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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한 권의 신학

[책] 우리 이웃의 신학들: 다양한 신학들에 대해 개혁신학 어떻게 반응할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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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의 신학들 / 이승구 / 도서출판 나눔과 섬김 / 18,000원

 

* 2014년 8월 11일 기사

 

 

 

헨리 나우웬의 영성과 관상기도와 같은 천주교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칼 바르트의 신학을 비롯해 존 요더. 레슬리 뉴비긴의 신학, 남비의 해방신학, 톰 라이트 등 다양한 신학자들과 운동들에 대해 개혁신학적으로 고찰한 책이 나왔다.


 


‘우리를 둘러싸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 이웃의 신학들’(이승구 저, 도서출판 나눔과 섬김)이다. 저자는 정통파 개혁신학과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는 신학들을 접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교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의 목차만 보더라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목차>

들어가는 말
감사와 인정의 말

제1부 : 천주교 신학들과 그 영향들
1. 헨리 나우웬에 대한 개혁신학적 한 성찰
2. 관상기도와 그 문제점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화(義化)’ 이해와 개신교의 ‘칭의(稱義)’ 이해의 비교

제2부 : 종교다원주의와 내포주의 신학
4. 종교다원주의의 대변자 존 힉(John Hick)의 종교다원주의 주장과 그 문제점
5. 복음주의적 내포주의자 클락 피녹(Clark Pinnock)의 신학과 문제점

제3부 : 칼 바르트와 그 영향
6. 게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초기 바르트(Karl Barth)의 이해
7. 챠일즈(B. S. Childs)의 정경적 성경신학과 개혁파 성경 신학
8. 피터 엔즈(Peter Ends)의 성경에 대한 성육신적 유비의 의의와 문제점

제4부 : 매력적이나 먼 이웃의 신학들
9. 우리는 존 요더(John Yoder)와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을까?
10.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egin) 신학에 대한 한 고찰
11.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 이해의 기여와 문제점
12. 남미의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적 정향
13. 톰라이트(N. T. Wright)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5부 : WCC 운동과 그 신학들
14. WCC 제 10차 부산 총회를 바라보면서
15. 성경적 에큐메니즘을 지향하면서

참고 문헌

 

 

반면, 정통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지 않는 독자들의 경우 이 책에 등장하는 신학들에 대해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이 됐든, 수용이 됐든 이 책은 다양한 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저자인 이승구 교수는 “영민(英敏)한 독자들은 각 장의의 제목들을 보면서 짐작하시겠지만, 이 책에서 다룬 신학자들과 사상들은 정통파 개혁신학과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고, 그런 사상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생각이 우리 주변에 아주 가깝게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책 제목도 ‘우리 이웃의 신학들’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부디 주께서 우리들을 더 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되게 하여 이 땅 가운데서 바르게 생각하고 사는 일에 이 책을 사용하여 주시기를 앙기(仰祈)한다”고 밝혔다.
 
한편, 다음은 ‘머리글’에 쓰여 있는 저자의 의도를 글을 옮긴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다양한 ‘이웃의 신학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변에 다양한 ‘이웃의 종교들’이 있는 것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기독교가 전파되어 우리 조상들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들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한국 사회는 기독교 도입(導入) 당시부터 종교 다원적 사회(宗敎多元的 社會)였다. 이처럼 현상(現像)으로서의 종교 다원적 상황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이웃의 어떤 분은 불교를 믿었고, 어떤 분은 샤마니즘적 무속(巫俗)을 중시(重視)하며 살았고, 어떤 분들은 유교(儒敎)적 이념에 충실하여 삶 전체를 살았다. 우리들은 이러한 종교 다원적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계속해서 믿어 오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 다원적 상황, 즉 현상으로서의 종교 다원성(宗敎多元性)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았었고, 지금도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오랫동안 기독교의 영향 아래서 살던 서구(西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웃에 여러 다른 종교들이 있다는 것을 아주 이상한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실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가 그런 과정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도 잘 의식하고 있지 않다가, 주변에 다른 종교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서구인들은 아주 새로운 상황 가운데 자신들이 처한 것처럼 반응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래서 “어느 날 깨어나 보니 자신들이 종교 다원적 사회 속에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자신들이 그 사회 속에서 소수자(minority)가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2006년 저자가 화란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초청으로 한 한기 동안 화란에서 연구 할 때 그들의 개최한 한 학술 모임의 주제가 바로 ‘소수자가 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서구 신학이 종교 다원적 현상에 대해서 반응하는 신학적 작업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구 신학자들이 종교 다원적 현상에 반응하면서 그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인 양하며 그에 대해 반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따라 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들이 처음부터 경험한 종교 다원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 배우고 실천한 그것을 잘 제시해 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처음부터 그런 상황 속에 있어서, 사회 속에서 종교적 소수자(minority)의 위치에서 사는 경험을 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처음부터 경험한 종교 다원적 상황은 이상한 일이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고, 신약 교회가 시작될 때의 그 상황과 같은 상황이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使徒)들과 그들을 따라 다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宣布)할 때, 그들은 종교적 진공(眞空)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수 없이 많은 종교들과 사상들이 주변에 있고 사람들이 그것이 삶의 길이라고 따르고 있는 그 정황 가운데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여 그 부조리하고 쓸데없는 것을 다 버리고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면서, 이렇게 “참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우신 '이 땅에 이미 임해 왔으나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사람 앞에 현저하게 드러날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다고 선언하고 가르쳤었다.
 
초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신앙적 배경 가운데서 이 복음의 내용을 듣고 비록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1) 십자가에서 죄를 위해 구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2) 그렇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이전에 자신들이 추구하던 다른 종교적 추구(追求)를 온전히 다 버려야 한다는 것과 (3) 계속해서 성경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배워 가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히 해 왔다.
 
그래서 한국 성도(聖徒)들은 상당히 부족하기는 하지만, (1)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믿음과 (2) 우상숭배와 그와 관련된 것에 대한 절연(絶緣, 다른 종교와 제사, 토정비결 등등과의 절연), (3) 기독교적 모임에 열심히 참여함, (4)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이기는 했다.

 

 

그러므로 (1) 이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 철저화하고, (2)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더 깊이 있게 파악하고, 그 심오한 사상을 자기 것으로 하여 누리면서, (3) 그 가르침을 잘 실천하고, (4) 동료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에게 이 "유일한 살 수 있는 길"을 잘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21세기 초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우리의 경험을 종교 다원적 상황을 새롭게 경험하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일에 여러 복병(伏兵)들을 만난 것 같다. 그 하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 대답을 성경의 가르침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sola scriptura의 원리)에 동의(同意)하지 않으면서 ‘성경과 전통 모두를’(both-and) 다 중시(重視)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성경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하려는 시도들’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중에 은밀하게 우리들 가운데서 번져가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결국 천주교 사상)의 영향이고, 한편으로는 성경 이외의 계시가 지금도 계속 주어진다는 것은 강조하는 신사도 운동과 같은 것들의 영향이다. 이 문제를 이 책의 제1부와 6부에서 다루었다.
 
또 하나는 서구에서 나온 규범적인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와 내포주의(內包主義, inclusivism)의 영향을 받은 이웃의 신학들이 있고, 이것이 우리들 가운데 알게 모르게 널리 퍼져 나가고 있는 현상이다. 이를 제2부와 4, 5부에서 다루었다.

 

또 하나는 성경을 매우 존중하면서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절연(絶緣)하지 않고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끌어 안으려고 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성경 신학 연구에서 그와 유사한 접근을 하는 챠일즈(B. S. Childs)와 (조금 지나치게 말하는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만 결국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피터 엔즈(Peter Ends) 교수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분들의 신학적 작업이다. 이에 대해서 제3부에서 다루었다.
 
또 아주 매력적이고 우리의 동감(同感)을 많이 자아내면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끝까지 그들과 동행(同行)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래서 안타까운 존 요더나 레슬리 뉴비긴 같은 분들의 생각이다. 이 분들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까운 이웃이다. 그러나 그 분들과 끝까지 같이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음이 늘 안타깝다. 이에 대해서 제4부에서 다루었다.
 
이런 점에서 칼 바르트나 존 요더나 레슬리 뉴비긴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WCC 운동의 방향과 그 사상적 내용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매우 당연한 과제이다.
 
앞에서 명백히 말한 것과 같이, 이 책에서 다룬 신학자들과 운동들의 생각은 정통 기독교회의 가르침과 다르고, 특히 개혁파 정통주의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학을 하지 않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상당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들의 사상이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들도 심각(深刻)하게 검토(檢討)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결국 이런 사상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이 책의 작업이 이 일을 위해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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