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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앤드류 멜빌, 장로교회 정치의 근간을 마련하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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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멜빌 / 김중락 교수(경북대, 역사교육과)

 

2014년 9월 1일 기사

 

“멜빌은 ‘황금법’ 제정을 통해 교회의 자유와 특권에 대한 세속정부의 불간섭을 확정지었으며, 주교들의 사법권을 제거했고, ‘제 2치리서’에 규정된 교회정부를 승인했다. 이러한 황금법의 제정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제 1세대 개혁가들이 이루어내지 못한 독자적인 교회정부의 치리제도를 법적으로 승인받게 됐고, 교회정부는 세속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간섭에서 벗어나게 됐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단추를 꿰고, 장로교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 존 녹스였다면 이를 완벽하게 보완하고 완성시킨 인물은 그의 제자 엔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었다. 오늘날 장로교회 정치의 근간이 된 ‘제 2치리서’(1578)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멜빌이라고 할 수 있다.
 
엔드류 멜빌은 1545년 스코틀랜드 앵그스 지방의 몬트로스 시 부근 발도비 마을에서 태어났다. 평생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그의 삶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1547년 부친 리차드가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어머니도 그 뒤를 따르자 멜빌은 형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형의 지원으로 멜빌은 몬트로스로 가서 프랑스인 학자인 피에르 드 마실리어스의 지도 하에 2년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으며, 그 후에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지속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정착된 직후인 1564년 멜빌은 19세의 나이로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566년에는 쁘와디에 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고, 그 이듬해에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의 지위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멜빌은 1569년 프랑스의 신교도 박해정책으로 인해 제네바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네바는 칼뱅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가 종교개혁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멜빌의 학문적 우수성을 인정한 베자는 그를 제네바 대학의 인문학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칼뱅과 존 녹스가 신앙적 동지로서 1세대 종교 개혁가들이었다면 그들의 제자인 베지와 멜빌은 2세대 개혁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멜빌은 제네바에 치류하는 동안 베자뿐 아니라 다양한 곳으로부터 망명해 온 신교학자들과 교류할수 있었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정치와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사상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74년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프랑스와 제네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언어, 과학, 철학, 신학 등의 교육과정을 정립한 후, 1580년에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으로 옮겨와 교수 겸 목사직을 감당했다.
 
# 멜빌과 ‘제 2치리서’
 

1572년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 큰 시련이 찾아온 해다. 섭정 마르(Mar) 백장은 종교개혁 이전의 주교구에 새로운 주교를 세우고자 했다. 마르의 속셈은 주교들의 성직록이 개혁교회로 이관되는 것을 막고, 허수아비 주교들을 임명해 자신의 배를 불리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24일 존 녹스가 사망했고, 그동안 장로교에 비우호적이었던 모튼 백작이 마르의 뒤를 이어 섭정직을 승계하게 됐다. 모튼은 허수아비 주교들을 세워나가기 시작했으며, 그를 비롯한 일부 귀족들과 함께 허수아비 주교들을 이용해 자신의 야욕을 채워갔다.
 
당시 개혁교회는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튼의 정책에 대항할만한 지도자가 없는 시기에 1574년 멜빌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스코틀랜드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가 됐다. 제네바에서의 그의 활약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학식과 당시 교회의 상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귀국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1575년 총회는 주교의 성경적 정당성에 대해 논쟁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주교제의 폐지에 대해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앤드류 멜빌이 총회장으로 있던 1578년 총회는 장로교 헌법의 핵심을 담은 ‘제 2치리서’를 통과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제 2치리서’의 핵심사상은 세속권과 교회권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두 왕국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두 왕국이란 국가와 교회를 의미한다. 이 두 왕국은 엄격히 분리되며,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다. 세속군주는 국가의 통치를 담당하지만 교회는 그의 통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또 다른 왕국이므로 세속권력이 결코 간섭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임명한 교회 직분자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 2치리서’ 제1장 12조는 누구든지 “스스로 교회의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적그리스도이며, 이는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주어지지 아니한 권한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규정한 가톨릭과 군주를 수장으로 규정한 잉글랜드 교회를 염두에 둔 언급으로 보인다.
 
‘제 2치리서’는 이외에도 장로교회의 주요 특징은 ‘회의체에 의한 교회조직’과 ‘사역자 간의 평등’을 잘 규정하고 있다. 7장 2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장로교 회의체는 4종류로 구성된다. 회의체는 각각 개별교회의 회의체인 당회, 특정 지역의 회의체인 지역회, 전국적 회의체인 총회, 그리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국가의 회의체인 국제총회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회에서 ‘지역’은 종교개혁 이전 한 명의 주교가 관리하던 광의의 지역, 즉 주교구를 의미하며, 오늘날의 ‘노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제 2치리서’는 국제총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장로교회의 국제적 연대 또는 가톨릭의 교황에 상응하는 회의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제 2치리서’의 도입이 스코틀랜드 정부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로교회의 가장 분명한 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로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기라 할 수 있다.

 

 

# 멜빌과 제임스 6세의 대결
 
1578년 14세가 된 제임스 6세가 직접통치를 시작하면서 모튼 백작은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주교제도를 유지시키려는 제임스 6세의 열망은 모튼 백작보다 더욱 강했다. 따라서 1580년대와 90년대는 주교제를 완전히 부활시키려는 제임스 6세와 이를 막으려는 멜빌과의 대결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스벤 습격’이라 불리는 일부 장로교 귀족들의 정치적 실수가 발생했다. 이는 교회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반면, 제임스 6세에게는 유리한 상황으로 작용했다. 루스벤 습격이란 1582년 8월 22일 제 1대 가우리(Gowrie) 백작인 윌리엄 루스벤을 위시한 장로교 귀족들이 퍼스시(Perth) 근교에서 사냥 중인 국왕을 10개월가량 납치해 더 철저한 장로교 개혁과 친 프랑스 정책포기 등을 강요한 사건인데, 총회 역시 이 사건에 지지를 보내는 실수를 했다. 이 사건으로 어린 시절부터 장로교도들에게 반감을 가져온 제임스 6세는 더욱 강한 반 장로교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1584년 암흑법(Black Acts)의 도입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암흑법은 스코틀랜드에 주교제를 재확립하고, 국왕이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는 내용의 법이다. 암흑법은 왕의 권력, 즉 세속정부는 영적인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을 모두 통제할 수 있으며, 총회의 소집권은 국왕이 독점할 뿐만 아니라 모든 목사는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장로교의 두 왕국 이론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오염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임스 6세의 반 장로교회 정책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인물은 바로 앤드류 멜빌이었다. 멜빌은 대학과 교회의 강단에서 제임스 6세의 교회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584년 초 멜빌이 국왕의 법정에 소환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법정에서 멜빌은 자신이 말한 것은 교회의 교리이며 이를 심판하려는 국왕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답변에서 그는 교회와 정치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제시했지만 처벌이 확정됐고, 잉글랜드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망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1585년 국왕의 처벌의지가 사라지자 멜빌은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제임스 6세는 아직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다 장로교 총회의 소집과 의제에 대한 통제도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장로교회 지도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멜빌은 다시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총장으로 돌아오게 됐다.
 
온전한 장로교회의 회복을 위한 멜빌의 열정은 한층 더 강화됐다. 멜빌은 이미 임명된 주교나 대주교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노회를 통해 그들을 파문하기도 했다. 1592년 제정된 황금법(Golden act)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법은 암흑법의 내용들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법을 통해 멜빌은 교회의 자유와 특권에 대한 세속정부의 불간섭을 확정지었으며, 주교들의 사법권을 제거했고, ‘제 2치리서’에 규정된 교회정부를 승인했다. 이러한 황금법의 제정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제 1세대 개혁가들이 이루어내지 못한 독자적인 교회정부의 치리제도를 법적으로 승인받게 됐고, 교회정부는 세속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간섭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형식적이긴 했지만 주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총회의 개최장소와 시일을 결정하는 권한 또한 국왕의 손에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내 장로회와 주교, 그리고 국왕의 매우 어색한 동거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점차 왕권을 확립해가고 있던 국왕 제임스 6세는 주교제를 강화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1596년은 이러한 점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사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제임스 6세는 8인의 대표를 선출해 국가의 재정을 주관케 했는데, 그 중에는 가톨릭 신자였던 알렉산더 세톤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대해 총회는 앤드류 멜빌과 그의 조카 제임스 멜빌이 포함된 특사단을 제임스가 머물고 있던 포클랜드 궁에 보내 항의하도록 했다.
 
앤드류 멜빌은 제임스 6세가 총회 운영에 대해 간섭을 뜻을 굽히지 않자 “하나님의 어리석은 종이여”라고 부르며 “국왕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 심지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조차 줄 수 없으며, 그것을 빼앗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모이고, 교회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국왕에게 이런 무례한 언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메리 여왕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녹스처럼 멜빌도 동일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제임스 6세는 그를 즉각 처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회에 대한 제임스 6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제임스 6세는 앤드류 멜빌을 총회에서 제거하려고 했다. 1598년 3월 던디에서 소집된 총회에서 제임스 6세는 앤드류 멜빌의 총대로서의 자격을 부정했고, 결국 앤드류 멜빌은 간접적인 영향력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제임스 6세는 그를 총장의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해 1599년 앤드류스 대학을 방문한 다음 다른 교수들을 사주해 총장을 고발하도록 했다. 하지만 앤드류 멜빌의 해명이 너무나 완벽해 제임스 6세는 그를 처벌할 어떤 근거도 갖지 못했다.

 

 

결국 제임스 6세는 신학교수가 총장직을 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그를 총장직에서 직위해제했다. 멜빌은 여전히 신학교수직을 지키고 있었지만 정치적 상황은 그에게 한층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돌아갔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로서 ‘제임스 6세 겸 1세’로 불리게 됐다. 잉글랜드 국왕이 된 제임스는 잉글랜드 교회제도에 대해 극도의 만족감을 느꼈다. 국왕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었고, 그는 대주교와 주교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는 주교제도야말로 군주정과 가장 잘 어울리는 교회제도라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북쪽 왕국 스코틀랜드는 상황이 달랐다. 여전히 앤드류 멜빌을 위시한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에 대한 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강력한 잉글랜드의 왕권을 소유한 제임스 6세 겸 1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를 잉글랜드 교회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여전히 앤드류 멜빌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제임스는 총회 소집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1604년 아버딘에서 모이기로 돼 있던 총회를 이유없이 1년 연기한다고 선포했고, 그 날짜가 도래하자 이를 또 다시 연기했다. 국왕 자신이 장로교회의 수장임을 보여주려는 명백한 의도적 행위였다. 이에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 모임을 갖고 이를 총회라 했다. 그 배후에는 물론 멜빌이 있었다. 멜빌이 1606년 퍼스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 소환된 것은 이렇나 배경에서였으며, 이것은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보인 마지막 공식적 모습이 됐다.
 
1606년 제임스 6세 겸 1세는 앤드류 멜빌과 제임스 멜빌을 비롯해 8명의 스코틀랜드 목사들을 런던으로 소환했다. 왕은 스코틀랜드 교회문제를 다루자는 구실을 제안했지만 실상 앤드류 멜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앤드류 멜빌은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런던탑에 투옥됐고, 다른 동료들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주거는 제한됐다. 조카 제임스 맬빌은 잉글랜드 북부지역의 도시인 뉴캐슬을 떠나지 못하게 됐다. 제임스 6세 겸 1세는 이를 통해 앤드류 멜빌에게 복수를 하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무력화시키는데 최대 방해물을 제거한 것이다.

 

 

# 멜빌의 죽음과 유산
 
멜빌이 런던탑에서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611년이었다. 그의 나이 이미 66세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석방에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프랑스 세당 대학으로 간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세당에서의 그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조카 제임스 멜빌과의 서신교류도 1614년 제임스가 사망하면서 끝이 났다.
 
멜빌은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죽기를 바랐지만 그의 신념과 교회에 대한 봉사가 이를 막았다. 장로교회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은 그를 외로운 타국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했다. 1622년 그는 77세의 나이로 프랑스 세당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앤드류 멜빌이 남긴 유산은 많은 영역에 남겨져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와 관련된 그의 유산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주교제도에 대한 장로교회의 분명한 입장정리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종교개혁 직후부터 주교제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완전한 폐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멜빌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장로교회 제도는 단지 유익한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제 2치리서’와 그 이후의 투쟁에서 장로교회의 흔들림 없는 원리로 정착됐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장로회 신수설’이 확정된 것도 이러한 멜빌의 유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교회와 세속정권과의 관계 정립이다. 앤드류 멜빌이 신봉한 원리는 두 왕국 이론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임명한 교회관리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멜빌은 지속적으로 교회에 간섭하려는 국왕과의 싸움에서 그의 의견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멜빌이 주도한 ‘제 2치리서’는 최초의 장로교회 헌정문서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회 정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만들어진 ‘장로교회 정치’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 정치’ 역시 ‘제 2치리서’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멜빌은 장로교회의 진정한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내용은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서창원 목사)이 지난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장로교회의 창시자 존 녹스와 청교도 목회’를 주제로 개최한 설립 22주년 기념세미나에서 김중락 교수(경북대, 역사교육과)가 발표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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