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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불교와 유교, "죽음과 영혼의 문제 해결 못한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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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불교와 유교는 죽음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될까? AI(인공지능)는 영혼을 소유할 수 있을까?  청주서문교회(담임:박명룡 목사)와 변증전도연구소(소장:안환균 목사)가 지난 11월 5일(토) 오전 10시 서문교회에서 <AI(인공지능)와 영혼 & 죽음 후의 삶>이라는 주제로 2022년 기독교변증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내놓았다. 이날 강사로 참여한 이승엽 박사(서강대 교수/융합의생명공학-기계공학), 길원평 박사(한동대 석좌교수/물리학), 박명룡 목사, 안환균 목사의 강의 내용을 일부 정리했다. <편집자 주>

 

 

 

불교와 유교, "영혼의 문제 해결 못한다"

안환균 목사

안환균 목사(그말씀교회)는 <불교, 유교, 기독교 세계관에서 본 영혼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불교의 붓다와 유교의 공자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온전한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안 목사는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볼 때, 붓다나 공자는 다 죽음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주지 못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겪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원인은 무지여서 그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며 "죽음은 죄의 삯이어서 반드시 속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수님만이 모든 사람 각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대속의 효력을 입증하기 위해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피력했다.

 

이어 "물론 불교나 유교를 진실하게 신봉하는 이들의 신앙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 또한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라며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본래의 창조질서 차원에서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절대 진리인가, 그러한 절대 진리 됨의 확고한 증거를 가진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본다고 할 때,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는 미흡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안 목사는 "붓다는 스스로 자신은 구도자일 뿐 구원자가 아니라고 말했고, 모든 사람 각자는 부처든 신이든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의지하라고 말했다. 마음을 중시한 붓다의 영혼관은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 자연주의 진화론의 논리와 별 다를 바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공자 역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런 실제적인 가르침도 남기지 않았다. 종교 본연의 임무가 신적 존재와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면, 붓다와 공자 모두 이 두 가지 문제에서 실체가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불교나 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의 영혼관보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의 본질과 기능을 이해하는 관점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궁극적인 구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누리는 데 훨씬 더 유용하다"라고 피력했다.

 

안 목사의 강의 내용 중 핵심을 정리했다.

 

 

붓다, 영혼이 없다고 가르쳤다

 

1.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 자신은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가 영혼을 부정한 논거는 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논거와 같았다. 사람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붓다는 영혼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익하다면서 영혼 신앙은 신 신앙과 마찬가지로 정견(正見)을 함양하는 데에 유해할 뿐만 아니라 신 신앙 이상으로 미신의 온상이라고 비판했다.

 

2. 붓다는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존재는 인정했다. 그에게 영혼과 마음은 어떤 차이를 갖는 것일까? 무신론자였던 그는 영혼이 신에게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되지 않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힌두교의 영혼관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이 없는데 어디서 영혼이 주어진단 말인가? 이러한 무신론적 사고는 붓다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대신 마음의 존재는 인정한 사상적 배경이 된다.

 

3. 붓다는 육체와 같이 마음 곧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진 의식도 흙과 물, 불, 공기의 결합체라고 보았다. 그는 물질적 요소들의 공존이나 집합체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그것에 수반하는 의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가르쳤다. 과학적으로 마치 전기장이 언제나 자기장을 동반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기장이 없으면 자기장도 없다. 따라서 육체가 죽고 나면 의식도 사라지고 없다.

 

4. 붓다는 마음 곧 의식이 인식적, 감정적, 의지적 기능을 두루 다 감당하기 때문에 영혼이 따로 수행할 기능이 없다고 보았다. 영혼에게 맡겨진 모든 기능을 의식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마음을 중시하게 된 근거다.

 

붓다, 영혼의 환생 믿지 않았다

 

5. 마음을 모든 불교 수련의 중심으로 본 붓다는 사람의 영혼이 죽고 나서 다른 육체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계속 존재한다는 환생론, 윤회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힌두교에서 신봉하던 전통적인 윤회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6. 영혼이 없다고 본 붓다는 윤회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환생은 있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기초한 원시불교에서는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윤회를 하는 주체로서의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 역시 없다고 본다. 육체와 같이 마음 또한 흙과 물, 불, 공기의 결합체라고 본 붓다는 이러한 결합을 통해 육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수반된다고 보았다.

 

7. 붓다에게 의식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결합체를 통해 생겨나는 일시적 현상이었다. 자아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있을 때만 존재할 뿐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 ‘나’는 없다고 보았고, 윤회가 이루어지는 현상 역시 인과관계에 따른 연기설(緣起說)로 설명했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을 뜻하는 말로 그러한 관계에서 생겨난 현상계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의미한다.

 

8. 붓다는 모든 법이 인연으로 생겨나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집착해서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체의 법이 무아’(諸法無我)라고 가르쳤다. 아울러 모든 번뇌는 고(苦)에서 비롯되고 이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들이 ‘나’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제법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四法印)을 전했고, 불교에서는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해 사법인(四法印)을 말하기도 한다.

 

9. 불교의 열반은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윤회 전생을 하지 않는 세계, 즉 부처가 되어서 윤회 전생과 인연 세계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는 연기 사상을 통해서 인간의 현실관을 설명한다. 연기설은 모든 존재의 본질과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불교의 주된 교리다. 불교는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견고한 것도 없으며 결국 모두 흩어지고 만다. 다시 말하면 변한다는 것이다.

 

10. 불교에서는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보았는데, 이 중 몸은 물질로 구성된 것이고 그 물질은 인간 외의 자연의 존재들이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과 자연의 존재들이 구성하는 물질은 동일하다. 일체의 세계는 십이처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십이처는 크게 두 가지로 변화한다. 하나는 형태적 변화요 다른 하나는 질적인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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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영혼의 윤회 인정

 

11. 붓다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대승불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물론 대승불교도 영혼보다 마음을 중시한 붓다의 주장과 같이 마음을 더 중시하는 영혼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스님들이 대중적인 법회에서 전하는 설법을 들어보면, 붓다가 의식 또는 마음이라고 지칭한 것을 영혼이라고 지칭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불교의 영혼관의 성경적 비판

 

12. 대승불교가 영혼이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나, 기독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여기는 지성, 감정, 의지의 기능을 영혼이 감당한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물질계에 속한 몸과 비물질계에 속한 영혼으로 분류하는 기독교의 영혼관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13. 이러한 유사성은 기독교가 여느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 그 자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어느 종교라도 일반은총 차원에서 자연세계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경우 영혼의 특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들을 발견하고 정리할 수 있다. 창조질서인 기독교와 전혀 다른 비진리만으로 이뤄진 종교나 사상이야말로 오히려 존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14. 영혼관과 관련해서 기독교와 불교가 가장 극명하게 충돌하는 부분은 역시 환생과 윤회론에 관련된 것이다. 불교의 영혼관은 기본적으로 환생 윤회설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달타, 곧 샤키아(석가) 족의 성자(모니)라 해서 석가모니라 불렸던 고타마 붓다 자신은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요소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해탈하지 못하면 죽고 나서 육체와 마음이 모두 자연세계로 돌아간 후 다시 연기법에 의해 윤회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환생을 반복한다고 가르쳤다.

 

15. 윤회 사상은 주전 6세기부터 인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어 온 사상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윤회설은 죽음의 문제를 인간들에게 해결해 보이려고 고안된 사탄의 작품(선악과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영혼관의 핵심 뼈대가 되는 윤회설은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단 한 번의 생에서 단 한 번 뿐인 소중한 구원의 기회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결국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16. 윤회 사상은 인도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인간의 삶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주가 주기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처럼 인간도 탄생과 죽음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회 사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분의 일회적 창조 사역과 심판 사역을 은폐하게 만든다. 윤회 사상은 인간 사후의 심판의 즉각성을(히 9:27) 은폐할 뿐 아니라 사후에도 인간과 혼령이 어떤 교통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접신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접신술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것이다(신 18:11).

 

17. 윤회설은 실제 세계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첫째, 윤회설은 우주의 시작과 인생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은 현재의 우주를 관찰해보면 모든 면에서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윤회설은 이 세계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이어지고, 사람도 윤회를 거듭하며 죽지 않고 계속 한없이 이 땅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따라서 윤회설은 적어도 현대의 과학이 뒷받침하지 않는 이론이다. 또한 창조를 믿지 않는 윤회설은 우주뿐만 아니라 인생의 시작에 대해서도 실제 세계의 이치에 맞는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해줄 수 없다.

 

18. 둘째, 윤회와 환생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윤회설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동물이나 벌레로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취하는 몸의 형태는 바뀌지만 그 속에 있는 영혼은 동일하다고 한다.이런 주장은 인간의 정체성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19. 셋째, 윤회설에서는 누가 각 사람의 업보에 따라 윤회를 결정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가 없다. 사람이 이전에 지은 악업에 따라 죽어서 짐승이 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 그러한 판결을 누가 감당하느냐 하는 주체를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정확히 규정짓기가 불가능하다. 판단이나 판결은 지성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성적인 어떤 인격체가 수행해야 한다. 그저 우연에 의해서나 기계적인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서만 이런 거대한 윤회의 시스템이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게 된 대승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염
라대왕이 그의 전생의 업보에 대해 심판을 시행한다고 가르친다.

 

20. 넷째, 윤회설은 실제적인 인구 통계나 악인의 수를 볼 때도 전혀 개연성이 없다. 악인들은 동물로 환생한다는 윤회설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악인은 점점 줄어들어야 한다. 또 그들이 쥐나 소로 새나가면 인구 역시 감소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악은 더욱 커지고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21. 다섯째, 전생 체험을 통해 윤회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지만 주관적인 체험만 갖고 윤회설이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단 과학적으로만 본다 해도 전생 체험은 최면 상태에서 이뤄지는 사람의 암시에 의한 상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최면 상태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활동과 함께 자기 암시에 따른 심리적인 상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확률이 높다. 

 

 

유교, 내세적 구원관이 없다

 

22. 유교는 동양의 전통적 종교로서 조상 숭배에 기초한 내세관을 전개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은 이러한 조상 숭배를 고도로 정련시킨 내세관을 보여준다. 성리학에서 사물의 다양성을 결정하는 것은 기(氣)다. 즉 사물이 형성될 때 기가 올바르게 형성되느냐, 편중되게 형성되느냐에 따라서 인간, 동물, 식물이 나누어지고, 또 기가 맑으냐 탁하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질의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23. 인간은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적 측면이고, 기는 혼(魂)과 백(魄)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이(理)는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적 측면인 백은 땅으로 가며, 정신적 측면인 혼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물다 사라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분리되어 백은 신체와 함께 분묘에 남고 혼은 사당에 모셔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24. 사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유교의 고유한 전통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고대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유교는 특별히 예(禮)를 전문적으로 다루어왔고, 거기에 제사에 대한 예(禮)도 포함시켰다. 그래서 제사가 유교의 산물인 것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유교가 한 역할은 제사의 예법을 확립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25.  제사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조상 숭배에 대한 의례 행위다. 천지만물이 음양, 오행, 기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또한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진다고 본 유교에서 죽음은 기가 흩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죽음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혼백(魂魄) 역시 음양의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마침내 흩어진다. 자연으로 돌아간 기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어 유교에서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26. 따라서 한 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대를 이어감으로써 그 허무함을 달래고 영생의 욕구를 대신하려 했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영생이 단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는 조상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잊혀지고, 산 사람과는 단절되는 문화가 아니다. 조상들은 죽었지만 자손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죽은 조상들이 제사 때마다 찾아온다는 미신적이고도 종교적인 요소가 제사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7. 따라서 유교에서 영혼의 활동 무대는 ‘저 세상’이 아니라 조상의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중국 귀신 신앙의 전통에 따라, 조상의 영혼이 제사를 통해 자손들과 만남으로써 생명이 연속된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 

 

28. 조상 숭배 즉 제사를 강조한 것으로 유교를 일종의 종교로 여기지만, 유교는 다분히 도덕철학의 특성을 띠는 가르침이다. 공자는 하늘(天)을 믿었으나 일반계시에 의해 알았을 뿐이므로 그 개념은 불분명하고 내세관 또한 희미하다. 유교가 강조하는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덕을 닦아 군자가 되고, 오륜(五倫)을 잘 알고 실행하여 현세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는 신관이 빈약하고 내세적 구원관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영혼관에 대한 성경적 비판

 

29. 불교와는 달리 유교는 사람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육체의 생명, 곧 기가 다해 죽고 나면 흩어져 없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라고 가르친다(시편 22:26, 23:6, 49:7~9, 다니엘 12:2~3, 요한복음 11:26). 모든 사람 각자는 죽고 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거치고 나면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거나 영벌을 당해야 한다(마태복음 25:46, 유다서 1:13). 기독교 세계관에서 볼 때 유교의 영혼관에서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상 제사를 통해 조상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조장된다는 것이다. 

 

30. 한국인의 조상 제사는 조상을 살아 있는 혼백으로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종교적이다.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에 따르면, 후손들은 제사를 통해 조상들을 살아 있는 존재로서 기린다. 후손들은 조상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거나 해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상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공경심을 표함으로써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복을 주고 보호해 줄 것을 청한다. 따라서 조상 제사의 종교적 주제는 살아 있는 영으로서의 조상에 대한 믿음, 조상들에 대한 경배, 후손들을 위한 축복의 기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31. 제사드리는 문제와 관련해서 제사할 때 ‘신위’라는 이름을 붙인 위패를 세워놓고 제사 음식을 차려 바치며, 거기에다 절까지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명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은 이 죄의 심각성을 모른 채 매번 제사를 드리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으로 면제되지는 않는다.

 

32. 조상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유교라는 종교의 형식 가운데 사람들이 만든 제사로 하나님이 아닌 조상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데서 떠나 하나님께만 진정으로 예배하는 참된 진리의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때다. 그래서 명절마다 우상숭배의 향을 피우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으로 귀신과 하나 되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일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영혼관
"몸과 영혼인가? 몸과 혼과 영인가?"

 

33. 성경은 사람의 몸이 흙으로 지어진 건 사실이지만, 유일하게도 하나님의 생기가 그 코에 불어넣어 졌다고 말한다. 사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사람의 영혼에는 육체와 연결된 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기독교의 영혼관의 핵심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34.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프쉬케’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면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린도전서 15:45)라고 말했다. 바울은 이 구절에 있는 ‘생령’을 ‘혼(프쉬케)’으로, 마지막 아담 예수님을 가리키는 ‘살려주는 영’은 ‘영(프뉴마)’으로 기록했다. 이 대목에서도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살아 있는 혼’을 의미하는 말로 확인된다. 이렇게 보면 이 한 구절에 인간은 몸(흙)과 영(생기)과 혼(생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진리가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35. 사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이분설과 삼분설의 논쟁과도 맞물려 있다. 삼분설은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의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 오리겐,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견지했고, 보수적인 개신교 안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있다. 이와 달리 기독교 사상사 전반에 걸쳐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이분설은 인간은 몸과 영혼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성경에서도 영과 혼은 별개가 아니라 한 존재에 대해 두 명칭으로 언급되는 것이라고 본다.

 

36. 실제로 성경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몸과 혼이라거나(마태복음 6:25,10:28), 몸과 영이라고 언급한다(전도서 12:7, 고린도전서 5:3,5). 죽음은 혼을 포기하는 것으로나(창세기 35:18, 열왕기상 17:21, 사도행전 15:26), 영을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시편 31:5, 누가복음 23:46). 영이 번민한다고도 말하고(창세기 41:8, 요한복음 13:21), 혼이 번민한다고도 말한다(시편 42:6, 요한복음 12:27). 때때로 혼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자아 또는 생명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태복음 16:26).

 

37. 동물에게도 사람의 혼과 비슷한 혼이 있지만 영은 없다. 그렇다면 영과 혼은 구분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과 혼이 어떻게 구분되고, 영과 혼과 몸이 어떻게 전인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는지에 대한 정확한 분별의 문제는 오래 묵은 신학적 난제다. 어쩌면 사람이 다 헤아리지 못할 신비에 속한 영역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도 정황에 따라 영과 혼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38. 다만 한 성경 구절 안에서 영과 혼을 동시에 뚜렷하게 구분해서 언급한 경우들로 볼 때 삼분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영과 혼이 구분 없이 같다고 여길 경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말씀이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는 말씀을 신자의 성화 과정에 제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

 

39. 만일 영과 혼이 같다면 신자는 무엇으로 자아, 곧 혼을 부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성령에 의지해 거듭난 영으로 혼을 부인하고 잃어버리고자 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할 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영적으로 꾸준히 성숙해갈 수 있다. 

 

40.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적으로 죽은 죄인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고 그의 죽으심 안에 연합됨으로써 거듭난다. 더 이상 아담처럼 피조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요한복음 1:13)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이 새 생명이 자라가려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로마서 6:5)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에도 동참하여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

 

41. 그때 비로소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로마서 6:11) 영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르는 삶이며,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을 버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는 말씀에 따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로마서 8:4) 순종의 헌신을 통해 성도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는 영광스럽고도 복된 삶이다.

 

 

오직 기독교가 정답이다

 

42.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붓다나 유교의 공자는 다 죽음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주지 못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겪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원인은 무지여서 그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죄의 삯이어서 반드시 속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수님만이 모든 사람 각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대속의 효력을 입증하기 위해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43. 붓다는 스스로 자신은 구도자일 뿐 구원자가 아니라고 말했고, 모든 사람 각자는 부처든 신이든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의지하라고 말했다. 마음을 중시한 붓다의 영혼관은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 자연주의 진화론의 논리와 별 다를 바 없다. 비인격적인 우주를 토대로 할 때 사람은 원자들이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했다가 분리되는 진화 과정의 물리적 산물일 뿐이다. 진화론자들이 이를 조종하는 배후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처럼 붓다 역시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운행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44. 공자 역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런 실제적인 가르침도 남기지 않았다. 종교 본연의 임무가 신적 존재와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면, 붓다와 공자 모두 이 두 가지 문제에서 실체가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45.  불교나 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의 영혼관보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의 본질과 기능을 이해하는 관점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궁극적인 구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누리는 데 훨씬 더 유용하다. 이 기독교 진리를 통해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크나큰 특권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AI(인공지능)는 영혼이 없다

이승엽 박사

이승엽 박사는 <AI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AI는 절대로 인간과 같은 영혼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인공지능 관련 미래학자와 과학자가 인간과 같은 자의식을 갖는 인공지능의 출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추론일 뿐이며 전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며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과 같은 영혼을 가진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라고 피력했다.

 

또한 "생물학이든 인공지능이든 물질과 에너지만이 존재한다는 자연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잘못한 과학 패러다임은 잘못된 것이며 과학은 철학적 기반과 상관없이 증거가 제시하는 것으로만 설명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이 박사의 강의 내용 중 핵심을 정리했다.

 

AI, 두려움의 대상인가?

 

1.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딥 러닝 기술(인간의 뉴런과 비슷한 인공신경망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것)의 발전이 더 크게 발전한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과 유사하게 발전하여, 결국 인간과 같은 자아를 갖는 존재가 되거나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SF 영화의 한 장면을 우려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딥러닝과 컴퓨터 기술로 인해서 급격한 발전을 해오는 인공지능은 향후에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정보처리 능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컴퓨터는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고 있으나 현재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인공지능’에는 단순히 정보처리 능력에서부터 인간과 같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의사결정 능력을 가지고 되고, 언젠가는 인간을 넘어서고 인간을 지배하는 ‘초지능’의 개념 등으로 매우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AI, 자의식 있을까?

 

3. 로봇 개발자들은 감정이나 정서의 영역까지 로봇의 기능을 확대해 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로봇이 즉 인공지능이 감정이나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슬픔, 기쁨, 삶의 애환, 동정심, 정의감 등등.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다양한 정서가 뇌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이나 정서의 아주 기초적인 기제인 쾌와 고통은 생물체, 그것도 중앙신경체계를 지닌 일부 유기체에서 발생함을 알고 있다.

 

4. 기계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할 뿐, 기계 그 자체가 외부자극으로부터 쾌나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수준에 도달한 지능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자의식을 획득해야 한다. 자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자신이 수행하는 활동을 자신이 스스로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인간이 진화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축적해 온, 문화, 도덕, 교육 등은 바로 이러한 자의식의 산물이다. 이 모든 산물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즉 삶의 시작이 있고 죽음이란 삶의 끝이 있고,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6.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인공지능은 조건이나 환경에 반응한 것이지, 그 형태가 자의식으로 작동한다고 보기 어렵다. 딥러닝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향후 인공지능 시스템이 정보를 고도로 판단하고 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인간의 뇌에 유사하게 발전되는 것은 가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학습하고 발전하면서 인간과 같은 감정과 자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은 곧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창의성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AI 자의식, 가능한가?

 

7. 스탠리 큐브릭이 2001년 만든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는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9000)과 인간 승무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기치 않는 긴장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는 할의 답변에서 보듯이, 이 영화에서는 할은 처음부터 자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와 판단을 통해 서서히 자의식을 획득해 가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8. 구글의 인공지능 람다의 논쟁도 이와 유사한데 인공지능 람다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가지고 학습하였기 때문에 람다는 작동 중지는 죽음과 같은 것이라는 학습 내용을 말한 것이지 자의식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9.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이든 구글의 인공지능 챗봇 람다이든 인간과 같은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이 개발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학습을 통한 발전을 거듭하여 인간 존재와 같은 의식이 자연적으로 출현하는 메커니즘이 구명되어야 하는데 현재로는 ‘창발’적 도약만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추론이다.

 

10. 창발(Emergence)은 하위 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말하며 자기조직화 현상이나 복잡계 시스템과 관련된다. 케스트(John. L. Casti)는 “개개의 구성원이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들이 상호 작용했을 때에 나타날 것으로 결코 예상하지도 못한 행위가 창조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11. 인공지능에서 의식의 창발은 우리의 이해나 통제 밖에 있으므로, 마음이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마음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마음이 어떠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견할 수 없다. 창발로 생겨난 마음이나 자의식을 가진 AI를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당연히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12. 하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연산 프로세서에 자기 학습이 가능한 딥러닝 인공신경망에서 프로그래머의 의도와 상관없이 복잡계 특성으로 인해서 인공지능에 자의식이 창발한다는 주장은 진화론에서 최초 생명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설명되는 방식과 동일하다. 

 

13. 결국 자연선택의 진화론으로 모든 생명체의 출현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든,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영혼을 갖는다는 주장이든 모두 동일한 철학적 근원에서 출발하는데, 곧 이 우주에는 물질과 에너지만이 존재한다는 자연주의가 그것이다.

 

영혼 있는 AI 출현, 불가능하다

 

14. 인공지능이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란 질문을 탐구하면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감정과 자의식이 자연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메커니즘은 ‘창발’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추론이며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복제가 가능한 최초의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추론에 어떠한 과학적 증거가 없는 것과 동일하다.

 

15. 정상과학이 되어버린 자연주의 진화론이 그동안 엄청난 연구들을 통해서도 최초 생명체의 자연적인 출현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것은 인공지능의 자연적인 자의식 출현이 불가능함을 뒷받침한다.

 

16. 많은 인공지능 관련 미래학자와 과학자가 인간과 같은 자의식을 갖는 인공지능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추론일 뿐이며 전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과 같은 영혼을 가진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 생물학이든 인공지능이든 물질과 에너지만이 존재한다는 자연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잘못한 과학 패러다임은 잘못된 것이며 과학은 철학적 기반과 상관없이 증거가 제시하는 것으로만 설명해야 한다.

 

 

영혼은 존재한다

길원평 박사

길원평 박사는 <물리학자가 본 물질과 영혼의 문제> 제목의 강의에서 우리 자신은 몸과 영혼의 연합체로써 영혼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길 박사는 "우리 인간은 영혼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죽으면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지옥 또는 천국에 가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분명한 진리이다. 영혼이 몸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혼은 몸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피력했다.

 

특히 "두뇌 손상이 정신적 장애를 초래한다는 사실이, 영적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두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비유로 말하면, 하늘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강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설명했다.

 

길 박사는 "두뇌주의는 영적 경험이 없는 자들의 무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며,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떠한 증거도 없고,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라며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을 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실력을 쌓아서 하루빨리 영혼이 없다는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길 박사의 강의 내용 중 핵심을 정리했다.

 

우리는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
"과학주의에 휩쓸리지 말라"

 

1. 영혼의 존재 여부는 과학의 영역에서 다룰 수 없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과학주의에 빠져서 영의 세계조차 과학적으로 판단하려고 하고 있다. 실제로 광적인 유물론자들이 언론과 문화 등을 통하여 열심히 유물론적인 인간관을 퍼트리고 있으며, 그러한 풍조에 많은 이들이 휩쓸리고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마태복음 10:28, 열왕기상 17:22, 누가복음 8:55, 고린도전서 2:11, 시편 51:10, 창세기 35:18, 베드로후서 1:14, 고린도후서 5:1 등). 또한 성경은 죽은 후에 영혼이 가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영혼을 지닌 영적 존재라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3. 성경은 영혼과 마음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표현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영혼이 마음에 깊이 관계하고 있다고 본다(시편 6:3; 25:1; 35:9; 42:1; 42:5; 61:10; 62:1; 84:2 등). 따라서 성경에 근거해 영혼은 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빠져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과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등과 관계하는 활동하는 영(acting spirit)이다.

 

4. 모든 과학적 사실들은 영혼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대에 오면서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체의 신비가 많이 밝혀졌으며, 최근 들어서 두뇌에 관한 연구가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과학적 사실, 특히 두뇌에 관하여 밝혀진 사실들은 영혼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는다.

 

5. 마음과 몸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속한다. 몸의 일부인 두뇌가 정신적 기능을 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과학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뇌를 포함한 몸과 마음과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속한다. 물론 두뇌의 손상이 정신적 장애를 유발함으로써 두뇌가 정신적 활동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6. 정신적 활동 중에서 기초적인 것에 속하는 기억조차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며, 여러 가설이 있지만 밝혀지지 않은 추측에 불과하다. 영혼의 실존을 알지 못하는 과학자들에 의하여 마음의 신비를 보이는 몸만으로 설명하려는 가설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지겠지만, 마음의 신비는 영혼의 존재를 무시하고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음은 자신의 영혼과 함께 다른 영적 존재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뇌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8. 두뇌주의는 마음은 두뇌로부터 생겨난다는 주장이며, 정신은 두뇌 세포로 이루어진 거대한 회로망에 의한 물리화학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정신은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 과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자연주의, 물리주의, 과학주의, 유물론, 환원주의의 결과이다. 그런데, 두뇌주의를 우리에게 교육, 문화(SF 영화 등)의 방법으로 세뇌하고 있다.

 

9. 즉, 두뇌주의는 ‘나’라는 체험을 뇌의 정보처리과정들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두뇌의 정보처리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가치관, 윤리, 철학, 종교 등은 두뇌가 확률과정(시행착오)으로 만들어낸 체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도 정보처리과정의 최상부에 의해 나중에 의식화된 현상이다. 즉, 두뇌가 처리한 결과를 ‘의지’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두뇌주의에 의하면 죽으면 몸과 함께 마음은 사라지고, 영혼 자체는 없게 된다.

 

10. 두뇌주의는 인간적 상호작용에 근거해 비물질인 영혼은 물질인 몸에 인과적 상화작용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공간적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영혼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기에, 물질세계에 인과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찰 가능한 연속성 관계 측면에서 영혼이 없는 동물도 인간과 비슷한 정신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영혼으로만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밖에 영혼을  마음의 두뇌 의존성과 관련해서 인간의 정신 능력이 두뇌의 상태에 의존적이라며 두뇌주의는 영혼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두뇌주의, 반론할 수 있다

 

11. 비물질인 영들이 실제로 물질계에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자연을 다스리고, 기적을 행하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즉, 두뇌에 영향을 미친다. 귀신도 몸을 주관하고, 마음에 생각을 넣을 수 있다. 즉, 두뇌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들이, 비물질인 영이 물질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잘 나타낸다.

 

12. 현대 과학의 틀 안에서도 비물질과 물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영혼이 두뇌의 특정 부분에 영향을 주어서 그 부분이 다른 부분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영혼이 두뇌의 여러 부분에 동시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유로 하면, 영혼이 두뇌에 있는 많은 키보드를 누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혼과 몸(두뇌) 사이의 상호작용은 신비에 속한다.

 

13.  동물의 정신 활동은 두뇌가 있고 학습이 가능하기에, 초보적인 정신 활동을 할 것으로 유추된다. 하지만, 동물의 정신 활동 즉, 기억, 언어능력 등은 인간과 엄청난 수준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의 마음은, 몸의 조작, 감정 등의 단순한 정신 활동과 함께, 예술, 연구 등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 찬양 등의 영적 활동을 할 수 있다. 동물은 아주 초보적인 정신 활동이 가능하지만, 창의성, 윤리성, 종교성 등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과 동물의 정신 활동이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는 주장은 두뇌주의에 근거한 편견이다.

 

14. 마음은 영혼과 몸(두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며, 영혼은 마음을 이루어지게 만든 근원적 실체 중 하나라고 본다. 비유로 하면, 몸은 컴퓨터이며, 영혼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며, 마음은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과 같은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마음이 두뇌 의존성을 가지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15. 두뇌주의는 영혼과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영혼이 없다고 오해한 것이다. 영혼은 보이지 않기에, 두뇌 영상을 보면 마치 두뇌 세포들이 영혼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뇌의 각 부분이 특정한 정신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부분이 영혼의 도움이 없이 정신 활동을 한다는 것은 두뇌주의에 의한 편견이다.

 

 

예수 부활, 영혼과 영생 증거한다

박명룡 목사

박명룡 목사는 <인간의 영혼, 죽음 후에도 삶이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성경은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는데, 그 영원한 삶의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라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을 본다"라고 피력했다.

 

특히 "사후세계가 없다고 주장했던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주장은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될 수 없으며, 오히려 현대 철학과 과학적 증거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지해 주고 있다"라고 역설했다.

 

박 목사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증가 바로 임사경험(Near-Death Experience)이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라며 "흥미로운 사실은 임사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동안 뭔가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임사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하지만 임사경험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죽은 상황에서 누가 자신을 구했고, 병원에 실려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 주변 상황들을 다 보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기억해서 그 사건들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하는 사례들이 많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도 영혼은 계속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해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이와 같은 임사경험은 육체와 분리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는 과학적 통계자료로써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뇌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또한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계속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다는 것.

 

박 목사는 "이러한 증거는 ‘모든 것이 물질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뇌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라며 "하지만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생의 삶을 알기 때문에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박 목사의 강의 내용 중 핵심을 정리했다.

 

죽음 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1. 인간의 영혼과 죽음 후의 삶에 대해 무신론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세계관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무신론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뇌의 기능에 불과하고 뇌가 죽으면 영혼도 사라지며,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의 영혼은 뇌의 기능이 아니고 정신적 속성과 육체적 속성은 일치하지 않으며, 육체가 죽어도 영혼
은 계속해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유신론자는 죽음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는다.

 

2.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소금물로 비유될 수 있다. 소금(영혼)이 물(육체)에 녹게 되면 소금물(인간)이 된다. 이 소금물을 가열하면 물은 증발하고 결국 소금(영혼)만 남는다. 소금이 소금물의 본질이듯이 인간의 영혼도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은 같은 것이 아니며 육체는 죽어서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계속해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영혼의 존재 부정하는 물리주의자

 

3.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다.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뇌는 영혼과 동일하며, 물질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이 같다고 생각한다.

 

4. 하지만 물질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은 다르다. 정신적 속성은 내적 성찰이 가능하지만, 물질적 속성은 내적 성찰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 속성은 감각을 가진다든지 생각하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특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은 다르다. 나의 눈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다. 나의 뇌와 나의 자아는 동일하지 않다.

 

5.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물질로 구성된 몸 때문만이 아니다.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정신(영혼) 때문에 인간이 인간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고유하게 소유하고 있는 정신(영혼)은 각각 다르며, 이 정신(영혼)이 인간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며, 인간도 물질로만 구성되어있다는 물질주의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영혼의 기원 설명하는 기독교

 

6. 지금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이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가정 아래 뇌와 정신의 관계성에 대해 연구를 해 왔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는 물질과 정신이 동일하다거나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것을 밝혀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영혼)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7. 결국 지난 수 십 년 동안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은 뇌와 영혼이 동일하다거나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물질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영혼, 이성, 생각, 마음, 수학적 진리, 도덕 등의 기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8.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은 정신과 다르며, 인간의 의식은 더 큰 의식인 인격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도 계속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9. 기독교 세계관은 생각과 감정, 믿음과 욕구, 선택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의식을 가진 분이다. 하나님께는 생각이 있고 믿음이 있고 욕구가 있고 인식이 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신다. 우리는 거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10.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뇌의 기능에 불과하며, 뇌가 죽으면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의 주장을 믿을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기독교 세계관이 훨씬 더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

 

11. 인간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임사경험(Near-Death Experience), 즉 심장마비 또는 뇌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의식이 돌아온 경험을 말한다. 의술이 발달되기 전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요즘은 심폐소생술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12. 30년 전, 미국의 한 갤럽이 조사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약 2천3백만 명의 사람들이 임사경험을 했다. 사람의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임사 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동안 뭔가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13. 물론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모두 증명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멈춰서 의학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일어난 주변 상황 들을 모두 다 보고 기억해서, 그 사건들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하는 사례들이 있다. 죽은 이후에 누가 자기를 구했고, 어떻게 병원에 실려 갔으며,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모두 다 말 했다는 것. 심장이 멈추었고 뇌파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그 모든 정황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4. 이러한 임사경험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도 영혼은 계속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 해준다. 육체와 분리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는 과학적 통계자료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뇌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계속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것이 물질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뇌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15. 인간은 육체 덩어리와 신경조직체로만 이루어진 물질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계속해서 살 수 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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