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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복음은 말이 아닌 삶의 교리 … ‘삶의 변혁’ 나타나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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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뱅이 말하는 ‘잘 정돈된 삶’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

 / 김선권 박사(호남신대)

“깔뱅(칼빈)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잘 정돈된 삶, 잘 정돈된 교회, 잘 정돈된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의 인생 즉, 기원과 의미, 목적을 잘 설정하는데 있다.”

김선권 박사는 ‘잘 정돈된 삶’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김 박사는 “깔뱅은 잘 정돈된 삶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기 부정을 말했다”며 “깔뱅에게서 복음은 언어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다. 그 결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 박사는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적 특징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지는 것’,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 ‘이 세상의 재화의 합법한 사용’이다.

 

 

김 박사는 “이 네 가지 원칙은 여전히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본질적 내용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며 “기독교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것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기독교인의 삶이란 결국 그들의 모든 활동으로 연장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즉, 복음, 복음의 현재화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결국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변혁하는데서 그것의 효과와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복음은 말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에 이 복음 교리를 가장 높은 자리에 배치했다. 왜냐하면 이 복음 교리가 우리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복음 교리는 우리 마음 속으로 깊숙이 완전하게 들어와야 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음 교리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며 “말의 교리가 아닌 삶의 교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김선권 박사의 주요 발표내용이다.

1.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에도 동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중적 측면을 가진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이 가지고 있는 은택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주어지는 은혜는 이중적인데, 칼뱅은 그것을 칭의와 성화(중생)의 은혜라고 칭하였다.

2. 성화는 기독교인의 삶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깔뱅이 말하는 성화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도달되는 인간의 사역이 아닌,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시는 은혜이다.

3. 인간의 사역은 그 자체로 구원에 기여하는 공로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하는 선한 역사는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은혜의 열매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4. 깔뱅에게서 성화는 단순히 신자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거룩한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칼뱅은 성화를 보다 근원적인 성도의 인격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거룩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외적인 형태로 거룩한 행동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인격이 신앙에 의해서 내적으로 올바르게 형성되는 사건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5. 즉, 죄로부터 승리케 하며,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의 인격을 계속적으로 점진적으로 재건하시며 그 인격의 형성의 열매가 삶 속에서 거룩한 생활로서 나타난다.

6. 하나님께서 성화를 성도 안에서 그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행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역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적 측면에서 성화란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질서와 영적인 법칙에 따르는 성도의 훈련과 삶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성화의 도구로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7. 깔뱅은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짊어짐, 미래 삶에 대한 묵상, 이 세상에서 재화의 합법적 사용 등 기독교인의 네 가지 삶의 방식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복음은 말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였기 때문이다.

8. (기독교의 네 가지 삶의 방식-①자기 부인) 깔뱅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는 거룩이다. 또한 거룩의 토대는 베드로전서 1장 16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다. 깔뱅은 말한다. “우리는 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할 우리 부르심의 목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거룩은 하나님과 우리의 결합의 끈, 즉 연결 고리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이 결합의 끈이 거룩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서 거룩이란 그들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9. 깔뱅은 우리 자신의 거룩한 생활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길 좋아했다. 즉 “자신의 삶을 잘 정돈하는 것” 또는 “자신의 삶을 잘 정비하는 것”이다. 이렇듯 깔뱅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형태는 참된 질서(정돈됨, 균형)의 회복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잘 정돈된 삶”은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데, 동시에 “성경의 계시”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내적인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성도 자신의 삶은 복음이 계시한 외적 규범에 따라 정돈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성령의 내적 요구에 따라 정돈이 되어야 한다.

10. 만약 기독교인의 삶이 신학적 토대(아버지의 거룩함)와 기독론적 토대(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길)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의 목적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룩 혹은 잘 정돈된 생활에 있다. 그리고 이 잘 정돈된 생활에 도달케 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깔뱅은 한 단어로 요약한다. 즉 “자기 자신의 부정” 혹은 “우리 자신의 부정”이다. 왜냐하면 잘 정돈된 삶의 시작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곳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 부정은 성도의 삶 전체에 영향을 준다.

11. 깔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에 대해 그것이 그 자체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인간 존재의 비움은 단지 비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의 참된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찾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12. 인간의 모든 고귀함과 영광은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할 때 주어진다. 제네바 교회 신앙교육서에서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13. 그 자신으로부터 떠남은 모든 선한 것에서 결핍된 인간이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다시 채워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와의 관계를 다시 설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어떠한 구원도 자기 자신 안에서 찾을 수도 소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14. 깔뱅에게서 자기로부터 떠남은(extra nos) 자신의 모든 실존은 긍정적이며 적극적 방식에서 하나님께 속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 부정은 우리에게 매우 알려진 선언으로 다시 인도된다.

 

 

15. 자기 부정이란 단순히 부정적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부정은 보다 긍정적인 요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자기 부정은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이 가리키는 것과 같이 성도들로 하여금 희생의 삶,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도록 권한다. 그 자신 안에서 자기 부정이 시작되자마자,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찾고자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요체가 된다.

16. 자기 부정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참여를 뜻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그런 자기 부정의 결과는 결국 삶의 진정한 확실성과 삶의 참된 의미를 인간의 외적 요소들인 물질적인 요소로서 부와 성공에서 찾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만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삶은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중단한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자신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깔뱅은 곧바로 기독교인의 삶을 발전시킨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영혼 안에 숨어 있는 “악덕”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근절하는 유일한 치료책 역시 자기 부정이다. 자기 부정은 교만, 인색, 탐심, 쾌락 등 모든 악덕을 제거한다. 이 자기 부정은 옛 본성 안에 있는 악덕을 근절시킬 뿐만 아니라 “깔뱅이 강조했던 덕들”의 열매를 맺게 한다. 깔뱅이 말하는 덕이란 하나님과 관계에선 “경건”, 이웃과의 관계에선 “정의(올바름)”, 사물(물질)과의 관계에서는 “절제(근신)”이다. 삶의 모든 행동들은 경건, 정의, 절제로 요약될 수 있다.

18. 결국 자기 자신의 부정이란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란 자기 부인과 인내의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것이 깔뱅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첫 번째 방식인 자기 부정이다.

19. (기독교의 네 가지 삶의 방식-②십자가를 짊어짐) 십자가는 의심할 바 없이 루터 신학의 핵심 주제였다. 루터는 그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신학”이라 칭하길 좋아했다. 깔뱅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의 관계에서 십자가를 언급했고, 특별히 기독교인의 삶의 주제와 관계해서 십자가를 자주 말하였다. 즉 보다 실천적이며 보다 실제적인 방식으로서 성도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20. 깔뱅에게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삶 전체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성도의 훈련을 위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지셨던 십자가는 우리가 지는 십자가를 면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가져야 하는 그와의 유사성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전적으로 나타난다.

21.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부당하게 주어지는 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결코 이유 없이 난폭하게 대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를 위한 선이 무엇인지 아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내포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따라서 모든 유익들은 십자가에서부터 온다. 십자가는 눈멀던 자기 사랑을 제거하며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자신의 연약함을 지각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만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깔뱅은 십자가는 우리의 치료제라고 주장한다. 결국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의 순종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게 된다.

22. (기독교의 네 가지 삶의 방식-③미래 삶에 대한 묵상) 깔뱅은 성도를 “순례자”라 칭하며 이 세상 안에서의 성도의 삶을 영원한 복락으로 들어가기 위한 “순례의 도상”이라 칭하였다. 성도의 삶과 관계해서 깔뱅이 말했던 “순례자”, “여행자”, “이방인”이라는 표현들은 결국 성도들이 대망하는 목적지인 하늘 세계로 진행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뜻한다.

 

 

23. 깔뱅에게서 현재 삶의 경멸 없는 미래 삶의 묵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현재 삶의 경멸은 그 자체 안에 무엇보다 십자가 훈련이 없이 있을 수 없다.

24. 미래 삶의 묵상의 주제는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는 하늘로 우리 양심과 마음을 드높이는 “수루숨 코르다”(sursum corda)의 주제와 관계된다. 성도들의 삶은 그들 생활의 초점과 목적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뿐만 아니라 그의 “승천” 안에서 발견되도록 하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는 우리가 그와 함께 하늘로 올리어지기 위해서였다.
25. 기독교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 순간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깔뱅은 모든 기독교인들과 모든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이 영원의 관점인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에서 이해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의 스타일 세 번째 미래 삶(장차 올 삶)의 묵상 또는 기대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이제부터 영원의 상 아래서 어떻게 현재의 재화들(물질들)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네 번째 방식, 이 세상에서의 재화의 올바른, 합법적 사용이다.

26. (기독교의 네 가지 삶의 방식-④이 세상 재화의 합법적 사용)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재화(물질)의 선한 사용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본질적이며 필수적 과제이다. 이것을 위해서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깔뱅은 이 세상의 재화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7가지 규칙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27. 첫째, 무엇보다 우선 우리 “인생의 짧음”을 의식해야 한다. 생명이 짧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때, 이 세상의 재화라는 것이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짧다는 인식은 이 세상의 것들에 안주와 안식하려 하지 않고, 마치 우리가 매 순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이 세상을 순례자처럼 살아가야 함을 가르친다.

28. 둘째, 우리는 이 세상의 재화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don de Dieu, donum Dei)임을 인식하며 그런 방식 안에서 재화를 사용해야 한다. 재화의 사용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증거한다. 성도들에게 재화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아버지”로서 계시되길 원하셨다. 현재의 삶에서 필요로 했던 것을 제공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9. 셋째, 땅의 축복들의 합법적 사용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드시고 정하신 “목적”에 항상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의 정신(영혼)은 땅의 것에 안주하며 그 안에서 위안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잠깐 지나가는 지상의 삶에서 행복을 주신 목적이 이 세상이 영원할 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장차 올 영원한 행복을 묵상하기 위해서이다.

30. 넷째, “지나친 엄격함”과 “지나친 남용” 사이에서 언제나 “중용”(milieu)을 선택해야 한다. 지나친 엄격함은 삶에서 필수적인 것 이상의 것들을 철저하게 금한다. 이 세상의 것들을 향유(즐거워)하는 것을 금한다. 깔뱅은 시간적 실재를 향유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것들을 주실 때, 필요에 의해서도 주시지만, 우리의 기쁨과 향유와 활력을 위해서도 그것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31. 지나친 엄격함도 문제가 되지만 지나친 남용도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혹은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방탕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남용은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한다. 지상의 것들의 합법적 사용은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이런 사용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된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성을 쏟기 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찾는 방식으로 물질은 사용되어야 한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은 지나친 엄격함과 지나친 남용 사이에 중용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너무 지나치지 않게, 너무나 부족하지도 않게 하기 위해서 깔뱅은 성 바울의 권면을 따른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전 7:31).

32. 다섯째, 비천에 처할 때나 풍부에 처할 때나 어떠한 형편에든 “자족” 할 줄 알아야 한다. 부자들은 그들의 부를 자랑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져서도 안 된다. 반면 가난한자들은 재화의 부족을 반감이나 유감을 가지는 것 없이 그 상태를 인내하면서 견뎌 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부족한 상태를 인내로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빈곤의 상태를 인내하며 견뎌내는 것에 있다.

33.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화의 “청지기”일 뿐임을 인식해야 한다. 청지기직은 그 직무가 끝나는 날에 셈을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가장 합법적인 방식으로 가장 하나님의 계획에 적합한 방식으로 물질을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이 요청된다.

34. 일곱째, 기독교인의 삶에서 모든 행동들은 “소명”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 깔뱅은 인간의 모든 노동을 소명이라 천명하였다. 그 전까지 이 소명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통해 부름 받은 “예언자”, “사도들”, 교회의 “직분자”들로 제한되었다. 스콜라신학은 노동 활동에서 모든 영적인 가치와 위상을 제거했다. 이 신학은 실천적 삶 보다는 관조적 삶에 우위성을 두었었다. 반대로 깔뱅은 인간의 노동에 예전에는 결코 가져 보지 못했던 영적인 존엄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여했다. 달리 말하면 깔뱅은 성과 속, 종교와 세상의 구별에 종지부를 찍었던 셈이다.

35. 직업이 자신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존중하고 있다면, 더 이상 상하구조는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관점 안에서 신앙적이며 존귀하다.

36. 깔뱅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잘 정돈된 삶, 잘 정돈된 교회, 잘 정돈된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의 인생 즉 기원, 의미, 목적을 잘 설정하는 데에 있다. 깔뱅은 잘 정돈된 삶에 도달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기 부정을 말하였다. 칼뱅에게서 복음은 언어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는 것은 필수적이다.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적 특징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37. “복음은 말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이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에 이 복음 교리를 가장 높은 자리에 배치했다. 왜냐하면 이 복음 교리가 우리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복음 교리는 우리 마음속으로 깊숙이 완전하게 들어와야 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음 교리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게다가 이 말의 교리가 아닌 삶의 교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위의 기사는 한국개혁신학회가 지난 2014년 4월 5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 개최한 ‘제108차 정기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내용 중에서 일부 발췌 및 정리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단체에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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