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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원문]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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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충원 박사(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 샴롬을꿈꾸는나비행동 사무총장)

 

2014년 12월 9일 기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 

1. 서론

나는 개혁파 영성의 탁월한 꽃으로, 영적으로 심히 혼탁하고 어두운 오늘을 위한 기독교 영성의 롤 모델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을 다루고자 한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영성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영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일체의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다음의 말은 기독교 영성에 대한 좋은 정의라 여겨진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영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인격을 드러내시며 보이신 행위에 대하여 신자들이 각자 그리고 함께 반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실상 삶의 모든 면을 아울렀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반응을 영성이라고 할 때, 영성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 모든 시대의 공통된 현실이다. 그래서 영성을 논의해야 하는 자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고질적적인 문제 상황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영성의 추구는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전환을 강조해야 한다. 영적인 삶은 육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돌이킴에 있다. 이 점에서 고전적인 기독교의 영성의 모범을 보여준 토마스 아켐피스의 관점은 타당하다. “일시적인 것에만 애착을 갖고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지 않는 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을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게 하라.” 하나님 사랑을 위한, 세상에 대한 부정과 철저한 자기부정이 전제되지 않은 기독교 영성은 불가능하다.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의 영육이원론, 성속이원론을 극복하면서 세속을 비판적으로 긍정하는 새로운 영성의 패러다임을 열어 주었지만, 종교개혁적인 영성은 중세의 수도원적 영성 이상으로 자기의(自己義)와 세속주의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의 영성이었다. 개혁파 영성은 세상에 대한 긍정을 지향하지만, 그 긍정은 십자가의 죽음이 전제된, 본회퍼가 말한 깊은 현세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세상욕망에 대한 철저한 비판, 이에 바탕을 둔 거룩함의 추구로 드러난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욕망과 자유를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감성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이로 인해서 도덕성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그런데 교회는 정통적인 교리를 붙들고 있지만, 인본주의 자유주의의 시대를 향해 무력하고, 더 나아가서 세상과 동일하게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고 신앙과 삶이 세속화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비판적으로 긍정하는 개혁파 영성이 이 시대에 회복되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1741년 대각성 이후에 벌어진 부흥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답변하는 성격을 지닌 그의 『신앙감정론』에서 부흥을 변호하면서, 한편 거짓된 부흥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다른 한편, 광신적으로 부흥을 왜곡하는 열광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참된 신앙은 대체로 감정들(affections) 안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주장은 기독교 영성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 영적이면서, 동시에 영성이 감성과 덕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영성이 감성과 도덕성의 기초이다. 그리고 영성은 감성과 덕성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의 영성신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영성은 자연적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 차원에 속한다. 둘째, 영성은 인격과 실천으로 드러난다.

에드워즈의 영성은 신앙의 초월적 차원을 상실하고 있고 보이는 만족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대한 대안이다. 나는 에드워즈의 영성의 특징을 살펴보고, 종교개혁적인 맥락에서 그의 영성신학을 해석하고, 오늘의 상황에 주는 의미를 고찰하려 한다.

2. 영성의 초월적 본질

에드워즈에게 영성은 거룩한 감정으로 표현되는데, 이 거룩한 감정은 분명히 자연적인 감정과 비슷한 경험으로 표현되지만, 그 근원과 본질에 있어서 사실상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며, 자연적인 감정과 명확하게 구분된다. 자연적인 감정이 육체에 속한 것이라면, 영적인 거룩한 감정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성령에 속한 것이어서, 이것은 중생 이전의 자연적인 감정과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에드워즈에게 영성과 자연적인 본성의 구별이 그의 영성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내재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 차원에 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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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적 본성의 전달

에드워즈는『신앙감정론』에서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는 첫 표지를 성령의 내주로 말한다. 에드워즈는 ‘영적인’이란 형용사를 인간 안의 내재적인 영에 귀속시키지 않고,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께 귀속시킨다. “‘영적인’(spiritual) 이란 형용사는 사람의 영적인 부분이 물질적인 부분인 사람의 몸과 상반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사람의 영이나 혼과 맺는 관계를 나타내려고 사용된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제삼위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성령’(Spirit)은 거기에서 성경의 ‘영적인’(spiritual)이라는 형용사가 파생되는 실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며,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셔서 거룩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된 사물들 역시 영적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를 영성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는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와 구원하는 역사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인'(common) 역사만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 영적으로 불리지 않는다. 오직 자연적이고 육적이고 성화되지 않은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영적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로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는 어떠한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의 본성의 전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에서 성령은 새로운 본성의 원리가 된다. 하나님의 영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데,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명과 행위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심령에 영향을 미친다.” 성령의 내주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갈 2:20). 여기에 결정적인 구원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 전달되고 그리스도인은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의 의미를 신적 본성의 전달로 보는 에드워즈의 관점은 그의 영성신학의 토대이다. 그리스도인은 새 본성의 주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자연인의 것과는 다른 경험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2.2. 영적인 지각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 새 본성은 새로운 인식능력으로서의 영적인 감각을 지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지각한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이 구절에서 영적으로 분별한다는 것을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으로 신적인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두 가지가 구분되는데,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신적인 일”과 인식의 주체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영적인 감각이다. 자연인이 경험적인 지각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듯이,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본성이 주어져서 신적인 아름다움을 “영적인 감각” 또는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 cordial sense)”으로 인식한다.
 
“영적인 이해는 ‘거룩함의 탁월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나 신적인 일들에 있는 도덕적인 완전성에 대한 마음의 감각(cordial sense)’에서 성립한다.” 에드워즈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란 설교에서 자연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의 근본적인 차이를 철저히 구분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향을 통해서 죄를 자각하는 것도 넘어선다. 성령께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것과 다르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바 선이나 정의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다르다.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란 “신앙에 대상에 대한 신적이며, 최상의 탁월함을 깨닫게 하는 감각”이다. 이것은 지상의 일시적인 영광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서 말미암는 지식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감각으로 “지상의 일시적인 것과 구별되는 신적인 최고의 영광”을 “이해하며 본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인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는 일반적인 신학적인 지식을 넘어선다. 일반적인 신학적인 지식들은 개념적인 이론적인 지식들로서 그것이 마음의 감각으로 신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을 결여한다면 꿀을 맛보지 못한 상태에서 꿀에 대해 아는 것과 같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면 영적인 지식은 꿀을 달콤함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것과 같다고 이해한다.
이런 영적인 감각, 영적인 지식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그의 영적인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에드워즈는 그의 회심에 대한 고백에서 1721년에 일어난 자신의 회심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봄에서 이뤄졌음을 고백한다.

"처음 맛본 이해로 지금까지 풍성하게 누려온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내적이고도 달콤한 즐거움은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디모데전서 1:17을 읽고 있을 때였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을 읽을 때 내 영혼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했고 내 존재 전체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썩지 아니할 영광을 그의 영혼이 “지각했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이 그가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과 『신앙감정론』에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라고 명명한 영적인 지각의 개념을 형성하게 만든 토대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1737년에 일어난 보다 더 강하고 결정적인 체험을 고백하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체험을 고백한다.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며 사색과 기도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내게 나타나셨고 그 탁월함과 위대함은 모든 사고와 개념을 삼켜 버릴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 일은 한 시간가량 지속되었으며 이후 여러 시간 동안 나는 눈물의 홍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의 영광의 “탁월함과 위대함”을 강렬하게 지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영적인 지각이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1734년과 1941년의 부흥기간에 여러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난 영적 경험임을 말한다. 특별히 그는 그의 아내 사라가 경험한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즉 수시로 상당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의 영광을 보면서 묵상하는 동안 영혼이 완전히 압도되었으며, 빛과 사랑과 감미로운 위로, 영혼의 안식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한 차례 이상 그리스도 인격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그분의 탁월하고 초월적인 사랑의 천상적인 감미로움에 대한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이 대여섯 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지각이 시각, 미각 등의 감각적인 경험으로 서술되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영적인 감각, 혹은 ‘마음의 감각’과 자연적인 감각의 구분이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이 두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두 가지 종류의 감각과 지각을 구분한다. 보편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 근원적인 아름다움에서 비롯되고 이것의 형상이 되는 피조세계의 이차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양자의 아름다움 사이에는 유비의 관계가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감각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일을 아는 마음의 감각과 도덕적인 선과 악을 판단하도록 하나님이 본성적 양심에 주신 ‘도덕적 감각’이 있다. 이차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참된 미덕에 대한 감각과는 전혀 다르다.”

 

 

2. 3. 영적인 감정과 미덕

에드워즈는 신적인 탁월한 영광과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지각을 중생한 성도의 특권으로 이해하면서, 그 결과로 영적인 감정이 일어남을 말한다. 영적인 지각과 영적인 감정은 동시에 일어난다. 마치 이것은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 자연스럽게 동시에 일어나는 기쁨의 감정과 유사하다. 영적인 지각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영적인 감정도 초자연적이다. “마음이 어떤 대상의 달콤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때, 그것은 그 대상을 생각만 해도 달콤함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인용한 에드워즈 부인 사라의 고백에서도 “빛과 사랑과 감미로운 위로, 영혼의 안식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에드워즈는 이런 영적인 지각에서 나오는 감정은 자연적인 감정과는 다른 천상의 감정임을 역설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 1부를 시작하면서, 참된 신앙이 감정들 안에 있음을 논증하는 서두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한, 베드로전서 1:8절을 주해하며, 영적인 감정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초자연적인” 사랑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각에서 나온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초자연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도 보지 못하였고 자기 육신으로도 본 적이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영광의 주님을 보고 경험한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기쁨,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초자연적인”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세상적인 기쁨들이나 육체의 즐거움들과 매우 다르다. 이 기쁨은 훨씬 더 순결하고 고상하고, 하늘에 속한 본성을 지니며, 초자연적이며 진실로 신적이며 형언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것이다.… 이런 기쁨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기쁨의 전주곡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늘의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충만해졌으며, 그들의 빛나는 모습을 통해 그 영광스러움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지각이 가져오는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영적인 지각과 지식은 감정을 비롯한 본성 자체의 변화가 일어난다.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와 같이 “영적인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현재의 영혼의 작용과 감각과 상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혼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이다.” 에드워즈가 말한 성령의 내주로 인한 본성의 전달의 의미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감정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성을 받아 신적인 감정을 소유하고 드러내게 된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빛을 받아 단지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된다.

 

 

“의의 태양 빛이 그들에게 비췰 뿐 아니라 그 빛이 그들에게 전달되므로, 그들 또한 빛을 비취는 자들이 되고 그들에게 비취는 태양의 작은 형상이 된다.…참 포도나무의 진액이 성도 안으로 전달될 뿐만 아니라, 진액이 나무에서부터 그 가지마다에 전달되는 생명의 원리처럼 전달된다.” “성도의 영혼은 의로운 태양 빛을 받는다. 그 때 성도의 본성(nature)은 변화되며, 성도는 본질상 발광체가 된다. 태양이 성도 안에 빛을 비췰 뿐 아니라 성도가 또한 작은 태양이 되어 그 빛의 원천인 태양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에드워즈의 이 말은 그리스도의 생명에의 연합에 대한 아주 대담한 해석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신이 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경계하지만, 구원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이라고 성경을 따라 말한다. “피조물의 능력과 한계를 따라 하나님의 영적인 아름다움과 복되심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고유한 본성 안에서 자신을 전달한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전달로 이해하면서, 이것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로 이해한다. 또 성도들에게 주어져도 본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와 그렇지 못한 은혜는 구분된다. 하나님의 영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의 본성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발광체라면, 성령의 영향을 받으나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이들은 “물체가 빛을 받기는 하지만, 그 물체가 다시 빛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물체를 발광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발광체라 할 수 없다. “비록 성령께서 여러 방식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당신의 고유한 본성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미약한 피조물이 아주 고결한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이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한 사역이 없는 가장 탁월한 사역이다.

따라서 본성의 전달이 없는 자연적인 양심에서 나오는 도덕성과 본성의 전달로 인해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은 차원이 다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미덕은 존재 일반에 대한 호의(BENEVOLENCE TO BEING IN GENERAL)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미덕은 보편 존재에 대한 마음의 동의, 경향성(propensity), 연합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 일반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미덕의 본질이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에게는 참된 미덕이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연인에게 참된 미덕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류에 대한 어떤 다른 호의나 관용도, 그리고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다른 미덕이나 도덕적인 자질도, 전적으로 그것들 위에 존재하며, 그것들이 예속되며, 그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속에 참된 미덕이나 종교의 본질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경험하는 본성의 변화로 인한 도덕성과 자연인이나 하나님의 영광의 지각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자연적인 양심에 근거한 도덕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자연인이 경험하는 도덕성의 개선을 넘어서 본성 자체가 신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지정의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영적인 지각과 감정과 미덕은 자연적인 것과 유비적으로 이해되지만, 차원에 있어서 다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초자연적인 영적 경험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도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영성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이다. 자연적인 지각능력과 초자연적인 거룩함을 지각하는 인식능력의 차이, 자연적인 감정과 자연적인 덕성과 초자연적인 감정과 덕성의 차이의 분명한 인식이 에드워즈 영성이해의 핵심이다.

 

 

3. 영성의 내재적 본질

에드워즈의 영성에 대한 이해는 영성이 자연(본성)과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보는 것에 핵심이 있다. 이는 전통적인 자연과 은혜에 대한 논의에 닿아 있다. 자연과 은혜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신적인 본성의 전달이라는 점에서 초자연이며, 자연을 넘어선다. 자연 혹은 본성과 영성의 근본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에드워즈의 모든 논의들은 이 기본 도식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영적인 감정과 영적인 미덕은 자연적인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관하고 하나님의 탁월한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자연적인 본성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3.1. 영성과 도덕성

에드워즈에게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처럼 하나님은 모든 선들의 원천이며 궁극적인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완전함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와 아름다움은 모든 존재와 탁월함의 총괄이고 포괄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경험은 미덕을 최고선의 탁월함과 영광으로 고양시킨다. 영적인 지각을 지닌 성도들은 이 모든 도덕의 탁월한 완성으로서의 신적인 도덕적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서 사물들의 본성을 알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인식이 있다. 하나님의 본성을 통해 신적인 것을 알게 되고 동시에 사물들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감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영적인 감각은 마음을 크게 조명하여 신적인 것들 일반(divine things in general)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사물 일반(things in general)을 바로 이해하도록 많은 점에서 지원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들을 올바로 증거함으로써 사물들의 본성과 진실을 보게 한다."

사물들의 본성을 통찰함으로 얻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과 도덕성이 처한 실상이다. 에드워즈는 자연적인 도덕성은 모두 하나님 사랑에 반하는 자기사랑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정의감이나 연민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도덕적인 양심이나 모든 자연적인 감정과 덕들은 한결같이 자기사랑에 속해 있어 참된 미덕과 거리가 멀다. “도덕적 미덕 중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참으로 덕스러운 원리의 영향력이 아니라 이런 방식이든 저런 방식이든 간에 어떤 종류로든 간에 ‘자기 사랑’의 승인을 받지 않은 특정한 도덕적 미덕은 하나도 없다.” 이런 왜곡은 자연적인 도덕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다. 자연적인 도덕성들은 자아사랑의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욱 추구한다.

그래서 자연적인 도덕은 영적인 미덕에 반대된다. 자아 사랑에 기울어져 있는 자연인은 “특정한 제한된 대상을 존재 일반 위에 두게” 되고, “존재 일반에 대한 존중심에 대한 적대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자연인은 아무리 육욕을 부정하며 거룩함을 추구한다 해도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기에 헛된 수고에 머물게 된다. “부패한 본성이 죽지 않고, 그 부패의 원리가 사람 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한 그 본성이 다시 지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자연인은 자아사랑이 참된 미덕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덕론자들은 사리사욕에 끌리지 않는 도덕의식을 모든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심겨진 선한 기질에 있는 참된 미덕의 증거라고 잘못 추론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혼동하고, 어두워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죄인이, 어떻게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으로 들어가 빛과 어둠을 보게 되는가? “성령은 인간의 마음과 심정 속 깊은 곳으로 들어와 거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게 되고 자신의 깊은 죄성을 인식하게 된다. 성령의 빛 아래 선 성도들만이 자신의 자아사랑에 물든 양심과 도덕적 감각의 실상을 인식한다. 자연적인 도덕성과 영적인 거룩함의 차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의 깊이이다. 신적인 빛에 의한 영적인 감각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할 때, 자신의 부패에 대한 인식도 심화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인식은 자신의 부패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통한 겸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의 빛은 더러움과 부패를 꿰뚫고 완전히 드러내 버린다.” 에드워즈는 그 자신이 자신의 삶에서 이런 깊은 죄의식을 경험했음을 고백한다. 그의 깊은 죄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형언하기 어려운 심미적인 경험과 함께 동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나쁜 사람’이고 ‘지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앉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이런 그의 “개인적인 타락에 대한 자각과 인식은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본 데서 비롯되었다.”

자연적인 양심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새로운 본성을 받게 될 때, 죄의 깊이를 깨달아 겸손히 부르짖게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마음과 본성 자체가 죄에서부터 돌이켜 거룩함을 향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죄와 원수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단지 자연적인 것을 고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본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본성은 자연적 선한 본성과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성을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호의의 원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감미롭게 하며 더 고상한 자연적 본능들의 적합한 영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며, 모든 본능을 적당한 채널로 향하게 하고 알맞은 방식과 정도로 작용하게 만들고 모든 본능을 최고의 목적에 기여하도록 지도한다.” “인간적인 것 안에 신적인 것이 현존하는 것은 인간 자아의 정규적인 기능을 침해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님을 에드워즈는 애써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기만 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작용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하는 근거로서 ‘인간의 기능과 연합하게’ 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성은 초자연적인 본성의 주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회복, 이로 인한 자연의 회복과 완성이다. 이 점에서 그의 영성이해는 초월적인 본질과 내재적인 본질을 아우르고 있다. 초자연은 자연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완성한다.

3.2. 영성에 대한 오해들

자연과 은혜를 분리시키게 되면, 영적인 추구는 열광주의에 흐르게 된다. 이것이 많은 영성운동들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오류들이다. 많은 영성가들과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왜곡하고 지성과 도덕성을 무시하는 열광주의가 나타난다. 에드워즈 당시의 부흥운동 안에서도 이런 열광주의가 일어나서 은혜가 자연을 초월하면서 자연을 왜곡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을 본다. 에드워즈는 대각성운동에서 경험한 부흥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면서도 이런 열광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건전하지 못한 영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왜곡으로 인해서 부흥운동 자체가 부정되는 것을 사단의 전략으로 이해한다. 영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넘어서지만, 이것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일반적인 상식과 이성적인 본성을 무시하는 열광주의적 오류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열거한다. 열광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체험은 육체에 속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중하지 못하고 무질서하다고 사방에서 말하는 엄청난 불평을 아주 듣기 싫어한다. 이 때 행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부흥에 반대하는 강한 비판을 들을 때, 그리스도가 땅에 검을 주려 왔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편견과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거칠음과 날카로움, 혹은 고의적인 태만”을 나타낸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영적인 영적 교만과 영성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이해한다.

또 열광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근거를 들어서 “외적 질서와 은혜의 수단”을 죽은 형식으로서 가볍게 취급한다. 이들은 “질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모든 외적 수단 가운데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모든 영적인 추구를 이유로 모든 자연적인 감정을 완전히 뿌리 뽑고 말살하려 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인 감정을 없애려고 하는데, “자연적인 성향이 잘 조절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어떤 의무와도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비판하는 열광주의자들의 비이성적인 모습은 균형의 상실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체험하기 위해 긴요한 것이 적절한 비율인데, 기형적으로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는 그리스도인을 괴물 같은 존재로 일그러뜨리고 흉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에드워즈는 이런 부흥으로 일어나는 문제들을 비판하지만, 비판에 있어서 한계를 설정한다. 그는 부흥이 일어날 때 지나친 열광이나 감정적인 치우침이 일어나고 여러 실수와 오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흥시에 대두되는 ‘인간성의 약점’이지, 부흥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부흥을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해야 하며, 부흥에 따르는 오류들과 일탈들은 부흥의 상황들과 함께 인류의 연약함과 약점 및 보편적인 부패를 생각할 때,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의 체험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고 해서 나타나는 약점을 무시해도 안 되고, 또는 그들에게 문제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들의 경험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종종 불순물이 섞인다. 은혜로운 체험들이 자연적인 감정이나 상상력이나 자기 의와 혼합될 수 있다. 열광주의자들은 이런 오류조차도 성령의 일이라고 강변하고 이성주의자들은 이런 오류를 근거로 부흥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영성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때 특별히 도덕적인 성품과 실천과 연관시키고 있지, 다른 외적인 질서나 감정에서 연관시키지 않음을 본다. 그래서 그는 열광주의자들이 영적인 교만으로 스스로 높이거나 말씀을 떠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일은 사단의 역사로 강하게 부정하지만, 부흥시에 나타나는 균형의 상실이나 흥분을 이와 동일한 어조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도 에드워즈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잘 구별하면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과 그 밖의 부차적인 상대적인 가치들을 구분함으로 현실적인 균형을 유지한다. 이 태도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에 나타난 바울의 자유정신과 동일하다 할 것이다. 거룩한 도덕성과 일시적인 감정이나 문화적 현상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에게 영성이 내재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우선 성화된 도덕성으로 자연적인 도덕성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인격의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다음으로는 일반은총에 속한 자연적인 지성과 감정을 억압하거나 희생하지 않고, 외적인 제도나 형식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초자연과 자연,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나, 초자연은 자연과, 특별은총은 일반은총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4. 종교개혁적인 신학과의 연관에서의 에드워즈의 영성

에드워즈의 영성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능력으로 끌어낼 수 없다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내재적인 본성 안에 하나님께 도달할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게 될 의는 루터가 말한 바 낯선 의, 또는 칼빈이 강조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 따라서 인간 안의 내재적인 것은 어떤 것도, 그것이 도덕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체험이든 어떤 것도 그 앞에 서게 하지 못한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이 말하는 것은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이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개념도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즉 가톨릭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차원에 강조점을 둔다면, 루터나 칼빈에게 있어서 영성은 초월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 즉 영성이란 하나님을 믿는 경건이다. 강조되는 것은 믿음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믿음이란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은혜로 인한 믿음이지, 내재적인 종교적인 영성의 가능성이 아니다. 개신교는 인간의 내재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초월적 차원 즉, 말씀과 이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에드워즈가 영성을 성령에 속한 것으로 정의할 때, 이 종교개혁의 노선에 서 있다. 자연인의 이성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파악할 수 없다. 은혜가 와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주시고 새 본성을 주시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은혜가 오기 전에는 하나님께 대한 어떤 인식도 참된 것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개혁파의 영성은 모든 내재적인 영성의 추구들과 차원을 달리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영성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특별은총이다. 종교적인 영성은 일반은총의 차원이다. 그리고 이것도 성령의 사역으로 인정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은총으로서의 경건의 영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에드워즈가 자연과 은혜를 구분하고자 한 시도 안에 이런 종교개혁의 전통이 녹아 있다고 본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은 안 된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본성의 전달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성의 경험과 내재적인 차원의 영성과 양심과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는 영성의 경험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혼동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영성은 개혁파 영성의 탁월한 성취로서 오늘날에 탁월한 의의를 지닌다. 오늘날 많은 유형의 영성운동이 일어나고 또 영성신학들이 논의된다. 그런데 많은 흐름들이 자연과 은혜를 혼동하고 내재적인 영성을 추구하면서, 이신칭의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 밖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인간의 내재적인 가능성을 각성시키려고 한다. 영성훈련의 이름으로 불리는 노력들은 에드워즈가 경험한 초자연적인 차원을 결여한 채 내면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영성은 칭의의 영성만이 아니라 성화의 영성이기도 하다. 성화의 은혜는 본성을 회복한다. 가톨릭의 주장처럼, 은혜는 본성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자연(본성)을 회복한다. 자연을 통해 직접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없지만, 은혜는 자연을 죄에서 돌이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칼빈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자유의지가 있어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죄인들은 자유의지를 상실하여 노예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중생을 통하여 의지가 자유롭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 오웬 같은 청교도들도 중생으로 말미암는 성향의 변화를 말하면서 잃어버린 거룩을 향한 성향이 회복됨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에 의한 새 본성의 주입을 말하지만, 이 새 본성의 주입이란 다름 아닌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모든 선의 근원으로서의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종교개혁적인 강조를 넘어선다. 그에게 부흥은 구속의 경험이고 새 창조로서의 구속은 창조를 능가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담의 영광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구속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위대한 목표이므로 창조 역사는 단지 구속 역사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흥은 새 창조의 역사로서 옛 창조보다 무한히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영성은 창조의 회복이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선 종말론적 영광의 선취이기도 하다. 에드워즈는 신적인 영광이 미래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에 천국이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 영광을 지상에서 이처럼 많이 맛볼 수 있었던 적은 과거에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의 종말론적인 실재가 이미 부흥의 경험 안에 현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적 본성의 주입’, ‘발광체’ 등으로서 처음 창조와 구별되는 새 창조로서의 구속을 표현한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의 영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조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칭의론 중심의 종교개혁신학에 바탕을 두면서, 이것을 인간의 영적인 차원, 도덕적인 차원, 미학적인 차원이라는 내재적인 차원에서의 초월을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고 본다. 이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차원이 그리스도인의 감정과 의지와 지성 안에 내재하게 된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에게 초월적 영성뿐 아니라 틸리히가 말한 초월의 내재, 내재 안의 초월의 영성의 특징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영성신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청교도들의 성화신학을 계승하고, 개인적인 영광의 경험과 공동체적인 부흥을 경험하면서, 에드워즈는 가톨릭의 내재적인 영성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내재적 영성을 제안한다. 기독교 영성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본성이 주입되고, 이로 인해 전인격적으로 거룩한 성향으로 변화되고, 이제 성도들 안에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미덕이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도덕성의 원천이며 목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에 참여한 성도들의 경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경험으로서의 부흥의 경험은 창조의 영광을 능가하는 탁월한 영광의 경험이다. 새 창조에 속한 구속의 경험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일반은총으로서의 옛 창조에 속한 도덕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도덕철학을 개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가톨릭의 영성신학과 비판적으로 대결할 수 있는 개신교 영성신학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에드워즈의 영성신학은 종교개혁적인 전통에 따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 영과 육의 차이, 무한과 유한의 차이를 혼동하지 않고 구분하면서, 동시에 종교개혁적인 칭의론과 청교도들의 성화론을 창조적으로 전개하여 유한 안에 내재하는 무한, 인간의 인격 안에 내재한 초월적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5. 결론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극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어떤 영성은 극단적으로 내재성을 지향하여 초월적인 지평을 놓치고, 어떤 영성은 너무 초월적이어서 내재적인 관련성을 상실하고 있다. 가톨릭의 영성은 내재적이어서 은혜를 자연에 환원시키고 이성과 계시의 근본적인 차이를 희미하게 만든다면, 이런 혼합에 저항하면서 일어난 개신교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 자연과 은혜의 질적 차이에 강조점을 두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오직 은혜를 말하면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의 관련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영성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의 전통에 견고히 서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차원에 대한 미학적 도덕적 경험을 통해서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의 근원과 목적으로서의 영적 차원을 드러내 주었다.

 

 

이제 초월성은 인간과 분리된 저 천상에 존재하거나 저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인 정황에 사는 인간의 내적인 영적 경험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참된 신앙이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에드워즈의 주장 안에 그의 영성의 특징이 잘 표현된다. 그에게 영성은 ‘거룩한’ 것,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신적 본질이 전달되는 초월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성은 자연인의 감정과 동일하게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탁월하게 아름다운 인간적인 ‘감정’이다. 내재적인 초월로서의 영성은 신적인 영광이 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으로의 부활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교회를 지향한다.

오늘날 교회가 종교개혁적인 신앙의 유산으로서의 초월적인 차원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적인 영성을 회복하여, 이것으로 교회의 세속화와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적인 십자가 영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초월이 내재적인 차원으로 드러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사랑으로 일어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인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더 나아가 영적인 부흥이 오늘날의 세속적인 상황을 치유하고 변혁하고 새롭게 하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참된 아름다움을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거룩한 감정을 자연적인 감정의 근원으로, 참된 미덕을 자연적 도덕성의 근원으로 제시한 에드워즈의 영성신학은 영성이 교회의 한계를 넘어 세속적인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관점을 열어준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교회가 단지 종교개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만 있지 않고 세속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닌 복음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에드워즈의 영적 비전을 받아들여 세상을 향해 세상보다 더 탁월한 거룩한 도덕성을 드러내고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영성과 그의 영성신학을 통해 도전받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성이다.

* 위의 연구논문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12월 5일(2014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제41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서충원 박사(샬롬나비 사무총장)의 발제문입니다. 주최 측의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법적 권한은 제공자 측에 있음을 밝힙니다. 연구논문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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