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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교회 내 갈등해결을 위한 '화해', 무엇이 필요할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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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연구(33) * 


 

 

화해에 대한 영성목회적 고찰:교회 내 갈등해결을 중심으로

/ 김상백 박사

 

모든 관계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갈등을 겪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사실에도 이러한 갈등의 요소가 있었다. 그러면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대체로 갈등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발생한다.]

 

첫째, 둘 이상의 주체 또는 세력

둘째, 상호의존적 관계

셋째, 상이한 시각과 이해관계

 


# 교회 갈등의 원인

 

교회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이 외에도 교회의 갈등 원인은 근본적으로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영적인 원인, 사회심리적인 원인, 현상적인 원인 등이 있다.

 

1. 영적인 원인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다.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다른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인간의 무지와 유한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신의 악한 뜻을 선택하는 인간의 선택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영적인 요소로는 사단의 궤계(詭計)이다. 사단은 욥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간질하고 정죄하는 자요(욥 1:9), 분쟁과 갈등의 원인자이다. 사단은 지금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교회가 잘 성장하다가도 갑작스럽게 까닭 없이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것은 사단이 그 배후에 있음을 인지해야한다.

 

2. 사회 심리적 원인

 

갈등의 사회 심리적 원인에 대해 드 보노(Edward de Bono)는 크게 네 가지로 설명했다. 네 가지 원인은 F로 시작되는 단어로 표현되는데, 두려움(fear), 힘(force), 공정성(fairness), 그리고 자금(fund)이다. 이 네 가지 원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3. 현상적 원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적 공동체이면서 또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갈등에도 사회의 다른 조직체와 같이 다양한 현상적인 원인들이 발견 된다.

 


첫째, 개인의 내적 갈등(Intrapersonal Conflict)

 

인간의 내적 갈등은 개인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이 서로 충돌하여 일으킨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절제된 청교도적인 삶과 어떤 개인의 놀기 좋아하는 성향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또한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무조건적이고 정서적인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내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이 개인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으면 교회에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개인이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투사할 경우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뿐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인한 갈등이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인적인 갈등은 가족 간의 다툼이나 부부문제, 친구들 사이의 문제, 사업주와 피고용인들 간의 문제 등이다. 목회는 이러한 개인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목회자는 이러한 갈등에 대처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


둘째, 교인 상호 간의 갈등(Interpersonal Conflict)

 

교인 상호 간에 일어나는 갈등은 한 개인이 상대방과 융화를 이루지 못해 서로 충돌하는 경우 발생한다. 그런데 이 갈등은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의 차이로 인해 생기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해 갖는 감정이나 느낌 때문에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 흔히 발생하는 갈등들의 원인은 서로 얽혀있고 복잡하지만, 보통 그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태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인데,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신념의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안건을 대할 때 생기는 갈등이다.

 

그 다음은 신앙적인 헌신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인데, 주로 회원규정이나 사역의 이념, 또는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등의 구체적인 안건들을 다룰 때 나타난다. 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출석하겠지만,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믿음과 헌신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한 갈등이다. 건강하지 않은 의사소통은 태도의 차이나 신앙의 헌신의 정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람직한 의사소통방법을 사전에 교육하는 것도 갈등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셋째, 구체적 요인들로 인한 갈등(Substantive Sources)

 

구체적인 요인들로 인한 갈등은 두 사람 또는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어떤 구체적인 일이나, 목적이나 목표 또는 수단들에 대해 의견차이가 드러날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들로 인한 갈등,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이나 차이로 인한 갈등, 목표나 목적의 차이로 인한 갈등, 그리고 목표나 목적의 기초가 되는 가치기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넷째,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Structural Sources)


교회 내의 계층, 성별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들이 이러한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한 갈등의 네 가지 주요원인은 구조적 불명확성, 목회사역의 역할들에 대한 혼동, 목회자의 지도력 유형 그리고 성장과 쇠퇴를 포함한 교회규모의 변화 등이다.

 

특히 포이리에(Alfred Poirier)는 갈등의 구조적인 요인으로서 권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위를 가질 권리에 대해 의심이 생길 때 갈등이 생긴다.

 

예를 들면, 민수기 12장의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권위를 가질 권리에 대해 의심하면서 자신들도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함으로 갈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바울에게서도 나타나는데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는 무리들에 의해 바울은 많은 도전을 받았다.


두 번째 유형은 권위의 남용이다.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轉嫁) 한다든지, 목회상담이나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공식적인 징계를 너무 신속하게 적용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은 권위를 전혀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권위의 남용이 아니라 아예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 우유부단함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를 행사하지 않는 문제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그 예로 이드로의 충고를 받은 뒤 중간 지도자를 세운 모세의 경우(출 18:19-22)나,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홀대 받은 문제로 갈등이 발생한 예루살렘교회의 경우이다(행 6장).

 

 

 

#  그렇다면 화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에는 화해(reconciliation)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나온다. 첫째는 카탈랏소(katallasso, 고전 7:10)인데 증오의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둘째는 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 골 1:20)로서 완벽한 화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카탈랏소의 차원을 넘어서 모든 증오와 장애물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디알랏소마이(diallassomail, 마 5:24)로서 화해하는 말인데, 상호 적대감이 발생했을 때 서로 양보하고 화해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카탈라게(katallage, 롬 5:11)인데 상대방의 행동에 유도되어 그 사람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께 감화 받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러한 성경에 나타난 화해에 대한 단어들을 살펴볼 때, 화해란 증오에서 우호적인 관계의 변화이며, 서로 합의하고 양보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증오와 장애물을 없애고 적대감 이전에 존재했던 본래의 관계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화해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고 이해기는 어렵기 때문에 용서, 정의, 치유, 평화, 회복, 온전함(wholeness), 구원(redemption)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이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다.

 

드 그루치(John De Gruchy)가 화해를 로마서와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에 근거하여 개인 간에 조화로운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모든 창조의 새롭게 됨을 소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새로운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화해의 개념은 관계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화해의 핵심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화해와 관계회복이며, 그 화해는 은혜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화해의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사명이기도 하다.

 

화해는 하나님과의 단순한 관계의 회복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변화이며, 관계의 단절된 아픔과 상처, 그리고 분열을 치유하고 새로운 창조적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화해는 하나님을 배반한 가해자인 죄인인 인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배반을 당하신 피해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의 과정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화해는 사실상 피해자의 용서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관계회복을 위해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한다.

 

 

 

# 화해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1. 에서와 야곱의 화해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사실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두 국민이 있는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창 25:23). 그리고 형 에서가 태어날 때, 아우인 야곱은 그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창 25:26). 이 같은 사실은 두 형제의 갈등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후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사는 것에서 갈등이 표면화 되었고(창 25:29-34), 결국 야곱이 형 에서를 대신해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음으로 갈등은 폭발했다(창 27:5-41).

 

형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던 야곱이 20년 만에 가솔(家率)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사백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온 형 에서와의 화해하는 장면은 참으로 극적(劇的)이다(창 33:1-20). 이 화해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갈등의 현장을 떠나 있었다. 어머니 리브가는 두 형제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형의 분노감정이 좀 식을 때까지 잠시 갈등의 현장을 떠나 있으라는 것이다(창 27:42-45). 갈등의 회피가 아니라 치솟는 분노감정을 조절을 위해 잠시 그 현장을 벗어나서 냉각기를 갖는 것도 갈등해결을 위해 지혜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심각한 갈등상황에서 차분한 마음으로의 대화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야곱의 온전한 순종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31:3)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설득했고(창 31:4-16), 20년이나 머물렀던 아내들의 고향인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결단을 했다.

 

이 순종을 통해 결국 야곱은 깨어졌던 형 에서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창 33:19). 갈등을 해결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시켜야 한다.

 

 

둘째, 야곱은 형과의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다(창 32:13-20). 이것은 화해를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였다. 그는 형이 이 예물을 받고 감정을 풀고 자신과 화해하기를 원했다(창 32:20).

 

이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긴 형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며, 형에게 상처와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회개이며 보상인 것이다. 이러한 에서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한 야곱의 친절은 화해의 전 단계였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

 

셋째,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이다(창 32:23-32). 형과 화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형과의 화해를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소원한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이 될 정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기도했다.

 

결국 화해는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해를 위하여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고 얽혀있는 감정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간절한 기도가 꼭 필요하다.

 

2.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요셉과 형제들의 갈등도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에 있다. 오직 요셉만 깊이 사랑해서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힌 야곱의 편애는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게 했다(창 37:3-4).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攝理)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오직 요셉에게 앞으로 전개될 역사적 사건들을 꿈으로 두 번이나 보여주셨다(창 37:5-11). 이것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가져왔고, 결국 형들에 의해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창 37:25-36).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국 30세의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며(창 41:46), 하나님의 말씀대로 임한 극심한 기근에 양식을 사러온 형제들과 화해하게 된다. 이 화해의 과정에서 몇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요셉의 영성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였으며 심지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갇혔다(창 39장).

 

물론 요셉은 어느 곳에서나 최선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창 39:23), 형들의 배신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깊은 상처는 형제들을 만났을 때의 그의 통곡에서 확연히 드러난다.(창 42:24; 43:30-31)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2)

 

그러나 이 모든 마음의 분노와 상처를 넘어 형제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요셉의 깊은 영성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 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5-8)

 

둘째, 형들의 진심어린 사과(謝過)이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죽음 이후에 요셉에게 가서 용서를 비는 진심어린 회개를 한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창 50:17-18)

 

요셉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사죄(謝罪)하는 형제들의 회개는 요셉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 형들의 고백을 듣고 요셉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형제들과 다시 만난 지 17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쉽게 낫지 않는 그의 마음의 상처를 대변하는 것이다(창 47:27-28). 하나님 앞에서의 진심어린 회개와 상처 입은 상대편의 마음을 배려하는 사과(謝過)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참된 화해의 길로 인도한다.

 

셋째, 요셉의 용서이다. 요셉은 용서를 비는 형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주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순종한 요셉의 영성에 기인(起因)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 모든 일들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형들의 미움과 범죄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한다(창 50:19-21). 용서는 화해과정에서 가장 고통스런 부분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고는 화해의 다리를 건널 수 없다.

 

3. 예루살렘 교회의 화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과부들에 대한 구제 문제였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의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갈등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는 것에 대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면서 불거졌다(행 6:1).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사도들의 행정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행 6:1). 교회의 지도자들인 열 두 사도들이 이 갈등을 지혜롭게 해소하고 화해를 통해 교회를 더욱 크게 부흥시켰다(행 6:7). 그 화해의 지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갈등을 일으킨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다.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놓고 갈등의 두 가지 원인을 분석했다. 그것은 먼저 열 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행정에 몰두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고(행 6:2), 또 하나는 교회 성장에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행정을 도울 일군 일곱을 택하라고 말했다(행 6:3). 사도들의 훌륭한 점은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부터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갈등을 해결하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다.

 

둘째, 교인들과의 소통이다. 사도들은 갈등이 불거지자 즉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했다. 즉 자신들이 교회행정에 몰두하다보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인 부분을 등한히 했다는 것이다(6:2,4).

 

사도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변명하거나 적당히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 갈등은 전적으로 목회자들의 책임이며 또한 많은 원인도 목회자들 자신에게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처럼 자신들의 책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교인들과 진심어린 소통을 나누는 것이 갈등해소의 지름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 갈등 해결을 위한 대안제시이다. 사도들은 갈등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교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지혜로운 갈등 해결의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도들은 본연의 사명인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고, 과부들을 구제하는 것과 같은 교회행정은 교인들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을 듣는 일곱 명의 일군들을 뽑아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제시를 교인들은 기쁘게 받아들였고,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 속에서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했다(행 6:3-7).

 

 

#  화해에 대한 영성신학적 이해

 

홈즈(Urban Holmes)는 영성을 감각현상을 초월한 존재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 형성능력(a human capacity for relationship)이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이 신비스런 관계를 통해 인간은 새로운 영적 각성(spiritual awareness)을 경험하게 되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그 영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렇게 영성을 관계성 형성으로 바라보면,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회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핵심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화해(和解)이다.

 

1) 화해를 시작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은혜롭고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출 34:6-7).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인간을 위해 항상 용서와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미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에도 벌거벗은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창 3:21). 하나님의 심판을 앞둔 타락한 성 니느웨도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을 때, 그 성을 용서해 주셨다(욘 4:9-11).

 

요나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성품을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리고 예수님은 배신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고 그와 화해하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화해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했다(눅 15:11-24).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배반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상처를 사랑과 용서의 긍정적인 정서로 대체한 화해의 상징이다. 교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배신의 상처와 분노의 감정을 넘어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미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화해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해야 한다. 순종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순종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삼상 15:22).

 

 

2) 화해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신성을 비우고 후에 목숨까지 버림으로(빌 2:5-8) 기독교의 심장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 사랑은 대부분 상호 교환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의 많은 종교, 도덕, 윤리, 그리고 철학의 체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은 개인과 공동체에 전혀 다른 도덕체계를 만드셨으며, 인간관계도 바꿔 놓았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 되셨다. 동시에 그는 성부 하나님의 공감과 긍휼과 사랑의 표현이셨다.

 

화해의 영성을 교회공동체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겸손과 자기 비움, 순종과 희생의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합일(合一)에 이르는 영적 성숙의 길이며, 교회공동체가 진정한 화해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3) 화해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화해는 고통스런 과정이며, 그 과정은 적대자를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동료, 혹은 친구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그 존재 변화를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즉 과거 적대자였던 상대방을 과거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해는 용서와 회개, 화해에 대한 소명인식, 과거와의 단절과 같은 결단 등의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화해의 과정은 사람들 간의, 또는 공동체 간의 분열, 갈등, 폭력, 상처로 얼룩진 역사와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상호인정, 상호공존, 평화의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 관계의 변화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 “밀양”은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욱이 화해는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성급한 화해시도는 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와 내면의 치유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신자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보혜사로서 위로자, 상담자,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시다(요 14:16).

 

성령은 화해사역에서 중생케 하시며, 성화시키시며, 사역의 능력을 부여하시고, 교제를 촉진하시는 분이시다. 용서와 화해는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타적인 사랑을 심어주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하신다.


성령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하게 하신다(고전 12:27-31; 14:1; 엡 4:7; 벧전 4:10). 갈등을 치유하고 신자들이 화해의 영성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이다.

 

성령은 사람들을 권유하여 서로 용서하게 하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용서의 결단으로, 그리고 조건이 맞을 경우 장벽을 넘어 화해의 결단으로 인도하신다. 신자는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충만해야 한다. 이러한 성령 충만을 통해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용서를 통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 화해를 위해 어떤 영성목회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1. 자신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영성목회: 낮은 자존감 회복

 

화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내적치유(inner healing)가 필요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는 우리의 자존감을 현저히 낮춘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는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상처를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높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열매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낮은 자존감 회복이 중요하다. 낮은 자존감은 용서하려는 마음을 막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자아존중감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씨맨스(David A. Seamands)는 자신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낮은 자존감을 치유하기 위한 실제적인 몇 가지 단계를 정리했다. 이 단계들은 진정한 화해의 영성을 증진하는 영성 신학적 측면에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평소 알고 있던 잘못된 신학을 교정하라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태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진정한 겸손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신학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제일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40)는 것인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가 없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옮음을 인정받기 위해 그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낮은 자존감이 치유되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와 화해도 이루기가 어렵다.

 

둘째는 자신의 평가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라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과거의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부터 자신의 귀중함에 대한 가치를 부여 받으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거짓된 생각과 과거에 받은 상처를 통해 자아상을 비틀고 왜곡시키는 사탄의 속삼임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평가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목회자는 설교나 성경공부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자들의 낮은 자존감을 세워주고, 그러한 낮은 자존감을 심어주는 평상시의 잘못된 신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에 대해 건강한 자아상(self-image)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치유목회가 신자들의 낮은 자존감을 치유하고 진정으로 화해의 영성을 갖게 한다.

 

 

셋째는 성령님과 동역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재조정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우리의 자아상은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않고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변화는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자신을 깎아 내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성령께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마움을 표현한다.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힘들더라도 성령을 의지하여 도전해야 한다. 성령은 “양자의 영”(the Spirit of sonship)이다(롬 8:15).

 

성령이 충만할수록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이 회복되고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보혜사 성령은 진정한 치유자이시며 상담자이시다. 성령의 열매 중에 사랑, 화평, 자비, 양선, 온유 등의 열매(갈 5:22-23)는 화해의 사역과 관계있다. 성령 충만한 신자가 화해의 영성을 증진할 수 있고,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2.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영성목회: 순종훈련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영성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영성제자훈련은 관계성을 중심으로 영성훈련을 강화하는 제자훈련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모든 신자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제자도의 영성은 신적인 주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시작이 되고, 과거와는 단절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존재(being)와 행동(acting)을 성육(incarnating)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러한 제자도의 개념이 좀 실종된 느낌이 든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을 배워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실제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자이다. 제자의 핵심은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신뢰를 통해 전적으로 그분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진정한 화해의 영성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분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순종할 때 비로소 진짜 믿음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은 다른 삶을 살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것이요, 철저한 자기부인이 필요하다(눅 9:23). 자기부인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자기부인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자기부인은 자기의 미래를 통제할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대로 따르기를 결심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도, 화해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우리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분열과 다툼, 그리고 원수 맺는 것과 같은 육신의 일은 사탄의 영역이지만(갈 5:19-21), 용서와 화해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갈 5:22-24).

 

일반적으로 갈등해결(conflict resolution: CR)은 사람들이나 기관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화해시키는 방법인데, 갈등의 사안에 따라 적어도 7가지의 CR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촉진자(facilitator), 치유자(healer), 전문가/자문가(expert/consultant), 심판자(arbitrator), 행정가(administrator), 완충자(buffer), 처벌자(penalizer)의 역할 등을 말한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러한 CR의 역할들을 감당해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화해자라도 양 당사자들에게 그 신뢰와 권위를 얻지 못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갈등해소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최고의 권위를 드리고 그분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이 진정한 화해를 이끌어 낼 것이다.

 

 

3. 이웃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영성목회: 경청과 공감훈련

   

진정한 용서와 화해도 서로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때 이루어진다. 만약 목회자가 교회에서 평소에 의사소통에 있어서 경청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적절히 훈련한다면 화해의 영성을 고양(高揚)하여 미리 갈등을 예방할 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것이다.

 

(1) 경청훈련

 

경청(Listening)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면 훨씬 용서와 화해는 가까워질 것이다. 성경에서도 경청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있다. 야고보서 1장 19절-20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고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는 행동이 바로 화해의 첫 걸음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그는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되고, 그의 슬픔, 고독, 좌절, 우유부단, 죄책감의 짐을 함께 나누게 된다.


훌륭한 경청은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말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숨겨진 메시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적극적인 경청을 해야 한다.

 

수동적인 경청은 상대방이 말을 하는 동안에 속으로 자신의 반응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러버리는 것이다. 적극적 경청은 상대방이 한 말을 바로 되묻거나 자신의 말로 변형하여 대답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경청은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2) 공감훈련


공감(empathy)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분을 함께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공감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셨고,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다.

 

고통과 슬픔은 나누면 반감(半減)되고, 기쁨과 행복은 나누면 배(倍)가 된다. 공감은 “상대방과 함께 느낀다.” “상대방의 감정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상대편의 관점에서 문제를 볼 수 있다면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상대편은 누군가 진심으로 자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서로 친화관계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된다.


위딩턴(Everett L. Worthington Jr.)은 용서에 도달하는 5단계의 피라미드 모델을 설명하면서 두 번째 단계로 공감(Empathize)을 말했다. 그는 공감이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용서하려면 가해자의 감정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의 힘든 처지를 어렵더라도 공감해 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의 노력은 고통에 인간의 얼굴을 입힌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동정, 긍휼, 아가페 사랑, 낭만적 사랑을 품을 수 있다고 했다. 워딩턴(Everett L. Worthington Jr.)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이 사라졌다고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공감이 생겨야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위의 기사는 한국실천신학회가 지난 2016년 2월 12~13일 부평 카리스호텔에서 '갈등과 화해(학제간 대화)'를 주제로 개최한 제59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화해에 대한 영성 목회적 고찰:교회 내 갈등해결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김상백 박사(순복음대학원대 실천신학 교수)의 연구논문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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