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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요한 웨슬레의 영성세계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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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정 교수(감신대, 역사신학)

 

2014년 10월 24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10월 17일일(2014년) 개최한 ‘제40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I. 서론

교회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전도자의 하나로서, 그가 영국에서 일으킨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을 통해 메소디스트교회(Methodist, 감리교회는 정확한 번역이 아님)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존 웨슬리)에 관해 우리는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리와 신학, 영성과 실천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활발한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 및 전 세계 웨슬리안 계통 교회들의 탁월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촉진된 웨슬리 연구(Wesley studies) 및 그 결과는 웨슬리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 이해를 많이 수정하였다.

이미 웨슬리 전집(The Works of John Wesley) 2백 주년(Bicentennial)기념판이 30여권으로 기획되어 1975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시작된 후 미 연합감리교회의 애빙던(Abingdon)출판사에 의해 계속된 지도 오래이다. 많은 웨슬리 학자들이 관련된 연구에 참여하여 왔으며, 웨슬리의 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5년마다 계속된 세계 감리교 신학자 학술대회(Oxford Institute of Methodist Theological Studies)는 작년에 제 13차 모임을 가진 바 있다.

 


이러한 연구에 가장 큰 시초적인 공헌을 한 미 연합감리교회의 역사신학자 앨버트 아우틀러(Albert C. Outler)에 의해 웨슬리의 신학은 깊이 있게 포괄적으로 재조명되었고, 특히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양자의 연결, 통합적 지평에서 논구된 바 있다. 필자는 아우틀러의 신학적 작업을 출발점으로 해서, 에모리 대학교의 저명한 조직신학자였던 테드 러년(Theodore Runyon)교수 하에서 웨슬리와 동방교부 사이의 역사신학적 대화를 학문적 과제로 삼고 연구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웨슬리의 영성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오면서, 필자는 좀 더 교회사적, 역사신학적인 지평과 관점에서 그것을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아우틀러의 가장 주된 관심 중의 하나는 웨슬리의 신학과 영성을 특히 초대교회 동방교부와의 연속성 속에서 읽고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컬 관점에서, 그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신학을 연결, 통합하는 신학적 가교로서 웨슬리의 신학을 제시한 것이다. 거기에서 그에게 큰 흥미를 준 자료는 Macarius라는 수도원 전통의 이집트 사막교부의 설교집이었다. 원래 콥틱 금욕수도사였던 이 위대한 마카리우스의 저술로 알려진 50편의 <신령한 설교>는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익명의 저자에 의한 시리아 수도원 전통의 산물로 추측되게 되었다.

아우틀러가 지적하였듯이, 이 저술의 일부가 위대한 동방교부 신학자 Nyssa의 Gregory의 한 저술과 상당부분 일치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 및 영성, 신학의 의존성이 흥미를 일으켰고, 웨슬리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주목된 것이다. 아우틀러의 중요한 주장은 이들의 동방교부 영성이 웨슬리의 성화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완전(teleiosis)을 이생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목표(skopos)로 보면서 상태보다는 과정으로서 상정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근거하면서, 필자는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웨슬리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 영성과 신학이 바로 동방교부에게 상당히 뿌리를 둔 것이라는 점을 좀 더 상세한 연구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웨슬리의 영성세계를 숙고함에 있어서, 총괄적으로보다는 좀 더 중요한 주제들에 국한해서 주목하려고 한다. 특별히 단권으로 기획된 그의 가장 주된 영성 저술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핵심사상인 성화와 완전론을 다루면서, 원리적인 차원과 실천적인 차원에 걸쳐 살펴보려 한다.

II. 성화와 완전의 도리의 역사적 전개

1.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웨슬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과 공헌은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도리를 일생에 걸쳐 가르치고 선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다른 영성가들도 이 주제를 피력하고 논의했지만, 웨슬리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이 주제가 주목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쳐치(Christ Church)의 학생 시절에 웨슬리는 거룩한 삶(holy living)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제레미 테일러 감독, 토머스 아 켐피스, 윌리엄 로 등의 저술을 읽으면서 감동받은 웨슬리는 내면적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음의 의도와 정감의 문제이며 그 단순하고 순결함, 혹은 성결함이 종교의 대원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웨슬리는 동방교부들의 저술에도 많이 심취되었는데, 그중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는 초대교회의 가장 높은 영성의 표현 중 하나로 경모되었다. 그 속에서 웨슬리는 영성의 삶의 실천적 신학(practical divinity)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그의 이후의 거룩한 생활의 가이드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고대 교회(Christian Antiquity) 전통은 이처럼 웨슬리의 영성과 신학의 중요한 표준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더불어 웨슬리는 후에 모친으로부터 소시 적부터 훈련의 영성을 익혀온 바 청교도들의 영성저술들에도 많이 눈을 돌려 섭취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가 칭송을 털어놓았던 몇몇 로마 카톨릭 영성 신비가들의 숭고한 영적 세계들에 대해 닫혀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국 웨슬리의 성화와 완전의 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 최종적인 원천과 표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729년 나는 성서를 진리의 유일무이한 표준으로, 순수한 종교의 유일한 모본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과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 그것도 그의 마음의 어느 부분만 아니라 그 전부를 품으며, 많은 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그의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함을 더욱 더 분명한 빛 속에서 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시기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종교를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따르는 것이요 우리 주님께 전적으로 내면적 및 외면적인 차원에서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관점이었다. 따라서 이 법칙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체험에 맞게 굽히거나 또는 극히 작은 그 어떤 일에 있어서라도 나 자신을 우리의 위대한 모범이 되신 분과 일치하지 않게 내버려두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가 주장한 기독교적 영성의 삶의 가장 주된 도리인 성화와 완전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일치(conformity)요 그 주님을 온전히 본받고 따르는 제자의 도리로 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내외적인 전체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이 곧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인 것이다. 일찍이 청년 웨슬리를 사로잡은 주제인 거룩함이란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하늘나라의 진리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사랑의 율법의 완성이다.

 


마음이 정결케 되는 정화를 통해 온 마음과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화이다. 하나님께 집중된 사랑은 오직 그에게 영광 돌리는 삶이요, 전적으로 사랑으로 충만하게 변화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오직 하나님을 기뻐함이요,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행복한 것이다. 성결은 곧 행복이다. 주님의 사랑이 내 자신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 될 때, 이 성화는 온전한 주님의 지배(하나님의 사랑의 전적인 주권적 통치) 아래 있는 것이 된다. 칼빈처럼 웨슬리도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영성과 신학을 품고 있다. 하지만 동방교부들처럼 웨슬리도 성화를 하늘의 아담, 신의 성품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여 신성에의 참여(koinonia)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본다.

웨슬리는 1739년 회심 1년 후에 이 주제를 명백하게 기술, 표명한 책자를 출간했는데, 그 제목은 “메소디스트의 성격”(The Character of a Methodist)이었다. 우리는 다음의 짧은 서술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일목요연한 묘사를 읽게 된다.


“메소디스트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성품)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기쁨이시오, 그 영혼의 소원이시다. 그의 영혼은 ‘하늘에는 당신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또한 땅 위에서는 주밖에 나의 소원할 자 없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전체시여! ‘당신은 내 마음의 힘이시며 나의 영원한 분깃이시나이다’ 하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그렇다, 항상 행복한 것이다. 그분 안에 영원한 삶 속으로 솟아나는 근원이 있어서, 그의 영혼을 평화와 희열로 넘쳐 흐르게 한다. 이제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었으므로, 그는 항상 기뻐한다. 그렇다, 그의 기쁨은 충만하다.”


웨슬리는 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동방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일찍이 묘사했던 완전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는데, 상당히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적인 그리스도인 상이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에 사로잡힌 존재의 형상이다. 그러한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죄의 정욕에서 순결하게 된, 성화된 존재요, 생의 유일한 소원과 의도를 하나님의 뜻에 두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 전체를 순종하며 지키는 성도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soli Deo gloria) 행하는 성도이다. 웨슬리의 고백에 의하면, 이러한 초기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그의 믿음과 헌신은 그의 일생에 걸쳐 변함없이 일이관지한 그의 대강령이요 최고의 교리였던 것이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도리에 관해 문제 삼게 되는 점은 그것에 대한 웨슬리의 좀 더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1740년대 이후로 웨슬리는 이 주제를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 속에서 확고하게 설명하려 했다. 우선 먼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에 대해 밝혔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웨슬리가 완전을 어떤 관점과 의미에서 해석했느냐의 문제이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지, 과오, 혹은 이해력, 상상력, 언어, 말, 행실 등의 약점들, 유혹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혈육에 거하는 한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웨슬리는 이 땅위에서 “절대적 완전”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반면.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 이생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요, 계속적인 증가를 허락하지 않는 완전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할 수 있다고 보았는가? 요한 서신에 특별히 주목하면서 펼쳐진 웨슬리의 해명에 의하면, 완전은 우리 죄를 자백하여 사함 받아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데 근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데, 모든 악한 생각, 기질, 욕망, 의지, 행실 등에서 깨끗하게 되는 순결한 거룩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같이(Christlike)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좀 더 긍정적인 차원에서 해명한다면, 성화와 완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갱신하는 것으로서 사랑으로 새롭게(renewal by love)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칭의, 중생 이후에 하나님께서 성화하는 은혜로 인간을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근원과 뿌리를 뽑는 완전한 구원, 높은 구원, 혹은 구원의 충만(fullness of salvation)이다.

웨슬리는 이 완전에 관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온전한 성화, 헌신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에 걸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제사로 계속 바쳐지는(헌신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통 불타는 마음을 품고 마음과 삶과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결론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비춰본 바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험(경험)에 비교하여 충분히 살펴본 바에 의한 것이었다.

1744년 첫 감리교 연회가 모였을 때, 이 교리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으며, 그 이후의 연회들에 걸쳐 정리된 중요한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 성화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것이며,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 말은 모든 내적인 죄, 나아가서는 자발적(의지적) 죄로부터 자유롭게, 정결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의 완전히 새로워짐인 전적인 성화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에 시작되어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며, 보통 죽기 조금 전에 이생에서 주어질 수 있다.

웨슬리의 성숙한 성경적인 구원론에 의하면, 구원의 순서(ordo salutis, way of salvation)에서 의롭다 함은 받는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relative change)이며 성화는 실질적인 변화(real change)이다. 또한 웨슬리는 이 완전성화가 순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했으며, 죽기 이전 일찍도 가능하며, 따라서 매 순간 현재적으로 추구하며 기대해야 한다고도 설명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순수(결)한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너무 높거나 낮게 설정하는 일을 피하여야 한다는 현실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단순하게 표현하여서, 완전은 순결한 완전한 사랑이 마음과 삶을 지배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기질과 말과 행동 전체에 그 사랑이 퍼져,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반대와 오해, 논쟁 등에 직면하면서도 완전론을 끝까지 지켜나갔던 웨슬리는, 1759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고찰> 속에서 완전성화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와 판단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가 칭의에 앞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분명한 확신에 의하여 타고난 죄를 완전히 깨닫고, 그것이 점점 소멸되어가는 것을 체험한 후, 죄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형상으로 완전히 새로워져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될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만을 느끼고 죄를 느끼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완전 성화를 그의 칭의 때처럼 분명히 입증해 주시는 성령의 증거가 더해지기 전에는 아무도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완전한(전적인) 성화 이전에 점진적인(gradual) 변화의 과정이 있지만 완전의 순간에 어느 변화보다도 무한히 더 큰, 체험하기 전에는 상정할 수도 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별되어야 할 칭의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도, 이처럼 성화는 그 종류가 다른 변화요 “무한히 더 큰(infinitely, immensely greater) 변화”인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 변화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뿐만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성장을 계속한다고 믿었다. 다른 한편, 완전 성화이후에도 항상 그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떨어져 타락할 수 있으며, 또다시 그 완전한 사랑을 회복할 수도 있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III. 실천적인 권면들

웨슬리는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도리를 주장하면서 많은 어려움, 오해와 반대와 공격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비난도 많았지만, 내부적으로 완전주의적 열광주의자들 (perfectionistic enthusiasts)의 문제와 대면하면서 크게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영성이 다듬어지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 외에도 정적주의, 유신론(solifideism), 도덕주의, 율법주의, 반(反)율법주의, 형식주의 등의 많은 장애물들을 헤치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정하고 순전한 영성의 길에는 많은 유혹과 곁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의 후반부는 그와 같은 실제적인 도전들에 직면하여 자신의 완전교리를 명백히 하는데 사용되었다. 율법에 관해 다루면서, 웨슬리는 율법무용론과 오도된 유신론(唯神論)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율법을 긍정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순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의 완전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랑의 율법의 성취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그는 해명하였다. 이 사랑에 관해 웨슬리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잘못된 지나친 은사주의나 열광주의에 반대하면서, 웨슬리는 성화와 완전을 성령의 열매와의 관계에서 실천적으로 많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성령의 증거도 중요하지만, 웨슬리는 그 열매들을 중요한 테스트로 보면서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항상 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고, 변함없는 오래 참음과 인내와 포기함으로, 모든 노여움을 초월하는 온화함으로, 심령이 양선하고 온순하고 사랑스럽고 부드러움으로, 충성됨과 단순함과 경건한 성실함으로, 심령이 온유하고 평온하며 흔들리지 않으므로, 음식과 수면 뿐만 아니라 모든 본성적, 영적인 일에 절제함으로 알 수 있다.”

 

웨슬리가 결론적으로 말하면서, 한 마디로 완전성화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의 기질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요약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으로 새로워졌다고 주장하면서 열광주의적인 완전을 표방하는 감리교 내의 극단주의자들 속에서 웨슬리는 그러한 성령의 열매들과 그 완성으로서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실천적인 권면과 충고에 있어서 웨슬리는 교만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라고 우선적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신자들의 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한번 물리친 것 같지만, 이 교만의 정욕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서 쉽게 신자들이 삶에 스며들어 유혹에 빠지게 한다.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거나,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등이 교만의 종류들이다. 웨슬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면서, 잘못되거나 약한 누구에게도,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였다.

교만에 대한 치유책은 물론 겸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과 정신을 품는 것이다. 자신이 작고 낮고 천하고 무가치하다고 믿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러한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속에 오직 하나님을 전체로 인정하고, 순종과 경외, 타인에 대한 존경 속에서 겸손의 삶을 사는 것이 웨슬리적인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겸손한 사랑, 온유하고 인내하는 사랑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십자가와 반대, 공격과 박해를 포함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훈련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고 유익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을 위하여 최선의 도움이 되는 것들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핍박과 모욕과 손실 등이다.

이런 것들은 거기에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지만 않았다면 다른 모든 것보다 바람직한 것으로서, 모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비롯되는 고난, 그가 기뻐하시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길이며,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는 우리에게 감당할 은혜와 함께 환난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나아가서 아무리 큰 환난 중에서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는 그 고난을 기쁨을 느끼면서 감내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권고한다.

고난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훈련의 결실은 참된 복종과 포기(resignation, surrender)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뜻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에 철저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좋든지 나쁘든지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의인들은 따라서 가장 큰 환난 중에서도 평화 속에 흔들림 없이 “영혼의 모든 능력을 하나로 통일하여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사랑으로써 그에게 완전히 복종한다.” 이러한 복종에는 고요한 감내가 있어야 하며, 그러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다루시는 것을 자원하여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참된 영성인의 모습이다. 그것은 어린 양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며, 불평이나 비난 없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베들레헴까지, 그가 채찍에 맞으시던 법정에까지, 그가 십 자가 위에서 죽으신 갈보리까지 벗은 몸으로 그를 추구하고 따라가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은 크나큰 자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이나 그것에 대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내가 없이 불가능하며, 겸손하고 온유한 정신이 없이는 인내가 불가능하다. 웨슬리에 따르면, 겸손과 인내는 사랑의 증가 ? 점진적인 성화의 본질 ? 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인 것이다. 겸손만이 인내와 사랑을 결합시키며, 오직 그렇게 됨으로써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웨슬리는 고백한다. 다시 한번 웨슬리는 참된 겸손이 모든 덕(virtue)의 중심이며, 그것이 일종의 자아멸절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죽이고 멸할 때, 진정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의 삶이 가능하다는 진리일 것이다. 죄의 용서가 있었다면, 우리는 이제 더 깊은 마음속의 겸손과 함께, 엄격한 규율 하에서 언행과 남은 고난 속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사랑이 최고, 최상의 진리요, 은혜라면, 그 완전한 사랑의 삶, 성화는 어떤 것인가? 웨슬리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들을 견디어내고 온유와 침묵 속에서 악들을 겪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괄이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완전을 이웃과 타자에 대한 용서하고 용납하는 태도, 아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오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했던 사랑에서 읽으려 한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하며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모든 악과 해와 저주를 담당하고도 침묵 속에 인내하며 용서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기도에 관해서 말하면서, 웨슬리는 일찍이 <메소디스트의 성격> 속에서 완전한 참된(real) 그리스도인, 진실하고 순전한(genuine) 성도의 삶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쉬임 없는(ceaseless) 지속적인 기도를 언급하였다. 쉬지 않는 기도가 가능한 이유는 기도가 마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의 마음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주여, 내 입은 소리 없어도 당신께 향하여 있으며, 내 침묵은 당신께 말하나이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들어 올려져 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며, 중단시키지는 더욱 못한다. 홀로 있거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한가한 때나 일할 때나 대 화할 때, 그의 마음은 늘 주님과 함께 있다.”

 

이처럼 기도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존재이며, 어떤 상태로서의 기도를 넘어서서 항상 기도한다. 그의 영혼의 사랑하는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 기도이다.

이와 같은 기도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 후반부에서 더 펼쳐 설명되고 있다. 기도는 은혜 안에서 성령을 주심으로써, 응답하심으로써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기도는 중보의 능력을 일으키며, 새로운 기도는 새로운 승리를 계속 가져온다. 마음의 불안을 이기려면 물러가 기도해야 하며, 결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빛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가장 크나큰 시험들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고 그 이름을 입 밖에 내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며, 악한 자를 정복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영적 확신과 평정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영혼 속에 보존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어거스틴처럼 웨슬리도 끊임없는 기도를 마음의 소원으로 본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든지 그에게 말씀드리든지, 그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고난을 받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 외에 다른 목적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 모든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단순함 속에 행하는 모든 것이, 순결한 마음속에 완전한 사랑의 소원이 있다면, 계속적인 기도, 완전한 기도인 것이다.

웨슬리의 영성에 관한 실천적인 권면은 선행과 자비의 행위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마지막에 달한다. 웨슬리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하나님 사랑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면, 그 사랑을 다시 비추는 선한 자비의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자비와 사랑과 선행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렇게 될 때에 모든 이기주의는 극복되며, 우리는 죽고 비워져서 자신의 무(nothingness)로 돌아감으로써 불멸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영광 받으시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이 웨슬리의 영성의 마지막 결론이다. 그것은 깊은 감사이다.

 

 

IV. 마치는 말

이제까지 요한 웨슬리의 영성을 그 원리와 실천 면에서 살펴보았다. 과연 그를 젊은 시절부터 사로잡았던 성화와 완전의 영성이 무엇인지 그 중심 내용을 집중해서 밝혀보려고 한 것이다. 성경 전체의 대지(tenor)인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갱신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최고의 계명의 성취인 것이다. 하지만 완전 교리의 전개에 있어서 웨슬리는 많은 어려움과 반대, 비판과 오해를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도리를 분명하고 적절하게 해명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의문과 숙제는 있다고 하겠다. 과연 한 순간에, 물론 그 이전과 이후의 점진적인 단계, 정도의 진보, 퇴보 등을 포함한다 해도, 완전한 성화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웨슬리는 자신이 말하는 완전이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 결함을 포함한 상대적인, 조건적인 ? 불완전한 - 완전임을 강조하였다. 절대적인 완전은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또한 그 미래적인 하늘나라가 현재적으로 오늘 여기에 존재함이 특별히 성령론적으로 중요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 칼빈과 달리, 그에겐 목적론적이고 희망에 주목한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지배적이었다. 여하튼 자신의 신도들 속에서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충만한 순간적 체험의 경험적인 증거가 있었으며,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던 웨슬리는 오히려 그것을 선포하고 촉진함이 마땅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나아가서 웨슬리의 실천적인 영성 속에서 우리는 영성의 경험 많은 멘토의 숙고된 심오한 지혜들을 읽게 된다. 거기서 영성이 열매 혹은 인격적 수련과 완성 없이 잘못하면 감정적 주관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오류와 곁길들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공감하게 된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개혁되고 성숙하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영적인 갱신이 앞서야 하리라고 본다. 이를 위해 웨슬리 같은 영성의 대가의 지혜들은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그것은 쉽게 획득된 것은 아니며, 그의 일생에 걸친 헌신된 훈련을 통한 영성생활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적 은혜가 있었음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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