이 일시적으로 여왕 군에 들어가면서 녹스는 세인트 앤드류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녹스는 그 곳에서도 설교했다. 녹스가 에든버러로 되돌아온 것은 내전이 여왕파의 패배로 끝난 1572년 여름이었다. 메리 여왕의 몰락은 그녀 자신의 비도덕적 행동에서 야기된 것이었지만 여왕과의 대립 가운데 그녀의 문제점을 밝히고 폐위를 주장한 데 있어써는 녹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 녹스의 마지막 날들 그리고 유산
 
환갑을 넘긴 녹스는 더 이상 설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1572년 11월 9일 녹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 목사직을 사임하고, 인근 자신의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당월 24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녹스는 사역자로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순종했고, 말씀에 항상 열정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임스 6세의 섭정 모턴(Morton) 백작은 녹스의 무덤에서 “여기 어떤 육체도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잠들다”라는 말을 남겼다. 녹스는 자신의 유언에서 “타락한 적도 없었고, 속인 일도 없었으며, 이익을 취한 적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라고 물은 사무엘의 모습임과 동시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한 바울의 모습이다. 전 세계 개혁교회는,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는 많은 것을 존 녹스에 빚지고 있다.

 

* 위의 내용은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서창원 목사)이 지난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장로교회의 창시자 존 녹스와 청교도 목회’를 주제로 개최한 설립 22주년 기념세미나에서 김중락 교수(경북대, 역사교육과)가 발표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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