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오늘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부활하신 주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주시며,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라는 말씀을 하셨다.
한국신약학회(회장:이민규 박사, 한국성서대 교수)가 지난 9월 23일(토) 오전 10시 한국성서대 복음관에서 정기논문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제자 중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a): 라이언 일병 구하기?, μὴ γένοιτο>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김형동 박사(부산장신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사회적, 경제적 관점을 넘어 정치적 종교적 관점의 비유로 읽힐 수 있다고 말하면서 주인의 뜻과는 달리 빚/잘못에 고리대금의 이자를 얹어주며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와 더불어 불의함을 칭찬하는 비유의 급진적 서사(용서와 화해를 통해 비유의 관계적인 속성)가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임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현재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종말론적, 사회경제적, 누가신학적 접근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지만 각각의 해석은 나름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면서'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비유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철저한 관계, 그리고 엉뚱함
김 박사는 "최근의 몇몇 연구들은 청지기는 불의하게 행하지 않았고(16:5-7),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청지기직을 통한 자신의 몫을 삭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라며 "이러한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적 흐름을 비켜간다"라고 진단했다.
즉, 이 비유 내에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것,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문학적 긴장관계가 있는데, 청지기의 행동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것과 분명한 상관성이 있다는 것.
반면, 김 박사는 "비유는 엉뚱하게도 주인이 이 청지기를 칭찬하였다는 말로 끝이 난다. 특별히 ‘엉뚱성’은 예수 비유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비유의 긴장 한복판에 놓인 특징이다"라며 "예수님은 곧 인습적인 안정의 종말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높은 이자율의 고리대금
특히 김 박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접근하면서 "당시 가신 계급에 속한 이들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며, 착취, 정의와 자비에 대한 무시, 무거운 짐을 지우는 행위, 살인적 의도에 대해 비난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청지기 비유는 주후 1세기 팔레스틴의 정치, 사회, 경제적 무대를 그 배경으로 한다"라며 "가장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은 주인은 지주이며, 청지기는 모든 일상적인 거래를 위임받는 자로 경영을 책임진 대리인이었다. 소작-농부들에게 땅을 빌려주거나 물품을 대여함으로써 원금과 이자와 수수료를 받는 것은 고대 근동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고리대금과 심지어 이자를 받는 것까지도 금지하고 있으나 실제로 고리대금의 비행이 자행되었다"라며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숨겨진 이자의 형식으로 원금과 이자가 합쳐진 총액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또는 이자가 아닌 증가액의 형식으로 임대료를 부가한 총액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엉뚱한 주인의 행동
김 박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앞장인 15장에서 나타난 '탕자의 비유'와 구조적인 유사성을 가진다. 15장에 나타난 탕자의 아버지는 이상한 아버지다. 특히 첫째 아들의 불평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고 그를 달랜다. 아버지는 도덕성에도 재산에도 권위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언제라도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내팽개칠 각오가 되어 있는 아버지였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 또한 엉뚱한 주인이다. 비유에서 주인은 자신에게 빚진 자들에게 청지기가 한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이를 알고서도 청지기가 결과적으로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점을 칭찬했다"라며 "예수님은 이 엉뚱한 주인을 통하여 당시에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는 지주 혹은 세금과 공세로 피지배 민족을 수탈하는 제국과 이와 영합한 예루살렘의 지배 계급(엘리트)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주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낭비, 해고, 칭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김 박사는 "청지기는 자기 살길을 찾고자 빚진 자들에게 채무액을 삭감했다. 그로 인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해서 결국 해고를 당하게 된다"라며 "하지만 주인은 청지기를 칭찬한다. 이 비유에서 청지기를 불의한 자로 묘사한 것은 그가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그릇되게 행사한 것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의 뜻이 명령과 규준으로 규정된 율법을 전제하지만 빚/잘못은 주인과 종,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라며 "예수가 주창하는 것은 빚/잘못을 용서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선하심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김 박사는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설명했다. 그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종은 주인의 권위에 대항한다. 비유는 분명하게도 메시아적 함의를 가진다. 이처럼 막대한 빚의 탕감은 희년의 희망이 성취된 것을 함의한다.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종은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신성한 것을 범한다. 종이 할 일은 주인이 한 것처럼 자비/용서를 베풂에 있다. 하지만 종은 다른 동료에게 채무를 변제하라 고 요구하고 형벌을 가한다"라고 역설했다.
예수님의 비유가 그리는 세계
김 박사는 "성서의 비유에서 흔히 주인은 하나님을 함의한다. 청지기 비유에서도 주인은 하나님이다"라며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빚/잘못된 고리대금은 주인의 뜻이 아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자산을 허비한 일은 단지 사회경제적 의미에서의 금전적 빚이 아니다. 오히려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않고, 주인의 명예라는 자산을 허비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오히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의 안위를 위해 빚/잘못한 자들의 이자를 제하였을 때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예수의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성전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다. 바리새인들은 볍률상의 구멍을 통해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법망을 피해 갔다. 여기서 청지기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집에서 율법을 맡은 자라는 언어유희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성전-국가 제도 하에서 율법을 맡은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였다. 그 청지기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잘못을 죄로 규정하고 죄의 고리대금, 곧 고리대금의 이자를 얹어준 ‘불의한’(τῆς ἀδικίας) 청지기였다"라며 "죄가 사함받았다는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성전 제사장들은 죄용서의 선포 대신에 죄의식을 심어주고 수많은 죄인을 양산했는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와 같이 권력의 지도층들(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공격의 비유이다"라고 역설했다.
즉, 유대 율법이 엄격히 금지한 청지기가 행한 ‘고리 대금업’은 애초부터 주인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 이 비유는 율법의 이름으로 십일조와 성전세를 요구하였고, 성전제도라는 이름 하에 거룩의 개념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아 의를 독과점함으로써 무고한 죄인들을 양산한 당시의 엘리트 계급을 향한, 특별히 가신 계급인 바리새인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청지기 비유는 관계를 말한다. 주인이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해서 칭찬했다는 마지막 결론은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오늘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라며 "부활하신 주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주시며,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라고 말씀하신다"라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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