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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성경과 신학

[고난받는 교회 ①] 한국교회 현재 고난은 ‘응보적 고난’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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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고난의 현주소 / 김진규 교수

 

2014년 10월 14일 기사

 

현재 한국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다. 사실 개혁은 고난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개혁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현재 겪는 고난에 대해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 스스로 자기욕심에 끌려 고난을 자초했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국개혁신학회가 지난 10월 11일(2014년)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개혁신앙과 고난 받는 교회’를 주제로 제37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국 교회 고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개혁신앙에 근거한 참된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 마련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을 '고난받은 교회' 연재형식으로 일부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주>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고난의 현주소/
  김진규 교수(백석대)

개인이나 공동체가 고난을 당할 때, 많은 질문들이 생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 누가 고난을 불러왔는가, 고난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왜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허용하셨는가?” 등이다.

 

2014년 4월 14일 진도군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왔는가’라는 질문을 수많은 사람들이 던졌다. 신앙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을까’라고 물었다. 어떤 목회자는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후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해일로 인해 1만9천여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됐을 때,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침수사고로 인해 지금도 방사능물질이 유출되는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당시의 어떤 목회자는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했다.

 

과연, 하나님의 경고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의 원인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동안 많은 고난들이 있었고, 그에 따른 고난에 대한 해석 또한 다양했다.

 

요즘 한국 교회의 교인 숫자가 날로 줄어드는 현상은 한국 교회의 분명한 고난의 징표다. 기윤실이 조사 발표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또한 참담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짓밟히는 불명예를 당하고 있는데 고난이 아니겠는가?

 

왜 한국 교회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번쯤은 던져봤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정확한 원인 규명은 쉽지 않다.

 

우리는 고난의 원인이나 의미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고난을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인간의 좁은 머릿속에 모두 집어넣으려는 시도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원인이나 의미에 대해 성경이 전혀 함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관점을 갖어야 한다. 개인이나 공동체를 위해 정말 중요하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보면서 기뻐하며 인내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고쳐야 할 점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 고난에 대한 성경신학적 관점

 

성경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됐고, 인류에게 고난이 왔다고 가르친다(창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을 ‘죄’(마 1:21)에서 뿐만 아니라 ‘고통과 부패와 죽음(롬 8:21, 고전 15:26)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인간의 모든 고난도 마침내 제거된다(계 21:4). 인간타락과 주님 재림의 중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죄와 고난이 끊이지 않는 고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인간은 질병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영적 존재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경은 고난에 대해 ‘수정된 이원론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원인자이시다(사 45:7, 암 3:6). 하나님은 사단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고(욥 1:12~2:6), ‘거짓말하는 영’으로 하여금 아합을 유인하게 하셨다(왕상 22:22 이하). 성령은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시도록 이끄셨고(막 1:12 이하), 사단은 예수께 베드로를 밀 까불 듯 하도록 요청했다(눅 22:31~32).

 

인간에게 찾아오는 모든 고난의 출처가 어떻든 간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에 대해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응보적 고난 △훈계적 혹은 교육적 고난 △구속적 고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등으로 나눠 설명하고자 한다.

 

 

1. 응보적 고난

 

포로기 이전에 가장 두드러진 고난에 대한 신학사장은 응보교리일 것이다. 단순히 표현하면 죄를 지으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오경의 주된 사상이고, 포로기 전의 선지자들의 주된 사상이고, 신명기 역사가의 주된 사상이다. 아니 응보사상은 종교의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다.

 

포로기 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죄와 벌에 대한 견해는 집단성이다. 한 사람이 죄를 범해도 집단적인 책임을 묻는 경우들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는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파장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죄의 결과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고통을 겪었다.

 

예를 들면,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함께 고통을 당했다

 

(수 7:1~26). 아버지의 죄는 자손 3~4대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출 20:5~6). 무엇보다 죄에 대한 처벌의 집단성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다.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 모두는 원죄를 지닌 죄인으로 태어나게 됐다. 같은 집단성의 원리 때문에 왕의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고통으로 몰고 갔고, 결국 국가의 응망을 좌우했다.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 따른 처벌의 집단성에 대해 불평을 하자(겔 18:1~2), 하나님은 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신다(겔 18장, 렘 31:29~30, 신 24:16). 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응보신학적 관점이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기계적 응보교리를 한편으로는 강하게 부정하는 말씀들을 하셨다(눅 13:1~5, 요 9:1~3). 그렇다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응보의 사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어떤 질병은 죄의 결과 때문에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도록 경고하기도 하셨다(요 5:14, 막 2:5~12). 엄격한 기계적인 응보사상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처럼 신약성경은 피하지고 있지만 여전히 응보사상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되고, 의인은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가르친다(마 13:49~50, 25:32~46). 신약의 응보교리는 최후의 심판의 때 악인들의 심판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진다(계 21~22장, 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2. 훈계적 혹은 교육적 고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사상이다. 대표적인 말씀은 아마 잠언 3장에 나오는 말씀일 것이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리라”(잠 3:11~12).

 

시편 119편에 나오는 말씀들은 교육적 고난의 대표적인 실례가 될 수 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야고보 1장은 ‘믿음의 시련’을 견디어내는 자는 결국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교육적 고난의 경우에 합당한 대응책은 고난의 과정을 인내로 ‘견디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는 ‘욥의 인내’를 고난당하는 자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약 5:11).

 

로마서 5:3~5도 고난의 교육적 가치를 잘 드러내는 본문 중 하나다. 환난은 결국 우리의 성품 가운데 인내, 연단, 소망과 같은 아름다운 인격을 구비하도록 돕는다. 히브리서는 심지어 고난의 교육적 가치를 예수님께조차 적용하고 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은즉”(히5:8~9).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징계의 필연성까지 주장하고 있다(히 12:8~11).

 

징계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게 하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또 하나 ‘믿음의 시험’을 위해서 주어지는 고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믿음의 시험도 시험 당하는 자로 하여금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3. 대속적 고난

 

대속적 고난의 대표적인 예는 이사야 52:13~53:12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고난이다. 구약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고난의 종’이 당시 선지자인가, 집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인가, 혹은 미래의 구원자인가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갖고 있지만 신약의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인간이 당한 모든 고난을 겪었다. 배고픔, 피곤함, 십자가의 징계와 같은 육체적 고난도 당하셨고, 사랑하는 자의 죽음(요 11:35)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눅 19:41) 감정적 고난도 당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침묵 속에 처절히 절규하는 정신적, 영적인 고통도(막 14:34) 당하셨다.

 

이사야 53장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메시야 예수의 고난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을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대속적 고난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오직 무죄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대속적 고난을 당할 자격이 있다.

 

4. 구속적 고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다. 복음을 위해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복음을 듣는 이들을 구원하기 때문에 구속적 혹은 구원적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죄인들이 당하는 ‘구속적 고난’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당하신 ‘대속적 고난’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고난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다른 사람을 대속하기 위한 고난이 결코 아니다. 단지 그들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관점에서 다분히 구속적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구속적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세는 고난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자신을 즉시 죽여 달라고까지 하소연하기도 했다(민 11:1~15). 그리고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미가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구속적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선지자 중에 하나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이라는 관점 외에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제자도의 가르침과 연속선상에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고난의 요청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구속적 고난이다. 바울서신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빌 1:29).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교회공동체도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바울은 심지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을 그리스도인을 위한 소명”으로 여기고 있고(롬 12:15), 예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복음 전파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5.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욥기의 서론을 보면 독자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사탄의 시험에 의해서 고난당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욥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당한 고난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이다. 욥기의 많은 부분은 ‘왜 욥이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욥에게 그가 고난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욥이 당한 고난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교육적 의미(욥 23:10)가 있음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욥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욥기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욥과 같이 의로운 삶을 살았던 자에게 갑자기 재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욥의 친구들이나 욥 자신처럼 응보적 고난관을 갖고 접근하게 되면 더욱 고난을 더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비록 답을 깨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섭리를 수용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도록 욥기는 ‘의로운 고난자’를 위로한다.

 

#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고난과 해결책

 

현재 두드러진 한국 교회의 고난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한국 교회와 도덕성의 추락으로 인해 불신과 멸시, 조롱을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기윤실이 조사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속에서 교회의 부정적인 평판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주된 요인은 네 가지다. 교회 세습, 교회헌금의 유용과 배임, 탈세, 성추행의 문제, 논문표절과 대필의 문제 등이다. 이것들은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로서 그동안 고통을 안겨주고, 교회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하는 동기와 배경에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이기주의와 권력지향주의, 헛된 명예추구 등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세속화 사상들은 결국 십계명과 같은 기본적인 계명들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기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죄악들이 맺어놓은 열매는 결국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정의롭지 못한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당하고 있는 치욕과 멸시와 같은 고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첫째, 그 답을 철저한 응보신학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외치면서 회개를 촉구했던 선지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사 1:18~20, 렘 18:8~11: 26:13; 36:3, 겔 3:19~21; 18:14~17). 인간은 누구나 연약해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죄를 범하는 자들의 공통된 모습은 설교로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죄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고 가거나 뭔가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이런 자기합리화는 회개의 길조차 막아버린다. 잘못된 동기나 배경에서 나온 모든 잘못된 관행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고치는 길만이 자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이다.

 

둘째, 개혁주의가 강조한 ‘율법의 제3의 용도’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율법의 제3의 용도는 교회의 진정한 거룩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율법은 죄인들의 죄를 깨닫게 해서 회개케 하는 기능(제2의 용도)도 하지만 현대 교회의 문제를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은 율법은 곧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기 때문에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제3의 용도)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병폐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십계명들을 이중삼중으로 어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십계명의 준수가 하나님의 뜻을 개인의 삶과 교회를 통해 이룸을 알고, 적극적으로 지키는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한국 교회가 현재 당하는 고난의 주된 요인은 ‘응보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철저한 회개, 개혁신학이 강조해온 율법의 제3의 용도로써 십계명을 가르치고 준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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