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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한국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한국장로교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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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사회와 장로교회 / 오덕교 교수(합신대)

 

“장로교회는 은둔의 나라를 계몽해 근대 국가로 세웠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 잃은 한 민족의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독립 운동을 이끌거나 후원하였고, 신사참배에 대항하면서 민족의 자존심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사회적 공헌에 대해 연구한 오덕교 교수는 “해방 후 신학적 입장 차이, 지방주의, 그리고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1970년대에는 민족 복음화 운동에 힘입어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부흥을 체험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부흥운동 이후에 나타난 교단의 분열 운동, 교회성장신학의 확산과 편파적인 인재의 활용, 그리고 개교회주의 운동 등으로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한국 장로교회가 다시 한 번 부흥을 체험하고, 교회 역사의 주역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덕교 교수는 △교회의 세속화 지양 △차세대 준비 △인재와 재정의 적절한 배치와 분배 △남북통일 △교단의 통합 등의 시대적 사명을 제안했다.

 

 

 

 

 

 

 

 

그의 연구목차는 다음과 같다

 

시작하는 말
Ⅰ. 조선 왕조 아래서의 장로교회(1883~1910)Ⅱ. 일제 하에서의 장로교회(1910~1912)
1. 총회의 설립과 장로교회의 사역
2. 신비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3. 신사 종교의 도전
Ⅲ. 해방 이후의 장로교회
1. 교단분열 운동
2. 민족복음화와 사회참여
3. 1970년대의 대부흥운동
4. 교회성장 신학의 도전
5. 한국장로교협의회와 정체성의 회복
맺는 말

 

 

 

 

 

 

# 연구내용 중에서

 

1. 한국 장로교회는 130여 년의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 교인의 70% 이상이 장로교 신앙을 고백하게 됐다. 개인적 혹은 기관별로 장로교회로 적을 옮기는 일들이 자주 있는데, 이는 장로교회가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것을 반증해 준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볼 때, 장로교회의 역사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1912년 총회를 설립한 이래 이제 10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됐다.

 

2.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한국인에 의해서였다. 최초의 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고, 한국인에 의해 번역된 성경을 통해 기독교가 정착됐다.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후, 속속 들어온 선교사들이 새싹에 물을 줌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됐다. 장로교회는 근대화를 위한 선구적 역할을 감당함으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 첫째로, 현대적 의료 제도의 도입이다. 이는 의료 선교사 앨런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1884년 12월 8일 갑신정변으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임금의 신임을 얻었고, 1885년 4월 9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을 설립하는 등 현대적 의료제도를 한국에 소개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선교 병원이 세워졌으며, 기독교와 서양인에 대한 의혹과 편견이 불식되고, 복음 선교의 기반이 구축됐다.

 

4. 둘째로, 구습과 미신의 타파와 위생생활의 보급에 앞장섰다. 장로교도들은 술과 담배, 아편이 재산 낭비뿐만이 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범죄의 요인이 된다고 보고, 금주와 금연 등 절제 운동을 전개했으며, 사람과 집, 나라를 망하게 하는 아편도 경계했다. 장례식에서의 번거롭고 불합리한 것과 같은 허례허식을 비판하며 장례식의 간소화를 계몽했다.조혼 제도의 폐해, 부모가 결혼 대상을 정해 줌으로 오는 해악을 비판하며 결혼제도의 변화도 시도했다.

 

 

 

 

 

 

5. 셋째로, 사회 제도의 개혁이다.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신분제도, 초혼, 축접 등의 봉건제 악습을 폐지했다. 장로교의 무어 선교사(Samuel F. Moore, 1846~1906)는 조선시대 7대 천민가운데 하나인 백정에게 전도해 공당골교회(승동교회)를 세웠고, 신분 차별 폐지운동을 벌였다. 그의 영향으로 1894년 7월 시행된 갑오개혁은 양반과 평민의 신분을 타파하고, 백정과 공대 등 천민 신분을 폐지하고, 공사 노비 제도를 없앨 뿐만 아니라 인신매매를 금하게 했다.

 

6. 넷째로, 여권 신장 운동을 전개했다. 장로교도들은 남녀평등을 가르치는 성경에 근거해 남존여비 사상의 철폐, 축첩 금지 등을 주장했다. 다섯째로, 한글의 보급이다. 장로교도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교회를 통해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장로교 공의회는 1893년 한글 전용정책을 전개해 한글을 대중화시켰다. 한글의 보급은 한국 사회에서의 문맹을 퇴치하고, 개화를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글 연구에도 앞장섰다. 1894년 게일 선교사는 ‘한국어 문법 형식’을 펴냈고, 1896년 ‘한영사전’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베어드 부인(W. M. Baird)은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이들을 위해 ‘50가지 도움’이라는 소책자를 냈다.

 

7. 여섯째로, 신교육 기관을 설립해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 1886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세우고,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를 설립해 신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8. 마지막으로,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끌었다. 문호 개방 이후 열방이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장로교도들은 국왕을 중심으로 뭉쳐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고종을 보호하였고, 애국 충군 운동을 벌였는데, 애국 운동은 국기 게양으로 진작됐다.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교회 명절에 십자가와 태극기를 교회당 좌우에 게양하고, 학교에서는 태극기를 달아놓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9. 장로교 총회는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 강당에서 목사 96명과 장로 125명 등 총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했다. 장로교 정치 원리에 근거해 총회 헌법을 제정했다. 장로교 총회는 일제의 강압기에 교회를 아우르면서 신앙적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10. 첫째로, 장로교회는 선교 운동을 계속하면서 한인 디아스포라를 지원했다. 둘째로,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셋째로, 경제 살리기에 앞장섰다. 조선물산 장려운동과 농촌 진흥을 위한 계몽 운동, 절제 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조만식 장로 등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한 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28년 농촌부를 신설하고, ‘농민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넷째로, 사회 개혁과 민족 정체성 지키기 운동을 주도했다. 1926년 제15회 총회를 통해 공창 제도를 폐지할 것을 촉구하는 등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11. 이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는 민족과 함께 고난을 당했고, 경제 살리기, 사회 개혁 운동을 전개해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1920년대 나타난 신비주의, 1930년대 일어난 신학논쟁,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의 도전을 받으면서 점차 맛을 잃어갔다.

 

12. 1920년대부터 혁명을 통한 민중 해방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치유와 신유 등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종교 체험을 중시하는 주관적인 신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가 확산되면서 장로교도들의 신앙은 체험중심적인 주관주의로 목회자들의 설교는 내세 지향적으로 바뀌어갔다.

 

13.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으로 장로교의 정체성이 힌들리게 됐다. 1930년대에 들어 김재준 목사가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고 성경무오 교리를 부정했도, 적극신앙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나타나 성경의 절대 권위를 부정했다. 점차 초대 선교사들에 의해 심어진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신앙을 거부하고, 이성과 상식 또는 체험을 중시하는 운동이 확산됐다.

 

14. 이와 같은 신학적 변화는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생긴 신학적 혼란을 틈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일삼는 교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때마침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15.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처리 문제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됐다. 출옥 성도들과 망명했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혁신 운동을 전개했지만 교권주의자(신사참배자, 친일파, 자유주의 신학자 등)들은 출옥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해 교단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아울러 신사참배를 정당화했다.

 

16.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인해 1952년 고신교단이 분열한 후, 1953년 기장의 분열이 있게 됐다. 그후 1959년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 1979년 합동 측 안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비주류에서 분열에 이은 분열로 한국장로교회는 200교단이 넘을 정도가 됐다.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17. 장로교회가 분열을 거듭한 배경은 첫째는 신사참배자 처리문제였다. 둘째는 신학적인 차이였다. 셋째는 지역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성경이나 역사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18. 하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분열 중에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크게 발전해 대중집회 시대가 열리게 됐다. 대중집회 운동은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나 민족복음화 운동, 전군 신자화 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이후 미국의 대중 설교가인 ‘빌리 그래이엄의 전도집회’(1973), ‘Explo 74’(1974), ‘민족복음화 대성회’(1977) 등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됨으로 한국 교회는 유사 이래 최고의 부흥을 경험했다.

 

19. 이러한 부흥운동의 불길은 부흥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합동 측이 교권 투쟁으로 1979년 이후 사분오열되며서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로는 쇠퇴기를 맞이하게 됐다.

 

20. 한국장로교회는 1970년대 대부흥운동을 체험한 이후 1980년대 정체기, 1990년대 이후 감소기를 보내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배를 수용하면서 열린예배가 장로교회 안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실용주의적 가치관으로 장로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21.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성경이 보여주는 원칙에 따라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00여 개로 나누어진 교단의 통합이다. 장로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분열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비판하면서 배척하고, 상호 간의 동질성을 발견하는데 앞장섬으로 가능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교리나 예배, 교회 정치에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으며, 그와 함께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일교단 다체제’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 위의 내용은 한국장로교신학회 논문집 제9호(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지1, 주제: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100년을 돌아보며) ‘장로교회와 신학’에서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특히 기사 형식을 제외한 모든 내용의 저작권은 해당 학회에 있음을 밝힌다.

오덕교, “한국 근대 사회와 장로교회”, 장로교회와 신학, 제9호(2012),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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