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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은 ‘안락사’를 반대해야 하는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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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부정’으로서의 안락사 / 박찬호 교수(백석대)

 

2014년 7월 23일 기사

 

생명연장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까지 박탈한 것일까?
안락사는 하나님이 예정한 죽음의 시간을 거부하는 행위일까?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안락사는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박찬호 교수(백석대)는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안락사를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이 땅에서의 삶 또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에 소위 말하는 자연사 내지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스캇 펙의 ‘영혼의 부정:혼돈에 빠진 안락사, 그 참된 의미에 대하여’라는 책을 중심으로 안락사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을 제시했다. 현재 이 책은 김영사에서 지난 2001년 번역 출간했지만 현재 절판이 된 상황이다.

 

 

우선 안락사는 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능등적 안락사의 경우 시행하는 주체에 따라 살인이나 자살에 해당한다. 수동적 안락사는 부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와 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로 나뉘어 지는데 부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도 능동적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살인이나 자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는 안락사가 아니라 존엄사 내지는 자연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관련 박 교수는 “이 입장이 타당하다고 보는 만큼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을 제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래는 박찬호 교수의 연구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 안락사의 분류

 
1. 안락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죽음이 아니다. 살인까지 연상시키는 오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안락사는 이제 유럽이나 미국에서 서서히 일반적인 죽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져 가고 있다. 최근 벨기에는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안락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수동적 안락사는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꽤 많다.
 
2. 안락사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논증 중의 하나는 환자의 고통이다. ‘능동적 안락사’는 독극물 등을 주사해 환자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즉, 능동적인 안락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어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능동적인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으며, 헌법상의 사생활권에는 존엄한 죽음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안락사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며, 고통을 겪는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3. 하지만 이런 능동적인 안락사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살인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헌법은 살인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자비로운 행동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 많은데 이런 고통을 중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4. 적극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빼앗는 능동적인 안락사는 한 마디로 살인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능동적 안락사와 달리 ‘수동적 안락사’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끊는 행위라기보다는 생명유지 수단을 제거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제거되는 생명유지 수단이 음식물과 같은 자연스러운 수단이냐 아니면 인공호흡기와 같은 부자연스러운 생명유지 수단이냐에 따라 부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와 자연스러운 수동적 안락사가 되는 것이다.
 
5. 전체적으로 수동적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론을 들어보면 안락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안락사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반하며 그런 의미에서 수동적 안락사도 자살 또는 살인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안락사를 더욱 강력하게 비난한다. 안락사는 인도주의적인 윤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안락사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경시한다. 안락사는 가족과 사회의 죄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부자연스러운 기계적 생명유지 수단을 철거하는 경우나 회복 불가능한 질병의 경우 밖에 없다고 말한다.
 
# 안락사, 연명치료, 죽음
 
6. 현대사회에서 안락사가 점차 받아들여지는 것은 근대 이후 형성되어 온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 근대의 중요한 가치로서 끊임없이 추구되어 온 개인의 해방, 그리고 근대 이래 모든 질병 치료에서 점차 관철되어 온 공학적 치료기술의 결과 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7. 근대 의료기술이 확립된 이래 인간의 수명은 점차 늘어났고, 이와 더불어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 왔다. 죽음은 점차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변화됐다. 죽음이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것, 극복과 금기의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죽음에 반응한다. 하나는 갖가지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해 죽을 시점을 가능한 한 멀리 밀어놓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죽음과 맞닥뜨려 그것을 수용하기를 회피해버리는 것이다. 안락사는 금기시된 죽음, 공포로 다가오는 죽음을 회피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8. 죽음의 순간에도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한 권리를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안락사. 하지만 안락사의 선택은 적극적인 권리행사를 통한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스스로 선택한 길에의 굴종’이라는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죽는 순간을 감당하지 못해 떠밀려서 이루어진 일종의 강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9. 안락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서 이루어진 강요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은 개인주의 문화가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죽음의 과정이 길면 길수록 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남은 삼과 죽음을 옆에서 돌봐줄 손길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그러나 가족관계마저도 개인주의에 의해 흐트러져 버린 서구에서 죽음이란 이제 주로 혼자서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10. 안락사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소극적 안락사도 자연사다. 그렇다면 기계를 떼어 냄으로 인해 죽은 것에 대해 안락사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기계에 의한 생명연장을 반대한다. 이에 대해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마 “국민 다수가 소극적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계의 사용을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자연사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이다.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까지 박탈하면서 강제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행위에 반대하는 것이다.

 

 

11. 안락사는 종종 편안하게 죽게 만듦으로써 죽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안락사도 죽음을 갑작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삶의 일부로서의 죽음을 빼앗아간다. 죽음을 전기충격이나 약물을 써서 불러오는 것은 남은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안락사당하는 사람은 결국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죽음에 수반되기 마련인 삶의 매듭의 마지막을 푸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12. 스캇 펙은 우리 문화의 장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장수 이데올로기는 안락사 논쟁이라는 복합방정식에서 인수분해되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다. 장수 숭배는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나이 80이 되기 전에 죽는 것은 자신들이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부도덕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 ‘영혼의 부정’으로서의 안락사
 
13. 스캇 펙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 가운데 하나인 극심한 고통은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줄 수 있는 의학적 약품창고가 있으며, 우리의 약품창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풍토가 개선되고 있고, 치명적 말기 질병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나와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이 세상 누구도 죽음에 따르는 지속적인 고통에 대한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14. 한 마디로 스캇 펙이 보기에 안락사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영혼의 부정, 다시 말해 하나님이 창조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예정한 죽음의 시간을 거부하는 행위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정반대도 사실이다. “자연사의 선택은 우리가 신과 공동 창조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15. 스캇 펙에 따르면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적절한 정의로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것이 많다. 사랑, 죽음, 기도, 의식 등등이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가장 크고 가장 정의내리기 어려우며, 가장 신비스러운 하나님에게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16. 안락사에 힘을 실어주고 광범위하게 영혼의 부정을 확산시키고 있는 세속주의에 대해 스캇 펙은 왜 이들 세속주의자들에 하나님을 수용하지 않는지 묻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17. 스캇 펙은 세속주의에 대한 우려보다는 자신의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신앙인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지적한다. “나는 안락사에 힘을 실어주고 광범위하게 영혼의 부정을 확산시키고 있는 세속주의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종교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은 다수의 종교인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18. 결론적으로 스캇 펙은 안락사는 하나님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그 배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안락사는 우리 자신을 속여서 하나님에게 거스름돈을 덜주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 안락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19.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안락사는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자연스러운 수동적인 안락사라 할 수 있는 자연사 내지는 존엄사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한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안락사를 인정하는 경우에 미치게 되는 많은 부작용을 우려해 우리는 특별히 여하한 형태의 생명의 질에 따른 안락사를 반대해야 할 것이다.
 
20. 현대 의술의 발달은 많은 경우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이전 세대들에 비해 오래도록 이 땅에서의 삶을 영위하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의술의 발전이 가져온 또 다른 이면은 소위 말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우리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죽음을 준비하며 죽을 수 있는 자연사에 대한 권리가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 일각에서 자신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되었을 경우에 그런 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유서를 작성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21. 고(故) 강여우 박사는 암치료 수술을 받으면 2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권고를 받았지만 그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사람의 죽는 모습은 그 사람의 진면목과 함께 그의 진가를 드러내준다.

 

* 위의 내용은 창조론오픈포럼이 지난 7월 12일(2014년) 서울교회에서 개최한 ‘제15회 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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