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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성경과 신학

느헤미야 지상강연(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무엇인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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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로마제국 /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

 

2015년 2월 3일 기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2월 2일부터 3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느헤미야 강의실에서 겨울방학 특강을 진행했다. 이날 특강에는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로마제국’을 주제로 강의했다. 안용성 목사의 강의 내용을 상하로 나눠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주>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르쳐라"
복음화는 '기독교화'가 아닌 하나님을 주님으로 만드는 것
회개와 믿음은 "파라오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제1부 / 하나님 나라의 복음

# 과연 우리가 믿는 복음이 진짜일까?

복음이란 무엇일까? 흔히들 한국 교회는 복음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복음이 과연 진짜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가라는 질문부터 해봐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를 보며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다. 한국 교회는 대부분 '복음주의'라고 말한다. 진보적인 교단도 복음주의 계열에 속할 수 있다. 복음주의라는 스펙트럼은 넓다. 모두 복음을 강조한다.

 

 

복음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왜 교회에 다닐수록 더 깊은 죄책감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진정 복음을 믿는다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죄책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라는 이름의 '율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라고 외치지만 사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회복하는 것, 자유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한국 교회가 율법을 가르쳤다면, 왜 율법적인 삶의 모습이 한국 교회에 드러나지 않는지 질문해봐야 한다. 율법을 그렇게 강조했다면 바른 삶이 되어야 함이 마땅한데 한국 교회에는 율법에 철저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없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은 내세지향적이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의 삶이 세속적인지에 대한 것도 질문하고 싶다. 내세지향적이라면 삶이 세속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인데, 한국 교회의 모습은 세속적이다. 철저하게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복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 십자가 대속의 복음:법정적 관점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복음은 첫째 '십자가 대속의 복음'(법정적 관점)이다. 복음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관점으로 바울의 사상으로 이해해왔다. 대속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속은 '내 죄로 인해 예수께서 대신 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바로 '죄사함'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일까?

십자가 대속의 복음만을 강조하다보면 심각한 결함이 발생한다. 이 복음은 믿음과 삶을 단절시킨다. 복음을 믿음으로 내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법정에서 죄를 사함받았다. 예수께서 무죄를 선언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다. 그런데 이 복음만을 강조하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한다. 윤리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복음(칭의)에 대한 가르침과 윤리적 권면이 함께 있다. 사도 바울은 칭의에 대해 가르친 다음에 그 칭의를 근거로 해서 윤리적 삶을 이야기했다. 윤리적 삶의 내용이 그 복음 안에 다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강조하는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는 이러한 부분이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 결국 '율법'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은 율법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결함이 있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이야기하려다보니 윤리를 말해야 하는데,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가 율법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은 교회와 세상을 단절시킨다. 세상을 복음화시킨다는 것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다 믿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복음화는 기독교화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전 국민의 4분의 1을 기독교화시켰다. 정치계와 교육계 등 힘의 논리로 봤을 때는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본다면 과연 복음화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독교화는 됐을지 몰라도 복음화는 되지 않은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강조하는 '복음화'는 과연 무엇일까?

 

 

# 하나님 나라의 복음:관계적 관점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복음(법정적 관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관계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죄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됐다는 것은 죄성을 갖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선포해주신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뜻한다. '칭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됐던 관계 속에서, 또한 다른 어떤 것의 지배를 받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칭의'다.

'대속'이라는 말은 속전을 지불하고 노에를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대속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죄가 주님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주님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속이다.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관계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믿음과 삶, 교회와 세상이 다시 연결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삶이다. 하나님이 주되신 삶이 곧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주되심은 개인과 사회, 교회와 세상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은 가슴과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위도 당연히 포함된다. 삶의 지향이 바뀐다.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행동도 변화된다.

따라서 '복음화'를 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육계를 복음화 시킨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육계에 하나님이 주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복음은 교회와 사회를 단절시킬 수 없다.

믿음은 과정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십자가 대속의 믿음에서 더 나아가 주님께 우리의 생각과 삶 모두를 내어드려야 한다.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일어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 우리의 신앙 성장 과정 속에서 주님이 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 예수님이 점점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가도록 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한 주님이 되시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는다. 인생 전체가 믿음의 과정이다. 믿음도, 구원도 과정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성경에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부분 미래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관계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노력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내어드리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마 1:14~15)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쳤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무엇일까?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복음의 정의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음은 곧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소식이다.

이는 마가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소식이 곧 복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되심, 주되심, 다스리심이다.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말쿠트',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다. 나라라는 말은 곧 왕이라는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다.

오늘날 국민, 영토, 주권이 있으면 국가가 된다. 국가의 3요소다. 여기에서 국민이 가장 중요하다. 국민이 주권과 영토를 갖고 있으면 국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국민보다 왕이 있으면 국가가 됐다. 왕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국가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왕이 먼저 있고, 왕의 소유의 백성들이 있고, 땅이 있으면 국가가 됐다.

누가 왕이냐에 따라 국가가 형성된다. 나라라는 말은 곧 왕이 되는 것이다. 왕이 곧 주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다스림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하나님이 왕되심, 하나님이 주되심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 아닌 것을 주로 섬겼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삶으로 전향하는 것이다. 복음은 다 정치적인 용어로 설명된다. 나라, 조도 다 정치적인 용어다. 회개도 정치적인 용어다. 전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을 바꾸는 것이다.

 

 

# 예언자들의 복음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복음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복음이었다. 그 복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사야 40장 9~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아름다운 소식이 곧 복음이다. 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신 것이다.

# 바울의 복음

이와 같은 복음의 내용은 바울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로마서 1장 1~4절에 보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 것(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예수님과 바울에게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 대해 설명한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신 것이다.

십자가 대속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이어서 바울에게서도 나타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실을 동의한 후,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 믿음이다. 결국 바울 복음의 핵심도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그 아들인 예수의 나라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받아 그 나라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 바울이 강조했던 믿음

바울이 강조했던 믿음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나타난다. 로마서 10장 9~10절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은 마음과 입으로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음과 입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믿음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 예수가 주님이 되시는 것은 마음과 입으로만 그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하자. 마음으로 믿었고, 입으로 고백했다고 하자.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입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는 말만 있는 종교가 될 것이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예수가 주되심까지 나아가는 것이 복음이고 믿음이다.

 

 

# 예수가 주가 되신다는 영역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왜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행위가 없이 공짜로 구원을 얻으니까 복음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의 핵심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사실 오랜 세월동안 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신앗시리아-신바빌론-페르시아-헬라-로마 등 700년 이상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제국의 지배를 대신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제국의 지배로부터7 해방이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를 기다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국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주권이 바뀌는 것이다. 해방되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이다.

제국의 지배 가운데 신음하던 백성들이 해방되니까 곧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이 신약성경으로 넘어왔고, 바울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복음이라고 정의했다.

죄와 죽음, 어둠의 지배로부터 해방이다. 외부의 어떤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사탄은 죄의 세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죄의 세력,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복음을 영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의 사회적, 현실적 복음을 바울이 영성화, 개인화한 것은 아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언제나 동일했다.

# 유대교 묵시종말론과 '이 세대'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교 묵시종말론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유대교 묵시종말론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묵시종말론의 특징은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눈다는 것이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하나님의나라)다. '이 세대'는 인자의 도래와 함께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오는 세대다.

인자의 도래와 함께 '오는 세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세대'의 기간은 엄청나게 길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2:2)이며, 현실의 통치자들(고전 2:6, 8)이다. '이 세대'는 기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한 통치자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따라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곧 인자가 도래한 이후부터의 세대는 통치자가 바뀌면서 새로운 세대가 된다.

묵시문학에서 시간은 연장선상에 있지만 통치자가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대'라는 말은 통치자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제국시대로부터 파생된 문학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부정적으로 봤다.

또한 '이 세대'는 이 세대(통치자들)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로마서 12장 2절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이와 같은 '이 세대' 곧 긴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 영적 세계와 현실

그러므로 사탄은 영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세력이다.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영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탄을 신화적인 존재로만 생각한다. 신앙생활에서 사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사탄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이 영적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은 현실의 심층에 있는 것을 우주의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이라고 월터 윙크(Walter Wink,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는 주장했다.

사탄은 신화가 아니다. 우리 현실에 존재한다. 현실을 실제로 움직이는 존재다. 신화적인 그림으로 표현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영적, 현실적 해방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탄이 현실을 매개로 활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귀신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 활동한다(막 5:1~20). 사탄이 현실 속, 숙주의 몸에 들어가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탄이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요한게시록은 로마제국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본다. 계시록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19장 10절까지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그 이후에는 사탄의 멸망을 말한다. 붉은 용은 사탄이고, 바다에서 올라온 용이 곧 로마제국이다.

사탄이 현실 속에서 활동하는데 로마제국이라는 숙주 속에 들어와 활동한 것이다.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죄와 죽음, 어둠의 세력은 항상 우리의 현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파라오의 질서(출 5장)

구약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파라오의 질서'(출 5장)를 통해서다.

출애굽기 5장 2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의 원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심판하기를 원한다고 했을까?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파라오로부터 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모세와 아론에게 내리게 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서 왕은 곧 신이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범람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홍수를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홍수와도 같은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신밖에 할 수 없다고 믿었다. 당연히 파라오는 나일 강의 범람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파라오는 당시 백성들에게는 곧 신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라오는 현실적인 신이었다. 하나님도 신이었지만 하나님은 파라오 밑에 있는 신일 뿐이었다. 그래서 파라오의 질서를 거부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를 바란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파라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조차도 그 질서 안에 갇혀 있다. 파라오의 질서에서 잘 되는 것이 그들의 기도제목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신이다.

# 우리가 믿는 복음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하나님인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제목이 우리와는 다른 것인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전히 파라오의 질서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파라오'는 오늘날 돈과 권력, 명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은 곧 파라오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와 믿음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파라오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느냐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와 똑같다. 그렇다면 정말 이 세상의 질서, 파라오의 질서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서 벗어나려면 신약의 종말론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새로운 세대를 맞이했다.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 세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이 세대'는 끝났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다시 오심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시 오심'이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냥 '오심'(파루시아), 곧 초림이다. 초림사건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과도기다. 논리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2천년 이상 길어지게 된 것이다. 누가복음은 80~90년에 기록됐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약 50~6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후반부에는 신학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됐는데, 아직 '이 세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이미'와 '아직'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대'와 '하나님의 나라'가 병존하는 세대 속에서 살고 잇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대는 '파라오의 질서'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파라오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면 굶어 죽어야 한다. 매매도 못한다. 경제생활도 중단될 수 있다.

파라오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파라오의 질서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 세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여전이 파라오의 질서가 유지되는 '이 세대'를 살아가려면 우리 안에 작동하는 파라오의 질서를 꿰뚫어 보는 눈과 식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대' 곧, 파라오의 질서는 끝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대되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민족 속에서, 전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파라오의 질서를 벗어나 하나님의 주되심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주권의 전향,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구원의 과정이다. 곧 복음이다.

처음에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한국 교회를 향해 질문을 했다.

첫째, 왜 교회에 다닐수록 더 깊은 죄책감에 빠지는가?

답은 믿음이 삶을 담아내지 못하므로 율법으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게 율법적인 가르침이 왜 한국 교회에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교리는 필수과목이지만 삶은 선택과목이 됐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교리를 갖고 싸우지만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다.

셋째, 내세지향적인 한국 교회의 삶이 왜 이렇게 세속적인가?

세상을 포기하면서 세상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질서에 대한 인식, 설명, 자각, 분별을 복음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파라오의 질서 안에 살고 있는데 복음이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신앙이 표현되고, 신앙이 유지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이를 포기하다보니 파라오의 질서가 지배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 세상을 파라오에게 넘겨주니까 파라오가 지배하게 됐고, 교회 안으로 파라오의 질서가 들어와 교회를 지배하면서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화됐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참 믿음과 참 복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예수의 주되심의 복음을 현실에 삶에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가 주가 되신다는 복음을 먼저 회복하고, 복음의 사회성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과제다. 교회가 세상에 지배당하고 있는 만큼 세상을 읽어내며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느헤미야 지상강연(하) 누가-행전에서 '어둠의 세력'은 누구인가? (tistory.com)

 

느헤미야 지상강연(하) 누가-행전에서 '어둠의 세력'은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로마제국 /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 2015년 2월 4일 기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2월 2일부터 3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느헤미야 강의실에서 겨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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