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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북간도 3.1운동의 특징과 한국교회

by 데오스앤로고스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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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임석순 목사/한국중앙교회)가 지난 3월 8일(금) 오전 7시 경동교회(담임:임영섭 목사)에서 월례발표회 및 기도회를 개최했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월례발표회에서는 김동춘 목사(서울제일교회)와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가 발제자로 참여했다.

 

 

 

 

북간도 3.1운동의 특징

'북간도 3.1운동의 의의와 특성: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과 기독교의 주도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김동춘 목사는 "북간도 3.1운동은 한국 3.1운동과 비교하면 유사점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 북간도란? 
(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서간도, 만주, 연변과 연길, 중국 동북의 차이) “간도1860년대 이후 우리 민족이 개척한 이래 주로 두만강 이북을 지칭하던 용어였다. 이후 압록강 너머로 개척이 진행되면서 북간도, 서간도로 호칭되다가, 1931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만주라 불렀다. 북간도는 현재 행정구역상 연변”(중국 동북 길림성)에 속한다. “간도만주는 중국 정부 수립 이후 사용을 금기시하였고 동북 지역으로 통칭하여 사용한다.

 

 

즉, 북간도 3.1운동은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꾸준하게 항일운동이 있었고, 3.1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연계되어 진행되었다는 것.

 

특히 김 목사는 주도층에 있어서도 한국은 종교인의 연합(기독교16명, 천도교15명, 불교2명)에서 시작되었지만, 만주 3.1운동은 시작도 끝도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면서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었을 때 그것을 촉매 촉진케 한 것도 북간도였으며, 한 해 뒤인 1920년에 있었던 1515만 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이 북간도의 항일운동단체 특히 기독교계 단체에서 주도된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덧붙였다.

 

 

 

 

 

 

북간도 교회의 3.1운동 준비 과정과 북간도 기독교 3.1운동의 경과 및 의의에 대해 발표한 김 목사는 북간도 3.1운동의 특징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독립선언서의 발표는 북간도지역 특유의 독특성이 있다는 것.

 

김 목사는 "3.13때 발표한 선언서는 <독립선언포고문>이며, 그 명의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이었다"라며 "북간도 대표 17명 등이 서명자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자신의 지역에 맞도록 지역의 인사들을 발기인으로 하여 각 지역마다 <독립선언서 발표축하회>의 형식으로 계속 시위운동을 하도록 하는 취지였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북간도3.13운동은 소수가 먼저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과는 달리 대중적 반일집회를 열고 독립선언 포고문발표와 함께 경축회 형식으로 만세시위운동을 했다"라고 덧붙였다.


둘째, 북간도3.1운동의 진압을 중국 군경이 주도한 것으로 지금까지 왜곡하였는데 사실은 일본이 진압을 주도하였다는 것.

 

김 목사는 "중국인들은 3.13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여 조선인과 중국인의 공동투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이런 대규모 시위운동을 목격한 중국 동북인들이 북경, 상해 등 본토인들에게 3.1운동을 선전하였고, 그것이 중국의 5.4운동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라고 설명했다.

 

셋째, 시위를 주도한 집행부의 대부분이 기독교계 목사, 장로들이었다는 것.

 

김 목사는 "북간도 3.1운동 모든 과정의 기저에는 기독교 단체와 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라고 설명했다.

 

 

 

 

북간도 교회의 피해

3.1운동 이후 일제의 박해와 북간도 교회의 피해에 대해 설명한 김 목사는 " 한국 전체에서 사망자 수가 7,500여 명인데 북간도에서만 3,664명이 죽었다. 결국 절반의 피해가 북간도에서 있었던 것이다"라며 "교회당 피해도 한국 전체에서 59개소 그중 장로교는 12개소인데, 북간도에서만 19개소가 피해를 입었으니 그 피해 정도가 짐작이 된다. 또한 제암리교회에서 29명이 참살당했지만 용정의 장암동교회에서는 33명이 불에 타 죽거나 일제의 총칼에 희생당했다"라고 설명했다.

 

3.1운동 이후 '간도국민회' 결성

특히 김 목사는 "3.1운동 이후 325일 북간도에는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도국민회'가 결성되었다"라며 "'대한임시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그 이름에 맞추기 위하여 '대한국민회'로 개칭했다"라며 "1920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는 북간도의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에 7개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확대하였는데, 각지의 지회의 간부와 경위대, 모금대 등 임원만 하더라도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특히 국민회는 교회의 시찰회 조직을 활용하여 회원을 확충하였으며, 그 회원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민회는 북간도 각 지방에 본부, 지방회, 지회를 두고 교회의 시찰회 조직과 연계하여 자치 행정, 군사 조직, 항일 투쟁 등 지방 정치와 행정 및 군사 활동을 일원화하였다. 그래서 산하에 '국민회군'이라는 군사조직도 만들었다"라며 "국민회군은 다른 독립군과의 연합도 모색하면서 국민회를 통한 연합부대가 결성되었기 때문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승리하게 되었다"라고 피력했다.

 

김 목사는 "결국 북간도 3.1운동은 시위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연해주 국민의회와 함께 간도 국민회를 결성되게 하였고, 독립군을 만들어 연합부대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연합의 힘이 뭉쳐 상해임시정부를 결성케 하고1920년의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이끌게 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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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3.1운동과 한국 교회

김 목사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은 만주에 망명해 오면서 조국을 회복하자, 조국의 모델이 되어보자는 의식이 있었다"라며 "그래서 북간도를 조선 팔도로 나누어 마을을 만들었고 기독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면서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기독교가 바탕인 독립운동 단체가 북간도 지역의 항일운동을 견인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결국 북간도 3.1운동은 한국 교회에게 이 민족과 사회를 주도해야 함을 보여 준다. 정치 세력을 갖자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선도적 역할 즉, 선도성, 선구자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이다"라며 "남북관계를 풀어갈 것, 결혼 출산 장려운동을 벌일 것, 조국 및 민족사랑 운동을 벌일 것, 연합운동과 하나 됨의 운동을 벌이는 등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한편, '3.1 정신과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박명수 박사는 "1919411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7조에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 한다'고 되어 있다"라며 "이것은 대한민국은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어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큰 꿈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19193.1 운동의 꿈은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 한국 교회가 가졌던 꿈, 아시아의 복음화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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