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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 박사가 말하는 ‘내러티브로 읽는 구약윤리’ 본문

성경과 신학

전성민 박사가 말하는 ‘내러티브로 읽는 구약윤리’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14:01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지난 16~18일 여름특강 진행 / 2014년 7월 18일 기사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진행한 여름특강에서 전성민 박사는 '내러티브로 읽는 구약윤리'를 주제로 강의했다.(사진제공:느헤미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인 전성민 박사. 그가 영국 옥스퍼드출판사에서 발간한 연구서인 ‘윤리와 성경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강좌를 진행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하.나.의.교회에서 진행한 ‘내러티브로 읽는 구약윤리’라는 여름특강에서다. 총 세 번에 걸쳐 진행된 전성민 박사의 강의내용을 일부 정리해봤다.

우선 내러티브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 내러티브(Narrative)는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 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는 오직 문자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이 언술이 영화에서는 이미지, 대사, 문자, 음향 그리고 음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영화에서의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조직하기 위하여 채택되는 전략, 약호와 관습을 (미장센과 조명 등도 포함해) 지칭한다. 흔히 스토리텔링(storytelling)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실제 이보다 더 큰 범위를 의미하는 것이다(인터넷 정보 참조, http://heynbye.egloos.com/334661).
 
# 담화분석에 토대를 둔 문학비평을 이용한 구약 내러티브 연구는 무엇인가?
 

   
▲ 전성민 박사(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 ⓒ 데오스앤로고스 DB

전성민 박사는 “구약의 내러티브는 구약윤리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장르”라며 “지금까지 구약윤리 연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내러티브가 무시됐거나 최소한 소외되어 온 장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약윤리의 주된 논의 대상은 사실 율법, 예언서, 혹은 지혜문학들이었다. 전 박사는 “지혜문학의 경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규범적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다”며 “따라서 윤리라는 것이 어떤 원칙들에 근거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대대해 이해되어진다면 그러한 규범적 원칙들을 비교적 용이하게 추출해 낼 수 있는 장르들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그렇지 못한 내러티브는 단지 추출된 원리들이 어떻게 작용되었는지에 대한 실례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있게 된다”며 “그러나 윤리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가질 때, 내러티브는 구약윤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피력했다.

전 박사에 따르면 구약윤리에 대한 내러티브라는 접근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내러티브를 읽는 것은 독자의 윤리적 지각력을 내러티브의 세계 속에서 ‘연습’함으로써 실제 삶에서의 윤리적 지각력을 증진시키고, 실천적 지혜를 성숙시키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러티브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원이라는 것이다.

전 박사는 “내러티브의 윤리적 진가는 그것으로부터 보편화된 일반적 원칙들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생하게, 삶과의 유비성을 놓치지 않고, 즉, 그 안에 담긴 여러 개별성을 무디게 만들지 않고 읽어낼 수 있을 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러티브를 윤리적 논의에 의미있게 사용하라면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적용에 관한 부담을 벗어야 할 뿐 아니라 좀 더 치밀한 서술이 필요하다. 특히 내러티브를 윤리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내러티브가 갖는 실재 삶과의 유비성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존재하는 등장인물들과 그들 활동의 무대가 되는 플롯 구성에 대한 치밀한 문학적 읽기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전 박사는 “담화분석에 토대를 갖는 문학 비평적 읽기가 그렇지 않은 읽기보다 더 치밀해 좀 더 객관적인 토론의 대상이 된다. 담화분석의 중요한 주제들로는 결속성, 일관성, 평가, 문장 간에서의 동사의 기능, 관여자 지시어 등을 들 수 있다”며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논의가 문학적 읽기의 객관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전 박사는 “담화분석의 도움을 받아 객관성을 증진시킨 문학적 읽기를 통해 내러티브의 특수한 개별성들이 뚜렷하게 서술될수록 그것과 실재 삶과의 유비는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보편적 원리를 추출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각 내러티브 속에 담긴 개별적 특수성을 가장 생생하게 읽어내는 것이 구약 내러티브 윤리연구의 핵심이 된다”고 덧붙였다.
 
# 어떻게 내러티브를 윤리적으로 읽을 것인가? (강의요약본)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연구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1) 누스바움의 통찰이 소개되기 전의 연구들 (Birch, Janzen); (2) 누스바움을 소개한 연구 (Barton); (3) 누스바움의 이론을 다룬 연구들(Wenham, Parry, Gorospe). 이 연구들의 장단점을 살펴보면 구약 내러티브를 윤리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 번째, 필자의 연구에서 사용하는 내러티브의 개념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다. Birch가 신앙 공동체의 도덕적 삶을 위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논의했는데, 그럴 때 그의 논의는 문학으로서의 개별적인 내러티브들이라기 보나 메타내러티브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는 개별적인 내러티브를 읽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필자의 관심은 개별적인 내러티브의 특수한 특징들을 무디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메타내러티브의 윤리적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내러티브들을 읽는 것이다.

두 번째, 필자가 제안하는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는 내러티브에서 추상적인 원리나 덕을 추출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 아니다. 누스바움 이전에 얀젠은 이야기들이 윤리적으로 의미있게 되기 위해 그것들이 추상적인 원리들로 환원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추상적 원리들의 자리에 그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의 패러다임은 다양한 이야기들의 모델적인 측면들을 종합한 이미지를 말한다. 그는 패러다임을 체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패러다임적인 성품에 따러 행동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상황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잔젠의 패러다임도 여전히 모델적이지 않은 측면들을 제해버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추상화다. 따라서 그러한 패러다임적 인물들은 실재 세상이나 내러티브 세상 안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잔젠의 패러다임적 접근이 이야기의 윤리적 중요성를 발휘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변화라는 것은 독자들이 자신들을 등장인물들과 동일시 할 때 가장 영향력있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질문을 웬함이 내러티브를 다룬 방식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다.

웬함이 구약 윤리를 위해 내러티브가 유용하다는 것은 일정하고 그것과 관련해 누스바움을 언급하지만, 그의 접근법, 즉 구약 내러티브에서 일반적인 덕들을 “증류”시키는 것은 내러티브의 장르적 특징을 최대한으로 활요하는 것이 아니다. 내러티브의 장르적 특징이라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 삶의 모호함과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 번째, 필자의 연구에서 구약의 윤리적 읽기는 문학으로서 내러티브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특징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어떤 요소들을 일반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접근들과는 대조적으로, 누스바움은 윤리를 위해 내러티브를 읽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그녀의 논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도덕적이다라는 말은 계속 변화하는 특정한 상황들을 지각하는 실천적 지혜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들은 특정한 것들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하며 실천적으로 지혜롭고 윤리에 익숙하다는 것은 윤리적 즉흥연주에 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가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때, 문학은 철학본문들 보다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이 된다.

독자들을 그러한 지각을 훈련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훈련은 가능하며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문학만이 인간 삶의 윤리적 복잡성을 적절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필자의 윤리적 읽기의 실제 형태는 “running commentary”일 것이다. 앞에 설명한 세 특징을 담고 있는 윤리적 읽기를 반영한 읽기다.

다섯 번째, 그러한 주석을 작성하는데는 “본문에 예민한 방법론”이 요구된다. 여기에 담화분석에 토대한 문학적 읽기가 유용하다. 구약 내러티브는 문학적 작품일 뿐 아니라 언어적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 요시야 이야기의 윤리적 읽기(강의요약본)

우발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순종과 역사의 주관자인 여호와의 자유

요시야 이야기는 삶 속에 있는 우발적인 사건들로 시작하고 끝난다. 율법책을 발견한 것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 나라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사실상 유다 자체의 상황은 그 발견으로 인해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바뀐 것은 상황에 대한 요시야의 인식이었다. 위기는 바깥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요시야가 자신의 옷을 찢게 만든 것은 외국의 군사적 공격과 같읕 외부적 위기가 아니었다. 위기는 요시야가 자신의 상황을 율법책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드러났다.

관점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위기가 이미 그의 나라의 온 구석에 온 역사를 관통하며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요시야는 그가 새롭게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인식하게 된 위기에 대해 여호와에게 묻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염려에 함께하지는 않았다.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이 예기치 못했던 현실을 직면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들은 그들이 조작할 수 있는 위안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듣기를 두려워했던 것을 듣는다. 그곳은 예루살렘 둘째구역-말하자면 북옥스포드 같은, 또는 서울이라면 강남에-에 살고 있었던 훌다였다. 훌다는 요시야가 자신의 신하들을 보내면서 사용했던 표현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요시야의 염려를 확증했다.

요시야는 그의 시대의 평화에 대해 말한 훌다의 두 번째 예언에 만족했을 수 있다(왕하 20:19의 히스기야 참고). 그러나 그는 자신 뿐 아니라 그의 백성에 대해 염려했다. 평화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다했다. 언약을 새롭게 하고 예루살렘과 벧엘에서 솔로몬 시절에서 므낫세 시절에 이르며 발생했던 모든 이교 제도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유월절 축제를 행했다.

요시야는 자신의 개격에 대한 노력이 여호와를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했었을까?(왕하 20:7의 히스기야의 회복 참고). 요사야가 벧엘의 제단을 허물었던 것이 예언의 성취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역사를 자신의 뜻을 따라 운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광범위한 개혁이 하나님의 주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예언된 운명에서 구출해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벧엘에서 행해진 요시야의 개혁의 역설이다. 마침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은 역사의 길을 바꾸지 못했다. 그가 좋은 왕일 수록 유다의 운명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요시야 이야기는 그의 삶에서의 마지막 우발적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미스테리하고 예기지 못하게 죽었다. 요시야는 전심으로, 온 영과 온 힘을 다해 돌이키고 모세의 율법을 순종했던 최고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종이 자동적으로 그의 나라를 심판에서 구원하지도 자기 자신이 삶에 가득한 우발성의 희생자가 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순종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순종은 여전히 삶의 우발성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자유는 역사를 주관하는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 위의 강의요약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보내온 자료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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