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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지상강연(하) 누가-행전에서 '어둠의 세력'은 누구인가? 본문

성경과 신학

느헤미야 지상강연(하) 누가-행전에서 '어둠의 세력'은 누구인가?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17:34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로마제국 /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 / 2015년 2월 4일 기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2월 2일부터 3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느헤미야 강의실에서 겨울방학 특강을 진행했다. 이날 특강에는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로마제국’을 주제로 강의했다. 안용성 목사의 강의 내용을 상하로 나눠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주>

   
▲ 안용성 목사는 두번 째 강의에서 누가-행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어둠의 세력에 대해 설명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어둠의 세력은 '로마제국과 유대인의 부역'

제2부 /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

전날 강의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복음은 하나님의 주되심, 예수의 주되심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구원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법정적 관점에서의 복음을 넘어 관계적 관점에서의 복음에 대한 이해). 또한 예수의 주되심은 개인과 사회,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다.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은 복음화되어야 할 영역이다. 복음화는 단순히 기독교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강의는 과거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던 ‘누가-행전 수난사화(19:45~23:56)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로마제국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 <참고> 안용성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인 ‘누가복음 수난사화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로마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 해석’(2005년)은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https://dr.nrf.re.kr/paper/search/90050999)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누가복음 수난사화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로마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 해석’(2005년)의 논문초록이다.

이 논문은 누가복음 19:45-23:56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한 시도이다. 성서 본문의 서사 세계와 한국인 해석자의 맥락을 공통적으로 특징짓는 헤게모니적 현실에 대한 문화 분석을 토대로, 누가가 하나님 나라의 시공간을 로마 제국과 어떻게 관련짓는지 탐구한다. 누가의 신학적 입장은 저항과 순응의 복합적 공존으로 나타나는데, 본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식민주의의 문화적 영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해하려 시도한다.

기존의 누가-행전 연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현세와 내세의 분리라는 시대착오적 이분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으며,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로마 사이의 식민 협력이라는 중요한 요인을 간과해 왔다. 이에 대하여 본 연구는 누가의 하나님 나라가 정치와 종교를 포괄하는 차원에서 그려지고 있으며,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을 함께 포함하는 제국의 정치-종교와 대립 관계에 있음을 보인다.

제 1장에서는, 먼저 해석학적 전제들을 기술한 후, 한국 현대사와 담론 분석을 통해 해석자의 맥락에 대한 문화적 지형도 그리기를 시도 한다. 제 2장은 누가-행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존 연구들을 시간과 공간과 권력 관계라는 관점에서 평가한다. 제 3장과 제 4장은 성서 본문 해석이다. 누가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종교-정치 체제를 각각의 서사적 시공간에 배치한다. 즉, 수난사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누가 19:47-23:56은 성전 공간과 낮 시간을 배경으로 예수의 우세를 그리며 (참조: 22:53a), 후반부인 누가 22:54-23:56은 예루살렘 성과 ‘너희의 때’(밤 또는 어둠의 때)를 배경으로 제국 시스템의 우세를 서사적으로 구성 한다 (참조: 22:53b). 제5장은 종합과 결론이다. 동아시아적-지구적 관점에서 누가 본문을 해석하는 이 논문은 성서 해석의 수사학적 성격과 윤리적 영향력을 신중히 고려하며 헤게모니적 문화 질서에 대항하는 생명 담론을 추구한다.

#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의 관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누가-행전이라고 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미 사도행전을 예고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고하는 내용이 누가복음에 있다. 이는 처음부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하나의 책으로 기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누가복음이 책으로 엮을 수 있는 최대의 분량이었기 때문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뉜 것이다.

누가-행전은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의 관계에 대한 논지를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누가-행전에 대한 연구의 주류는 하나님은 현실 영역을 로마제국에게 양도하시고, 초월적 영적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류적인 연구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영역에도 세워지기 때문에 로마제국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의 통치가 현실에 존재하고, 하나님의 통치 또한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로마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행전은 묵시적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 누가-행전은 예수님 재림의 지연을 설명하는가?

   
▲ 안용성 목사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재림의 지연과 임박을 동시에 설명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콘첼만(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1953)은 누가-행전의 핵심은 파루시아(예수님의 재림)의 지연에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 부활 승천 후 50-60년 경과됐지만 예수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초대 교회에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셨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가? 등의 심각한 질문들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마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됐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고, 파루시아가 임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셨다. 당시 기독교인 공동체들에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따라서 콘첼만은 누가는 예수님께서 바로 오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갖고 복음서를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즉, 누가복음의 기록목적은 파루시아의 지연에 대한 이유를 보여준 책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서다. 누가는 마가복음서와 Q자료를 참고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성격이 강한 복음서다. 하지만 콘첼만은 누가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언급들을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해보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재림, 곧 종말이 임박했다는 내용들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이 삭제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콘첼만의 주장은 누가는 파루시아의 지연 문제를 정리함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은 곧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한참 뒤에 오신다는 것으로 신학화(비묵시화)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됐는데, ‘이 세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도기가 길어진 것이다. 그래서 콘첼만은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시대’라는 또 하나의 시대를 만들었고, 교회라는 시대가 끝나야 예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가복음은 묵시적 성격이 강한 복음서였다. 인자의 도래와 함께 로마제국은 곧 멸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예수가 오시면 로마제국은 곧 멸망하기 때문이다.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묵시종말론적’ 사고는 당연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신앙공동체는 반로마적인 투쟁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자연스럽게 로마제국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에 로마제국과의 투쟁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반로마 사상’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사실 복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로마제국은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는 마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금방 오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기술했다는 것이다(콘첼만의 주장).

결국 콘첼만은 로마제국의 통치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친로마적인 입장을 자신의 복음서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사도행전의 시작부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며 누가복음의 독자는 로마제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콘첼만에 따르면 누가는 로마제국을 향해 기독교는 정치적이지 않은 비정치적이고 무해한 종교적인 모임이라는 사실을 변호한 것이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로마 관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 7:1~9).

또한 누가복음 23장에서는 로마제국의 빌라도가 예수를 살려주려고 했던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죄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세 번이나 선언한다. 그러면서 예수의 유죄선언은 유대인들이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관리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과 박해의 책임을 로마제국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따라서 콘첼만은 누가복음은 친로마적인 입장에서 쓴 복음서라고 주장했다.

# 누가-행전은 ‘파루시아’의 지연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콘첼만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콘첼만은 누가는 파루시아의 지연을 다루었다고 하지만 누가-행전에는 파루시아가 임박했다는 부분도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 눅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2.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3. 눅 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4. 눅 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5. 눅 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6. 눅 12:35~48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7. 눅 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밖에 마틸리(A. J. Mattil)와 푸스코(V. Fusco)는 누가복음 17:20~37, 19:11~27, 21:7~36 등을 비롯해 사도행전 1:6~8, 10:42, 17:31, 23:25, 24장 등의 구절을 통해 파루시아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누가복음은 임박한 종말론을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콘첼만의 주장처럼 파루시아의 지연도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파루시아의 지연과 임박이란 주장 틀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파루시아의 지연과 임박의 공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지연’이라는 모티브가 필요한 이유는 누가-행전이 기록됐던 80~90년까지의 파루시아 지연 문제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임박’이라는 모티브는 누가-행전 기록 시점으로 볼 때, 누가는 예수님의 재림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 누가복음은 친로마적인 정치적 변증을 위해 기록됐나?

누가복음이 파루시아의 지연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됐다는 콘첼만의 주장에 대해 파루시아의 임박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언급하면서 반박했다.

여기서 콘첼만의 또 다른 주장을 반박하겠다. 과연 누가-행전은 친로마적 정치변증을 위해 기록되었느냐는 것이다. 콘첼만은 친로마적 정치변증을 위해 누가-행전이 기록됐다고 주장했다.

물론 콘첼만의 주장처럼 누가복음은 친로마적인 언급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친로마적이지 않은 내용들도 많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콘첼만의 주장처럼 예수가 죄가 없다고 선언했던 빌라도에 대한 묘사가 과연 친로마적이라고 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의 정치적 힘겨루기에 져서 죄가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줬다. 자신들이 다스리는 땅에 거주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넘겨 준 로마제국. 이렇게 묘사한 것을 과연 친로마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로마제국은 자신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십자가 형벌을 진행했다. 로마제국의 문화적 코드는 명예였으며, 십자가 형벌은 곧 수치에 해당됐다. 십자가 형벌은 비참하게 죽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의 시민들이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질렀어도 명예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십자가 형벌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불온한 사람들로, 기독교는 불온한 종교로 인식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로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힘이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는데, 그것을 입증해 줄 만한 사람은 빌라도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은 빌라도의 무죄선언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빌라도의 입을 통해 전달했을 뿐, 이러한 사실을 친로마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누가는 로마 관리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4장과 25장에서는 벨릭스와 베스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을 로마마제국의 부패한 관리의 표본으로 인식되도록 했다. 이 또한 누가가 친로마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유대인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일으키는 소란으로 인해 항상 피한다. 소란의 주동자들은 유대인들이다. 콘첼만은 누가가 유대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이라고 인식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되기 싶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나는데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불편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이 과연 친로마적으로 기록됐다고 볼 수 있느냐다. 결코 친로마적인 입장에서 누가가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와 함께 누가복음 1-2장에는 사회 전복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마리아의 노래’가 나온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 관련된 친로마적이지 않은 전복의 내용들도 많다.

따라서 콘첼만의 주장처럼 누가-행전은 결코 친로마적인 입장에서 기록됐다고 볼 수 없다. 친로마와 반로마의 공존이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파루시아의 임박과 지연이라는 모티브, 친로마와 반로마의 모티브가 모두 누가-행전에 들어가 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반로마적인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비교적 반로마적이라고 선명하게 그려지는 부분도 있지만 신약성경은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에 대해 암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세밀한 독서가 필요하다.

# ‘Space-time & power relations’

지리학에는 공간이론이 있다. 나는 이 이론을 응용해서 ‘Space-time & power relations’라는 분석틀을 만들었고, 이 분석틀을 중심으로 ‘예수와 어둠의 권세:누가 수난서사의 시공간과 힘의 관계’라는 연구논문을 썼다.

★ <참고> ‘예수와 어둠의 권세:누가 수난서사의 시공간과 힘의 관계’라는 연구논문은 한국신약학회가 발간하는 ‘신약논단’ 제13권 제2호(2006년 여름)의 353~375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논문제목을 입력하면 해당 연구논문을 원문 그대로 올려놓은 블로그가 있습니다. 기사로 정리한 글은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해당 논문을 검색하셔서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리학의 공간이론을 응용해 시간과 공간, 관계라는 분석틀을 만들었고, 그 분석틀을 중심으로 묵시사상과 비묵시화(콘첼만 주장)를 정리했다.

묵시사상은 시간적으로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운 미래에 도래한다. 공간적으로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 땅(로마제국의 통치영역)에 실현되는 것이다. 관계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로마제국은 곧 멸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묵시사상이다.

비묵시화는 시간적으로 파루시아가 지연됐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초월적, 영적 영역이다. 관계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로마제국은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 예수와 어둠의 권세-성전과 예루살렘

   
▲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은 로마제국과 유대인들의 부역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하나님 나라와 로마제국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와 어둠의 권세에 대해 다루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의 수난사화는 두 개의 시공간으로 구성됐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다.

수난사화의 전반부는 성전(눅 19:47~21:38)을 배경으로, 후반부는 예루살렘 성(22:54~23:56)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는 시공간과 힘의 관계라는 틀 속에 있다.

성전이라는 공간과 낮 이라는 시간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우세했다. 예수님은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유대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내용들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처리하려고 했지만 예수님 주변에 머물고 있는 무리들 때문에 자신들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이라는 공간과 밤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둠의 권세가 우세했다. 예루살렘 성과 밤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이 섬기는 로마제국의 권세가 강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렀다. 예수님은 밤에 결박돼 끌려가셨다.

누가는 이와 같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구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어둠의 권세)이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를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구성을 통해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제국이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성전과 예루살렘

우선 성전이라는 공간을 살펴보자. 성전(19:47~21:38)과 관련된 말씀의 시작과 끝나는 부분은 ‘수미쌍관구조’로 되어 있다.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19:47~48)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21:37~38)

예수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쉬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러 번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술해서 보여주는 요약문이다.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성전은 공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낮에 가르치셨다. 성전이라는 공간과 낮이라는 시간이 결합돼 있고, 예수님이 시공간적으로 우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예루살렘 성(22:54~23:56)을 생각해보자. 여기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이 우세하다.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처형되셨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무리에 휘말렸을 뿐이다.

특히 성전과 예루살렘이라는 두 개의 시공간과 힘의 관계가 함께 나타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22장 53절이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니라”

이 말씀의 구절은 전반부(성전+낮 시간)와 후반부(예루살렘 성+어둠의 시간)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예수님이 우세했다(19:47~21:38). 그리고 후반부는 ‘너희’라는 어둠의 세력이 우세했다(22:54~23:56)

한마디로 22장 53절에서는 성전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간적 배경이 바뀌고, 낮에서 밤으로 시간적 배경이 나뉘는 것을 설명한다. 공간의 전이, 힘의 전이, 시간의 전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와 같은 구도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도 어둠의 수미쌍관구조로 되어 있다. 어둠의 권세(22:53)는 낮을 어둠의 권세로 만들어 버린다. 23장 44절은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라는 말씀이다. 낮을 어둠의 권세로 바꾼 것이다.

#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어둠의 권세

누가복음은 이와 같이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라는 시공간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어둠의 권세에 대해 설명한다. 성전이라는 공간은 ‘오는 세대’를 보여주는 것이고, 예루살렘 성은 ‘이 세대’를 말해주는 것으로써 예수의 권세와 세상의 권세라는 대립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어둠의 권세’는 누구일까? 누가복음 20장 20절에 나와 있다.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누가복음 20장 1절에서부터 이를 설명하는 사건이 전개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들이 나아와 예수께 항의한다. 이들은 산헤드린 지도자들이다. 산헤드린은 한마디로 입법부와 사법부를 합친 권세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되어 있지 않았다.

‘정교분리’는 현대사회에서 만들어진 주장이다.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는 유착이 되어 있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예수께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느냐고 따진다(20:2). 한마디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위는 자기들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전에 대한 권위를 예수께 묻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을 피하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 재차 질문을 하신다. 그들은 답변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도 어떤 권세로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하시는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어서 포도원 농부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20:9~18).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산헤드린 지도자들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의 힘겨루기에서 그들은 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성전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총독에게로 갔다.

그리고 다시 예수께 돌아와 다시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20:22)라고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가이사의 주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은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제국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가이사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행위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성전의 지도자라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라고 강조한 것이다. 성전의 지도자들은 성전의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맞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결국 누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어둠의 권세는 로마제국과 유대인들의 부역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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