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진단! 한국교회

나라멸망이 하나님 심판이라면 정의와 공의부터 세워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728x90
반응형

성서의 하나님은 일제의 식민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실까? / 김근주 교수

 

2014년 7월 28일 기사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1. 문창극 장로의 강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고를 보여주는 것들에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게으른 조선’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에 비해 ‘일본은 참 깨끗하구나’라고 보았다는 미국 선교사들의 생각에 대한 언급,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승만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묘사,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공산주의며, 미국을 통해 도우시려고 분단과 6.25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식의 표현 등이 있는데 이러한 언급들은 그의 생각이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몰상식, 노예근성, 그리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고로 일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2. 망해가는 나라에 살았던 예레미야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니엘은 그렇게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있으며, 역시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 그들의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가? 우리 역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약탈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다니엘처럼 묵묵히 순종하여 섬겨야 하는가? 여기에는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해석학적인 문제가 연관돼 있다.

 

 

3.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행동을 평면적으로 오늘을 위한 규범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 외치던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 이래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하게 될 것임을 선포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다의 패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의 결과다.
 
4. 예레미야의 멸망예언에 비해 하나냐 같은 예언자는 줄기차게 민족의 회복과 바벨론으로부터의 놓여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는 것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냐는 민족의 죄악과 하나님을 떠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 은혜로운 미래를 전할 따름이다. 지난 잘못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반성이 없는, 영광스러운 민족의 앞날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든 없든 무의미한 탐욕의 소산일 뿐이다.
 
5.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반성이 결정적이다.
 
6. 다니엘서 9장은 포로로 끌려 온 민족의 현실을 두고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여기며 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현재 민족의 참담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명백하게 고백한다. 멸망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 풀이하는 경향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구약 문헌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 반성이다.
 


7.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이 유다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것이 바벨론이 유다에 저지른 짓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이지 않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낯선 땅을 살아가면서 바벨론의 멸망을 기원하고 갈망한다(시 137:8~9). 이러한 표현은 원수를 향한 대적과 저주의 기도에 닿아 있다.
 
8. 시편기자가 바벨론에 관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바벨론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반영한다. 이것은 까닭 없는 저주가 아니라 바벨론이 저질렀던 짓에 대해 그들도 동일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고 부족한 탓 때문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있는 잘못되고 불의한 사회경제적 틀로 인한 부분도 크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공동체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기 쉽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바깥이 아니라 오직 내부로만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도 한다. 시편의 기도와 저주의 기도는 우리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을 명확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9. 문창극 씨의 발언은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시간을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을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이며,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의 발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저 조선 민족의 게으름, 일하기 싫어함, 더럽고 지저분함에 대한 지적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극히 천박한 이해를 반영할 뿐, 선교사들의 저술에 담긴 일방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반복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10.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 아무 내용이 없는 채 우리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고 말하면 기독교적인 것인가? 우리가 겪은 식민지 시절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특징을 보여주거나 담보하지 못한다.

 

 

11. 예레미야와 다니엘 본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정의와 공의’에 연관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문창극 씨의 발언이나 그의 발언을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의 소리에 크게 실망하게 되는 것은 정작 불의한 독재 정권이 판을 치던 시절, 이러한 교계 인사들이 그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반대도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2. 정작 그 끔찍하던 군사독재 정권이 횡포를 부리던 힘겹던 시대에는 정의에 대해 관심갖지 않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이들이 일제 강점기를 가리켜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빛과 소금은커녕 악취나는 신앙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3. 장기 독재를 시도한 이승만의 시대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독재시절이 우리 민족을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리와 정의와 공의로 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인 유영익 같은 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후진국에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돌아봄도 찾아볼 수 없는 노예근성에 기반한 이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4. 어느덧 한국 교회는 꿩 잡는 것이 매가 되었고, 모르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지배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 점에서 식민지 사관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네 안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 위주의 사관은 철저하게 기득권 중심이다.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권과 정부와 나라라면 망해야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진리다.
 
15.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심판이라면 고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외치며 정의와 공의를 전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 땅에 살면서 바벨론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고, 이방의 왕을 향해 공의의 통치를 행할 것을 촉구했다. 정말 죄로 인한 심판인 줄 안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 성서의 하나님은 일제의 식민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실까?(성서학적 통찰), 김근주 교수

 

* 위의 내용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지난 25일 오후 7시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로 비추어 본 한국 교회와 신학’(부제:고통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우정의 신학)을 주제로 진행된 긴급포럼에서 발표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