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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한국교회

성서적 교회상과 맞지 않는 메가처치 환상 버려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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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마당, ‘대형 교회, 그 신화를 넘어서’ 4월 정기포럼

 

생명평화마당은 “대형 교회는 한국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대형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신화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 신화들의 뿌리는 무엇이고, 과연 신학적, 교회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과연 교회와 사회에 유익한 것인지,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복음적’인지 묻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행사 취지를 밝혔다.

 

 

 

# 대형 교회의 넓은 길, 작은 교회의 좁은 길(박영신 박사,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1. 교회의 역사 안에는 ‘전도’해야 하고 ‘전도’를 통하여 기독교가 성장하고 부흥해야 한다는 오랜 가르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몇 천 명, 몇 만 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을 어느 하나의 공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확장이 대형 교회를 세우는데 있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성장을 겨냥했다면 그것은 적정한 교회의 성장이었다. 교회가 부흥하게 되면 힘을 모아 교회를 개척하여 지교회를 세워 독립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식이고 정도이었다. 아무리 교회가 성장하여 부흥한다고 해도 베드로성당과 같은 거대한 ‘대형’ 교회를 목표로 삼거나 꿈꾸지 않았다.

 

2. 교회가 초대형 교회로 나아가고자 한 일종의 거대주의는 산업화와 함께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성장’이라는 세속 가치의 오름세와 긴밀히 이어져 있었다. 이른바 ‘대형화 기획’은 우연하게 나타난 것도 아니며 무풍지대에서 잉태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마구 휘몰아가던 성장 정책의 드라이브와 성장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에서 몰아간 성장 정책에 모두가 도취되어 있던 시대에 성장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삶의 조건이자 성취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우선하는 가치란 아무 것도 없었다. 가난을 몰아내자며 모두가 들어섰던 성장을 향한 민족의 대행진은 가히 눈물겨운 역사의 행군이었다.

 

3. 이 길은 넓은 길이었다. 모두가 열광하고 모두가 욕망하는 성장으로 가는 이 길은 미어지도록 사람들이 모여드는 넓은 길이었다. 누가 경제 성장을 마다하며, 누가 부의 증식을 거부하는가?

 

이 세속의 욕망이 교회도 매혹시켰다. 모두가 교회 성장을 갈망하고 모두가 교회의 자산 가치를 늘이고자 안간힘을 썼다. 교인이 많아져야 교회 헌금도 많아지고, 대형 교회 예찬자들의 틀에 박힌 표현 그대로 그렇게 되어야만 뭔가 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이 교회를 뒤덮어버리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대형화라는 데 겨누어 있었다.

 

 

 

 

 

 

4. 교회 성장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거기에 광분해온 교회 성장의 기획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달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했던 그 범죄 행위에 심원한 뜻에서 연루되어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성장의 종교를 믿고 이것을 설파해온 자들은 하늘의 소리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소리를 전했던 것이다.

 

이들은 국가 권력이 일종의 국교처럼 만들어놓았던 ‘성장 종교’를 대변해가면서 그 종교와 뒤섞인 ‘성장’의 혼합 종교를 만들어 그것을 전파하였다. 교회의 성장을 이끈 자들은 십자가를 배경으로 한 교회의 강단 위에서 바로 그 혼합 종교를 전했던 것이다.

 

5. 대형 교회는 그 확장의 행태에서도 대기업을 모방한다. 교회가 백화점식으로 운영되는 것마저 재벌이 골목상권을 침해하는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을 정도이다. 교회마다 찻집을 꾸며놓다 보니 주변의 찻집은 손님을 빼앗기게 되고, 교회 안에 문화 공관을 따로 만들어놓다 보니 가까이의 문화 행사나 공연장 쪽에서 소원한 느낌을 갖게도 된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교인들을 위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그럴듯한 방침이 교인들을 그 울안에 가두어두는 꼴이 되었다. 이것은 교회 독점주의와 그렇게 먼 것이 아니다. 다원 사회 안에 든 교회로서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웃과 어울려 이웃의 일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울안으로 모여들기만을 원한다.

 

 

 

 

 

 

 

 

6. 성장의 종교 혼합주의에 물음을 던지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종교 혼합주의의 굴레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고기 가마 곁에서 떡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애굽 제국에서 살아도 좋다는 뒤틀린 경제주의에 저항코자 하는 사람들이다.

 

7. 작은 교회로 남겠다는 것은 단순히 교인 숫자의 크고 작음에서 구별되는 그러한 뜻에서만이 아니다. 작은 교회는 대형 교회와 구별되는 대안의 교회, 아니 ‘본래’의 교회이고자 한다. 한 마디로, 작은 교회 지향의 운동은 대형 교회가 표상해온 성장의 종교 혼합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이에 맞서는 대항의 가치를 표상한다.

 

이 운동은 성장 체제의 중심부 세력에 대한 주변부의 저항이고, 교회 안팎에서 군림하고 있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제공코자 하는 집합 결의이다. 오만한 성장 체제 밑에서 업신여김을 당하여 밀려난 저 변두리의 예언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체제 저항 운동이다.

 

8. 작은 교회는 교회 안에 모이는 숫자와 교회의 외형이 근본에서는 전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교회 건물 안에 모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 사람은 큰 교회 사람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 바깥 넓은 시민 사회의 마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그러기에 그 일이 큰일이라고 믿는다.

 

그 마당에서는 기독교/교회의 이름을 내걸고 안 내걸고는 전혀 중요치 않다고 여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따름이다. 그리하여 작은 교회에 속한 사람은 교회 밖으로 나아가 시민 사회에 적극 참여한다. 일당 십, 일당 오십, 일당 백의 선한 이웃이 되어 묵묵히 여리고 길을 걷고자 한다. 이것이 작은 교회가 열매를 맺는 방식이다.

 

 

 

 

 

 

# ‘메가처치’ 현상, 진단과 치료를 위한 단상(신광은 목사, 열음터교회 담임목사)

 

1. 1960년대를 전후로 새로운 차원의 대형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형교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교회(too big church)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교회는 한 주 평균 출석인원이 2,000명을 훌쩍 넘는 교회로서, 일부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형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예 건강한 교회요,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회의 표준인양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중소형 교회가 그러한 초대형교회를 지향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특이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이 새로운 교회를 대형교회라는 말로 담아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해서 생긴 용어가 ‘메가처치’다.

 

2. 전체 한국교회라는 차원에서 봤을 때 메가처치가 왜 문제일까? 그건 한국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퐁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블랙홀에서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다. 왜 못나오고 있을까?

 

그건 한국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거나, 분석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 처지를 제대로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거기서 나오든 말든 할 것인데, 그걸 못하니 못 나오고 있는 것이다. 메가처치 현상에 대한 판단중지 행위는 미필적 고의로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중지 행위는 앞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크기를 상대화시키는 태도 때문에 더욱 강화되고 있다.

 

3. 교회성장은 신학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현실이고, 먹고 사는 문제다. 소위 목회 현장의 문제다.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곳은 신학교 강의실이 아니라 목회 현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현장의 논리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더욱 불행한 것은 지금 교회 현장은 전쟁터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대포알이 휙휙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95년 이후 한국의 개신교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교회 수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년간 22%나 늘었다.

 

즉 시장은 점점 좁아지는데 경쟁업체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93%가 소형교회이니 성장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왜냐하면 소형교회는 성장이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교회성장을 위해 올인(all-in)하고 있다. 담임목사나 부교역자, 직분자들 뿐만 아니다. 온 교회 교인들이 전부 교회성장을 위해 헌신하도록 동원되고 있다. 이게 오늘날의 목회 현장이다. 한 마디로 전쟁터다.

 

 

 

 

 

 

4. 교회 간 경쟁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교회시장에서는 동종업종 거리 제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 건물 안에도 두, 세 개 교회가 함께 세들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남의 교회에다 자기 교회 주보나 전도지 꽂는 것은 예사고, 전도라는 미명 하에 다양한 수단으로 남의 교회 신자들을 유혹(?)하고 채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교회가 크면 좀 세련된 형태로, 작으면 좀 노골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 일명 양도둑질(sheep stealing)이라고 하는 행위는 현대 교회의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전도구역 다툼 때문에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체 이게 다 뭔가? 이건 아니지 않는가? 지금의 한국교회의 끔찍한 행태는 한때 면죄부를 발행해서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던 중세 가톨릭교회에 비견될만하다.

 

5. 우리는 다시 교회론과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필자는 미로슬라프 볼프(Miroslav Volf)의 교회론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 가장 포괄적인 정의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를 제안했다. 교회는 역사의 끝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인데, 그 새 창조가 미리 선취된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표지(sign)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맛보기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 있기는 하지만 교회는 어쨌거나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의 현존이다.

 

 

 

 

 

 

6. 메가처치를 대체할 만한 성서적이고 건강한 교회상을 개발해내야 한다. 각 교단들의 이해관계와 그들이 헌신하는 전통이 이러한 교회상의 개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교회상의 개발은 에큐메니컬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러한 교회상이 개발되고, 구체적인 모델을 적용하거나 발굴해낼 수 있다면 교회들에게 이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고 여기에 헌신하도록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1%의 메가처치가 그렇게 될리는 없겠지만 99%의 비메가처치는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만일 99%의 비메가처치들만이라도 그러한 교회상에 헌신하기만 한다면 메가처치 현상은 저절로 극복될 것이다.

 

* 위 내용은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가 지난 2013년 4월16일 오후 7시30분 명동 청어람에서 ‘대형 교회, 그 신화를 넘어서’를 주제로 진행한 4월 정기포럼에서 발제자들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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