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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탐심의 밥상인가? 생명의 밥상인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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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창조와 환경'을 주제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76차 정기논문발표회가 개최됐다. 이날 설은주 박사(숭실대)가 '생태계 위기극복과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생명밥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주제로 교육분과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아래 글은 설 박사의 발표 내용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 사망의 독이 넘치는 밥상

 

우리의 먹을거리를 위협하는 4가지 요소는 유해식품과 환경파괴, 농사경시, 독점이다. 우리들의 음식문화는 글로벌푸드와 패스트정크푸드, 가공식품, 유전자 조작식품, 인스턴트실험식 식품, 가짜식품이 주를 이루며 식습관은 빨리빨리의 패스트(Fast)문화현상이 주를 이룬다. 

 

이것을 맥도날드화 (McDonaldization)라고 하는데 맥도날드의 특징은 뚝배기의 장맛이 전혀 없고 시간의 맥락을 상실하고 통제성, 신속성, 생태계의 돌봄이 전혀 없는 음식문화를 말한다. 패스트푸드로 지칭되는 음식은 햄버거, 샌드위치, 도너츠, 피자, 인스턴트 식품들이다.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는 식재료의 내역이 불명확한 정체불명의 음식들이 많고 튀긴 음식이 많으며 식이섬유가 적고 고지방을 함유하고 있다. 패스트푸드는 비만 뿐 아니라 심장질환, 위암, 유방암, 당뇨, 고혈압, 무수정증, 뇌출혈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패스트푸드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단절시키며, 계속 나쁜 음식을 확산시키며 사람들의 부실한 건강과 의료비용의 증대, 지역사회에 부정적 영향, 환경문제를 가져온다. 패스트푸드의 삼형제인 버거와 감자튀김, 탄산음료는 소금과 설탕, 그리고 지방맛의 중독성을 극대화시킨 음식들이다. 이러한 음식들은 소비자들의 입과 뇌에 맞추기 위해 연화, 염지, 당지의 과정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중독성이 있게 된다. 이렇게 중독성있는 식품을 먹으면 인간의 뇌에 헤로인, 아편같은 약물을 먹었을 때와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

 

 

# '탐심'은 무서운 죄

 

식도락의 즐거움, 음식에 대한 무제한적 욕망충족이 많은 이들을 먹기를 탐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죄- 탐식은 오늘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몸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영성신학에서 말하는 칠죄종(Septem peccata capitales)- 7가지 큰 죄인 자만 또는 거만, 탐욕, 정 욕, 즉 지나치거나 부정한 성적 욕망, 질투, 과식(과음도 포함됨), 노여움, 게으름 중의 하나인 탐식은 과다한 식욕으로서,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해 있거나 음식에 점령당한 상태 및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무절제한 욕망을 가리킨다.

 

음식에 대한 탐욕과 과식, 특정 음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금물이다. 그것은 영양의 균형을 무너뜨려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특정 식량자원의 고갈을 초래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식을 ‘먹는 것에서의 혼란’이라고 정의한다.

 

중세시대에는 탐식을 5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praepropere로서 너무 빨리 먹는 속식이다. 음식을 재빨리 허겁지겁 먹는 것, 음식의 맛과 향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것. 이 유형은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햇볕을 자란 작물과 과실, 땅과 바다, 농부들의 수고, 그리고 정성껏 요리하여 식탁에 차리는 이의 수고를 의식하지 못한다. 탐식자는 그저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둘째는 ardenter로서 너무 열심히 먹는 탐식이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은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말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셋째는 nimis로서 너무 많이 먹는 과식이다. 배가 부르지만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수저를 놓 지 못하는 것, 무한리필이 과식이다.

 

넷째는 laute로서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이다. 이는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 니라 보암직하고 세련된 정찬, 우아한 식탁의 느낌을 고집하는 것. 호식가들은 음식 자체 뿐 아니라 정서적인 만족감까지 중요시한다.


다섯째는 studiose로서 너무 까다롭게 먹는 미식이다.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외에도, 현대적 현상으로는 세계적 기아와 연결된 국가적 탐식, 계층적 탐식등 사회적 탐식이 있다.

 

탐식자는 무관심과 하나님, 사람들의 수고에 감사를 갖질 못한다. 오직 눈앞에 있는 음식으로 자기배를 채우고 만족시키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자기만족에의 탐식은 감사의 적이다. 이처럼 탐식은 우리의 영혼과 몸을 동시에 망친다. 우리 식탁이 탐식과 폭력의 식탁으로 변질되고 음식문화가 오염되고 낭비가 되면 주님의 영이 깃든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은 병들고 다른 생명도 해하고 땅도 물도 오염시키고 결국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오염을 가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하게 된다.

 

 

 

# 성경이 말하는 11가지 밥상

 

밥상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매일 먹는 먹을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라고 말한다. 음식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돌봄과 현존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태초의 농부이시며 훌륭한 농부의 원형이시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사랑이 농사를 통해 드러나게 하셨다. 

정경호 교수는 '성서를 통해 맛보는 생명의 밥상 평화의 밥상, 대한기독교서회, 2013)에서 성서가 말하는 밥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에덴의 밥상이다. 아담과 하와가 정성껏 가꾼 신선한 채소와 탐스런 열매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넘치도록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섭리를 맛보고 음미하면서 감사하는 은총의 자리이며 에덴의 밥상 속에는 지구적, 우주적 생명공동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담겨져 있는 밥상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시며 좋아
하신 지고의 기쁨의 밥상이다.

 

2.  환대의 밥상이다. 기독교적 환대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 중 하나이다. 환대는 사람들에게 가정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그들에게 기쁨과 새 힘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환대의 모습은 좋은 본보기이다. 아브라함은 낯선 이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대접했다. 바로 이것이 무조건적인 환대이며 신적인 환대이다. 

 

3. 만나의 밥상이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만나의 밥상은 모두가 평등한 밥상이요 모두가 넉넉한 밥상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 만나의 밥상은 과도한 물질의 축적을 금지하는 밥상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의 밥상은 모두에게 알맞은 밥상이며 약자, 곧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보호하는 밥상이다.

 

4. 축제의 밥상이다. 유월절, 민족의 해방을 기리며 즐거워하는 축제의 밥상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출애굽 고난의 때를 기억하는 밥상이요, 하나님의 해방의 날을 기념하는 밥상이다. 유월절 음식은 민족의 해방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명절의 잔치이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과 모든 생명공동체를 구원하여 주시고 천지를 창조하셔서 인간이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며 정의를 창조하셔서 모두가 함께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밥상이다.

 

5. 성한 밥상이다. 가난한 다문화가정의 여성인 이방여인 룻은 경제적 궁핍, 인종차별, 성차별을 극복해낸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 룻은 공동체 모두를 위해 생명을 살려내고 풍성한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헌신하는 새로운 인간의 한 모형이 됨으로써 생명살림의 증언자가 되었다.

 

 

 

6. 섬김의 밥상이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이름없는 여인, 사르밧의 과부는 마지막 남은 한 웅큼의 밀가루와 기름 한 방울로 남을 대접한다. 이 여인의 밥상은 선지자 엘리야를 살리는 밥상이 되었다.

 

7. 거룩한 밥상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밥상은 제국의 왕이 차려놓은 산해진미의 밥상을 거부하고 불의한 제국과 타협하지 않은 정의롭고도 거룩한 밥상이다.

 

8. 절제의 밥상이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불의 앞에서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 가난한 선지자였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요한의 밥상은 소박하고 검소하며 절약하고 절제하는 밥상이라고 할 수 있다.

 

9. 일용할 밥상이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나타난 일용할 밥상은 몸에 필요한 양식만 아니라 오늘의 삶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매일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간구한다는 의미와 함께 영적이고 초월절인 인간이기에 영적인 성장과 영향을 위한 영의 양식을 간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0. 회개의 밥상이다. 예수께서는 삭개오, 세리, 병약자, 가난한 자들과 식탁을 나누는 밥상공동체를 통해서 그곳에 임하시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지극히 작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손길로 임해오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죄성에서 돌이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회개운동에서 시작한다.

 

11. 구원의 밥상이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가의 다락방에 차려진 유월절 만찬에서 빵을 들어서 이것은 자신의 몸이라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들어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막 14:22-26, 마 26:26-28, 눅22:19-20)  다시 말해 예수께서 온 인류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 살과 피로 친히 구원의 밥상을 차려주셨다. 그리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구원의 삶, 생명, 정의,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게 하셨다.

 

 

 

# 생태계 위기극복과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생명밥상

 

우리의 탐욕과 낭비, 불의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 생명과 사랑의 가치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심각하게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일원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창조세계를 돌보고 섬기는 청지기들이다. 

 

우리의 식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식탁이 정의로운 식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밥상이 정의로운 밥상이 되도록 불로소득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 땀의 대가로 얻어진 양식을 먹어야 한다. 부동산 투기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는 양식은 거룩한 양식이 아니다. 진정한 노동, 땀의 대가로 얻는 양식이 거룩한 양식이다.

 

음식은 자신만이 먹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함께 먹는 일은 신앙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중심요소이고 공동생활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타인과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우정의 상징, 소속감의 표현, 상호신뢰의 표시이며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며 다른 사람과의 연대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루에 여러차례 음식을 먹는다. 먹을 것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식사는 단순한 소비행위가 아니라 생명순환의 행위이며 성례전적 행위이다. 양식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 땅의 곡식들은 자랄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음식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이 배어있다. 그리고 그 양식은 나 혼자만 독식하는 양식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양식이다.

 

 

# 혼밥, 먹방, 쿡방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먹는 것 자체에 함몰되어 위대(胃大)한 인간이 되어버린 현대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음식에 관한 한 무지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음식문화인이 아니라 음식맹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음식문맹으로 인한 피해와 부정적인 영향이 현대인의 삶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의 음식문화인 먹방, 쿡방, 혼밥, 맛집기행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전국의 맛집마다 미식 애호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많은 이들이 몸보신에 열중하고 일부에선 얼짱, 몸짱을 만들기 위해 살과의 전쟁을 치루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소모되기도 한다. 

 

현대인이 먹는 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가족이 해체되면서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갈증과 고독, 현대사회의 특징인 경쟁사회, 피로사회가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현대인으로 하여금 먹기에만 몰두하도록 만든 것 같다. 특별히 현대사회의 피로증후군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교제를 단절시키고 혼밥, 혼족의 문화를 양산시켰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환대와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밥상에는 엄마, 온기, 손맛, 따뜻함, 가족, 그리움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보석들이 가득하다. 다함께 먹는 식사는 지겨움과 외로움을 덜어주는 놀라운 치료법이다. 함께 하는 식사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식탁은 사랑을 만들어 낸다.

 

영어단어 Companion(동반자) 어원은 라틴어 com(함께) panis(빵)의 합성어이다. 동반자란 빵을 함께 먹는 사람 그래서 음식은 관계를 형성한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것은 기도나 금식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가 된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의 한 방식이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즉 밥상은 환대의 장소이며 유대감과 연대감의 시작이며 사귐과 교제와 공동체에의 참여이다. 식탁교제를 통해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인간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참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 이것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식사이다.

 

 

#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밥상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중요과제는 녹색과 사람, 생태, 연대, 돌봄의 생명중심의 가치의 회복이다. 특별히 죽음과 폭력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식탁에서부터 살림, 생명의 식탁으로의 전환이 시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가정과 교회는 첫째, 각 가정과 교회는 검소한 식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 생활쓰레기의 30-50%를 차지하는 음식물쓰레기는 환경적인 이유에서만 아니라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난받을 만하다.  날로 늘어가고 있는 쓰레기 문제야말로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특별히 음식물 쓰레기는 수질과 토양오염에서부터 갖가지 질병에 이르기까지 생명적 삶을 흔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생명밥상 빈그릇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농촌지역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식품 및 로컬푸드를 구입하여 최소한으로 가공처리되고 덜 포장된 식품을 소비함으로써 환경보전에 기여해야 한다.  도농직거래방식인 농촌교회와 도시교회와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셋째, 패스트푸드를 극복할 수 있는 생태문명 속에서 순리대로 속도를 늦추어 사는 생태마을,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슬로처치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자원의 소비를 줄이고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계 방식을 배워야 한다. 

 

 

 

 

넷째,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가 필요하다. 사람도 다른 생명체도 함께 행복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이타적 소비, 정의로운 소비가 필요하다. 만약 예수님이 시장에서 장을 보신다면 어떤 음식들을 구입하셨을까를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섯째, 우리의 식생활이 음식문맹에서 음식문화인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음식문화인이란 단순한 먹을거리의 구매자가 아니라 먹을거리의 생산, 유통, 소비를 성찰하고 좋은 음식, 깨끗한 음식, 정의로운 음식이 생산, 가공, 유통, 소비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섯째, 지속가능한 밥상을 위해 함부로 창조물들을 착취하지 말고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대하지 말고 텃밭을 가꾸고 퇴비를 만들고 재활용해야 한다. 글로벌푸드를 먹지 말고 지역농산물을 애용하고 직접 재배하여 먹는 것이 안전하다.


일곱째, 탐식과 독식으로 또는 혼밥으로 얼룩진 밥상을 환대와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섬김과 나눔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생명밥상, 경건한 밥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에서 건강한 먹거리와 생명밥상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go 에서 Eco로 Greed에서 Green으로 바뀌어진 밥상을 향한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다. 코 로나 시대 이후에 우리는 이웃과 함께, 자연과 함께 공존을 모색해야 안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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