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주일이 맞나요? 안식일이 맞나요’ 제5회 신학캠프
2014년 8월 26일 기사
주일은
'안식일’과 전혀 다른 개념
주일성수를 유독 강조하는 한국 교회.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철칙 중의 철칙, 신앙생활의 절대규범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다보니 ‘주일’을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로 이해하거나,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도 많은 상황이다.
하지만 주일과 안식일은 엄연히 다른 개념. 비록 의미상으로 동일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지만 두 개념의 차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성도는 극히 드물다. 그냥 쉽게 주일을 안식일처럼 여기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와 관련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23일 ‘주일이 맞나요? 안식일이 맞나요?’라는 주제로 제5회 신학캠프를 개최했다. 주일과 안식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신학적, 성경적, 목회적으로 조명한 발제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주일과 안식일의 ‘다름과 같음’을 배워보자. 이날 발표된 느헤미야 연구위원들의 주장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주>
# 안식의 근본은 노동으로부터의 ‘쉼’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제도다. 오경의 율법 체계에서 안식일 규정은 단지 여러 규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거룩한 삶과 연관해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식의 중요성과 의미는 현재 우리가 지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서술하고 있는 창세기 2장(“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첫머리에 분명히 드러난다.
"안식은 쉼이다"
엿새 동안 일하신 하나님께서 이레째 되는 날에 쉬셨으니 그 날은 복되고 거룩하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쉼을 가리켜 복된 것이며 거룩한 것이라고 뚜렷하게 증언한다. 일하시고 노동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일하는 것도 하나님 닮아감이며, 쉬는 것 역시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이다. 무엇보다 일로부터의 쉼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표지다(겔 20:11~13, 20~21).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등장하는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의 경우 확연한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는 창조하신 후 쉬신 하나님을 안식일 준수의 동기로 제시하고, 신명기는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그 동기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이러한 안식일 준수의 혜택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남종과 여종, 함께 거하는 나그네, 그리고 가축에게 미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다.
안식일 준수는 개인적 영역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 근거해서 주일성수를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노동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안식을 그저 주일 하루 일하지 않고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날로 만드는 것은 구약의 진술들과 전혀 합치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오직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과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경우에만 의미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안식일 개념은 날 자체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쉼이 결정적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도 일로부터 쉬셨다. 이윤추구와는 상관없이 그저 쉬셨다. 쉼을 격상시키고 거룩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다. 잘 쉬기만 해도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다. 따라서 안식의 핵심적인 초점은 쉼에 있으면서 그 쉼은 나만의 쉼이 아니라 종과 가축, 나그네에 대한 쉼이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분주한 노동으로부터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의 근본은 쉼, 자유케 함에 있다. 물질적인 생산력에 의지하지 말고 충분한 쉼을 누리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피로사회를 맞서는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다. / 안식 그 거룩한 부르심(김근주 연구위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
"주일은 안식일 아니다"
"주일성수, 위선적 사용 자제"
# 주일은 ‘안식일’아냐, ‘주일성수’ 개념 위선적으로 사용해선 안돼
한국개신교 안에는 아직도 주일을 유대인들의 안식일처럼 가르치고,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한국개신교 안에는 ‘주일성수’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며,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예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주일에 일체의 노동이나 물건을 매매하는 일과 오락을 금지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가르침은 정당한가?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첫째,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가르치신 일을 묘사하면서 이 일이 금지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둘째, 막 2:23~28에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통해서 안식일에 사람의 굶주림을 해방시켜 주는 일은 안식일 규정의 예외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안식일이 사람의 필요를 위해 제정됐다는 율법의 정신을 알려준다. 셋째,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에 고쳐주는 일은 선한 일이며,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에 안식일 규정에서 예외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첫째, 안식일 준수규정과 관련해 마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은 분명한 언급이 없다. 둘째, 마태는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에 대해 마가의 기술을 따르면서 안식일에 사람의 굶주림을 해방시켜 주는 일은 안식일 규정의 예외임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안식을 규정의 정신을 강조한다.
셋째, 마태는 예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한 마가의 기술을 따르면서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에 안식일 규정에서 예외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넷째, 마태복음 24: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은 안식을 규정의 엄격한 준수를 보여주기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를 고려한 기도의 권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첫째,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이것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고, 다만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행위가 금지된 일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누가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일에 대해 마가와 마태와 동일하게 안식일 준수보다 인간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일이 안식일 규정 준수 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셋째,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세 사건(6:6~11, 13:10~17, 14:1~6)을 통해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일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안식일을 문자적이며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성경의 안식일"
넷째, 누가의 특수 자료(13:10~17의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과 14:1~6의 수종병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에 해당하는 안식일 치유사건을 통해 당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적인 안식일 준수를 고발하며,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일이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율법 준수보다 앞서는 일임을 보여준다.
다섯째, 누가는 초대교회 당시에도 안식일 규정을 계속 유지하며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안식일의 기본정신은 ‘쉼’이 당시 남자들과 비교해 볼 때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인들에게도 허락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첫째, 예수는 안식일에도 병을 치유해 주시는 일을 계속하셨다. 둘째, 첫 번 안식일 치유사건(5:1~18)에서 예수는 안식을 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안식일 논쟁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셋째, 두 번째 안식일 치유사건(9:1~41) 역시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그 의도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안식을 논쟁은 공관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안식일 규정 준수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의 정체성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하게 지켜야 할 유대인의 율법으로 제시하지 않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은 △예수 당시 안식일은 여전히 일반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지켜야 할 율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안식일에 허용됐던 일은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이었다 △안식일에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 병을 고쳐주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선한 일과 관련된 것은 안식일 규정에서 금지한 행위일지라도 예외가 된다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금지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의 안식일에서 확인된 것은 △예수는 의도적으로 안식을 규정을 어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셨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의 안식일 논쟁은 모두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보조역할을 한다 △안식일 논쟁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을 선언하신다 △안식을 규정을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히 준수해야 할 율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개신교는 안식일에 대해 첫째,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둘째, 주일성수와 안식일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아무 관련이 없다. 셋째, 복음서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율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즉, 한국개신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을 안식일로 가르치지 않아야 하고, 안식일 준수를 위해 주일노동의 금지, 스포츠 및 오락의 금지, 매매금지 등은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안식일 규정 준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책임을 갖고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이루어야 할 경건한 의무이며, 특권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개신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성수’라는 단어를 위선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복음서의 안식일(조석민 연구위원, 에스라성경대학원대 신약학 교수)
"안식일의 사회적 의미"
# 안식일의 사회적 의미, 주일신앙과 결합시켜야
한국 교회에서 주일관념은 율법적 안식일 사고였다. 즉, 한국 교회의 주일은 사실상 ‘율법적으로 이해된 안식일적 주일’이었다. 주일은 성수주일 혹은 주일성수였다. 주일이란 구속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노동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인간적 쉼과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보장하는 사회적 차원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주일은 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율과 의무와 같은 것이었다.
물론 기독교의 주일준수가 한국사회에 노동의 인권적 차원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주일개념이 거의 대부분 교회적 규례로서 이해된 한국 교회에서 주일준수가 사회적 차원의 맥락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정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지켜왔던 주일개념이 일하는 인간에게 쉼과 휴일로서 인간복지적이며 인권적 차원의 주일이 아니라 율법적 안식일로서 주일이 된 이유는 첫째, 한국 교회에서 거룩이란 세상과 교회의 분리였는데, 그것은 성별된 시간을 성별된 장소에서 보내는 것을 말했다. 주일은 바로 거룩한 삶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표식이었다.
"안식, 주일신앙과의 결합"
둘째,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윤리관은 사회와 문화를 향한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회악을 제거하고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변혁윤리보다 술 마시지 않고, 담배피지 않고, 특정 장소에 출입하지 않기만 하면 되는 소극적인 금기윤리에 머물렀다. 주일은 일을 금지하는 날이지, 적극적인 윤리적 실천을 뒷받침하는 삶의 원리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교회 주일관과 그에 따른 교회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안식일-주일관에는 안식일 폐기론과 주일 무용론이 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안식일 폐기에 초점을 두고, 주일은 규제 없는 해방의 날로 강조한다.
왜 우리에게 안식일이 사라졌을까?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인 연결끈이 없다. 안식일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규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식일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할 필요가 없는 구약적 개념이요, 율법적 준수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는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사고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안식일은 율법시대의 규율이며, 주일은 복음과 은혜의 시대를 사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안식일과 주일을 율법과 복음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근본적인 교정이 필요하다.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의 틀로 설정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구약은 율법이며, 신약은 복음이다.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이며, 신약시대는 복음의 시대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도식이 성립될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한국 교회에서 안식되어 온 것처럼 율법의 준수규칙이나 의무사항, 구원을 위한 공로와 행위와 같은 율법준수의 표식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받은 신자의 은혜와 감사로부터 나오는 신자됨의 표지라는 관점이 중시되어야 한다.
"안식일의 재발견"
안식일은 구원받기 위해 준수해야 할 신자의 의무행위나 행위규칙이 아니라 오히려 출애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업적에 대한 결과로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내야 할 신자의 표지라는 것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학적 차원과 인간권리를 박탈당한 위험에 노출된 노동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인간학적 차원이 중첩돼 있다는 점이 중시되어야 한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에 관한 경배와 인간을 향한 배려가 녹아내려 있다.
만약 안식일이 폐기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으로 이해된 안식일적 주일’이 되어야 한다. 안식일으 제의법적 의미는 폐기되어야 하지만 시민법적이며 사회적 차원은 폐기될 수 없다. 안식일 개념이 폐기되면 안식년도 없으며, 안식년이 폐기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대안사회의 형성을 위한 총체적 사회변혁의 프로그램인 희년의 제도적, 법적 근거도 사라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안식일적 주일’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어떻게 주일 안에 안식일의 사회적 의미를 구현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이제 주일은 단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앙표식이라는 사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전체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주권을 보호하는 공공의 차원이 함축돼 있다.
한국 교회가 안식일의 사회적 의미를 재발견하려면 주일에 대한 의미발견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구약의 안식일신학의 사회적 의미를 재발견하면서 안식일 신학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며, 그것을 주일신앙과 결합하도록 고민해야 한다. / 사회적 안식일 신학을 향하여(김동춘 연구위원, 국제신대 조직신학 교수)
# 안식일 ‘규정’에 매이지 않고 ‘정신’을 실천해야
한국 교회는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주일성수가 성경적인 개념인 것이 맞다면 그 권위를 다시 회복해 순종의 훈련을 강조해야 할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른 가르침을 통해 교인들의 삶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이라고 부른 날이 구약의 안식일과 개념적으로 동일한 날인가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주일성수를 안식일의 개념과 동일하게 이해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구약 율법의 안식일 규정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으며 그것을 주일에 적용하는 것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구약의 안식일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효력이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
첫째,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언약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안식일 규정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로서 주어진 규례이기 때문에 구약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 규정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규정보다 정신"
둘째,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재해석됐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 12:8)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를 통해 안식일의 본래적 의도를 회복하려고 오셨고, 그 궁극적 의미가 자신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 자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을 그대로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셋째, 안식일 규정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완성됐다. 신약시대에 새 언약을 맺은 백성들은 안식일과 같은 구약의 규정들을 그대로 지킬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듯이 그리스도가 단 번에 제사를 드려 모든 구약의 제사제도를 완성해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안식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그림자인 하루의 안식일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모든 날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누리는 안식일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참된 제물이요, 성전이요, 안식이기 때문에 다른 제물이나 성전, 안식일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넷째, 신약의 권위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안식일법을 지키라고 명한 적이 없다.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지 않았다. 제자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우리가 지금 할례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안식일 규정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신약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어느 특정한 날에 모든 노동을 중지하고,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설령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순전히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임이었을 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해 거룩의 일상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날들이 동일하게 중요한 날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14:5~6, 골 2:16~17, 갈 4:9~11). 어느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다거나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고, 실체를 무시하고 여전히 그림자를 붙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다른 날과 동일한 날이다.
여섯째,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한 주의 첫날(일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분명하지만(행 20:7, 고전 16:2, 계 1:10) 그들은 이 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그 날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하루를 쉬면서 모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날로 규정하는 적도, 그렇게 규정하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다.
"제도로부터의 탈피"
일곱째, 실제적으로 현재 안식일법을 구약 규정 그대로 지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안식일법은 그 날에 어떤 일도 금하며, 심지어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길 때 받을 형벌은 사형이라고 규정한다(출 35:2~3). 이것이 신약에서 다른 규정으로 대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규정을 그대로 따르려면 형별까지도 준수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우리는 오늘날의 주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지킬 필요는 없다. 이제는 모든 날들이 동등하게 거룩하게 됐기 때문에 주일만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주일성수주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주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다만 주님의 부활의 날로써 기념의 의미만 갖고 있다.
하지만 안식일의 정신은 계승해야 한다. 비록 구약의 안식일 규정이 신약시대에 폐지됐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완성된 ‘안식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종말에 누리는 영적 안식과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담긴 정신은 일 중단과 쉼에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누리는 것에 있다. 구원에 대한 경축에 있다. 비록 주일이 안식일이 아니고, 구약의 안식일처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주일은 안식의 정신을 가시적으로 실천하고 훈련하기에 용이한 시간이다. 그러나 안식의 의미를 살리고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구별한 날은 결코 율법적인 날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루를 떼어서 안식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것은 안식을 파괴하려는 세상권세 잡은 자의 계략을 파괴하고, 하나님나라의 참된 가치를 선포하려는 적극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다. 이런 동기로 행할 때 조심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율법에 매인 것처럼 의도했던 대로 하지 못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다. 둘째, 다른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어떤 틀을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 안식일 ‘제도’에 매이지 않지만 그 ‘정신’을 실천하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점점 더 안식을 잃어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알리고, 그 안식을 향한 소망을 선포하고, 그것을 지금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믿는 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 안식일의 정신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김형원 연구위원, 느헤미야 원장)
"예배에 치중된 주일"
# 예배에 치중한 주일, ‘안식’의 회복 추구해야
(고대) 초대 기독교공동체는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이 선교여행 중 안식일에 회당예배(13:14)와 성전제사(5:42)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일과 구별되는 주일이 매우 빠른 시기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 같다. 복음서에는 유대인과 유대-기독교인, 그리고 이방-기독교인 사이에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커져가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고전 16:1~3, 행 20:7~12, 계 1:10 등).
초대 교회는 안식일을 버리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엄격히 준수한 것 같지는 않다. 2세기 초반에 이르면 유대교의 안식일과 주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주일신학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로마제국에 발생한 달력의 변화도 교회가 안식일에서 주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태양을 섬기는 미트라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방인들은 태양을 숭배했던 미트라교의 영향 아래 토요일보다 일요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는데, 기독교인들도 이런 이방인들의 관행에 점차로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21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요일을 모든 시민의 일반적인 휴일로 선포했고, 이때부터 일요일은 법정 공휴일이 됐다. 콘스탄티누스의 결정으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안식일 대신 주일을 자신의 안식과 예배의 날로 준수하게 됐다.
(중세) 중세로 진입하면서 주일에 안식일의 의미가 이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공식적 입장과 특권을 회득하면서 이런 특성은 더욱 강화됐다. 305년(306년)에 스페인의 엘비라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주일예배 참석을 교회적 최초로 의무화했다.
5세기 아우그스티누스는 ‘기쁨의 날’이라고 불렸던 안식일 개념에서 죄와 관련된 일과 합법적인 쾌락을 구분했으며, 동시대에 히에로니무스는 일요일에 게으른 휴식을 유대적이라고 비판했다. 538년 오를레랑 3차총회는 최초로 주일 안식을 교회법으로 규정했다.
9~10세기 사이에 아일랜드에서는 안식일이 토요일 저녁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월요일 아침 기도시간까지 이어졌다. 13세기에 활동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일이 예배의 날이므로 ‘노예적 노동’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 1517년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마틴 루터는 율법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입장에 근거해 인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했다. 그는 엄격한 안식일 계명이 단지 유대인들에게만 명령된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반면, 제세례파 지도자들이었던 오스왈드 글라이트와 앤드류 피셔는 신약성경을 면밀히 검토하고, 제7일인 안식일만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해 실레지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에서 극단적 안식일주의를 전파했다. 또한 루터파였던 매튜 페헤와 아담 노이저도 같은 확신 속에 트란실바니아의 유니테리언들에게 안식일주의를 전파해 그 지도자인 프란시스 다비드를 개종시키기도 했다.
개혁주의를 대표하는 요한 칼빈은 영적 안식은 신자들이 자기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는 것이며, 죄악된 성향과 욕망, 일들을 중지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틴 부처는 1548년부터 1551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주일에 일하는 것은 물론 육신의 일에 전념하고 돈을 버는 일, 형제의 거룩함을 방해하는 일, 연극과 서커스와 놀이, 쾌락을 법법으로 금지시키려고 했다.
경건주의를 대표하는 야콥 슈페너는 루터보다 안식일 계명을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했다. 즉, 모든 신자들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며,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죄짓는 일과 육체의 쾌락을 도모하는 일을 금지하도록 권면했다.
"주일외 시간도 거룩한 주일"
(청교도) 영국의 청교도와 그 이후의 비국교도들은 은혜의 언약 속에서 십계명의 안식일로서 일요일을 엄수했지만 구약의 안식일 규정을 주일에 지키려고 했다.
청교도들의 노력으로 찰스 1세가 통치하던 1625년에 ‘주일준수법’이 통과돼 주일휴식을 법적으로 규정했다. 164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안식일 규정이 삽입됐다(모든 신자는 주일에 세상일을 멈추고 안식해야 하며, 오락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적인 언어와 생각까지도 삼가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적 일뿐만 아니라 사적인 훈련을 온전히 해야 한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정신은 소위 최후의 청교도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 안에서 절정에 달했다. 에드워즈는 일생동안 주기적으로 청교도적 안식일 규정을 방어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미국에서 청교도의 성서주의와 분리주의적 성향은 몇 가지 극단적인 안식일주의 운동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제7일 침례교’와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가 대표적이다. 제7일 침례교회는 성경의 안식일, 제7일이 거룩한 시간이며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고, 창조 때 제정됐으며, 십계명에서 확증됐고,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모범 속에서 재확증됐다고 믿는다. 특히 안식일이 안식, 예배, 기념의 날로 신실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율법, 즉 제7일 째의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칙령 이후에 형성된 것이므로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이 교회는 안식일이 제7일에, 특히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출까지 준수되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독교가 안식일에서 주일로 예배와 휴식의 날을 바꾼 것은 다양한 신학적, 사회적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의 산물이었다. 예수의 부활, 천지창조, 예수의 재림과 같은 신학적 요인들뿐만 아니라 교회가 처한 새로운 목회상황, 로마의 새로운 달력, 미트라교의 영향, 그리고 황제의 법령 등이 함께 결합해 그런 결정적 변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리돼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간적으로는 안식일과 결별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유산을 계승했다. 즉, 시간적 측면에서 교회의 공식예배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했지만 주일성수의 내용은 안식일 규정을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의 표현처럼 주일을 ‘기독교적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모순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휴식에 방점을 두었다면 기독교의 주일은 예배를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안식일에는 사회적 요소가 강한 반면, 기독교의 주일은 종교적 요소가 절대적이다.
한국 교회는 종전의 청교도적 주일사상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주일이 예배와 휴식 모두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휴식보다 예배를 강조한 것은 안식일과 주일을 혼용하면 정작 안식의 가치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잃어버린 안식의 회복이 향후 한국 교회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한국 교회는 주일에 대한 배타적 강조 때문에 다른 평일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일종의 ‘시간적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주일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도록 훈련해야 한다. / 안식일이냐 주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배덕만 연구위원, 복음신대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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