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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질과 오용①>설교위기, 목사와 성도 모두의 책임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17:43

느헤미야, 교회개혁 위한 제2차 연중포럼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데오스앤로고스  |  thelogos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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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16  22: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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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6월 15일 오후 7시30분 느헤미야 세미나실에서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연중포럼인 ‘영화 <쿼바디스>에 답하다’의 제2차포럼으로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설교의 본질과 오용’을 주제로 포럼을 진행했다. 이날 김형원 목사를 비롯해 배덕만 교수(건신대학원대), 권연경 교수(숭실대) 등이 발제자로 나서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했다. 발제자들의 주된 발표 내용을 '설교의 본질과 오용' 시리즈로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주>

   
 
< 설교의 위기, 목사의 문제인가 성도의 문제인가>
/ 김형원 목사

한국 교회에서 설교의 위상이 매우 높다.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요소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목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또한 설교에 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것 또한 설교이며, 가장 힘들어 하는 것도 설교다.

다른 의미로 설교는 한국 교회 타락의 원인이며,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많은 설교들은 한국 교회 부조리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설교는 목사의 신학, 사상, 신앙의 결집판으로써 목사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이와 함께 성도들과 교회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교회가 타락하면 설교가 타락하고, 설교가 타락하면 교회가 타락하게 된다. 설교에 대한 개혁은 목사와 성도, 교회에 대한 개혁의 최종 지점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설교를 개혁하는데서부터 한국 교회 개혁은 시작된다.

한국 교회 설교의 위기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 우선 목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목사가 설교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는 일방통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성도들과 쌍방 교류가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의 수용자인 성도를 염두에 두게 된다. 결국 성도들이 설교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려면 목사와 성도 양 측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 설교의 위기: “설교자가 문제다”

설교의 위기를 설교자 편에서 진단할 때,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살펴봐야 한다.

1. 성경 이해에 관한 문제

   
▲ 김형원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는지 진단해야 한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설교는 난관에 부딪친다. 출발부터 삐걱거리게 되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성경을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배우지만 졸업해도 여전히 설교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설교를 안 할수도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방향으로 출구를 찾게 되는데 하나는 큐티 묵상 수준의 성경이해를 바탕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다. 원어나 다른 번역본을 통해 본문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고, 다양한 주석과 참고자료들을 참고하는 등 해석학적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목사가 되기 전부터 해오던 큐티 수준의 묵상 결과를 기초로 설교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어떤 본문을 설교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적용 또한 어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예화 중심적 교양 설교를 선택하게 된다. 성경본문의 광맥으로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인상적인 구절이나 단어, 혹은 개념을 몇 개 찾아내고 그것과 관련된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예화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이해하기 쉽고 감동도 줄 수 있는 설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설교자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게 하기보다는 예화를 수집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교양강좌’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보다 더 심각한 또 다른 탈출구는 스스로 설교를 작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설교를 표절하는 것이다.

신학이 결여된 강해설교도 문제다. 강해설교는 가장 안전한 설교 방식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정작 강해설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단지 성경을 풀어서 설명을 하고, 적용을 하면 강해설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 결과 설교가 단순히 일반 교인들도 하는 묵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설교를 오랫동안 들어온 교인들은 본문만 들어도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할지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강해설교는 신학적인 요소를 듬뿍 담고 있다. 성경 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 전체가 거론되고, 관련된 신학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진정한 강해설교다. 따라서 좋은 강해설교를 위해서는 신학적인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 일반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신학적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목회자까지도 신학을 너무 경시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신학서적 보다는 말랑말랑한 책들(교회성장, 설교집, 설교에 도움이 될만한 수필이나 베스트셀러, 예화집 등)만 읽는다.

이런 상황에서 매주 설교를 하다보니 성경을 연구해도 깊이가 없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토대를 계속해서 넓혀가지 못한다.

설교에 대한 훈련 부족과 설교 준비 시간의 부족은 필연적으로 설교 표절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 표절은 새삼스럽거나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한국 교회 토양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보통 다른 사람의 설교를 상당 부분 베끼는 경우, 남의 설교들을 짜깁기해 자신의 것처럼 둔갑시키는 행위, 다른 사람의 예화를 마치 자신의 것인양 이야기하는 행위 등을 설교 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교 표절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허락도 없이 빼내오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다. 교인들에 대한 기만행위다. 목사로서의 직무유기다. 설교의 본질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교 표절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설교의 횟수가 너무 많다는 것, 설교자로서의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 설교를 잘 하는 목사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것,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설교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을 뒤집는다면 표절 처방도 가능하다. 설교 횟수를 줄이면 된다. 설교 훈련을 잘 받으면 된다. 목회성공주의와 교회성장주의, 자기과시의 유혹에서 벗어나면 된다. 목사로서의 역할을 재인식하면 된다.

2. 설교자의 신앙/신학과 관련된 문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교자의 신학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설교는 설교자의 신앙 수준을 보여준다.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을 당시에는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을 다짐하지만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다보면 점점 욕심이 생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 인정을 받고,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과연 제대로 된 설교가 나올 수 있겠는가? 물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대변하는 엉뚱한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멋진 설교를 외친다고 해도 목회자의 삶이 그것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헤롯의 포효처럼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스스로 침몰의 길로 이끄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먼저 좋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이원론적인 신학도 문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의 삶을 이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전달하려면 신학적 해석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소홀히 하면서 설교를 작성하다보면 자칫 이원론적인 신앙을 부추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 즉, 성도들의 종교적 삶과 사회적 삶을 분리하는 이원론, 그리고 개인적 삶의 영역과 사회구조적 영역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를 비롯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을 잘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내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판별하는 기준 또한 기도, 예배, 전도, 헌금, 봉사 등이다. 종교생활을 잘 하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교회 외부에서의 삶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원론을 부추기는 것이 목사의 교회 중심주의, 훅은 교회 환원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목사의 일터는 교회다. 목사의 성공여부는 교회에서 판가름난다. 목사의 권력은 교회에서 나온다. 결국 이러한 사고방식은 설교의 구성, 적용, 예화 등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떤 설교를 해도 결론은 교회 생활 잘하라는 쪽으로 귀결되게 한다.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는 이원론도 문제다. 교회 환원주의와 더불어 목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바로 사회-구조적 차원을 무시하고 오직 개인윤리만 강조하는 이원론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적 삶은 개인적 영역과 사회-구조적 영역과 뗄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개인적 윤리와 함께 사회-구조적인 윤리에 대한 강조가 뒤따라야 한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어떤 본문을 설교해도 결론은 교회생활 잘하라는 것, 그리고 도덕적으로 살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목사의 신학이 그러하니 설교도 그러한 것이다. 결국 목사가 이원론에서 탈피해 통합적 세계관에 기초한 신학을 견지하고 있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 바른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3. 성도와의 관계에서 초래되는 문제

설교는 일방통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설교자와 성도 사이의 상호작용이 설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때, 설교의 위기가 초래된다. 어떤 설교자는 마치 청중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설교해서 문제고, 다른 설교자는 지나치게 청중들을 의식한 결과 설교의 핵심조차 변질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설교자가 성도의 삶의 정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과 연결시키는 것인데 성도의 삶을 모르니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바른 지침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결국 설교는 편협한 종교적인 삶만 강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른 직업을 갖게 되는 목회자들의 경험이 오히려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최대한 텍스트(성경)뿐만 아니라 컨텍스트(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들의 상황과 타협하는 설교도 문제다. 성도들의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그것에 부합하느라 성경 메시지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칫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상처를 입지 않을까 염려하면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설교자가 있다. 마음이 약해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설교를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개인적인 권면이나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야 한다.

반대로 목사 자신이 성공과 권력 지향적이어서 돈과 권력이 교회를 더 풍성하게 만들며 복음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돈과 힘이 있는 성도들에게 아부하는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지 성도들과 타협하는 순간 설교는 갈 길을 잃게 된다.

4. 감성적 설교의 문제

청중들을 부정적으로 의식하는 설교의 또 다른 측면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울리고 웃길 수 있는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물론 성경의 진리를 잘 대변해줄 수 있는 예화를 통해 큰 감동과 기쁨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하게 될 때 머리와 꼬리가 뒤바뀌는 것이다.

감동과 즐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설교자는 개그맨이나 예능 사회자처럼 입담으로 청중들을 휘어 잡으려로 연기를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이나 경험과는 상관없는 감동적인 예화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 더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원래 없던 내용을 집어넣어 조작하는 일도 감행하게 된다.

이것은 설교에 어떤 ‘느낌’이 올 때,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교인들에게 영합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은혜로운 설교자’라는 칭찬을 듣고 싶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감동이나 은혜를 통해 성도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설교의 영광은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것이다. 청중인 성도들에게도 문제는 발생한다. 은혜로운 설교는 수많은 종류의 쾌락처럼 중독성이 있다. 성도들은 감상의 안개에 취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 놓치게 된다.

그 결과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이 세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지 못하는 감동, 나의 어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지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 열정,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감정으로 전락하게 된다.

# 설교의 위기: “교인들도 문제다”

설교의 위기의 또 다른 면에는 왜곡된 설교를 지지하는 성도들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잘못된 방식으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설교 잘한다고 추켜세우면서 은혜받았다고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목사들이 계속해서 그런 설교를 하는 것이다. 설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성도들의 설교에 대한 태도 역시 점검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 성도들은 감성적 설교만을 요구한다. 주로 자신이 ‘은혜받았는가’ 하는 것으로 설교를 판단한다.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은 말씀이 그러한가를 깨닫는데서부터 오는 감동이기보다는 멋진 예화와 재미있는 스토리를 토해 받는 감동일 경우가 더 많다.

인내심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서옫들은 성경을 깊이 있게 파고들면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그저 ‘은혜’만 요구하고 감동적인 것만 요구한다. 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설교에 접근하게 되면 목사들은 성도들의 욕구를 감지하고 성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점차 성경 메시지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끼칠까’ 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따라서 설교의 회복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도 문제다. 신학은 오직 목사나 신학자들만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성도들의 신학적 수준이 낮고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만 보일 때 목사의 설교를 검증할 길은 사라진다. 성경을 잘못 해석해도 아무도 모르고,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목사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게 된다.

반대로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과 신학적 소양이 높을수록 목사의 설교가 잘못된 길로 나갈 위험은 그만큼 줄어든다. 설교자가 스스로 더 조심하게 되고 말씀 연구에 더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세속주의도 문제다. 성도들은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방법만을 원한다. 자신을 책망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다고 인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설교자를 원한다.

결국 목회자는 성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처세술적 설교, 심리적 위로를 주는 설교, 죄나 잘못을 지적하여 불편하게 하지 않고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그래야 성도들이 좋아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다음 주에도 다시 교회에 올테니까. 결국 설교 시간은 성도의 욕망과 목회자의 욕망이 만나 춤을 추는 현장이 된다. 설교가 타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설교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면 우선 설교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며,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인지 깨닫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광맥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청중인 성도들 또한 설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설교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하거나 설교자에게 잘못된 요구를 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 재미있는 설교, 부담 없는 설교, 감성을 터치하는 설교를 좋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회복해야 한다.

설교자와 성도 양쪽에서 설교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야 설교의 위기 상황이 타개되고,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게 되는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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