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오덕교 목사)와 유나이티드 문화재단(이사장:강덕영 장로)이 지난 9월 22일(금) 오후 2시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지하 1층 더글라스홀에서 '제4차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제임스 게일과 초기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이은선 박사(안양대 명예교수), 이상웅 박사(총신대 신대원 교수), 장성민 박사(한국 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등이 발제자로 나섰다.
첫 번째 발제자로 참여한 이은선 박사는 <게일의 한국사 연구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게일의 한국사 연구 세 가지 특징
이 박사는 "초기에 게일은 한국사의 독자성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1895년에 Korean Repository에서는 『동국통감』을 번역하는데, 단군에서 시작하여 신라시대까지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가 선택한 역사책은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유학자들의 동국통감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1900년에 헐버트와 논쟁할 때,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아 단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라며 "반면, 헐버트가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단군을 우리의 고유성의 출발점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하자, 게일은 토론부에서 동국통감을 인용하고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지적하여 헐버트의 입장을 반박하기도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게일은 1901년에 『그리스도 신문』에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까지 역사를 소개했다. 여기서도 『동국통감』의 단군관련 기록을 번역하여 소개했다"리며 "하지만 단군을 외국에서 온 인물로 해석하여 신화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로 제시했다"라고 피력했다.
두 번째로, 게일은 한국의 종교적 관념을 추구하여 1918년에 가면 한국에도 서양의 관점의 종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했다는 것.
이 박사는 "게일은 성경을 번역과정에서 God을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결정 할 때에, 1900년에 주 씨(주시경)의 입장을 빌려 하나님이 하나(유일성)와 위대한 창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했다"라며 "또한 이러한 그의 입장은 하나님이란 용어 수용을 주저하던 언더우드가 하나님을 수용하게 만들어 1903년 번역자회에서 God을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로 결정하는데 기여했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게일은 1909년의 『전환기의 한국』에서 하나님의 개념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등 한국인의 종교적인 관념에서 하나님의 의미를 추적했다"라며 "한국인의 종교적 관념을 추적하여 인간 외부에 있는 신적 존재를 섬긴다는 면에서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단군은 정치적 지도자라고 봤지만 종교적 지도자로 보지는 않았다. 즉, 게일은 한국 종교의 시원으로 단군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반면, "게일은 1917년에 김교헌의 『신단실기』를 인용하여 단군의 역사성을 검토했고,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그의 존재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라며 "게일은 한국의 한문문헌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한국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한국인들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발견하면서 단군을 종교적 시원으로 인정했다. 이때 한국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뿐만 아니라 내재성을 인정하는 종교였다"라고 평가했다.
세 번째로, 게일은 1924년에 <한국민족사>를 저술하면서 단군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반영하여 단군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저술했다는 것.
이 박사는 "게일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정치지도자일 뿐만아니라 종교지도자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유비를 보여주는 인물로 봤다"라며 "그는 한국문헌에서 이러한 유비를 찾아내면서 한국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였고, 한국문학의 독자성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게일의 선교사역과 종말론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선교사역과 종말론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상웅 박사는 게일의 40년 간 선교기간(1888-1928) 속 그의 기여를 평가했다.
이 박사는 "게일은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도 한국장로교 선교를 주도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나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협력하면서 선교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했고, 1892년 초에는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의 추천으로 소속을 북장로교 선교부로 옮겼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게일은 연동교회 담임목회(1900-1927)라는 주된 사역이 있었지만, 어학과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예에 힘입어 한국어와 역사 등을 서구권에 알리거나 서양 문헌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일에서 더욱 더 강력한 빛을 발휘하기도 했다"라며 "그의 문서사역에서 이룬 성과는 오늘날 일반 학자들도 인정하지만 선교 자체보다는 언어와 문학에 너무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게일의 종말론적 경향에 대해서도 고찰한 이 박사는 "19세기말 D.L. 무디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선교사가 된 게
일은 동일한 영향하에 한국에 온 대부분의 초기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처럼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전천년설이라는 이름하에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취했다"라며 "하지만 게일이 자신의 종말론적 입장을 밝히거나 설명하는 공식적인 인쇄물을 찾기는 어렵다.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사신들 속에서 그의 전천년설적인 종말론 성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이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게일 연구로 문화석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는 장성민 박사는 <게일의 창세기 1장 번역 탐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한편, 심포지엄 전에 열린 개회예배는 오덕교 박사(횃불트리티니대학원대 총장)의 사회로 이종전 박사(대신총회신학원 교수), 박응규 박사(아신대 역사신학 교수)의 설교, 정효제 박사(전 대한신학대학원대 총장)의 축도로 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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