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호빗’, 인간 탐욕의 맹목성과 치명성을 선명하게 그려내

교회와 사회&환경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17:25

본문

‘호빗에 나타난 탐욕의 문제’ / 권연경 박사 / 2015년 1월 16일 기사

 

 

삶 속에서 돈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 곧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

권연경 박사(숭실대, 신약학)는 “오늘날의 교회를 진단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욕망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절실하게 느껴지는 탐욕의 강력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설교나 가르침 혹은 더 나아가 보다 전문적인 신학적 담론에서 탐욕에 대한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 권연경 박사(숭실대) / theosnlogos_DB
권 박사는 “바울은 탐욕을 우상숭배로 규정했다”며 “우상숭배는 실상 그 우상을 만든 나 자신의 욕망을 신의 의지로 포장하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은 맘몬과 양립할 수 없다. 교회가 탐욕을 일곱 가지 대죄의 하나로 간주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권연경 박사는 이와 같은 탐욕의 문제를 소설 ‘호빗’을 통해 조명한다. 그는 “호빗은 탐욕의 맹목성과 그 치명성을, 그리고 그 탐욕을 넘어서는 방식으로서 자기포기의 심원한 울림을 선명하게 그려낸다”며 “물론 이 아름다움 배후에는 결국 톨킨(호빗의 저자)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 박사는 “톨킨은 인간의 삶에서 탐욕의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성서적 비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권연경 박사는 한국기독교학회 학술지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91권(2014년)에 실린 ‘호빗에 나타난 탐욕의 문제’라는 연구논문에서 호빗 후반부의 중심주제로 등장하는 탐욕과 그로 인한 갈등의 양상을 다루고 있다.

권 박사의 이번 연구논문은 ‘성서의 신화와 그 변용-호빗에 나타난 요행과 은총’(한국기독교신학논총 76권, 2011년)이란 연구에 이어 진행된 것으로 호빗에 등장하는 탐욕의 문제를 성서적, 신학적 담론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그들 간의 갈등을 통해 드러내는 탐욕의 양상을 그려냈다.

권연경 박사의 두 연구논문은 한국기독교학회 홈페이지(http://www.kacs.or.kr) 자료실에서 PDF파일로 열람 및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 소설 '호빗'의 영화 포스터


아래는 ‘호빗에 나타난 탐욕의 문제’에 대한 연구논문의 내용을 일부 정리했다.

<호빗에 나타난 탐욕의 문제>

Ⅰ. 들어가는 말
Ⅱ. 톨킨의 신화세계와 탐욕
Ⅲ. 탐욕의 연속체
1.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들
2. 탐욕의 화신들
Ⅳ. 마음 속의 괴물-쏘린의 탐욕과 죽음을 통한 해방
Ⅴ. 포기와 영원한 소유: 빌보와 욕망
Ⅵ. 나가는 말

‘호빗’의 모험 이야기를 지탱하는 핵심적 주제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보물을 독차지하던 용 스마우그가 죽고, 그 보물을 둘러싸고 중간계 종족들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소설 후반부에서는 거의 모든 사건들이 ‘탐욕’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일어난다.

탐욕이라는 주제는 톨킨의 대표작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탈취하려는 악의 세력과 이를 파괴함으로써 그 악을 소진시키려는 선한 세력 간의 서사적 투쟁 이야기로 형상화된다.

‘호빗’의 마지막 장들에서는 일종의 ‘탐욕의 연속체’가 나타난다. 탐욕과 관련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바로 쏘린과 빌보이며, 선과 악의 스펙트럼에서 보다 극단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 베오른>

탐욕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베오른이다. 그는 검은 곰과 사람의 모습을 오갈 수 있고, 크림과 꿀을 먹고 살며, 동물들조차 잡아먹지 않는다. 그의 집에는 금은으로 된 물건들이 없으며, 칼 말고는 금속으로 된 것이 없다. 난쟁이들의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정도로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인물이다.

< 간달프>

모험의 동반자 중에서 탐욕에서 가장 초연한 마법사다. 용의 보물을 찾아 나선 모험은 애초부터 그의 것이 아니다. 그의 역할은 일행이 산맥을 넘는 시점에서 끝나며, 난쟁이 일행이 보물을 향해 가는 여정 내내 그는 보물과 무관한 ‘다른 급한 용무’에 마음이 쏠린다.

< 바르드>

인간 중 탐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존재는 호수마을의 인상적인 궁사 바르드다. 물론 그 역시 보물에 대한 욕심 자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바르드의 경우 탐욕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열망과 연결된다.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려는 열망, 옛적 노래처럼 자기 마을을 황금종으로 채우고 싶은 그런 열망이다.

< 스마우그>

탐욕의 화신 용이다. 그는 궁전 깊은 곳에 보물을 커더란 더미로 쌓아올리고 그걸 침대 삼아 그 위에서 잠을 자는 존재다. 스마우그는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탐욕 그 자체 혹은 절대적 탐욕의 소유자이다.

< 호수마을의 영주>

중간계 종족 중 스마우그와 가장 유사한 인물이다. 돈에 민감한 그는 산 아래 난쟁이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옛 노래’보다는 ‘교역과 통행세, 그리고 뱃짐과 금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이었고, 또 그러한 방식으로 현재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용이 죽은 후 그는 교묘한 언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결국 절제되지 못한 탐욕 때문에 결국 파멸을 자초한다.

< 난쟁이들>

용의 보물을 되찾는 모험이라는 ‘호빗’의 구도는 애초부터 탐욕이라는 주제가 그 바닥에 깔려 있다. 탐욕으로 인한 갈등이 구체화되는 것은 모험의 표면적 목표가 달성된 시점, 곧 탐욕의 화신 스마우그가 죽은 이후다.

사실 용의 죽음은 오히려 더 무서운 갈등에 불을 지피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갈등의 중심에 난쟁이들이 있다. 그들은 돌처럼 차갑고 고집이 세지만 성품이 한결같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황금에 대한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요정 페아노르의 보물 실마릴을 갖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난쟁이들은 많은 요정을 죽이고, 또 난쟁이의 왕 역시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한다. 또한 탐욕 때문에 사우론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 쏘린>

욕망이 점유한 쏘린의 마음 속에는 타인의 권리에 대한 정당한 고려는 물론이고, 자비나 연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탐욕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여러 종족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평화와 동정심이 결여된 자폐적 탐욕은 파멸로 이어질 뿐이다.

선한 충고에 화살로 갚는 쏘린에게 바르드는 “굳이 그렇다면 어디 그 보물들이나 먹고 사시오!”하며 물러선다. 이 한 마디는 쏘린이 가진 탐욕의 맹목성을 정확히 짚어낸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탐욕의 무게는 쏘린이 가진 난쟁이 특유의 ‘위엄’마저 타락시킨다. 빌보가 아르켄스톤을 ‘적’의 손에 넘겨준 것을 알게 된 쏘린은 빌보 뿐 아니라 그를 원정대의 일원으로 선택한 마법사 간달프에게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다섯 군대의 전투 이후 쏘린은 삶을 마감하면서 탐욕에 의해 쉽게 가려지는 진리를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궁극적 한계 앞에서 보물은 무의미하다.

누가복음에서 세리장이며 부자였던 삭개오의 회심이 대표적이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 놓고, 자신의 횡령에 대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탐욕으로 인한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타인과의 회복의 길을 걷는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고, 구원을 선포한다(눅 19:1~10).

쏘린의 뒤늦은 깨달음은 욕망이 야기하는 치명적 결과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비록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지만 결과적으로 쏘린은 탐욕으로부터 구원받고 죽음을 통해 더 나은 삶의 비전을 획득한다.

죽음과 더불어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쏘린의 경험은 ‘반지의 제왕’에서 보로미르의 운명과 유사하다. 그는 프로도에게서 반지를 뺏으려 하다 원정대의 해체를 초래하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오르크들로부터 프로도를 지키기 위해 영웅적인 싸움을 수행하다 죽음을 맞는다.

< 빌보>

빌보는 탐욕에 관한 저자의 관점을 잘 담아낸 인물이다. 빌보는 난쟁이들과는 달리 비이성적 탐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물론 그 역시 보석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지는 않다. 호빗족 빌보에게서 욕망은 지속되지 않고, 또 구체적 탐욕으로 행동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빌보의 욕망은 탐욕보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

보물을 되찾고 싶은 난쟁이들과는 달리 빌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모험의 평화로운 결말이지 보물의 획득이 아니다. 결국 빌보는 평화로운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 그는 그간 남몰래 간직하던 보석 아르켄스톤을 바르드 일행에게 넘겨준다.

바르드 일행이 그것을 이용해 쏘린과 협상해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빌보의 이러한 ‘자기 부정’이 궁극적인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는 톨킨의 관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빌보는 모험 초기 드러내던 약간의 동요조차 떨쳐 버린,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이 된다.

‘호빗’이란 작품은 그 나름의 한계 속에서 탐욕의 맹목성과 그 치명성을, 그리고 그 탐욕을 넘어서는 방식으로서 자기포기의 심원한 울림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물론 이런 아름다움 배후에는 결국 톨킨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이 작용하고 있다.

명제적 가르침이 아니라 잘 빚어진 상상적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톨킨은 인간의 삶에서 탐욕의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성서적 비전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