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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침례교회 구원론:택자구원론 타당성을 중심으로 [원문]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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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연구(2)

 

 

침례교회 구원론(택자구원론 타당성을 중심으로)

 

2014년 8월 26일 기사

 

1. 서론

침례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침례교회의 역사와 신학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침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신앙의 자유’와 ‘교리의 순수성’에 있다.

특히 침례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은 성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신약시대의 교회에 침례교회의 역사와 신학, 신앙과 정신이 있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오직 성경에 기초한 교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관 또한 만인제사장의 지위 아래 국가나 다른 세속적 권력이나 제도, 환경 등에 제한받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믿음으로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특정 인물의 신학이나 사상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즉, 독특한 하나의 신학체계나 교리 장정을 만들어 신앙을 통제하기보다는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통해 침례교회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 신학적 특징을 보다 세밀하게 말한다면 ‘다양성’에 있다. 침례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 역사는 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로 구분되는 신학의 범주에 속해왔다. 하지만 수정된 칼빈주의, 수정된 알미니안주의가 기독교 내에 없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침례교회에 소속된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이들도 있으며, 수정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혼합한 신학을 추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어느 특정한 신학사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학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침례교회는 성경해석의 자유를 믿는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신학의 다양성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침례교회는 신학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신학이 침례교회 신학에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가 옳다고 말하는 등 침례교회 내에서 극단적인 논쟁을 벌이는 일도 발생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정 인물의 신학사상을 따르지 않고, 성경해석의 자유를 보장하는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침례교회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최근에는 침례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한 가지로 통합하려는 관심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침례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의 자유’에 어긋나는 것으로써 침례교회 전체, 곧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와 관련 본 연구자는 침례교회의 다양한 신학 전통 중 ‘구원’에 관한 신학적 정체성의 방향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구원론적 관점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구원론이 침례교회 내에 공존하고 있지만 본 논문에서는 ‘택자구원론’, 즉,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은혜에 근거한 구속사의 타당성을 연구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침례교회의 기원과 영국과 미국, 한국 침례교회의 발생 배경을 먼저 기술할 예정이다. 이어 침례교인들의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신학적 특성을 분석하고, 미국 남침례교 신학자들의 주장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침례교 신학의 흐름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 특성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구원론을 언급하고, 구원론적 관점에서 칼빈의 예정론과 5대 강령을 설명한 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교리 비교를 통해 택자구원론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론의 타당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택자구원론이 성경을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권위로 삼고 있는 침례교의 구원론과 얼마나 가까운지 성경적 지지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
 
2. 침례교의 기원

침례교(Baptists)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는 ‘계승설’(전승설), ‘재침례교 영적혈연설’, ‘영국 분리주의 후예설’ 등 여러 가지 학설과 주장들이 있다.
 
1) 계승설

계승설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주었던 침례요한 시대부터 침례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침례요한 시대나 초대교회들에게서 침례교회의 영적 이상이나 정신적 배경을 찾을 수 있으며, 침례교의 원리를 비롯해 의식과 교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승설은 역사적인 실재로서의 ‘침례교인’이라 호칭된 사람들의 ‘역사적 출현’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 기원성은 결여돼 있다.
 
2) 재침례교 영적혈연설(The Anabaptist Kinship)

재침례교 영적혈연설은 16세기 종교 개혁기에 발생한 ‘재침례교도’로 보는 견해로써 침례교도(Baptist)와 재침례교도(Anabaptist) 간 영적 혈연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침례교는 15세기 이후 유럽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재침례교도들로부터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15세기의 재침례교도들은 변질된 신앙적 원리들에 대해 강력히 항거했던 무리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성서중심적 사상 때문에 당시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칼빈, 쯔빙글리의 교회들과도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 개혁자들의 사상이라는 것이 인본주의에 근거해 목적을 위해서는 현실과 우선 타협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재침례교도들은 그들의 성서 일변도적인 투철한 주장 때문에 개혁자들로부터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재침례교도들은 당시의 모든 종교 단체, 즉 로마교회, 루터파, 칼빈파, 영국성공회들로부터 비난과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잘못된 기성 체제에 도전하여 신약성서의 기본적인 확신, 곧 중생한 신자의 침례, 신앙양심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3) 영국분리주의 후예설

이와 같은 재침례교도들의 신앙적 특성 속에서 침례교의 정신적, 교리적 근원을 찾을 수 있지만 역사는 무엇보다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계승설과 재침례교 영적혈연설은 단순한 정신적 기원만 갖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의 확실한 역사 정립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역사적으로 확실한 침례교의 자취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난 영국 비국교도의 무리 속에서 찾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분리주의 후예설’이며, 역사적으로 이를 침례교 기원으로 해석하고 있는 상황이다.

16세기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었고, 화란,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는 재침례교도들이 발생해 복음적 신앙개혁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영국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성공회가 영국국교회를 조직해 영국 안에 있는 비국교도들에 대해 박해를 가했는데, 침례교회의 기원을 이와 같은 영국 비국교도들의 신앙과 삶에서 찾는 것이다.

특히 토벳은 침례교도들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의 후예로서 신자의 침례와 회중정치를 핵심적인 신앙원리로 수용했던 성도들이었으며, 다음의 세 가지 논거를 이유로 침례교의 발생을 반드시 재침례교의 영향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첫째, 재침례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은 모두 다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론을 구성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받음 없이도 독자적으로 유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둘째, 초기 일반 침례교 신앙고백서(1660년)에 “재침례교도라고 잘 못 부른 것이다.”(Falsely called Anabaptist)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자신들이 ‘재침례교도’라고 불린 칭호에 대해 단호히 거부한 점이고, 셋째, 영국 분리주의 운동에서 침례교 전통이 나올 수 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분리주의자들은 유사한 것과 유래한 것은 다르며, 유사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을 기원으로 해석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침례교의 역사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과 복음적 신앙운동으로 격동을 겪고 있던 신앙적 분위기와 시대적 각성 속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3. 영국침례교의 발생 배경

침례교회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떠나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추적해 올라갈 수 있는 대표적인 최초의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한 침례교회들이다.

역사적으로 침례교가 최초로 발생한 곳은 영국이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가 영국 안에 있는 비국교도들에게 박해를 가하며 국외로 추방할 때, 이들의 박해를 피해 국내외로 전전하던 비국교도의 무리 속에서 침례교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영국 침례교회는 다시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구원론에서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일반침례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 신학’을 표방한 특수침례교회다. 두 침례교회는 ‘종교의 자유’, ‘신자의 침례’, ‘회중 정치’ 등의 동일한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구원론과 관련된 신학에서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1) 영국 일반침례교회

영국의 일반침례교회는 1606년 런던의 게인스보로우(Gainsbrongh)에 있던 비국교도의 한 무리를 지도하던 요한 스미스(John Smith, 1554~1612)와 더불어 시작됐다. 이들은 성공회의 비성서적인 신앙모습에 반대해 성공회에서 탈퇴해 독립적인 교회를 조직해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비국교도들로서 신앙적으로는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날로 혹심해지는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1608년에는 화란의 암스텔담(Amsterdam)으로 이주했다. 이 때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75~1616)라는 평신도가 이주비용을 지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재침례교도들인 멘노파(The Mennonites)와 접촉을 갖게 됐다. 이들은 화란의 재침례교도와 접촉에서 침례에 대한 새로운 복음진리를 깨닫게 됐다. 당시 이들이 침례의식에 대해 새로 깨달은 복음진리는 침례는 중생의 체험을 가진 자에게 베푼다는 사실과 유아세례는 비성서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스미스와 그의 무리들은 이 복음진리에 따라 다시 침례를 받았다.

반면, 토마스 헬위스와 소수의 무리들은 스미스와의 의견 충돌을 계기로 1611년 경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근교의 스피탈필드(Spitalfield)에 역사상 첫 침례교회를 세웠다. 따라서 일반침례교회를 실제로 시작한 사람은 토마스 헬위스로 보고 있다.

이 때 토마스 헬위스에 의해 발표된 신앙고백서가 ‘암스텔담에 남아있던 영국인의 신앙선언문’이다. 토마스 헬위스가 죽은 뒤 지도력은 존 머튼(John Merton)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신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따랐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일반속죄설’(보편구원론)을 믿었기 때문에 ‘일반 침례교회’라 칭하게 됐다.

 

2) 영국 특수침례교회

영국 특수침례교회는 1616년 영국 국교회에서 탈퇴해 칼빈주의적인 복음신앙을 갖고 런던의 사우스와크(Southwark)에서 독립교회를 세운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의 무리와 더불어 출발했다.

제이콥은 1622년에 이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 교회의 회중은 그 후 몇 차례 목회자를 바꾸며 분립과 결합의 과정을 거쳤다. 이와 같은 분립과 결합의 원인은 침례문제였다. 유아침례와 교구목사로부터 받은 침례의 유효성 등의 문제였다.

이러한 변전을 하다가 1638년 중생침례를 주장하는 수 명의 교인들이 단합해 “중생한 자에게 침례를 베풀며 침례 의식은 전신을 물 속에 잠그는 것이다”라는 신앙 주장에 따라 분립해 교회를 세웠다. 바로 1638년 요한 스필스베리(John Spilsbury, 1593~1668)에 세원진 이 교회를 최초의 공식적인 특수 침례교회로 보고 있다. 스필스베리는 칼빈주의의 온건한 분리주의자였던 헨리 제이콥이 세웠던 교회에서 분립해 나와 침례교회를 세운 것이다.

특히 이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직 택함 받은 소수의 무리들만을 위한 것(제한속죄설)이라고 주장하는 칼빈주의적 신앙을 지닌 침례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특수 침례교회’라고 칭했다.

따라서 영국의 특수침례교회는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는 칼빈주의적 신앙을 가진 무리들이 교회를 재조직한 1638년을 발생연대로 삼는다. 그 후 1644년에 이들은 침례양식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50개조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이것을 이른바 ‘런던 신앙고백서’라고 칭했으며, 칼빈주의 신학, 침수침례, 종교적 자유가 그 중요 골자로 되고 있는 신앙고백서다.
 
3) 일반ㆍ특수 침례교회의 부흥과 성장

1644년 이르러 영국의 일반 침례교회는 40개 교회로 성장했으며, 특수 침례교회도 런던 주위의 7개 교회로 자라났다. 영국에 있어 이 양 침례교도들은 이때부터 1689년에 ‘신교자유령’이 공포되기까지 종교적 자유를 부르짖으며 혹심한 투쟁을 전개했다. 많은 교인들은 투옥됐으며 온갖 고난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침례교의 신앙을 지키며 영국 국교회와 투쟁한 침례교의 대표적 지도자들은 헨리 제쎄이(Henry Jessey, 1601~1663), 존 스필즈버리(John Spilsbury, 1616~1660), 윌리암 키핀(William Kiffen, 1616~1701), 헨서드 놀리즈(Hanserd Knollys, 1599~1661) 등이 있다.

물론 신교자유령이 공포된 이후에도 양 침례교회는 성장과 발전의 기회로 잘 활용하지 못했다. 일반 침례교회는 1750년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적 조직의 강화와 교리적 논쟁으로 교회가 약화됐다. 당시 영국 사회가 세속적 철학사상과 자연과학 사상이 신앙사상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침례교회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방지하고 통합을 유지할 목적으로 교권조직을 강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교권조직의 강화는 개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파괴하면서 맹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또한 일반침례교회는 알미나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경향이 일게 되자 극심한 교리논쟁과 분열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열과 투쟁은 교인들의 신앙열정을 식게 만들었다.

특수 침례교회는 개교회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지켰다. 하지만 교리적 아집과 오류는 교회발전을 저해시켰다. 이들의 중요한 교리적 강조점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특정한 개개인을 미리 선택했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일반 대중에게 전도하는 일이나 선교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복음전도나 선교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과 생각이 전체 교회와 교인들에게 만연되자 교회는 쇠퇴하고, 교인들의 영적인 힘은 급격히 쇠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교리적 오류와 모순 속에서 신앙생활하던 영국의 침례교도들에게 요한 웨슬레(John Wesleys, 1703~1791)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03~1791)의 부흥운동에 의해 교리적 오류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 중생의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 침례교도들은 회심의 필요성과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일반 침례교회에서는 단 테일러(Dan Taylor, 1738~1816)를 중심으로 특수 침례교회에서는 앤드류 플러(Andrew Fuller, 1754~1815) 및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 등을 중심으로 외국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양 교회는 선교협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사역과 부흥운동으로 교단조직과 교리 논쟁을 둘러싼 분쟁과 분열로 극도로 쇠퇴했던 교세에서 벗어나 18세기 후반부터 부흥하기 시작했다. 1800년에 이르러 양 침례교회는 165개의 새로운 교회를 조직했으며, 50년 어간에는 700개의 교회가 더 조직됐다.

이때 영국 침례교회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로버트 홀(Robert Hall, 1764~1831),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알렉산더 매크라랜(Alexander Maclarenm, 1825~1910) 등은 당시 뛰어난 설교자요 문필가요, 사회활동가로서 활동했다.

특히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는 신자로 구성된 교회, 신자의 침례, 회중정치, 신앙생활의 자유, 개교회 독립 등의 공통점을 추구했다. 하지만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각 교회의 구원론은 조금씩 달랐다.

툭수침례교회의 경우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을 인정한 반면, 일반침례교회의 경우 인간의 부분타락(자유의지 인정), 조건적 선택, 일반속죄(보편구원), 은혜(성령)는 거부될 수 있으며,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도 있다고 인정했다.

 

4. 미국의 침례교회

영국 침례교회와는 별도로 미국에서도 침례교회가 시작됐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침례교회 공통점은 모두 영국 분리주의 후예들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과 이들 각 교회는 서로 간에 역사적 연결교리가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미국 침례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주로 영국 및 유럽의 이민자들로부터 발생했다. 최초의 미국 이민자들은 유럽대륙에서 종교적 박해를 견디지 못해 종교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대담한 신앙인들인 청교도들로 구성돼 있었다. 미국의 침례교회는 이와 같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 목숨을 아끼지 않은 청교도적 신앙전통 속에서 역사가 시작됐다.

미국 침례교회는 크게 지역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부, 중부, 남부 등이다. 미국 대륙이 최초로 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된 곳은 북부지역인 뉴잉글랜드다.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맨 처음 모두 보스톤 항구를 통해 이 지역에 정착했다. 하지만 미국 대륙이 이민자들에 의해 개척되자 영국 정부는 그들의 군대와 관원들을 파견해 동부 13개주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고 국교회(성공회)를 미국으로 이식했다.

결국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동한 청교도들은 보스톤 항구에 닫자마자 다시 국교회의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1631년 보스톤에 와서 살렘교회의 목사가 된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 목사는 바로 성공회의 종교적 박해에 직면했다. 그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다 보스톤에서 추방돼 로드 아일랜드 섬에 땅을 사서 프라비던스 식민지(Providence Plantation)를 세우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특히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며 성경을 연구하다가 1639년 침례를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므로 최초의 침례교회를 조직했다. 이 교회가 미국에서 조직된 최초의 침례교회인 프라비던스 제일 침례교회(Providence First Baptist Church)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북부 지역의 침례교회 성장은 극히 미약해 1700년 뉴잉글랜드 지역 침례교회는 10개 교회, 교인 수는 300명에 불과했다.

반면, 중부지역은 침례교 성장의 핵심이었다. 영국의 국교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신앙적 자유를 누리기 충분했다. 펜실베니아 주와 뉴저지 주는 처음부터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고, 필라델피아 주는 19세기 초 식민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침례교의 센터가 되고 있었다.

1684년 토카스 둔컨(Thomas Dungan)이 펜실베이나의 콜드 스프링에 교회를 조직한 것을 비롯해 유명한 ‘필라델피아 제일 침례교회’가 설립됐다. 1707년 5개의 교회로 필라델피아 침례회연합회가 조직됐으며, 이 연합회는 1757년 펜실베니아, 뉴저지, 뉴욕, 버지니아 등지의 식민지에서 25개의 교회를 확장했다.

 

1726년경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발생했을 때 대다수 침례교인들은 북부와 중부지역에 있었다. 당시 남부지역은 소수의 이민 집단들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부터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이주한 무리들이 많아지자 침례교 사업도 자라났다. 또한 이 지역에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됐기 때문에 침례교, 루터파, 모라비안파, 감리교 등이 많이 몰려들어 활발한 교세확장이 이루어졌다.

남부지역은 대체로 대각성운동의 부흥운동 이후에 개척되고 발전됐다. 당시 이 지역의 침례교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서민계층이었으며, 신앙은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감성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하지만 대각성운동의 불길은 가난하고 교육 정도가 낮은 남부지역의 침례교인들의 뜨거운 신앙적 체험과 더불어 복음전도열을 촉진시켰다. 침례교회의 자유로운 신앙원리는 결국 전도열에 불타는 많은 설교자와 전도자를 배출했으며, 이들의 전하는 체험적인 복음진리, 격식이 없는 소박한 신앙스타일, 대중적이며 복음전도적인 설교는 자유와 평등과 실제를 숭상하는 미국의 풍토에서 가장 생리에 맞는 적절한 생활환경이 됐다.

결국 보수적인 영국에서 발생한 침례교가 신대륙 미국에서 그 이상과 원리가 만발하게 꽃피운 이유다. 특히 오늘날 미국의 남침례교가 오늘날 전 세계의 기독교 가운데 괄목할 성장과 발전의 왕좌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성경 진리에 투철한 침례교의 신앙원리가 거둔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5. 한국의 침례교회

한국 침례교회 역사는 1889년 내한한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과 더불어 시작됐다. 펜윅을 비롯해 파울링(F. W. Pauling) 선교사 등은 충남 공주와 강경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착수하면서 최초의 침례교회가 탄생했다.

펜윅은 1906년 충남 강경에 그의 모든 동역자나 교인들을 모아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고 46개조로 된 회칙을 만들었다. 이후 일제통치 아래서 대한기독교회는 몇 차례의 교단명칭 변경이 있었다. 1921년에는 ‘동아기독교회’로, 1933년에는 다시 ‘동아기독대’로, 1940년에는 ‘동아기독교’로 변경됐다.

1890년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계예양 원칙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할하자 펜윅 선교사는 대한기독교회의 선교터전을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으로 선정하고, 선교에 주력했다.

결국 대한기독교회는 초창기의 전도지역인 충남 일원, 경상북도 일원 및 원산을 중심한 함경도 일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전도 사역의 역점을 만주, 시베리아, 몽고지역에 뒀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선교활동의 결과로 국내에 약 100개의 교회, 만주에 100개의 교회, 시베리아에 40개 교회 및 몽고에 수 개의 개척 전도소를 개설하는 교세확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만주, 시베리아, 몽고 및 북한 지역에 주된 교회와 사업 터전을 갖고 있었던 ‘동아기독교’는 1946년의 북한 공산정권 수립으로 그들의 선교 터전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다.

이후 1946년 남한에 있던 교단 소수의 지도자들은 충남 철산에서 모임을 갖고 ‘동아기독교’ 재건에 나섰다. 이후 1947년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로 환원하고, 분립해나갔다. 1949년 제39회 총회가 충남 강경에서 개최됐을 때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 있어서 침례교단 조직의 역사적 시발이 됐으며, 1950년의 철산 총회에서 총회의 제반 규약을 미국 남침례회 총회의 규약과 매우 유사한 체제로 변경했다. 1952년 42회 총회가 충남 철산에서 개최했을 때, 총회는 연맹총회로 규약을 개정했으며, 여전도회를 조직했다.

또한 1953년 대전에 성경학원 개설하고, 이듬해인 1954년 침례회 신학교로 승격시켜 문교부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1953년 이전에는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정규적인 침례교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의 침례교인이 전혀 없었다. 총회 지도권을 가진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펜윅 선교사가 길러낸 동아기독교의 목회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년대 중반부터 침례교의 이상과 신앙정신에 투철한 미국 남침례교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이 많이 나오게 되자, 총회는 침례교의 신앙원리를 지향한 전도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반면, 선교사들이 한국의 실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지도자들의 행정적 독주와 파당성, 신앙절충주의, 해외선교부 의존성 등으로 한국 총회와 선교회 갈 갈등과 대립이 조장됐다.

결국 1960년대 한국 침례교단은 대전과 포항 지역으로 분열됐다. 분열 이후 대전 총회는 미국 남침례회 총회를 본 딴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교회진흥원을 만들어 교육에 힘쓰는 등 침례교의 신앙정신을 진작시켜 나갔다. 하지만 분열 이후 선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중단된 포항총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침례교회들 안에 일어났던 영적 부흥운동은 정치와 물질에 의해 갈라졌던 총회를 다시 하나로 만들게 했다. 1968년 4월 16일 9년 동안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의 교단 명칭으로 분열됐던 교단이 합동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후 교단의 통합과 더불어 전개된 한국침례회 연맹총회는 1976년 11월 4일부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명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한국 침례교회는 신앙과 행습, 교회행정과 조직, 교단의 사업과 정치 등 신약성서 교회의 모본을 향해 기틀을 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6. 침례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지금까지 침례교회의 기원과 영국, 미국, 한국 침례교회의 발생배경 및 역사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에서는 침례교의 전반적인 신학의 특징과 정체성에 대해 기술해보고자 한다.

사실 정신적 측면에서 침례교회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로 더불어 시작됐다고 믿는다. 침례교회는 신약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형태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침례교회는 믿고 따른다.

초대교회의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도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뿐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최종적 권위로 믿는다. 침례교의 모든 신학과 신앙은 성경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신구약 정경 66권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은 절대 무오함을 믿는다. 이밖에 성도의 제사장 직분 교리를 믿으며, 개교회 독립성(행 13:2~3, 롬 12:16, 고전 1:10, 6:1~8, 고후 13:11, 엡 4:3)을 믿는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교회들은 개교회가 독립해서 자치적으로 행정을 해나가는 독립교회였다. 정치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마 22:21, 롬 13:1~7).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뿐이라고 믿는다(딤전 3:1~13, 2:11~12, 고전 14:34~36). 믿는 자의 침례와 주의 만찬만이 교회의식임을 믿는다(행 2:41, 고전 11:17~34). 구원받은 영혼이 침례에 순종함으로 개교회의 회원이 됨을 믿는다(행 2:41, 마 28:19~20).

또한 예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에게 나셨으며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소유하신 분임을 믿는다. 또한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으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3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해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믿는 자들의 중보가 되셨음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속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권능과 영광 중에 돌아오실 것이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주님으로 모든 믿는 자 가운데 거하신다. 침례교인들은 성령께서 삼위일체 중의 한분이심을 믿는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며 모든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고 은사를 주시며 또한 성결케 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무엇보다 침례교 신학적 정체성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에 있다. 자유는 침례교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이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영역, 구원(영혼의 자유), 종교의 자유(성서의 자유), 교회의 생활(교회의 자유), 시민의 생활(종교의 자유)에서 나타난다. 물론 자유는 항상 위험스러우며 위협적인 사상이다. 영혼의 자유는 구원을 성예전적이며 이성주의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이다. 성서의 자유는 성서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위협적이다.

교회의 자유는 교회의 독재주의자들과 정치적인 전제주의자들에게는 위협적이다. 종교의 자유는 사람을 그들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려하고 법으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다. 하지만 자유를 강조한다는 것은 성서와 개인적인 삶, 교회, 정부를 포함해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로 묶는 신앙이다. 역사적인 침례교의 정체성은 먼저 통제보다는 자유, 강제보다는 자원주의, 집단사고보다는 개인주의 대리종교보다는 개인적인 종교,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은 침례교 신앙의 정신을 반영하는 원리로써 신자의 침례, 성경의 권위와 해석의 자유, 전신자 제사장주의, 지역 교회의 자치권과 회중정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든다.

사실 침례교의 신학은 신앙과 삶을 반영해야 한다. 침례교적 신앙과 삶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신학은 첫째, 타락했으나 그래도 인간에게 최소한 하나님과의 접촉점이라도 남아 있다는 인간론이다. 둘째, 타락했으나 그래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세계관, 문화관, 역사관을 지닌 계시론이다. 셋째,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속죄론이다. 넷째, 신자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고 타인과 타교단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해 주면서 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론이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가치이며 한국 침례교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7. 침례교인들의 신앙고백에서 나타난 신학적 특성

침례교는 위와 같은 신학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현재까지 결코 어떠한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 침례교 안에 유일한 교회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떤 교리적 진술로도 행함과 신념에 대한 성서의 명령을 적합하게 요약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신조로 규범을 만들면 그것에 맹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례교회는 다양한 신앙고백을 해왔다. 따라서 그동안 발표됐던 침례교 신앙고백을 통해 침례교 신학의 특성을 다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영국 신앙고백서

영국 침례교회는 처음부터 신학적 성향이 다른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에 의해 시작됐다. 이 두 성향을 대표하는 최초의 신앙고백서에는 일반침례교회의 ‘화란 암스테르담에 남아있는 영국인들의 신앙선언서(1611)’와 특수침례교회의 ‘런던신앙고백(1644)이 있다.

첫 번째 신앙고백서는 ‘토마스 헬위스 신앙고백’ 또는 ‘27개조 신앙고백’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토마스 헬위스가 요한 스마스와 결별한 뒤 작성한 신앙고백서로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공식적인 최초 신앙고백서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두 번째 신앙고백서는 1644년 런던에서 일곱 개의 특수침례교회가 당시 확산됐던 일반침례교회와 급진적인 아나뱁티스트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발표한 것이다. 이 고백서는 기본적으로 선택교리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진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유기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는 이유로 온건한 칼빈주의 신학을 표방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두 신앙고백서 외에도 여러 개의 신앙고백서들이 영국 침례교회서 발표됐다. 하지만 이 두 신앙고백서는 영국 침례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고백서다. 일반침례교회는 1651년 ‘30개 회중의 신앙과 실천’을 발표했으며, 1660년에는 ‘표준신앙고백’을 발표했다.

하지만 표준신앙고백의 경우 침례교인들이 반역의 무리이며 무정부의자들이라는 오해를 벗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어서 순수한 일반침례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특수침례교회에서 나온 ‘제2차 런던신앙고백(1677)’은 ‘런던신앙고백’보다 더 체계화되고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에서는 런던고백과 다를 것이 없고, 배열과 구조 및 표현 방식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대체로 따르고 있다.
 
2) 미국 신앙고백서

1845년 남침례교 총회가 분립한 뒤에 공식적으로 총회에서 발표한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1925)’는 어떤 점에서 미국의 침례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백서는 ‘필라델피아신앙고백(1742)’나 ‘뉴헴프셔신앙고백(1833)’을 거쳐서 오늘날 남침례 신앙고백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미국 침례교에서 처음으로 결성한 필라델피아 지방회에서 작성한 ‘필라델피아신앙고백’은 웨스트신앙고백을 모방한 ‘제2차 런던신앙고백’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고, 이 고백서는 18세기 미국 침례교회들의 신학을 칼빈주의로 기울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뉴헴프셔신앙고백’은 자유의지침례교회의 영향력으로 인해 칼빈주의 신앙을 새롭게 진술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제정됐다. 이 두 고백서는 미국 침례교의 신앙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두 고백서의 신학적 공통점은 그 신앙고백의 배경에 칼빈주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는데 있다. 하지만 차이점은 전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해 있는 반면, 후자는 그 칼빈주의적 성향이 크게 약화됐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남침례교 총회가 1925년에 채택한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는 당시 진화론과 현대주의 신학에 대한 전통적인 신조와 교리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제1조에서 15조까지는 뉴헴프셔신앙고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좀 더 교리적인 설명이 필요할 때 표현을 고치거나 새로 삽입했다. 특히 인간의 노력 부분을 강조했던 뉴햄프셔신앙고백의 일부분을 삭제했다. 이후 이 신앙고백은 1963년 개정됨으로써 좀 더 체계적으로 간결하게 정리됐다.
 
3) 칼빈주의 5대강령으로 분석한 신앙고백서의 특성

그렇다면 칼빈주의 신학과 침례교회 신앙고백서에 나타나는 신학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김용복은 ‘은혜와 자유’라는 관점에서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화란 암스테르담에 남아있는 영국인들의 신앙선언서’(1611), 영국 특수침례교회의 ‘런던신앙고백’(1644), 미국 남침례교의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1963) 등 침례교회의 대표적인 세 신앙고백서를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분석 틀로 삼아 재구성하고, 그 신학적 특성을 일반화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원죄와 죄의 전가

세 신앙고백서는 인간이 아담의 타락 이후 죄 가운데 태어나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고, 정죄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이른바 ‘원죄’ 개념을 충실히 반영했다. 하지만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아담의 원죄와 그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었는지, 즉 직접전가인지, 혹은 간접 전가인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1644년 신앙고백서는 직접 전가에 가까운 인상을 주며, 반대로 1611년 신앙고백은 간접 전가에 가깝다. 1963년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후손은 죄를 향한 본성과 환경을 물려받음으로써’란 표현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직접 전가를 지지했다.

 

② 선택과 예정

세 개의 신앙고백서 가운데 선택과 예정이란 단어가 동시에 사용된 것은 1611년과 1644년의 신앙고백이다. 이 두 고백서는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믿을 자와 믿지 않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1611년 신앙고백서는 그 예정을 ‘예지 예정’(foreknowledge predestination)으로 해석했고, 1644년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이 선하고 즐거운 뜻에 따라 예정하셨다고 함으로써 그것을 ‘절대 예정’(abso1ute predestination)으로 해석했다.

한편, 1963년 신앙고백서에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반응을 조화시키려는 흔적을 보였다. 따라서 1611년과 1644년의 신앙고백서는 각각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신앙고백을 한 셈이다. 그에 비해 1963년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을 완화시킴으로써 중도적 입장을 표방했다.
 
③ 그리스도의 속죄

1611년 신앙고백서는 비록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속죄의 범위가 명시적으로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보편속죄’를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1644년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자’에게만 구원을 베풀었다고 진술하면서 ‘제한속죄’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63년 신앙고백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다소 명료하지 않다. 하지만 제4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대목을 통해 ‘보편속죄’로 이해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④ 하나님의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와 ‘선행적 은혜’라는 개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신학논쟁에서 중요한 갈등 요인 가운데 하나다. 16131년 신앙고백서는 ‘선행적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조건적 은혜’를 진술했다. 1644년 신앙고백서는 믿는 행위가 ‘전적으로 수동적’임을 밝히고 있어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1963년 신앙고백서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든지 선행적 은혜라는 개념은 찾을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원론적인 언급이 있을 뿐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에서 1611년 신앙고백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1644년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신학을, 1963년 신앙고백은 그 중도적 신학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⑤ 성도의 견인

한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끝까지 믿음 안에 거하게 되느냐, 아니면 그 은혜로부터 떨어질 수도 있느냐 하는 문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갈림길이다. 1611년 신앙고백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따른 결과대로 ‘하늘로부터 오는 은사를 받고 성령을 힘입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구절을 명시했다.

반대로 1644년 신앙고백은 ‘믿음을 가진 자들은 최종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그 믿음에서 결코 떨어져 나갈 수 없다’고 함으로써 칼빈주의 신학을 충실히 반영했고, 1963년 신앙고백도 ‘모든 참된 신자는 끝까지 인내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자의 견인을 고백했다. 따라서 1611년 신앙고백은 전형적인 알미니안주의를 따랐고, 나머지 둘은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신학과 맥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칼빈주의 5대강령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서들을 분석했지만 ‘구원론’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611년 신앙고백은 대체로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1644년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신학을 반영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1963년 신앙고백은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라고도 할 수 없다. 흔히 1963년 신앙고백을 ‘수정된 칼빈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며, 하나의 ‘신학적 중도주의’라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주의는 단순히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적당히 섞어놓은 절충주의가 아니라 그 둘 모두를 포괄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8. 침례교 신학의 흐름

지금까지 침례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및 침례교 신앙고백에서 나타난 신학적 특성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침례교 신학은 어떻게 흘러왔을까. 사실 침례교 신학은 미국 남침례교 신학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침례교는 1845년 이후 12명의 미국 침례교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적 흐름이 유지되어왔다. 1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남침례교 신학의 흐름을 살펴볼 때, 초기에는 ‘칼빈주의’, 중기에는 ‘수정된 칼빈주의’ 후기에는 ‘알미니안주의’가 두각을 보이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침례교 신학의 진정한 전통은 어느 특정한 하나의 신학체계나 교리체계를 고집하지 않는데 놓여있다는 점이다. 얼핏 들으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이는 침례교 정신 및 신학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실 미국 남침례교의 경우 역사적인 문제나 혹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교단으로 평가되어왔다. 또한 남침례교의 경우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에 직면하기는 했어도, 어느 특정한 하나의 신학체계나 교리체계를 세워나가는데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침례교 신학의 부재론까지 들고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고 침례교가 자신의 신학을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신학이 부재한 것은 아니다. 침례교 신학은 어떤 하나의 신학체계를 권위적 혹은 강압적으로 내세우지 않을 뿐이다.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침례교를 특징지을 만한 신학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정한 신학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침례교의 독특한 장점이지 결코 약점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침례교의 신학이 없다느니, 애매하다느니 하는 부정적 평가는 다분히 그 평가의 기준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라는 두 틀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교리사 관점에서 본다면, 남침례교 신학은 인간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거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의 남침례교 신학에서는 결코 칼빈도 알미니우스도 독보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유일한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었다. 그리고 성격은 해석의 자유라는 원리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이런 특징은 침례교의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남침례교의 긍정적인 신학 전통 가운데 또 하나는 그들의 신앙이 ‘은혜와 자유’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언제나 이 둘의 관계 속에서 팽팽한 긴장과 조화를 이루어왔던 것이 침례교 신학의 장점이었다.
신학적 사조로 말한다면, 이것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도를 지향한 것이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도를 가는 신학, 이것을 ‘은혜와 자유의 조화’에서 빚어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 미국 남침례교 신학의 흐름을 정리한 폴 바스든의 주장을 예정, 속죄, 견인과 배교, 구원 등으로 분류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는 전반적으로 남침례교의 신학이 초기의 칼빈주의에서 중기의 수정된 칼빈주의를 거쳐 후기의 알미니안주의로 흘러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 예정

지금까지 어떤 교리들도 예정론만큼 많은 논쟁과 분열을 일으킨 것은 없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의도를 구원에 대한 인간의 희망과 관련짓는 교리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인간의 죄의 확실성, 구원의 약속 등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예정론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관련이 있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이 믿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을 영원 전부터 결정하셨고, 명확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람들도 예정하셨다.

이러한 견해가 바로 칼빈주의 예정론이다. 반면, 에라스무스, 알미니우스 웨슬리의 경우 구원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선택하는 역할을 강조했다. 알미니우스의 경우 예정론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고 은혜로운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삶을 허락하지만 불신자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하신다’로 정의했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중재자로, 구세주로, 대제사장으로, 속죄자로 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남침례교 예정론은 19세기 후반부에는 고등칼빈주의 경향에서 해석되었다. 그런데 멀린스, 카너와 피셔에 의해서 예정론은 급격하게 수정됐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한다는 것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거부하므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견해에는 반대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원하는데 책임이 있고, 개인은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 선택은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며, 유기는 조건적이며 순간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게다가 이 세 명의 신학자들은 다른 중요한 방법에서 칼빈주의적 선임자들과 결별했다. 그들 모두가 예정론을 논의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가 추상적인 추론을 대신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재해석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포함시켰다. 더욱이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하나님도 결코 침범하지 않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생각했다. 이 모든 요소들을 함께 평가하자면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에 수반하는 신학적 주제들은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두드러지게 수정해 해석된 것으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반면, 멀린스와 카너의 수정된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넘어 철저한 알미니우스주의의 모델을 수용한 신학자들도 있었다. 홉스, 스태그와 무디는 구원과 저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정이라는 칼빈주의의 생각뿐 아니라 유기가 인간의 믿음에 따라 조건적인 반면에, 선택은 무조건적이라는 수정된 칼빈주의의 관점도 역시 거부했다. 대신에 선택과 유기는 모두 인간의 믿음에 따라 조건적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구원과 저주는 자유 결정에 따라 바뀐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응답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즉, 자율-선택의 한 형태를 수용한 것으로써 이는 그 형태 안에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자신이 구원받도록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침례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초기 60~70년 동안 칼빈주의에 집착했다 할지라도 최근 책을 펴내는 신학자들은 예정론에서 칼빈주의를 거부하고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2) 속죄

속죄에 관한 남침례교의 견해는 보이스의 칼빈주의로부터 이탈되어 왔다. 칼빈주의의 영향은 멀린스와 카너의 사상에 이르는 동안 감소됐고, 무디의 신학에 와서는 완전히 거부됐다.

보이스는 터레틴, 핫지, 칼빈주의적 고백 문헌에 나타난 칼빈주의를 추종했다. 그의 방법은 개혁주의적 스콜라주의(“하나님은 거룩하고 주권적이며, 인간은 부패하고 수동적이다. 속죄의 교리는 율법의 범주 안에서 형성된다”)였다. 율법과 정의는 기본적인 요소다.

보이스의 강점은 인간의 죄된 상태와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 데 있다. 그는 정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고, 속죄의 교리에서 인간의 구원 불가능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멀린스는 계시적, 방법, 철학적 인격주의 그리고 보편적 속죄를 통해 보이스의 칼빈주의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칼빈주의적 선택의 합리주의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모두 강조함으로써 보이스의 속죄 교리를 수정했다. 또한 멀린스는 특별선택을 지지하면서도 불가항력적 은혜를 거부했다.

카너는 하나님을 의롭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간주하는 좀 더 균형 잡힌 견해를 내놓으면서 멀린스의 인격주의와 체험적 신학을 수용했다. 카너는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일반적 동기를 선택했다. 그는 희생이나 대속 개념과 같은 더욱 특별한 동기의 타당성과 속죄의 주관적 요소를 부인하지 않았다. 멀린스처럼 카너도 보편적 속죄를 주장했다. 보이스, 멀린스, 카너는 모두 특별선택과 보편 속죄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결론은 동일했다.

데일 무디는 칼빈주의의 영향을 제거했다. 희생과 수난의 종이라는 범주들을 선호하고, 속죄에서 어떠한 형벌적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화해에서 은혜와 사랑이 율법과 정의보다 우선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십자가 사건에서 수동적이라는 보이스의 주장을 반대하고, 무디는 인간이 전적으로 능동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속죄 교리와 관련 무디는 신론에서 하나님을 거룩하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명하면서도 십자가론에서는 거룩이란 개념을 빠뜨렸다. 칼빌주의에 대한 지나친 반대로 인해 자신의 해석학에서 불일치를 드러내고 말았다.
 
3) 견인과 배교

초기 남침례교 총회는 온건한 칼빈주의를 유지하면서 성도들의 견인의 견해를 지지했다. 멀린스와 카너는 자신들의 신학에서 칼빈주의 위에 인간적인 면을 더하게 되었으나 견인에 대한 그들의 견해들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전제들 위에 근거한다. 무디는 칼빈주의를 역전시키고 행위에 의한 구원은 아니지만 믿음의 문제와 관련된 배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무디는 구원의 속성상 배교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그것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도의 배교 실제성을 주장한 것이다.

현재 남침례교 총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히 성도들의 견인에 있다. 하지만 배교에 대한 무디의 해석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남침례교 학자, 목자, 성도들도 있음은 의심이 여지가 없다.

 

4) 구원

대그는 칼빈주의 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체험, 특히 회심의 체험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중생시킨다고 주장했으며, 신자의 배교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기본적으로 서 있었지만 칼빈주의 택자와 예정교리의 논리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언약하신대로 끝까지 지켜주실 것을 믿는 확신에 근거했다.

멜은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과 제한 구원, 유효한 소명, 최종적인 견인의 신학체계를 추구했다. 카너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함을 시인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다. 하지만 은혜의 불가항력성이라든지 이중 예정은 거부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구원의 완성을 위해 협동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무디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자들에 대한 예정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철저하게 칼빈주의의 5대교리를 거부했다. 회개와 믿음에 선행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와 칼빈주의의 중생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멀린스도 제한속죄를 반대했으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며 초청하고, 설득하시는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남침례교 신학의 주요 흐름을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남침례교 신학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도를 가는 신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남침레교의 신학 흐름은 사실 전 세계적인 침례교회의 신학적 흐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침례교회는 칼빈주의 전통과 알미니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와 목회자, 그 두 전통의 중도를 지향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함께 공존하는 신학적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복은 침례교회는 다양한 신학적 색깔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신학적 색채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침례교회의 신학적 성향을 대체로 대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큰 의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 신학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특성을 첫째, 침례교 신학은 성서적이다. 둘째, 침례교 신학은 복음전도적이다. 셋째, 침례교 신학은 신자의 중생체험을 강조하는 특성이 있다. 넷째, 침례교 신학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9. 한국 침례교 신학의 특성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과 특성, 미국 남침례교 신학의 흐름을 다뤘다. 하지만 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국 침례교회도 영국 침례교회와 미국 침례교회와 같이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침례교 신학은 역사적 자료와 신학적 유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국 침례교의 신학 전통은 펜윅 선교사의 신학사상에 기초한다. ‘구원’과 관련해서 펜윅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했다. 로마서 8장 29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과 같게 하게 위해서 미리 선택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펜윅의 예정론은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이라기보다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에 더 가깝다. 그는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보편속죄를 지지했다. 따라서 펜윅이 생각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되, 인간의 반응을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선택하고 예정하시는 분이다. 이런 펜윅의 중도적 입장은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이루는데 함께 협동한다는 이른바 ‘신인협력설’로 이어진다.

또한 초창기 한국 침례교가 미국 남침례교와 제휴하면서 알버트 게미지(한국명:지대명)가 침례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전통적인 남침례교의 신학 경향을 따랐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함께 가르치고 있다”며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기의 한국 침례교에서의 구원론은 전반적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에서 그 중도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여줬다. 게미지의 경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거부했지만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체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자유의지는 상호 긴장관계를 갖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의 중도를 지향한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게미지는 20세기 미국 남침례교의 정통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온건하고 중도적인 신학, 혹은 수정된 칼빈주의 신학을 거의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 침례교회에 소개했다. 한국 침례교의 신학자들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도를 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한국 침례교의 조직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자들은 칼빈주의나 알미나인주의처럼 하나의 폐쇄된 체계 속에서 신학하기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양 극의 조화를 추구하는 신학을 선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10. 침례교회 구원론

전반적으로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 및 특성, 신학적 흐름을 정리했다. 지금부터는 침례교의 ‘구원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침례교회는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성경이 어떻게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침례교회 구원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를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물론 구원은 신약에서 삼중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순간적인 구원, 점진적인 구원, 그리고 최후의 구원이다. 이 세 가지 의미들은 각각 중생, 성화, 영화에 해당된다. ‘순간적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행 2:21, 롬 10:10). 이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 곧 일어난다. 이것은 중생 혹은 거듭남이다. ‘신자의 보증’과 ‘성도들의 견인’이라는 용어들이 가리키는 바로 그 상태다. ‘점진적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과 그에 대한, 그를 위한 봉사에서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벧후 3:18, 빌 2:12). 이것은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엡 2:10). 구속은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그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헌신이다. ‘최후의 구원’은 구속과정의 최종 상태이거나 천국에서 누릴 모든 은혜들과 축복들이다(롬 13:11, 히 9:28). 이것은 천국에서의 최종의 영화이다. 최후의 구원은 구속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나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그들의 일에 충실했는가에 따라 있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천국에서 누릴 것이다(고전 2:7~9).
 
1) 선택과 소명

하나님의 선택이란 구원의 하등의 조건도 구비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시사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다. 우리는 선택에 의해 구원으로 들어오게 방향을 취하게 됐다(롬 8:29, 30).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실제로 회개와 믿음으로 향해 부르신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종들과 섭리적인 다루심을 통해 사람들을 부르신다. 선택과 소명은 구원의 최초행위다(마 11:28, 요 12:32, 롬 10:16;17, 롬 2:4).
 
2) 회심

성경은 사람을 향해 스스로 돌이켜 오라고 호소한다(잠 1:23, 히 6:1). 회심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이는 내적 변화의 외적 증거와 관계가 있다. 영적 의미에서 회심은 회개를 내포한 마음 또는 태도의 내적 변화에 의한 외적 증거이고 직접적인 결과다. 내적 경험이란 회개와 믿음을 말한다. 외적 증거는 하나님께 반항하여 불복종했던 옛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마 3:8, 7:16, 행 9:1~~22). 회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참된 회심의 경험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죄에서 돌아서는 것,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의 직접적인 행위가 심령에 임하는 것 등이 필수적이다.
 
3) 믿음

그리스도인 경험에서 믿음의 중요성은 믿음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492번이나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업의 사실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즉 의지의 행동을 포함한다. 믿음에 대한 동사의 원형은 ‘믿는다’, ‘위탁한다’, ‘신뢰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해 쓰여진 것을 믿는 것, 그리스도와 구원을 위한 그의 사역을 신뢰하는 것,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요 3:16, 행 16:31).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 서신(롬 4:3)과 야고보서(2:20~26) 사이에 서로 모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상호 충돌하지 않는다. 바울은 믿음을 원인으로 보는 반면, 야고보서는 믿음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행위를 떠나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4) 칭의와 중생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칭의로 인해 형벌이 제거되고(롬 5:12~14, 6:23),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며(갈 3:26), 의가 돌아온 것이다(고후 5:21). 칭의는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피와 믿음으로 된다. 한편,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하며(요 3:5), 새로운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벧후 1:4),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한다(고후 5:17). 즉, 중생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으로 된 것으로써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다. 신자는 중생의 결과로서 자녀의 특권과 후사의 특권을 가지며 시험을 이기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마 7:11, 롬 8:16, 요일 3:9, 5:1)
 
5) 견인

견인이라는 개념은 ‘신자의 안전’, 또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로 불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를 나타내는 성경구절들은 많다(요 10:28~29, 롬 5:9~10, 8:30, 9:11:16 등). 물론 견인이란은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면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신자이면 모두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요일 2:19). 이는 또한 진실한 신앙인이면 결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죄가 그들의 삶의 습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요일 1:6~10). ‘은혜에서 떨어지다’(갈 5:4, 히 12:15)는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은혜의 영역을 떠나 율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에 의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은혜에 의한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5) 성화

성화는 인간사상의 표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표준에 근거한다(롬 6:9, 수 24:19, 시 22:3, 99:3, 마 6:9, 시 111:9, 출 22:31, 히 12:14, 벧전 1:15, 살전 4:3, 3:13, 레 19:2, 고후 7:1). 데살로니가 전서 4장 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와 같은 성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에 근거한다. 성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께 헌신 또는 봉헌을 위하여 성별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관적으로는 의롭게 되고, 순수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어(롬 6:22)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되어지는 것(롬 8:29)이다. 하나님께 성별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도덕적 악에서부터의 성결이다.
 
11.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칼빈의 예정론

침례교회의 구원론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구원론이다. 이와 비슷한 신학이 바로 칼빈의 예정론이다. 사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 그의 예정론에 전반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에 따라 미리 영원 전에 정하신 작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원은 생명으로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선택을 통해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인아 유기의 작정은 사람들의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의 선행(자유의지에 따른)이나 현재와 미래에 달성하게 될 가치나 공로, 혹은 조건들에 따라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속하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변경도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칼빈은 이와 같은 자신의 예정론을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된 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그의 모든 예정론은 구원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칼빈의 예정론에 있어서 선택교리는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은총이다. 타락한 인간들은 부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게 됐으며,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 어떤 조건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이 나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와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도다”(롬 5:6)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결국 우리의 선한 행실로 우리에게 미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교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죄인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비와 인내를 발견하려면 우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 구원과 생명과 천국과 영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곳은 없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국의 상속자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의 은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칼빈의 예정론에서의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인간이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이들 자체로서 선택의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안이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됐다(엡 1:4)는 것이 핵심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예정론에 나타난 선택의 개념은 인간의 공로주의를 반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단단히 결속시킨다. 물론 선택과 관련된 유기라는 개념 또한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선택과 유기는 궁극적으로 동등한 것이기 때문에 선택과 유기가 독립된 교리가 아니라 한 면의 두 모습을 가진 하나의 교리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무엇보다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이라는 교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숭고한 지혜, 그 자체를 탐구하려데 목적이 있지 않고, 구원의 경륜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행동을 관찰하고 정리하는 것이다. 예정의 교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자신 안에 펼쳐진 구원을 깊이 묵상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신앙의 깊이다. 예정의 교리는 그리스도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다.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 뜻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창세 전에 자신이 하나님의 예정된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12. 칼빈주의 5대 강령

이와 같은 칼빈의 구원론(예정론을 포함한)은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5대강령’, 곧 튤립(TULIP)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5개 강령의 영어 알파벳의 첫 글자를 따서 지칭하는 말이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 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니 자력으로는 회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인간은 타락 이래 모든 선에 대하여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경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세상이 생기기 이전에 어떤 개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온전히 그 분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었다. 죄인들에 대한 특별한 그 분의 선택은 예를 들면 믿음, 회개 등의 인간들 편에서의 응답이나 복종을 미리 보신 것에 그 기초를 두지 않는다. 그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을 결과요,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사람가운데에서 미리 보신 행위나 어떠한 도덕적인 특성에 달려 있거나 그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신 사람들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죄인의 선택이 아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뵈트너는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즉 어떤 차별이나 제외 없이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셨는가 아니면 피택자만을 위해 자신을 바치셨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 교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택함 받은 백성 외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으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한 사람도 없느니라”고 말한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ble Grace)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이렇게 나온다.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는 하나님이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사 저희의 본질상 속해 있는 죄와 죽음에서부터 나오게 하시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또한 저희의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의 도를 깨달아 저희의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유순한 마음을 얻게 하시며 저희의 뜻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저희를 세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에게 유효하게 나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 안에 예지된 어떠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으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 새롭게 된 후에라야 이 부르심에 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주시마라고 하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하여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 자들은 전적으로나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될 수 없다. 오히려 최후까지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뵈트너는 “일단 참 그리스도인이 되면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여 멸망하는 일은 없고, 비록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 들어가는 일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반드시 구원 얻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칼빈주의 구원론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한량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강조된다.
 
13.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구원론 비교

지금까지 구원론적 관점에서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해 정리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나타난 구원론은 침례교의 구원론과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됐다. 하지만 침례교의 구원론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적 색채를 동시에 갖고 있다. 따라서 칼빈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구원론은 어떤 주장에 더 가까운지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의 5대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VS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타락
 
① 알미니안주의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 구성돼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② 칼빈주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에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 살게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 것이다.
 
2) 조건적 선택 VS 무조건적 선택
 
① 알미니안주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해 믿음을 가질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인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② 칼빈주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 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 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3)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VS 특별 구속 혹은 제한 속죄
 
① 알미니안주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② 칼빈주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시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4) 성령의 거부 VS 거부할 수 없는 은총
 
① 알미니안주의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은 죄인들이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한 만큼 성공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지 않는 한 중생시킬 수 없다.

즉, 믿음(인간이 공헌하는 부분)이 선행해야만 중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해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② 칼빈주의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외적 부르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을 향해 반드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외적 소명(모든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하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적 소명(오직 택한 자만을 부르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5) 은혜로부터의 타락 VS 성도의 견인
 
① 알미니안주의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 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② 칼빈주의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원론적 관점에서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을 기술했다.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노력이 결함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가니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적으로 칼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은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선택과 구속, 중생 등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14. 택자구원론의 성경적 타당성

지금까지 칼빈의 5대 강령(교리)과 알미니안주의의 5대 강령(교리)에 대해 기술했다. 침례교의 구원론은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침례교 구원론은 알미니안주의보다 칼빈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침례교의 구원론은 ‘택자구원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중 어떤 신학체계가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만약 알미니안주의가 성경의 확실한 지지와 증거를 가질 경우에는 침례교인들은 반드시 알미니안주의를 따라야 할 것이다. 반대로 칼빈주의가 성경의 확실한 지지와 증거를 가질 경우에는 칼빈주의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신학 내지 개혁주의 구원론이 제시하고 있는 칼빈의 5대 강령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침례교의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 주요한 성경구절을 정리하면서 ‘택자구원론’의 타당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침례교는 오직 성경을 신학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1) 죄인된 인간의 타락(전적 타락)

① 아담이 범죄한 결과 인간은 죄 가운데 출생하게 되었고, 자연히 영적으로 죽게 됐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이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② 타락의 결과 인간은 영적 진리에 관해 눈이 어두워졌고, 귀가 멀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고, 그들의 마음은 부패했고 악하게 됐다.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에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 5:8).
 
③ 죄인이 성령의 중생하시는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새롭게 나아가기 전까지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고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의 종이다.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가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조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④ 죄의 통치는 보편적이다. 즉,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결국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역대하 6:36).
○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⑤ 죽도로 내버려진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거나 복음을 믿거나 혹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리까 하나도 없나이다”(욥기 14:4).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2) 하나님의 구원계획(무조건적 선택)

①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셨음을 보여 준다.
 
○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안이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 17:14).
 
②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로 선택하셨다. 그의 선택은 택함을 받을 자들의 응답이나 행동을 미리 아신 것이 기초해서 하신 것이 아니다 믿음과 선행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이 여기신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③ 선택은 바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가는 첫 발걸음을 의미한다. 구원을 받도록 선택된 사람도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전까지는 아직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
 
○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7).
○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딤후 2:10).
 
④ 선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특별한 자비하심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 자비를 얻도록 결정되고 안되고의 여부는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15).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 9:10~24).
 
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대단히 광범위한 성경적 교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작은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결과임을 아울러 가르쳐 준다. 주 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고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도 그의 영원하신 목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1~2).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 135:6).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 46:9~11).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제한된 속죄)

①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전한 구원(실제적 화해, 칭의, 성화)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의되고 성취됨을 보여준다.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3~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 3:5~6).
○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과 맺으신 은혜로운 계약 혹은 조건들을 성취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시고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5~40).
○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24~30).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12).

 

③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또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럼도 불구하고 몇몇 성경구절들은 그의 죽으심이 그 계획상 한정된 것이며 특별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안이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상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2:16, 3:1).
○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4) 성령의 특별한 은혜(불가항력적 은혜)

① 성경은 구원이 성령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사역임을 보여준다.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0~14).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② 중생 혹은 새로운 탄생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영적인 생명이 주어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경은 이 과정을 영적인 부활, 창조, 새로운 마음을 주심 등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결과이지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결코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7~18).
○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③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개인적인 계시를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다.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7~18).
 
④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을 통해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다.
 
○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⑤ 복음의 초청은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이고 외적인 부르심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외적인 부르심에 더하여 오직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 특별한 내적 부르심을 주신다. 복음의 보편적인 부르심은 종종 거절당할 수 있지만 성령의 특별한 부르심은 절대로 거절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특별한 부르심이 적용될 때 사람들은 항상 회개에 이르게 된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5~16).
○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라 되라”(벧전 1:15).
○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⑥ 구원의 적용은 전부가 은혜이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성취된다.
 
○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5) 하나님의 보호하심(성도의 견인)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는 순간에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받으며, 따라서 어느 것도 그들의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며 마침내 영원한 기업을 받게 된다.
 
○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 “아들을 맏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5~40).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5, 13~14).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신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15. 결론

지금까지 침례교의 기원과 신학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침례교 구원론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히 신학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고 있는 침례교의 구원론이 칼빈주의 구원론, 즉, ‘택자구원론’에 보다 가깝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칼빈의 예정론과 5대 강령의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또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비교 분석하고,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다는 ‘택자구원론’이 얼마나 성경적 지지를 얻고 있는지 밝혔다.

성경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완전히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 예정론, 특히 구속사역에서의 전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해 얻어지는 것(알미니안주의)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구원론은 성경적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성경을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고 있는 침례교의 구원론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돼 있다.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거나 다른 사람인아 성인, 교회의 도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본 연구자는 침례교회가 칼빈주의 구원론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될 경우 과거 침례교의 역사에서 보듯이 복음전파의 사역을 소홀히 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중요성과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성도의 삶을 등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한 뜻까지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믿고 따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도구로서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경험 진술, 성경적인 사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을 통해 인간의 경험의 언어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구원이 내게 주어졌음을 감사해야 한다.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의 신앙까지도 지속적으로 견인하여 주실 것임을 믿되, 성화의 삶을 포기하기보다는 구원의 깊이를 묵상하면서 더 깊은 경건의 삶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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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긴, 「한국침례교회사」, 대전: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0.

* 기사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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