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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코로나 시대의 교회를 바라본다면?

목회와 신학

by 데오스앤로고스 2021. 4. 2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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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흑사병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기독교인, 삶의 자리와 소명이라는 '처방전' 잃지 말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교회일치위원회가 '코로나19, 새로운교회-함께하는 공동체'를 주제로 '2021년 에큐메니칼 선교포럼'을 기획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교회들의 공동의 과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한국 교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면서 에큐메니칼한 교회 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포럼은 올해 총 2차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그 첫번째 순서로 지난 4월 29일 오후 2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 뉴노멀과 새로운 교회'를 주제로 한 1차 선교포럼이 줌(ZOOM)과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됐다. 이날 ▲'루터의 시선으로 바라본 코로나 시대의 교회'(이지성 박사/루터대 교수), ▲존 웨슬리적 관점의 불이, 융섭, 글로컬'(이찬석 박사/협성대 교수) ▲최태용의 교회에 관한 인식과 코로나 시대의 교회(이윤석 박사/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등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지성 박사의 발표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NCCK가 온라인으로 개최한 에큐메니칼 선교포럼

1. 루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코로나 19와 한국 교회-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루터의 처방전 - 이지성 박사(루터대 디아코니아 교양대학 교수)

 

# 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루터의 입장

 

시골의 작은 대학 도시인 비텐베르그에 흑사병 첫 환자가 발생한 건 1527년 8월 2일이었다. 종교개혁의 후원자이며, 작센 지역의 요한 선제후는 위험한 상황을 예견하고 8월 10일 대학을 근방의 예나 지역으로 옮기고 루터뿐 아니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을 피신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비텐베르그 사망자 숫자는 18명을 기록했다. 시장의 아내가 루터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고, 루터의 집에 머물고 있던 임신했던 친구의 아내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었다. 게다가 루터의 아내 케이티는 임신 중이고 큰 아들 요하네스도 병중이었다.

 

거의 하루 한명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선제후 뿐 아니라 멜란히톤을 비롯한 동지들도하나 둘 도시를 떠나면서 루터에게 도망치자고 호소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모두 떠나고 루터는 부겐하겐과 함께 비텐베르그에서 남아 있던 학생들에게 계속 강의를 하고 늘어 나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집을 임시 병원으로 운영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곁을 지켰다.

 

사실 이러한 루터의 결정은 위인스럽고 담대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돌보지 않는 무모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특히 이 결정을 ‘도망이냐 항복이냐’의 이분법적 관점으로만 해석한다면 루터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루터의 처방전은 ‘암 진단을 받은 후 암 제거 수술을 할지, 받아 들이고 치료를 거부할지’ 결정해야 하는 O 혹은 X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명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루터는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던 “도망(run away 혹은 flight)가도 되는 건가? 항복 (submission)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진단에 앞서 도망치는 사람과 떠 나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루터가 ‘남거나 떠나거나’의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처방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선택이지만, 믿음이 굳건하다면 하나님 이름으로 남아도 된다고 격려하고, 마음이 약해서 공포에 질려 있다면, 자신의 의무를 버리지 않고 수습하는 선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을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남아야 하는 근거는 ‘사랑’ 즉,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 루터의 몇 가지 처방전

 

우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대한 경고’이다. 루터는 고의적으로 전염병을 확산하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살인자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지만, 소극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 즉 이웃을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라고 비판한다. 

 

‘의료 활동에 대한 옹호’의 입장도 주목할 만 하다. 고의로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사람들 보다는 악의는 덜하지만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의료적 치료를 거부하고 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경솔하고 무모한 사람들을 비판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면서 위험한 장소를 피하지 않고 감염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병을 이겨낼 자신에 차 있는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향해 루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돕고자 하신다면 의약품과 스스로 조심하는 방법으로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행위라고 경고한다.

 

또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서 그런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실 필요가 없으며 옷을 입을 필요가 없고 집도 필요가 없을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들도시 한복판의 집에 불이 났는데도 불을 끄지 않는 자들로 오히려 불이 온 도시를 집어삼키도록 바라만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불을 끌 물 없이도 불이 꺼질 것이라 주장하는 반지성적 인간들임을 비판한다.

 

루터는 지금은 도시에 불이 난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 불끄기 위해 전력 투구해야 한다고 행동하자고 권고한다. 적극적으로 의약품을 사용하고 집과 공용 공간을 소독하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웃들과 가급적 모임을 삼가고 거리두기를 하라고 권했다.

 

확진자에 대한 시선과 태도에 대한 루터의 의견은 더욱 시의적절하다. 주변에 어떤 사람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고 나아가 혐오와 증오심을 갖게 되는데, 루터는 이러한 생각은 악에서 비롯된다고 경고한다. 악은 공포와 걱정을 앞세워 삶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에 휘둘린 영혼은 절망 속에서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두고 도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루터는 “병원이 없는 곳에서는 서로가 병원의 역할을 하면서 간호하는 일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고, 그래야만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고 말씀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보이지 않아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루터가 이 의무에 대해 설명하며 언급한 ‘이상적인 의료 체계’는 유능한 정부의 덕목과도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이웃들을 향하고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보상의 확신이다. 루터는 힘든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은 놀라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하나님이 그를 돌보실 것이라는 위로를 건넨다. 세상 모든 의사가 우리를 살필지라도 하나님께서 살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세상 모두가 도망치고 어떤 의사가 함께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끝내 전염병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살아나며, 함께 이겨낸 자들은 하늘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전한다.

 

결국 ‘루터가 치명적인 전염병에서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과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자신과 가족들의 위험 앞에서 루터가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단순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이웃 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가 건네 준 전염병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도 모두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들이었다. 

 

# 우리는 루터의 처방을 '지금, 여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루터는 당시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참된 믿음과 이웃 사랑에 대한 시험”이라고 불렀다. 코로나 19 전염병을 지나면서 ‘지금, 여기’ 한국 교회도 시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과연 오디션에서 몇점이나 받았을까?

 

최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코로나 19와 한국교회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있는 설문을 진행하고 결과를 제공했는데, 상상은 했지만 기독교인·비기독교인 설문 대상 그룹의 인식 차이가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교회가 대응을 잘했다’라는 긍정적 평가에서 목회자 79.7%, 기독교인 58.6%, 비기독교인 12.0%로 목회자와 비기독교인 간에 무려 6배의 차이가 났다.

 

‘교회가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응답에 목회자 68.7%, 기독교인 54.1%, 비기독교인 10.1%로 답했다. 다행스럽게 기독교에 대한 인식 긍정평가 영역에서 ‘코로나 19 상황에서 기독교의 대사회적 역할이 중요함’은 목회자 98.7%, 비기독교인 76.0%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 19 확산에 기독교 책임이 크다’라는 항목에 대해서는 비기독교인 82.4%, 언론인 76.5%, 기독교인 63.1%, 목회자 53.7%의 결과를 보였다.

 

세부적으로 언론의 보도 방식과 방역 차별화 등 다양한 문항들이 조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현실로 보인다.

 

루터는 오늘 처방전을 통해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단이 담긴 ‘삶의 자리’와 ‘소명’이라는 처방전을 건네주었다. 사실 루터의 처방전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그를 악을 물리치고 이웃을 돕기 위해 전염병과 싸워서 인간의 삶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간 위인이나 개혁가로 보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위험스러운 적용이다. 

 

500년 전과 후, 전염병으로 인한 세상의 혼란은 그대로이지만 진단을 받아들이고. 복용을 선택한다면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의 상황을 고려한 주의 사항도 꼼꼼히 챙겨 읽어야 할 것이다. 


이제 처방에 따라 약 복용을 선택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몫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이웃 사랑의 ‘소명’을 다하면 된다는 진부한 처방전이 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지 반신반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책임’이라는 것을 되새겨 본다.

 

루터의 처방전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내용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본 결론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와 다른 결론에 다다랐다면 그때는 저나 당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길을 보이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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