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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분쟁의 치유방법, "중재자로서 샬롬의 복음(길) 제시하는 것" 본문

목회와 신학

갈등과 분쟁의 치유방법, "중재자로서 샬롬의 복음(길) 제시하는 것"

데오스앤로고스 2020. 6. 2. 13:59

국가와 국가 간 끊임없이 벌어지는 군사적-무역적 갈등과 분쟁, 그리고 국가 내에서조차 정치와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몸살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등 국내외 정세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남북 간 군사적, 정치적, 산업적 갈등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실천신학자들이 화해와 치유의 신학으로 갈등과 분쟁의 해법을 모색해했다.  한국실천신학회(회장:황병준 박사, 호서대)는 지난 2월 7일부터 8일까지 인천 카리스호텔에서 '통일, 화해, 치유의 실천신학'을 주제로 제75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주제강연자로 나선 2명의 해외 신학자의 주장을 일부 정리해봤다. <편집자 주>

 

한국실천신학회가 '통일, 화해, 치유의 실천신학'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사진출처: 한국실천신학회 홈페이지)



# 분열된 사회에서 샬롬의 길을 만들기(주제강연1)
/ 조엘 테제도 박사(Joel A. Tejedo, Asia Pacific Theological Seminary)


William Klassen에 따르면, 샬롬이란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 관계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며 서로를 위협하기보다 공동선을 위해 헌신한다.” 사회의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체의 평화 조성을 위해 행동할 때, 샬롬은 마치 “개인과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자성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성경 속에서 “샬롬”은 아름다우면서도 다면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의 샬롬은 “잘됨,” “온전함,” “하나님 창조의 완성,” “번영,” 혹은 “평화”와 같은 의미이다. 이 글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평화롭고, 화목하며, 번영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네 가지의 상호 연관적 관계는 다음의 네 가지이다: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의 창조물의 평화, 당신의 평화, 그리고 타인의 평화다. 샬롬은 창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샬롬을 만드셨고, 모든 창조물들은 조화롭게 살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전체 창조물들의 균형을 지키는 청지기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셨다. 개인에게 샬롬은 건강과 육체의 온전함을 포함한다 (시 38:3, 잠 3:2). 그것은 해로부터의 보호나 여행을 하거나 갈등의 상황에서의 안전을 의미한다(창 28:21, 수 10:21). 전투나 전쟁의 상황에서 샬롬은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삿 8:9. 11:31). 또한 샬롬은 겸손함의 결과로 인한 경제적 풍요나 번영, 음식물과 자원의 공급을 뜻하기도 한다. 가족에게 샬롬은 진실한 관계, 번영과 온전함을 포함한 경제적인 안녕을 의미한다(시 128:1-6). 하나님의 임재와 호의는 똑바로된 마음을 가진 평화로운 사람에게 베풀어졌다(수 6:24-26, 시 34:14, 37:37).

단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게 샬롬은 전쟁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에서 이웃 나라와의 샬롬은 평화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열망하는 바였다 (사 51:3, 11:6-9, 호 2:18). 샬롬이 국가와 공동체에 형성되면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실현되었다. 샬롬은 단지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다. 샬롬은 옳고 평화로운 관계와 연관이 있다. 당신의 관계에 전쟁과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자라고, 깊어지고,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이러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따라서 합당하게 또는 올바른 관계로 행동한다는 것은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샬롬은 개인과 국가 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개인 간의 샬롬은 갈등의 심각성에 상관없이 상대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샬롬은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상황에서도 끊기지 않았던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상 20:42). 샬롬은 평화로운 관계와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간에 자원을 나누는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왕상 5:7-12). 이러한 평화로운 관계는 동등한 두 국가간의 조약이나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조약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수 9:3-15).

다른 사람에게 정의의 행동을 하는 것 역시 샬롬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바른 행동을 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이나 생각을 하거나, 혹은 높은 행동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그가 받을 만한 것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신약 성경에서 샬롬의 의미는 “관계의 화해와 회복,” “치유와 온전함,” 그리고 일부 구절에서는 “유대감”을 뜻한다. 예수님의 말씀 속 샬롬은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구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인생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어 “소조 (너를 낫게 하였다)”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나타낸다. 문자 그대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의미도 있고,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 혹은 “너의 믿음이 너를 온전히 하였다”의 뜻도 있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너는 더 이상 그 누구와도 갈등을 겪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 보다는 “가서 번창하라”의 의미이다. 중재는 샬롬의 언어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 혹은 중재자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기록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 라는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설교는 이를 확증한다.

우리가 설교하는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행 10:36, 엡 2:17, 6:15). 초대교회는 인종, 성별, 사회적 지위 등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를 입은 초대교회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을 이겨낼 수 있는 샬롬과 화해를 가져올 수 있었다 (행 2:42, 6:1-7, 13:1-3). 화해는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에게서 서원해진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이다.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이다. 양극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이익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Sebastian Kim이 주장하는 대로, 기독교인의 목회는 “현존하는 사회 제도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이익들을 중재하는 역할 뿐 아니라 사회 안에 존재하는 비이성적 관례나 사회적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시편 85:10은 “공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분열된 사회에서 공의와 샬롬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역할이다. 샬롬은 공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에 실현가능하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타인은 우리의 축복처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다.

교회가 신학의 실천을 통해 샬롬의 가치들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연결된 관계 속의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도울 수 있다. 따라서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시민 사회의 다른 종교/비종교 단체들과 연계하여 상호 협력과 도움을 강화할 수 있다. 튼튼한 사회적 연계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대체로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다. 집단적 행동은 개인적 행동보다 공동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집단적 행동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사회적 자본이다. 튼튼한 사회적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주체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동체와 연계될수록 역량이 증진된다. 

기독교 단체들은 한 사회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잘 대할 때, 관계는 한 사회의 연합과 연계의 자본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받는 사람들이 아닌 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어야할 다른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물질적인 자원은 없을지 몰라도 자원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연결시켜줄 수는 있다. 타인과의 연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에 투자하는 것이다. 우리가 봉사를 하고 다른 단체들과 공공의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타인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뢰를 주지 못하며 그들도 우리를 신뢰하지 못한다.

교회는 그들의 전통과 분열된 사회의 경험을 통해 배운 풍성한 샬롬의 신학을 통해 공동체들의 연합과 화해와 치유에 도움을 준다. 샬롬의 중요한 가치를 인식한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희망의 지표가 되며, 보다 나은 사회, 화해의 사회를 만드는 일꾼이 된다. 기독교적 개념의 연합, 화해, 치유를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은 충분히 실현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은 사회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더 나은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개인과 가정과 친구와 동료와 나아가 공동체와 국가까지 화해하고 연합할 수 있는 평화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 통일, 화해, 치유를 위한 예언적 설교(주제강연2)

/ 박 사무엘 박사(Graduate Theological Union, USA)

한국교회의 심장은 설교이다. 한국교회 만큼 한 주일에 목회자들이 설교를 많이 하는 교회도 많지 않다. 설교가 교인들의 가치관 및 교회의 정체성에 주는 절대적 영향을 감안할 때,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역할의 큰 책임이 설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말은 동시에 설교가 달라지면 해결점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준다.

설교는 설교자들의 생각이 아닌, 복음의 안내를 받아 교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있는 자리로 삶을 옮기도록 초대하는 성령의 사건이다. 마태복음 기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 교회 식구들을 물질의 풍요 속에서 분열과 갈등을 겪는 현장을 목격하고 화합과 섬김의 삶으로 저들을 초대해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였듯이, 또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인의 집합체가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치유(병원)공동체로의 변화를 소망하였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도 지금 부터라도 설교자들이 현재 서 있는 교회의 현 주소를 뼈아프게 점검하며, 설교의 방향 전환을 통해 교회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모든 설교는 예언적 설교다. 성서가 가르치는 예언자적 삶의 핵심은 세속의 물질적 성공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보다는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 주는 삶이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게 예언적 삶의 표준이며 모든 교회들이 이 길을 가도록 초대받았다. 

문제는 모든 설교자가 오늘의 교회 상황을 인지하며 시편 기자의 통곡의 영성을 회복하는 게 필요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다시 연결되고, 세속의 영광이 아닌,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헨리 나우엔(Henry Nouwen)이 말한 대로 세상이 그 토록 원하고 바라는 위로의 움직임, 권력의 추구, 올라감의 지도력이 아닌, 십자가로의 낮아짐, 예수의 길, 사랑의 지도력, 종의 지도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날 감동을 주는 설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남의 눈의 티를 지적하기 전에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마7:3) 통곡하며, 그 속에서 함께 통곡해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 영혼이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에게 설교자 예레미아는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를 외치며 통곡한다. 그리고 보통의 언어로서는 저들의 굳어진 심성을 녹일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내 딸이 치료를 받지 못함이 어찌 됨인고?" (렘 8:18-22)라고 시인의 음성을 동원한다. 월터 브르그만은 이런 예레미아의 시적 언어가 단순히 그의 언어를 세련되게 표현하기 위한 옷가지 정도가 아니라 말씀으로 하여금 살아서 역사적 현실 속에 무엇인가 변화를 가져 오게 한 전략이었다"고 말한다. 

예레미아에게 "기존 세계의 현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이 창출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것이 아닌 청중의 감각에 자극을 주는 언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위의 통곡의 언어를 넘어서 허리띠를 매고 (렘 13장), 토기장이의 장면을 보여주며 (렘 18장), 그릇을 깨고 멍에를 매는 등의 (렘 19, 27-28장) 상징적 행동을 설교에 동원하고 있다. 이는 그 만큼 청중의 변화가 쉽지 않다는 증거이며 예언자는 피를 말리는 노력을 통해 설교의 언어선택을 위해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설교, 최고의 설교 언어는 역시 이웃사랑이다. 현재 교회들이 서 있는 위치 혹은 앞으로의 목적지가, 7-80년대식의 성장주의, 넓은 땅에 웅장한 예배당을 갖추어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만 성공이라는 세속적 물량주의가 아닌, 가난한 자, 상처 받은 자, 차별과 편견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찾아가, 인종과 계층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도를 보여주며, 결국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교회가 따라 갈 수 있다면,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는 비록 숫자는 작고, 허름한 건물을 가지고 있더라도 교회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교회가 명예나 감투의 자리가 아닌 단순히 머리되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궂은일을 하더라도 그게 감사하며 그게 특권인 것을 깨닫는 이들이 건강한 교회를 이루며, 그런 교회들이 골목마다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설교이고, 교회의 부흥이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이게 통일된 한국을 준비하며 회복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리라.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여러 계층 간, 지역 간, 종교 간의 차별과 분열의 치유 및 화해는 고사하고 교회 간, 교인들 간의 갈등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하고 이를 위해 설교하는 게 절실하다고 본다. 그게 2040년 평양 강남에서 만나게 될 우리의 형제들이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이요 설교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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