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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신사도운동 신학은 말씀의 신학으로 수정받아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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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운동을 열광적 은사운동으로 변질 위험성 /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여태까지 교회성장학자로 잘 알려진 피터 와그너는 2000년대 들어와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신사도적"이라고 부르면서 신사도들의 모임인 “국제사도연맹”을 결성하였다.

 

200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도미니언』(Dominion)에 의하면 현재 국제사도연맹에는 5백명 이상의 사도들이 소속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통사도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신사도적 교회가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위와 능력을 그대로 연속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초자연적 능력”을 강조하면서 기적이나 표적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의 갱신운동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사도교회는 전통교회와는 대조적으로 진리가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준다고 보지 않고, 반대로 “초자연적 능력이 진리를 응용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본다. 신사도교회는 정신(머리)보다는 마음(가슴)에 더 강조점을 둔다. 신사도교회가 초자연적 현상으로 언급하는 “성령 역사로 쓰러짐,” “영적 지역 조사,” “예언 활동” 등은 오늘날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현상들이다. 와그너는 신사도적 교회의 표본으로서 아프리카의 독립교회, 중국의 가정교회, 남미의 풀뿌리 교회를 들고 있다.

 

 

그리고 신사도적 교회의 9가지 특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새로운 이름, 새로운 권위 구조, 새로운 지도력 훈련, 새로운 목회 초점, 새로운 예배 스타일, 새로운 기도형태들, 새로운 재정, 새로운 전도, 새로운 능력 방향이다.

 

신사도운동은 이러한 9가지의 특징으로써 "미국 개신교를 개혁 내지 재발명"(reinventing American protestantism)하려고 한다.

 

신사도운동이 제시하는 교회갱신의 프로그램으로서 (1) 평신도 중심의 사역운동, (2) 셀 중심의 조직, (3) 찬양 경배, (4) 기도 형태의 역동성 (5) 넉넉히 드리는 헌금은 배워야 할 덕목, (6) 공격적 전도 등은 긍정적 측면으로서 전통교회가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측면은 기독교 복음운동을 열광적 은사운동으로 변질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1) 사도성 주장은 새로운 계시 운동 우려


신사도 운동이 주장하는 사도성(apostleship) 주장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하고 영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의 이러한 주장은 자칫하면 오늘날에도 새로운 계시가 가능할 수 있으며, 초대교회의 사도적 계시가 오늘날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열광주의 계시운동이 될 위험성이 있다.

 

신사도운동이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같은 권위와 질의 치유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 때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초대교회로의 되돌아감 이상으로 새로운 계시운동으로 변질될 우려성이 제기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신사도 운동”이란 용어는 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덕스럽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초대교회로 되돌아간다고 했을 때 자신들의 권위가 초대교회 사도들의 권위와 같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과 권위를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위의 기준 아래 비추어 중세교회의 변질된 교리와 예전과 교회조직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사도적 가르침과 권위, 즉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자신들이 사도적 계시와 권위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초대교회의 사도적 가르침과 권위로 되돌아 가자고 했던 것이다.

 

 

(2) 교회 권위가 목회자 개인 권위로 옮겨감


신사도운동은 교회의 권위보다는 목사 개인의 권위에 더 비중을 둔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목회자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공교회가 갖는 사도적 권위가 목회자 개인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의 공동체인 공(公)교회 개념은 약화된다.

 

거기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지는 권위는 목회자 개인에게 옮겨가게 된다. 와그너는 “오늘날 세계적인 초대형교회를 이룬 목회자 개인이 사도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종교개혁적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로서의 교회의 개념이 주관적으로 변모되고 탈공동체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진 개인 사역자 목사에게 이전된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도나티스트 논쟁(Donatist controversy)에 있어서 신앙박해 시 변절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교인들의 세례는 무효인가라는 논쟁이 있었다. 이에 공교회는 배교(背敎)한 목사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권위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부여한 직책인 목사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어느 개인 목사가 준 세례는 그의 변절(變節) 때문에 무효화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사도적 가르침과 권위는 전승되어 있으나, 사도적 직함이나 심지어 초대교회 사도를 대체할 수 있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적 가르침이 쓰여진 성경이 우리들에게 사도적 권위로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사도운동이나 신사도직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3) 찬양 경배, 쓰러짐 등 체험에 치우쳐 말씀 선포 등한시


신사도교회에서 드리는 공적 예배는 대중적인 공연과 혼동되고 있다. 예배 시 박수를 자주 보내는 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며, 설교자나 간증자가 경배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공연 성격의 예배 스타일이 칼빈이 말하는 바 외경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잘 음미해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리 구도자(求道者)를 위하여 예배의 스타일을 구도자의 눈높이로 낮춘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는 경건성의 표현과 기본적인 예배 순서가 있어야 한다. 주일 대예배만큼은 전통적인 예배순서에 따라서 정장(正裝)을 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격적인 하나님과 만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신사도교회 예배에서 찬양 시간을 너무 길게 잡는 것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찬양경배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말씀의 강론 시간이 짧아지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예배가 너무 이성에 치우치는 것도 문제가 있으나 신사도 예배처럼 너무 감성에 치우는 것도 문제가 있다. 찬양과 말씀 선포가 적절히 배합하여 신자들이 감성과 이성의 균형잡힌 태도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신사도운동이 쓰러짐 등 체험 위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신사도운동 전도자 베니 힌(Benny Hinn)은 1996년 그의 집회에서 초기 오순절 운동의 여성 사역자 마리아 우드워드 에터(Maria Woodworth Etter, 1844-1921)의 집회에서 쓰러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나이든 자매가 푹 쓰러지더니 몸이 차가워지면서 경직되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맥박이 뛰는 것만 제외하고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매를 강대상 소파에 눕혔습니다. 그날 내내 자매는 그곳에 누워 있었고, 저녁집회 때도 두 명의 여자가 같은 방식으로 쓰러졌습니다.” “복도 쪽에 있는 남자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그 남자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쓰러졌습니다...제가 뒤로 조금 물러나자 연단에 있던 목회자들 중에서 한 명이, 그 교회 담임 목사였는데, 두손을 들어 올리더니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죄인들에게 엄습했습니다. 목회자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제 피할 곳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사도 사역자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도 마찬가지로 “우드워드 에터가 성령의 통제를 받아서 그 모습 그대로 얼어 붙어서 3일 밤낮을 입신 상태로 서 있었고, 육체의 기능이 완전히 그녀를 보려고 3일동안 방문한 사람들이 무려 15만명이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쓰러짐의 현상은 서인도제도에서 기인했으며 미국 남부의 주술종교인 부두교나 퀘이커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복음 전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드워드 에터는 1920년 네브래스카에서 몰몬교도들이 설교를 해달라고 초청했을 때 그 초청에 응하여 설교했으며. 거기서 몰몬교도들을 회심시켰다는 보도는 없다.

 

기독교적 복음 전파는 외부적인 영적 현상의 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의 선포요 복음을 받는 자들의 내면적인 회심과 인격의 변화로서 행해진다. 초대교회 있었던 베드로의 복음 선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의 죽으심,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4) 공격적 전도는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신사도교회가 가난한 자, 버림을 받은 자, 노숙자, 불우한 자, 장애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이들에 대한 구제와 도움의 실천을 하는 행위는 매우 바람직한 선교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세력에 대한 공격적 전도는 한국에서는 조계사 경내에 땅밟기 전도라는 형태로 사용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는 능력 대결(power confrontation)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신사도운동가들이 지역의 영들을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권능으로 묶어 내쫓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 대결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어느 집단의 흑암 세력을 묶어 내는 축사(逐邪) 시에는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어느 특정 종교의 경내에 들어가서 그 지역의 영들을 묶어서 쫓아내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타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제도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고 참 종교와 타종교가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악이나 타종교는 하나님이 그의 때에 또는 최후의 심판 시에 판결하실 것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타종교와의 공존이라는 사회적인 덕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

 

 

(5) 초자연적 일을 지나치게 부각


신사도운동이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인정하면서 오늘날에도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가 임재한다고 증언하는 것은 성경적이며, 교회의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올바른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 베드로는 증언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그런데 신사도운동은 성령 사역의 “초자연적 측면, 치유, 귀신축출, 영적 전투, 예언, 성령의 역사로 쓰러짐, 영적 지역조사(영적 매핑, 도해)”등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구제와 나눔, 불우한 자들에 대한 긍휼, 중보기도 등을 제외하곤 성령의 윤리적 열매에 대하여는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성령의 역사로 쓰러짐, 영적 지역조사” 등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논쟁의 거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예언활동“ 등을 말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초대교회 정경과 같은 권위의 예언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게 될 때 이것은 신약정경의 기준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신약의 사도를 대체할 수 있는 신사도, 오늘날의 사도적 사역과 권위를 강조하게 되어, 기독교 전통에서 이탈하는 영적 교만과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배제할 수 없다.

 

 

맺음말: 말씀의 신학과 더불어 성령 은사에 대하여 열린 개혁교회의 겸허한 태도.


와그너는 사도적 교회와 오늘날 교회 사이의 불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속성만을 인정하여 오늘날 교회도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위와 사역을 그대로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신학적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그는 세계적 초대형 교회를 이룬 유명한 목사들을 오늘날의 사도들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세속적 번영과 성공의 양으로 측정하는 비성경적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체험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초시간적으로 불변한 진리인 성경의 계시에 따라서 우리의 종교적 경험을 해석하고 음미해야 한다.

 

신사도운동은 오늘날 신자들의 신비로운 체험에 비추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인간의 체험적인 지식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아직도 이들의 신학과 설교 형태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가 없는 실정이다. 신사도운동이 비판을 받는 것은 말씀선포가 약하고 그 삶의 성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운동에 대하여 은사중단론에 선 비판가들의 피상적인 비판에 근거하여 무조건 정죄만 하려고 하지 말고 이들의 일차적 자료들을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하여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바르게 제시하는 것이 요청된다.

* 위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2013년 6월7일 오후 4시 학술원 세미나실에서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제30회 월례발표회’ 발제문에 나온 김영한 박사의 ‘신사도운동 신학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수정받아야 한다’는 개회사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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