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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6.25 전쟁 당시 기독교인의 직접적인 피해 원인은 '이념 갈등'

by 데오스앤로고스 202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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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27회 영익기념강좌 개최
‘지역사회와 한국전쟁 그리고 기독교’ 주제로

박명수 명예교수, 장금현 박사 발표

 


지역사회(로컬리티) 차원에서 6.25 전쟁에 관한 연구는 신분과 계급 간의 갈등, 친족과 마을 간의 갈등, 종교와 이념 갈등 등의 세 가지 측면에서 진행돼 왔다. 이와 관련 6.25 전쟁 당시 지역사회 내에서 기독교인들의 피해 원인은 이념 갈등 때문이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박창훈 교수)가 지난 4월 25일(화) 오후 1시 서울신대 본관 소강당에서 <지역사회(로컬리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기독교>를 주제로 '제27회 영익기념강좌'를 개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3년 만에 마련된 이번 기념강좌에서는 6.25 당시 논산과 군산지역 기독교인들의 수난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먼저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는 ‘논산군 성동지역의 근현대사와 6.25 전쟁,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피해’라는 제목으로 일제하 및 해방 이후 논산군 지역 기독교의 시작과 사회운동, 좌파와 우파의 충돌과 피해 상황과 함께 6.25 전쟁 당시 성동지역 좌우익의 갈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수난과 박해에 대해 발표했다.

 

 

6.25 전쟁 당시 논산군 피해 1,200명
600여 명은 성동면에서 희생
기독교인의 피해는 약 120여 명

박명수 박사

박 박사는 "6.25 당시 논산군의 피해규모는 약 1,200여 명에 달하는데, 그 중 약 600여 명이 성동면에서 희생됐다고 추정된다"라며 "이 가운데 기독교인의 피해는 약 14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지금까지 성동면 병촌교회를 중심으로 66명이 희생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본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곤교회를 중심으로 73명의 기독교인 피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라며 "73명이라는 피해 규모는 6.25 전쟁 당시 전남 영광 염삼교회의 77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이번 연구는 여기에 대한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날 박 박사는 일제하 논산군 지역의 기독교와 사회운동과 해방 후 논산군 성동면의 기독교와 각종 사회운동을 비롯해 6.25 전쟁 당시 성동지역 병촌교회 기독교인 수난과 박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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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념 갈등이 기독교인 피해 원인

그는 "논산군 성동면은 해방 공간과 6.25 전쟁 기간을 통해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지역으로써 1920년대 사회우의 운동이 매우 강하게 일어났던 곳이다”라며 “사회주의 운동은 지역의 지주층과 연대해 세력을 확장시켰는데, 해방 이후에도 강력한 좌익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6.25 전쟁 당시까지 지역 안에서 좌우의 갈등이 지속됐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6.25 전쟁 기간의 민간인 피해를 마을 안에서 계층 간의 갈등, 씨족 간의 갈등의 측면에서만 파악했지만 6.25 전쟁 기간 성동면 지역에서 발생한 갈등은 이념 갈등이었다”라고 분석했다.


성동면에 거주했던 지주나 소작인, 머슴을 비롯해 가문들의 당시 상황을 설명한 박 박사는 “6.25 전쟁에서 기독교인 피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민공화국 건설에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좌익들에게서 이념에서 찾아야 한다”며 “당시 성동면은 일제시기부터 6.25 전쟁 당시까지 좌익사상이 강했다. 좌익들은 인민공화국을 만들려고 했고, 여기에 반대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라고 주장했다.


박 박사는 6.25 전쟁 당시 성동지역의 피해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좌익이념을 받아들인 지역의 일부 유지들이 소작인과 머슴, 서자들을 동원해 공산주의 혁명으로 자행한 것이다. 둘째, 전통적인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정치적 성향의 변화는 가문이 아닌 개인 혹은 가정의 영역으로 전이돼 좌경화 및 우경화가 나타났다. 셋째, 당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우익세력과 결합돼 있었는데, 좌익세력들에 의해 위협적인 세력으로 간주돼 잔인한 학살이 발생했다 등이다.


박 박사는 “사회주의 혁명이 강하지 않았다면 반상, 씨족, 종교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며 “만약 이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큰 희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6.25 전쟁 당시 민간인 살해 문제에서 이념을 제외하고 단순한 반상, 씨족, 종교의 갈등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군산지역 피해도 좌우의 대립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장금현 박사

장금현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는 <군산지역과 한국전쟁:기독교인 집단희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장 박사는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와 6.25 전후 군산지역의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관련된 현대사적 갈등배경을 설명하면서 군산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에 치달아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6.25 전쟁 당시 군산지역 기독교인들의 집단희생은 가깝게는 해방, 멀게는 일제강점기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며 지경교회, 원당교회, 해성교회, 신관교회, 동부교회 등 군산 지역 교회 기독교인들의 집단희생의 특징을 설명했다.


장 박사는 “군산지역 피해 교회의 대표적인 특징은 우익 인사 혹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됐으며 월남한 기독교인들도 정치적 활동 기록이 없었지만 인민군들이 월남인들을 반동분자로 낙인찍어 구금, 구타, 살해 등을 자행했다. 또한 좌익들은 숨어서 우익인사들의 학살을 자행하면서도 기독교인이었던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도와 큰 해를 받지 않도록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집단희생된 교회와 유족들은 죄악들과 부역자들에게 크게 보복하지 않았다”며 “증언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당교회 신자들의 보복은 없었고, 가해자 후손과 피해자 후손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했다”라고 설명하면서 군산 지역 기독교인들의 피해는 이념과 같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강좌 전 드려진 예배는 박창훈 교수의 사회로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의 기도, 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장 김헌곤 목사의 ‘6.25 전쟁 피해와 한국교회의 사명’이란 제목의 설교, 김광동 위원장(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동영상 축사, 고 김영익 집사의 장남 김승환 집사(장충단교회)의 인사, 김헌곤 목사의 축도로 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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