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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도 기독교에 속한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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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래 교수, 성경삶사역회 ‘겨울 컨퍼런스’서 세 교회 일치성과 차이점 발표

 

2014년 12월 30일 기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신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광의의 기독교 정의에 따른다면 개신교회, 동방교회, 로마가톨릭교회는 모두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총신대 정원래 교수(역사신학)는 성경삶사역회가 지난 12월 29일 오후 2시 서울영동교회서 개최한 ‘2014 겨울 컨퍼런스’에 강사로 참여해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정통, 보편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한 정 교수는 “세 교회 모두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와 이단들을 분류하는 기준이 됐던 ‘신앙의 규율’을 공통적으로 믿음의 내용으로 받고 있다”며 “하지만 교회 역사에서 세 교회는 모두 치열한 논쟁을 넘어서 상대를 정죄하는 역사를 지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053년 동방과 서방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며 완전히 단절됐고,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상대방을 정죄했다는 것이다. 각각의 교회는 상대를 향해 파문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로 선언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그 결과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교회사적 탐구에 있어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연구는 주로 서로의 차이점을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어떻게 다른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탐구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정 교수가 이날 컨퍼런스에서 이와 같은 주제로 발표한 것은 지난 8월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기독교에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단들과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지난 5월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발족한 것과 관련해 교계 내에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정 교수에 따르면 세 교회가 서로를 적대시하거나 이단시 하는 결과를 도출해내기까지에는 교리적인 논쟁과 역사적인 정황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에 대해 우리가 날카롭게 각을 세우는 부분들(차이점)의 상당부분은 다른 신학적 전통, 해석과 역사적 상황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만으로 서로의 교회를 이단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동방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적 해석과 전통에서 우리 개신교회에게 유익한 부분들이 있다. 또한 세 교회 모두 공동의 유산들을 지닌 채 교회와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서로 상대를 이단시하고 정죄하고, 갈등을 낳게 되면 우리 개신교회의 뿌리 역시 상당부분을 제거해야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과 동방교회의 보편성과 정통에 대한 주장이 역사성과 더불어 신학적 무게감을 지니지만 우리 개신교회는 프로테스탄트다. 성경말씀에 맞지 않는 주장이나 해석에 대해 ‘아니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저항을 할 수 있는 교회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아래는 이날 정원래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정통, 보편,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로마주의와 정통 개신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과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주님과 인류의 구세주를 믿는다. 양자는 공히 성경과 보편적인 신앙을 받아들인다. 양자는 모두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들에 동의한다. 양자를 연합시키고 있는 것은 양자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고, 중요하다.

동방과 서방교회의 관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 1054년 서로를 파문하며 단절한 양 교회는 서로의 차이를 부각하고, 자신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소유하며, 참 교회임을 강조하고, 상대를 정죄해왔다. 동일한 교리 체계, 동일한 교회법, 동일한 예배 형식을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았으면서도 상대방을 향해서는 우위성을 내세웠다.

특히 현대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는 서로 간의 역사적 반목들을 제거하려고 하고, 화해와 평화를 모색한다. 동방신학은 현대에 있어 서방신학자들의 연구에 많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몰트만 등이 동방의 삼위일체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지지울라스(Zizioulas) 등은 신론의 연구에서 학자들이 피해갈 수 없다. 또한 필립 쉐러드(P. Sherred)는 현대에 이르러 동방정교회 영성의 재발견은 서구에 중요한 영적 도전임을 제시한다.

이러한 현대적 상황에서 동방과 서방교회의 차이점과 연속성 혹은 개신교화의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동방과 서방교회를 먼저 비교해보고,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비교해 볼 것이다.

 

 

# 정통(Orthodoxy)이냐 보편(Cathokic)이냐

필립 샤프에 의하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일치점은 △1~7차까지의 세계공의회 결정들을 인정한다 △교회 전승의 권위를 성경과 동일한 신앙의 준칙으로 인정한다 △성모와 성인들과 그들을 묘사한 그림들, 그리고 성유물을 숭배한다 △믿음과 선행이 공동의 조건이 되어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한다 △선행, 특히 자발적인 독신과 청빈의 공로를 인정한다 등이다.

또한 두 교회의 차이점은 △성령의 발출 △교황의 보편적 권위와 무류성 △성모의 무흠수태설, 하위성직자의 결혼 등이다.

교회가 본격적으로 분리된 것은 1054년 교황과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을 때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공식적인 단절이었을 뿐이고, 이미 수세기 동안 단절은 계속돼 왔다. 1054년 훔베르투스가 동방정교회를 파문하는 ‘파문장’의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현한다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으로 소위 필리오케(filioque:성자로부터)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 총 공의회의 반대 역시 이에 연관돼 있다.

즉, 서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포함되지 않았던 filioque를 삽입한 것이야말로 정통신조를 위조한 이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점에서 서방교회는 보편성(catholicity)을 주장하며 “아들로부터 성령의 발출은 비록 당시의 논쟁점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진리”임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하는 동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반면, 동방교회에게 신조의 일부를 삽입하는 서방교회야말로 이단이며, 동방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보편공의회(1~7)의 신조를 100% 보수하고 있는 유일한 정통(Orthodoxy)임을 자부한다,.

이러한 정통과 보편성의 추구는 중세 이후로 라틴교회와 동방교회가 그 궤를 분명히 달리하도록 만든다. 그리스 교회가 정체된 반면에 라틴 교회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즉, 동방교회는 완벽한 신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반면, 서방신학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그리고 새로운 민족에 대한, 새로운 지역에서도 여전히 진리임을 내세우기 위한 노력을 더했고, 그 결과 중세의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하게 된다. 동방과 서방신학의 보편과 정통의 다툼이 언급한 filioque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많은 동방신학자들은 신학이 개인의 경험과 동떨어진 실험이 될 수 없다고 하며, 그 이유는 어떤 용어로도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또한 동방의 신학은 의식적이고 체험적인 신학을 특징으로 한다. 즉, 동방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추구나 설명, 이해가 아니라 체험과 찬송, 기도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성례와 예배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동방교회에서는 서방교회에서 부르는 미사를 ‘성찬예배’라고 부른다. 동방교회의 예배에는 미적 요소들과 상징적 요소들의 조화된 신실한 고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생애, 소년기로부터 성인기까지, 성육신에서부터 부활하심까지의 성화)들이 교회 안에 비치돼 있는데, 예배자들은 이런 성화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교회의 장식과 배열은 분명한 신학적 계획에 따라 이뤄지며, 교회 건물 전체가 하나의 위대한 성화,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를 이룬다. 교회를 가득 채운 성화들은 천국과 지상이 만나는 지점 역할을 한다.

또한 동방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적이고 능동적이다. 정교회의 예배는 성직자와 회중이 함께 수행하는 공동의 행위다. 회중은 예배의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회중은 십자성호를 긋거나 몸을 굽혀 절하거나, 사제가 교회와 여러 가지 세상의 필요한 일을 위하여 연도를 요청할 때, ‘퀴리에 엘레이손’(kurie eleison)으로 화답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예배를 드린다.

# 동방교회는 ‘성화’ 서방교회는 ‘칭의’ 추구

특히 전례는 동방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세례는 한 사람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방편이며, 성찬은 한 사람이 이러한 회원 자격을 확인하며, 그것을 경험하는 방편이다., 전례라는 경험은 정확하게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및 신적 생명 자체에 참여하기 위한 원천이요, 가능성이다.

서방에서 어거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 신학에 반대해 원죄를 강조함으로써 세례를 주로 죄사함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례의 신학은 주로 부정적인 것이 됐다. 동방에서는 원죄에 대한 어거스틴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죄의 결과를 죄책으로 보지 않고 죽어야 할 운명의 결과로 보았다.

 

 

대부분의 서방신학자들은 구원을 회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들은 인간의 노력들이 구원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하는 회심 후에 행해지는 인간들의 노력들에 중요한 자리를 남겨두기는 한다. 이러한 서방의 신학은 당연히 구원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며, 특히 종교개혁을 통해서는 ‘십자가 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칭의’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중심이다.

반면, 동방신학자들은 ‘신성화’를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상태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유한 서방신학자들과는 달리 ‘과정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유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성화를 향해 점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의 노력들을 갖고 그러한 과정을 구축해 나가야 했다. 동방신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노력과 거기에 상응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성화가 중요한 핵심을 차지한다. 동방과 서방의 신자들은 각각 ‘칭의하라’와 ‘성화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필립 샤프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그 가지들은 다른 기독교의 서로 구별되는 두 형태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필립 샤프는 “가톨릭교회는 중세의 야만적인 민족들에게 꼭 필요한 훈련의 학교로서 공헌한 법적 형태의 기독교이다. 개신교는 독립된 성년의 시대에 응답한 복음주의적 형태의 기독교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 위계 제도적, 예전적이며 보수적이다. 개신교는 성서적, 민주적, 영적이며 진보적이다. 전자는 ‘권위’의 원리에 의해, 후자는 ‘자유’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일치와 차이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 교황무오설, 마리아론에 있어서 일치와 차이점을 지닌다.

 

 

1)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독교의 모든 진리와 규범의 준거가 됨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도, 사람에 따라 서로 이해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이해에 대한 갈등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앙을 가르는 중요한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개신교의 다양한 교회들을 서로 차이나게 하며, 나아가 교회의 역사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신앙과 신학을 가치 폄하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이 그릇된 성경 이해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를 갖고 있으며,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 역시 성경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권위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제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든 면에서 신구약 성경의 책들이…거룩하고 정경적이다. 그 이유는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으며…하나님을 저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하여 고수한다”라고 선포했다.

실상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우는 슬로건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에는 이러한 두 진영의 첨예한 갈등이 내포돼 있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교황, 공의회 및 신학자들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본다.

이에 관한 칼빈의 주장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 판단 범위를 넘어서 있고, 또한 교부들과 공의회들은 말씀의 척도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의회들과 교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지위와 영예를 우리는 여전히 인정한다”이다. 즉, 규정하는 규범으로서의 성경과 규정된 규범으로스의 공의회 의결, 공인되는 신조들, 전통으로 표현할 수 있다.

둘째, 개혁가들에게 교회 안에서의 권위는 공직자의 지위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봉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직분자의 권위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함에 근거한다.

가톨릭인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 많은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형식적 교리와 실질적 교리의 측면을 구별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질적 의미에서의 Sola Scriptura는 구원적 계시의 모든 내용들이 성경에 있다는 의미다. 이 점에 관해서 가톨릭인들은 동의한다. 반면에 공식적 의미에서는 개신교인들은 성경이 너무나 명백하고 명로하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적 무오류한 가르침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반면, 가톨릭인들은 이에 반대한다. 이러한 성경해석의 전통이 교회에 전승되고 있으며, 교회의 권위에 힘입을 때에만 만연한 개별주의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교황무오설

교황무오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교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황 혹은 교황제는 가톨릭교회의 수장을 의미하는 직분 혹은 제도를 가리킨다. 교황청 연감에 따르면 교황은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권의 계승자’, ‘전체(보편) 교회의 수장’, ‘서방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와 로마 교회의 주교들과 도시들의 수장’, ‘바티칸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 등으로 나타낸다. 로마 교황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직분으로 접근해야 한다.

반면, 동방교회와 개신교회는 교황권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처럼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사도의 우두머리로서의 권한을 내렸으며, 대대로 그 후계자(로마 주교=교황)에 계승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수위권을 갖는 것에 대해 인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예상일 뿐, 실질적인 통치권적 수위권과 무류성을 행사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들은 고대 이래 내려온 5대 사도좌가 모두 동등한 권한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황 역시 다섯 총대주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개신교회에서는 교황권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교황의 무류성 및 교황권에 기반을 둔 모든 사상을 부인한다. 교황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 근거를 베드로의 수위권에서 주로 찾고 있으나 개신교와 성공회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지상에서 예수를 대리하는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견해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허락한 베드로의 수위권이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회라고 이해한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지상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정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교황권 자체를 시인하지 않는 개신교는 교황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로 볼 수 없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다.

교황의 가르침이 무류적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 가르침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 자격으로서 나온 것이어야 하고, 둘째는 그 가르침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이어야 하고, 셋째는 그 가르침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선언이 아니라 직분에 따른 선포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에 대해 개신교회는 성경의 무오류성을 수용하지만 모든 인간과 인간이 만든 제도가 성경의 무오류한 해석가라는 사실은 완강히 거부한다.

 

 

3) 마리아론

많은 개신교인들이 마리아론과 성모 마리아 숭배를 거의 동의어로 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인들과 개신교인들이 마리아론에 관해 많은 점에서 공감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며, 신인이신 그리스도를 동정녀로서 잉태했다는 점에서 루터나 칼빈도 함께 사용한 것처럼 ‘하나님의 모친’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의 무흠수태설, 무죄성,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 중보성, 형상의 숭배 등에서는 개신교회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동방교회 역시 무흠수태설과 성모승천설 등에 대해서는 개신교회와 입장을 같이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무오설과 마리아론에 대한 개신교회의 입장은 분명하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교황, 공의회 및 신학자들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 즉, 성경에서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전통이나 해석에서도 여전히 정당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톨릭, 동방교회, 서방교회는 모두 기독교이다. 다른 교회에 대해 날카롭게 각을 세우는 부분들의 상당부분은 다른 신학적 전통, 해석과 역사적 상황에 따른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 교회 모두 공동의 유산들을 지니고 교회와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동시에 상대를 이단시하고 정죄하고, 갈등을 낳게 되면 우리의 뿌리 역시 상당부분을 제거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보편성과 정통에 대한 주장이 역사성과 더불어 신학적 무게감을 지니지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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