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신원하 교수(고려신대원, 기독교윤리)
“자살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큰 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자살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된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없다. 자살자는 자살하는 순간 죄를 회개하지도 못하고 죽지만 하나님은 그 특정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통설이 과연 어디에부터 기원했고,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 신원하 교수는 “한국 교회 중에서 이러한 교리를 만들거나 이와 관련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거나 지침서도 만든 교단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통설은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왔다”고 주장했다.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통설이 과연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 검토한 신 교수는 “성경에 자살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어떤 본문도 이들의 자살을 구원과 관련시켜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살이 구원받지 못하는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 기원하고 있다”며 “종교 개혁 이후에 개신교는 교회법이나 교리 문답을 통해 자살에 대한 공적 입장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루터의 경우에는 자살자들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살이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칼빈과 웨슬리 또한 비록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자살을 구원과 연결시켜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살인’이라고 불리는 자살이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살은 다른 행위와는 달리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회개하지 못한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그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며 “자살자라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 가운데 택한 자라고 하면 설령 중대한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택함 받은 바가 취소되거나 변경된다고 할 수 없다”고 피력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유일하게 사함 받지 못할 죄인 ‘성령훼방죄’와 관련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성령을 훼방한 죄로 간주할만한 충분한 신학적 근거가 없다”며 “성령훼방죄의 성격은 성령의 내적 조망을 받아 알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으로서 자살과 성령훼방죄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목회자들은 자살이 구원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공공연하게 설교하는 것은 조심하고, 오히려 삼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자칫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사려 깊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이밖에 신 교수는 돌봄의 극대화를 통한 자살예방 사역의 중요성과 유가족에 대한 목회적 돌봄, 자살한 이들의 장례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 교수는 “유가족들에게 어떤 교리적 가르침이나 권면을 하려 하기보다는 우선 마음을 함께하고 물리적으로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 또한 자살한 자들의 장례도 유가족을 돌보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신원하 교수의 주요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살은 기독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혐오스러운 죄로 취급됐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피조물이 자기 뜻에 따라 끊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 한국사회는 현재 자살자 수와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겪고 있다.
2. 성도들의 자살도 늘어나면서 목회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당황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때론 중직자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본인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들과 교회에도 큰 고통을 안겨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가족들은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자살한 자는 지옥간다’는 통설로 말미암아 더욱 고통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는 일도 발생한다.
3. 그렇다면 소위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통설은 과연 어디서 기원했으며,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 중에서 이런 교리를 만들거나 이와 관련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거나 지침서를 만든 교단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통설은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왔다.
4. (성경에 나타난 자살 분석)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한 사람은 구약의 아베멜렉(삿 9:52~54), 삼손(삿 16:23~28), 사울(삼상 31:1~6, 대상 10:13~14), 아히도벨(삼하 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마 27:3~10, 행 1:16~18)다.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살한 경우이고, 다른 경우는 직접 자살한 경우다.
5. 삼손의 경우는 하나님이 위임한 것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살자가 아니다”라고 칼 바르트는 해석하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삼손은 성령이 은밀하게 명령한 대로 행동한 것으로 보면서 자살과 구별하기도 했다.
6. 성경은 사울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를 치신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죽음 방식 자체나 그에 관련한 것에 대해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고 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의 모략을 받지 않고, 오히려 후새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고향 집으로 돌아가 신변을 정리한 뒤에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생을 마감한 방식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단지 그가 아버지의 묘에 묻혔다고 기록한다.
7. 시므리는 왕궁의 경비초소로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죽은 방식 자체에 대해서나 그런 죽음과 그의 죄와의 인과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아비멜렉은 여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기 싫어 병사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병사의 칼에 죽었다. 그런데 성경은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들을 죽여 그의 아버지에게 악을 범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죽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8.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으로 “제 곳으로 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9.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 사건들을 분석해 본 결과 첫째, 성경에 언급된 자살은 어떤 것도 우호적으로 표현되지 않았고, 특히 어려운 시기에 탈출구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방편으로도 그려지지 않았다. 삼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다룬 본문은 자살 행위 자체, 즉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흥미롭게 침묵하고 있으며, 어떤 명시적 가치판단을 내려놓고 있지 않다. 물론 사울의 경우, 그의 죽음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신 결과라고 성경은 주석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와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10. 셋째, 모든 자살이 위기에 봉착하게 됐을 때 나온 반응이었다. 넷째, 어떤 본문도 이들의 자살을 구원과 관련시켜 취급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가룟 유다와 관련된 본문에서조차 그가 “제 곳으로 갔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의 자살 행위와 인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11. (자살과 교회사적 흐름) 예수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 고대 헬라와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스토아 사상은 자살에 유연하고 관용적인 입장이었다. 스토아 사상은 우주는 소멸하면서 다시 생성하고 그 이전 존재로 반복된다는 순환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불멸과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생명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았다.
12. 이런 시대의 사상의 영향 아래서 태동한 초대 교회는 유대교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도리어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고, 자살에 관용적인 로마 스토아 사상을 비판하면서 자살에 대한 엄격한 신학을 세워나갔다. 4세기의 어거스틴은 자살을 신학적 주제로 삼아 다룬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살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하고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다.
13. 중세 교회는 자살에 대한 주요한 결정을 세 차례 내렸다. 첫째, 533년 오르레랑에서 열린 2차 공의회에서는 사제는 사형 당해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미사를 드려도 되지만 자살한 이들을 위해서는 진혼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리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자살을 사형죄보다 더 악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14. 둘째, 약 30년이 지난 561년, 1차 브라가 공의회는 교회가 미사를 할 때, 자살한 자들을 위해 추념과 같은 어떤 의식도 하는 것을 금지했고, 또 성시교독과 성가를 부르는 장례식은 허락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15. 셋째, 693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자살 미수자들이라도 그 죄책을 물어 2개월 동안 성도의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성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교회가 교회법으로 이것을 명시한 것은 하나의 흐름이 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 866년에 니콜라스 1세는 불가리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서신을 통해 자살자들에게 결코 교회가 장례의식을 허용하거나 그 시신을 경내 묘지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이런 결정에 따라 자살자에 대해 교회장을 허락하지 않는 관습이 교회 전통으로 자리 잡게되었고, 그 흐름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17. (교회 역사와 신학자들) 어거스틴은 어떤 동기로 행하든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고, 살인과 다르지 않다고 봤다. 그는 강간을 당한 뒤 자신의 순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목숨을 끊은 한 로마 여인의 예를 들면서 비록 그 여인이 그것을 통해 자신이 간음녀가 아니라 피해자였음을 인정받게 됐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이라고 주장했다.
18. 어거스틴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악과 고통을 피하기 위한 자살을 허용하는 메시지를 주는 곳은 없다고 말하면서 그 행위는 명백히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6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봤다.
19.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살에 대한 견해는 교회 공의회의 결정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랐다. 아퀴나스는 자살은 ‘자연법과 사랑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대죄’일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해를 가하는 잘못으로 봤다. 또한 자살은 하나님께 속한 권리를 자신이 행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 마틴 루터는 자살을 다분히 개인의 죄악이라는 시각보다는 사탄의 힘에 장악돼 저지르는 역부족 상태에서 발생하는 성격의 죄로 간주했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보다는 외부의 힘, 즉 사탄에 사로잡혀 자살을 행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루터는 자살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로 단정하기를 거부했다.
21. 요한 칼빈은 많은 그의 저작과 문서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자살을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성경을 강해하는 가운데 사울의 죽음과 아히도벨의 자살에 관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자살을 취급했을 뿐이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자살에 대한 견해를 수용하면서 인간이 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날 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22. 그래서 스스로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를 이탈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죄악이라고 보는 등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칼빈은 고난의 순간에 있어서도 신자는 끝까지 하나님이 지키시고 결국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살은 이러한 믿음에 역행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봤다.
23. 요한 웨슬리는 자살에ㅔ 대해 신학적으로 깊이 사유하기보다는 사회 기강과 관련해 격하게 비판했다. 자살을 자기를 살해하는 죄로 정죄하면서 교회는 이 사실을 성도에게 엄히 가르치고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18세기 말) 영국에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자살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24. (자살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인식의 흐름) 자살이 구원받지 못할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서 기원한다. 특히 12세기 교회의 대 신학자인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가르쳤던 것은 자살하면 지옥가게 된다는 인식을 굳게 하는데 기여했다.
25.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이와는 달리 교회법이나 교리 문답을 통해 자살에 대한 공적 입장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편지에서 자살자들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살이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26. 칼빈은 어거스틴의 생각을 계승했기 때문에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그것을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정죄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자살한 자들이 더 큰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경종을 가해야 한다고 했지만 영원한 저주와 연결시켜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 교회 안에서도 중세 교회로부터 내려오던 ‘자살하면 지옥간다’, ‘자살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통설은 여전히 자리를 잡고 영향을 미쳐왔다.
27. (왜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할까) 구약성경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살인을 하는 것은 사형에 처하도록 엄중히 명하고 있다. 물론 살인을 다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모세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쳐 죽였고, 다윗은 살인을 교사해서 간접적으로 살인했다. 그 행위로 이들은 상당한 값을 치렀지만 결국 용서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자기 살인이라 불리는 자살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8. 자살은 다른 행위와는 달리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 점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하지 못한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과연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29. 개신교회는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치지만 모든 범죄에 대한 회개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가 하나님이 영원한 작정 가운데 택한 자라고 하면 설령 중대한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택함 받은 바가 취소되거나 변경된다고 할 수 없다.
30. 만약 신자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 낱낱이 회개해야만 용서받고, 구원 얻게 된다고 하면 이것은 자칫 행위구원 내지 공로사상으로 치우칠 위험을 안게 되고,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31. 구원은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다. 물론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회개가 용서에 필수적인 것임을 약화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특정한 죄에 대한 회개가 그 사람의 칭의와 구원받은 바를 드러내주는 징표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32. (성령훼방죄와 자살) 성경에 기록된 유일하게 사함을 받지 못할 죄는 오직 “성령을 훼방한 죄”(마 12:31, 막 3:28~29, 눅 12:10)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권위 있는 신약학자 카슨(D.A. Carson)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진리를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대속의 죽음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33. 그렇다면 자살은 이에 해당하는 죄라고 볼 수 있을까? 삶의 어느 순간에 약함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구름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을 성령을 훼방한 죄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충분한 신학적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34. 만약 어떤 자가 구원 얻는 믿음을 부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 내세, 구원 등도 없다고 주장하며,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이기에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차원에서 자살을 택했다면 그것은 성령훼방죄에 해당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극심한 생활고, 참을 수 없는 육체의 고통, 정신적 우울감, 또한 소망이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살을 성령웨방죄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35. (개혁신학적 조명: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성도의 견인 교리)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은 영원한 작정에 따라 택자와 유기자를 정했다는 예정교리와 구원으로 택함받은 성도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견지해왔다. 개혁주의 교회가 자살 문제를 신학적으로 판단하려고 할 때, 이 교리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제공해 줄 수 있다.
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에 수록돼 있는 견인 교리는 (1) 하나님이 택한 자는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2) 그들은 반드시 끝까지 견디게 되는데, 이 확실성은 인간이 아니라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친다.
37. 이 ‘성도의 견인’ 교리의 빛에서 본다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란과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자살도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비록 자유의지로 자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살이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에서 나오는 기쁘신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도 없고,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작정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이 견인교리는 잘 정리해 준다.
38. 언약백성이 율법을 일시적으로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효화하지는 못했다. 이 이유는 언약의 유효성이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39. 선택된 자라 하더라도 연약하게 되면 극단적인 죄를 범하게 될 수는 있다는 사실은 극단적 범죄도 선택을 무효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살에 적용시키면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것 자체가 선택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40. 경건한 자라도 악함이나 약함으로 자살과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성도가 치명적인 악을 범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주권적 사랑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자살이라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했고, 스스로 죄의 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45. (바른 교리와 목회적 돌봄) 하지만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여탈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탈하는 심각하고도 큰 죄임에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된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46. 자살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유족과 교회도 꽤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다. 이런 자들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통설을 바로 잡고, 그것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한 근거가 없는 것임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설령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소망 없는 처지에 있는 자들을 살펴보고, 돌보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47.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작정에서 말미암는 것이라는 교리를 교회는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 한다. 특히 유족들에게 이 교리를 가르치면서 위로하고 소망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자살이 구원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공공연히 설교하는 것은 조심하고, 오히려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설교는 자칫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목회자는 이 점에서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한다.
48. (유가족을 위한 목회적 돌봄) 유족들에게 어떤 교리적 가르침이나 권면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마음을 함께하고 물리적으로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더 필요하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4:15)는 바울의 권고대로 자살 건에 대해 정죄하지 말고 슬픔과 고통에 힘들어하는 남겨진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어야 한다.
49. 자살한 자들을 잃은 상실감,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같이 다양한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돌볼 수 있는 후속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유가족은 자칫 잘못하면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에 빠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는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수치감, 그리고 외부의 비난과 같은 것으로 몸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와 교회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이들을 돌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50. (자살자 장례문제) 목회자와 교회는 전향적으로 고민하고 검토해야 한다. 유가족을 돌보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 십수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장례를 허가하지 않았던 천주교회도 20세기 하반기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로마 교회의 새 교회법은 장례식을 거행할 때 교회적이거나 사회적인 스캔들이 될 수 있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살자들의 장례를 허용하고 있다.
51. 어거스틴은 장례식이란 기본적으로 유족들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교회는 유족들을 위해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허락하는 일에 좀 더 전향적이어야 한다. 장례과정을 통해 유족들은 고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서로에게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복돋아 주고, 또한 형제, 친척들 사이에 서로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섭섭함, 비난, 상처들을 어느 정도 치유해 갈 수 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은 기독교 자살예방센터 라이프 호프가 지난 2013년 5월 23일 서호교회(노용찬 목사)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주제로 ‘제3회 자살자 유가족을 위한 위로예배 및 자살예방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 가운데 일부 발췌 및 정리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단체에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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