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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한국교회 율법폐기론, 올바른 성령론과 칭의론으로 해결해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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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연구(3) * 


 

2014 서울 퓨리턴 컨퍼런스-[강좌3]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과 한국 교회

 

2014년 9월 24일 기사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큐리오스 인터내셔널, 워싱턴 트리니티연구원은 지난 9월 22일(2014년) 신반포중앙교회에서 ‘퓨리턴 신학과 한국 교회-퓨리턴과 에드워즈를 통해 본 한국 교회’를 주제로 2014 서울 퓨리턴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한국교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치유와 회복, 갱신과 개혁의 방향이자 영적 나침반으로서 퓨리턴의 신앙과 신학을 재조명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한 발제자들의 발표문을 일부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과 한국 교회 / 조현진 교수(한국성서대)

 
뉴잉글글랜드에서 일어난 율법폐기론 논쟁은 1636년 10월부터 1638년 3월까지 대략 17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의 율법폐기논쟁은 청교도 존 코튼(1584~1652)에 의해 시작됐다. 코튼은 “선택받은 백성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개종의 직접적인 감각을 주신다”고 주장했다.
 
코튼에 따르면, 성령 하나님은 구속의 과정에서 어떤 도구들이나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선택하신 백성에게 역사하신다. 이는 후에 율법폐기론자들의 모임의 지도자가 되는 앤 헛친슨과 존 휠라이트가 확대 해석해 계승하게 된다.
 
율법폐기론을 기반으로 하는 헛친슨은 1638년 10월 보스턴에 있는 교회에서 “성령께서 칭의된 자들 안에 거하신다. 성화의 과정은 우리가 칭의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성을 완전히 부인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청교도들은 성화는 성도가 믿음으로 칭의를 획득한 후에 자신이 구원받은 백성임을 드러내는 가치 있고 중요한 칭의의 증거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백성임을 구체적으로 확신하게 된다고 믿었다. 당연히 율법폐기론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율법폐기논쟁은 에드워즈의 생애 이전 한 세기 전의 사건이지만 그도 이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을 이끌면서 헛친슨의 가르침을 따르는 급진적인 새빛파(Radical New Lights)들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새빛파에 속했고 리더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급진적 새빛파 교인들이 기존 교회에서 분열돼 나와 자신들만의 모임을 가짐으로 인해 이미 많은 곳에서 교회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이용해 자신들의 극단적인 성령론을 전파하고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새빛파들을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율법의 지속성과 성령의 직접 계시 문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성령의 도래로 인해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지속되느냐의 문제다. 헛친슨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열어놓고 성령이 직접 주시는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율법폐기론자들은 율법을 성도의 경건생활을 측정하는 척도나 규범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런 율법폐기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율법의 지속성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 그는 율법은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구원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켜주며, 성화의 과정에서 성도들이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 당하는 어려움은 그를 의롭다하는 믿음의 주된 증거라고 했다.
 
에드워즈는 율법을 칭의와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율법의 역할을 분명히 언급했다. 또한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말하기 위해 ‘율법적인 겸손’과 ‘복음적인 겸손’을 구별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성령의 직접계시 사상을 거부하고 있다. 성령은 성경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에드워즈의 마음에는 항상 급진적 새빛파의 사상적 배후가 율법폐기론임을 유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면 성령 하나님은 직접 계시를 제공하신다기보다는 오히려 성도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받아들이고 바르게 이해하도록 조명하며 도우신다.

 

 

에드워즈와 그의 동시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직접 계시에 대한 율법폐기론자들의 견해는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로 보는 개혁주의적 성경관과 충돌되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결코 성경을 무시하고서 성령이 직접 성도들에게 계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점에서 비록 에드워즈는 직접적으로 칼빈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율펍폐기론자들의 오도된 계시관을 조용하면서도 심도있게 비판했다.
 
# 참된 성도의 구별 문제

 
에드워즈가 율법폐기론자들과 대립했던 또 다른 신학적 주제는 바로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는 문제다. 당대의 급진적 새빛파들은 그들이 성령이 알게 하신 ‘핵심적인 지식’으로 인해 신앙의 위선자로부터 성도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새빛파들은 구원의 확신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비적이고도 주관적인 감정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한 기초로 이 주관적 성령 경험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령이 함께 하는 참된 성도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마음의 조사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는 마음의 조사자, 즉, 다른 성도들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 판단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을 반대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위선을 확실히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으셨음을 강조했다.
 
율법폐기론자들이 주장하는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기에 에드워즈에 의하면 만일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야말로 거짓 성도임을 자신들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칭의와 성화의 문제
 
에드워즈는 율법폐기론자들과는 달리 참된 성도의 증거는 영혼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도의 실천, 특별히 성화되는 삶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나무의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바로 성도의 삶을 통해 맺히는 삶의 모습으로 그 사람이 칭의를 받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에드워즈의 이해에 따르면 아무리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라도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거룩한 삶으로 구원의 증거를 충분히 보여주어야 한다. 성도의 보이는 삶이야말로 그가 참된 성도인지 아닌지 증거하는 표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폐기론자들의 급진적인 영성주의에 반대한 에드워즈는 칭의를 얻은 사람은 여전히 성령께서 자신 안에서 내주해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부패함을 인식하고, 성경과 이성으로 이를 수정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결코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가 본질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며 죄 가운데 사는 비참한 생활이 이 세상에서 지속됨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에드워즈에게 중생은 구원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며 성화는 중생과 칭의의 다음 단계에 오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중생자에게서 시작된 구속사역을 이렇게 구원의 여러 과정을 통해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드워즈는 이신칭의 교리가 적극적으로 타락하고, 방탕한 인간의 삶을 억제하는 기능까지 한다고 설명한다. 칭의 교리는 단지 이론이나 신학으로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 생활과 긴밀히 연결돼 성도들의 삶을 바르게 인도해주는 적극적인 실천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도의 거룩한 삶과 실천은 영적인 문제라고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영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성도들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 모두 영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급진적 새빛파들이 주장하는 이원론적 영적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다.
 
# 한국 교회의 율법폐기론 문제

 
한국 교회도 주관주의적인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유사한 율법폐기론의 모습들이 여러 형태로 존재해왔다. 일례로 한국전쟁 전후로 나타난 기도원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도원의 특별집회로 인해 사람들은 전통적인 예배형식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체험을 강조해 그 표시로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은사 집회가 진행됐다.
 
특별히 안수의 변형인 안찰이 성행하고 이는 박태선의 전도관과 같은 이단을 낳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부류의 운동은 기도원 운동으로만 그치지 않고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파의 순복음교회가 탄생돼 부흥되면서 점차 한국 교회에 널리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통해 객관적 계시인 성경보다는 주관적, 영적 경험을 중시하면서 심지어 직통계시를 주장해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예언하는 다미선교회와 같은 이단들이나 자신이 성공한 예수라고 하는 문선명의 통일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단들이 나오면서 영적 혼란의 상태를 가져오게 됐다.
 
또한 최근 정체된 교회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목회자들 사이에 은사집회와 성령운동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성령운동이 한국 교회를 참된 개혁과 부흥으로 이끌기보다 오히려 광신과 혼란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무분별한 한국의 성령운동에 대해 에드워즈가 보여준 모범은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에드워즈는 당시 급진적 새빛파들로 인한 무분별한 성령운동에 대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성경’의 슬로건이 나타내는 대로 신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성경의 권위를 다시 확증했다는 점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주어진 계시를 해석하는데 조명해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한국 교회도 혼란한 성령운동의 모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거기에 포함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리적 진실들을 가르치고 배우려는 노력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또한 칭의를 단지 신분의 변화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도 다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칭의는 법정적 의로움의 문제다. 칭의는 죄책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화는 이에 기초해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문제다. 하지만 한국 교회 문제는 그동안 ‘예수 천당’을 외치며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
 
물론 이는 진리이지만 이를 통해 교인들은 예수를 통해 모든 죄가 사해졌고, 칭의되었기에 실제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도 되는 것과 같은 오해가 생기게 됐다. 결국 이는 칭의의 문제를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신분의 해결로만 보게 돼 결국 성도의 삶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칭의를 성화와 구별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 개혁주의 이중은혜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재확인해야 한다. 개혁신학에서 칭의와 성화를 ‘이중은혜’라고 하는 이유는 칭의된 자는 성령의 은혜로 반드시 거룩하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바로 이해하는 칭의는 결고 성화를 간과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성도의 거룩한 삶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펠라기안적이거나 알미니안적인 사고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직 성도에게는 인간의 자력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진리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에드워즈가 율법폐기론과 급진적 새빛파들과 맞서 자신의 칭의론을 포함해 개혁신학적 입장으로 응전한 모습을 통해 현재 다양한 모습으로 오도된 성령론과 칭의론을 주장하며 도전해 오는 여러 이단들에 대해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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