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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한국선교 130주년, 과연 한국개신교 기년(紀年)은 언제일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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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무 교수,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서부터 시작해야” 주장

 

2015년 2월 8일 기사

 

한국개신교회의 요람 ‘소래교회’로 출발한다면 1885년이 한국개신교 기년

‘한국교회 선교 130주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교회(개신교) 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교단 및 단체, 교회별로 다양하게 마련되고 있다.

한국 교회가 한국개신교 선교를 130주년으로 설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84년 9월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알렌이 한국에 들어왔다. 같은 해인 6월에 미국북감리회 메클레이 선교사도 방한했다.

이듬해인 1885년 4월에는 미국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미국북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선교적 목적을 갖고 공식적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한국개신교의 기년(紀年)은 1884년일까, 아니면 1885년일까.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는 외국선교사들의 공식적 방문(내한) 시점인 1885년을 기년(紀年)으로 보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개신교의 기년은 외국선교사들의 방한 시점인 1885년으로 설정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현재 이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는 상황이지만 보편적으로 외국선교사들의 공식적인 ‘한국선교’ 시작을 한국개신교 기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신광철 박사)가 지난 7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제332회 학술발표회’에 발제자로 참여한 한규무 교수(광주대)는 ‘한국 개신교 기년 설정의 현황과 쟁점’이란 주제의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우선 기년(紀年)의 개념부터 말하자면 기년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기원으로부터 차례로 센 햇수'다. 기원(紀元)은 '역사 연대의 기준이 되는 해'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기년이 곧 '역사의 시작';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규무 교수의 경우 한국개신교의 기년설정은 해외선교사들의 한국방한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 형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외국선교사들의 한국방문을 ‘한국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이 시점을 한국개신교의 기년(紀年)으로 볼 경우 다양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선 한국선교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 교수는 “우선 ‘선교’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또한 외국선교사들의 방한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1832년 7월 방한한 네덜란드선교회 귀츨라프 선교사, 1865년 8월 방한한 런던선교회 토마스 선교사도 있다”며 “외국선교사들의 방한을 한국개신교의 기년으로 설정하는 근거가 되려면 그 이전에 한국에 개신교인도, 개신교회도 없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널리 알려진대로 이들의 입국 이전에도 한국에는 이미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때문에 UPC 선교사 매킨타이어에게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1879년 1월을 기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밖에 1884년 이전 이미 한국에 개신교인과 신앙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다양하고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수용’과 ‘전래’ 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기년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개신교의 ‘기년’ 설정을 합의 없이 설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직까지 한국개신교 안에서 역사적 사건을 합의된 기준에 맞도록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한국개신교의 기년 못지않게 개신교회의 기년, 즉 교회의 설립 역시 복잡한 문제”라며 “한국개신교 역사학계의 대가인 민경배 박사(「한국 기독교회의 기원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도 한국 교회 기년을 어떤 기준으로 잡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그는 창립, 시작, 기원, 시원 등 기년을 뜻하는 표현을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의 경우 한국 교회의 기년 설정에 대한 결정을 유보했지만 선교지에서의 교회의 기원은 ‘소래교회’, 사도적 교회로서의 기원은 ‘새문안교회’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 한 교수는 “소래교회는 성직자가 없었기에 ‘교회의 시원’으로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성직자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새문안교회를 정식 정통 교회로 평가한 이유는 조직교회, 즉 당회라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성직자보다는 ‘장로의 장립’이 필수요건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한국개신교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기년 설정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교수는 한국개신교의 기년은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기년으로 할 경우 공개적이 아니더라도, 주일예배가 아니더라도, 성직자가 없더라도 기년 설정에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러한 점에서 한 교수는 흔히 ‘한국개신교의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 교회에 주목했다.

하지만 소래교회도 다양한 문제가 있다. 소래교회의 설립연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1883년설, 1884년설, 1885년설이 있다는 것.

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1885년 ‘송천교회의 창립’이라고 나온다. 민경배 박사는 1884년을 창립연대로 보았다. 하지만 소래교회 출신들은 1883년 5월 16일이 창립기념일이며, 1933년에 창립5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현재 복원된 소래교회 앞의 약사에도 ‘설립년월일:1883년 5월 16일(초가집 예배당)’이라 적혀 있다. 대표적인 한국개신교 통사인 ‘한국기독교회사’에는 1884년 ‘한국기독교의 역사(1)’에는 1885년으로 나온다.

한 교수는 “어떤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본 발표자는 1885년이 맞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물론 1933년 소래교회에서 ‘교회창립 50주년’을 기념한 것은 사실이다. ‘동아일보’(1933.06.02/1933.06.19)와 ‘조선일보’(1933.05.08)에 기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래교회 출신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시대일보’(1925.08.12)를 보면 1925년 8월 6일 ‘송천교회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 담임은 서경조 목사였다. 그렇다면 왜 50주년 기념식을 1935년이 아닌 1933년에 거행했을까?

한 교수에 따르면 이 역시 확실한 근거는 있었을테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1933년은 서경조 목사가 소래로 이주한 해다. 이때부터 전도가 시작됐다고 생각해 연도를 앞당긴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서경조가 1925년에 쓴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를 보면 위와 같은 추론들은 타당치 않다.

 

 

이 글이 1925년 10월 발간된 ‘신학지남’에 실려 있으니, 같은 해 8월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이승철 목사가 설명했다는 ‘교회역사’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교수는 “이 글을 보면 1883년 소래로 이주한 서경조는 1885년 형인 서상륜을 만나기 위해 상경하기 전 전도는 고사하고 그 자신도 고민을 거듭할 뿐 공개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히 나타난다”며 “따라서 그가 공개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은 1885년부터이므로 그 이전에 소래교회-신앙공동체가 창립됐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발표자인 나는 이런 점에서 한국개신교의 기년이나 한국 교회의 기년을 1885년으로 보는데 동의한다”며 “하지만 발표자인 내가 기준으로 삼은 ‘한국인 신앙공동체의 형성’이란 것도 논쟁의 여지가 많은 모호한 개념이다. 따라서 어떤 기준으로 한국개신교와 한국교회의 기년을 설정해야 할지는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논찬자로 참여한 안교성 교수(장신대)는 “한국개신교와 한국 교회의 기년에 대한 논의가 이제라도 본격화된다는 것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이라며 “비록 발표자의 주장이 뚜렷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안 교수는 “기독교의 기원을 말한다면 그것은 선교사가 되었건, 현지인이 되었건,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의 계기를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세계주의인 동시에 민족주의이며, 전래와 수용은 궁극적으로 모두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교회의 기원을 말한다면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교회의 비공식적인 기원과 공식적인 기원을 모두 말해야 한다. 가령 교회는 복수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역사로 시작되어야 하며, 그 공동체의 공식성은 각 종파가 결정한 일이다”며 “따라서 논찬자는 다기원설(다단계설 포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기독교의 기원과 교회의 기원을 둘러썬 오해, 심지어 분쟁까지 있다. 특히 ‘누가 최초냐’는 소모적이고 분쟁적인 논쟁이 개교회, 교단별 및 교단간, 선교기관별 및 선교기관 간 등 한국기독교 전반에 걸쳐 지속 및 확산돼 왔는데, 이를 시정할 필요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학술발표회에서 신광철 박사(한신대)는 ‘한국 천주교의 기년 설정의 현황과 쟁점’을 주제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 박사는 “한국 천주교회도 1779년과 1784년과 관련해 기년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1779년설의 경우 평신도들의 자발적 노력과 주민들의 신앙사에, 1784년설의 경우 교회공동체의 완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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