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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크리스천과 정치: 자본주의 계급화와 권력화 상쇄시키는 ‘사민주의’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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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정치:사민주의적 지향을 위하여 / 고세훈 교수(고려대)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사회의 전 영역에서 실천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고세훈 교수는 “좋은 정치는 좋은 제도를 낳고, 좋은 제도는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좀 더 선한 방향으로 이끌고, 경제적 분배 문제를 보다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그만큼 회복시킨다”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선한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민주주의는 분명 차선의 제도이지만 인간은 약하다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소수의 독단을 견제함으로 상대적으로 좋은 제도, 관행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했다.

 

 

 

 

 

 

 

# 발표내용 중에서

 

1. 우리는 ‘일상적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사회문제나 경제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낙태문제에서 핵문제, 그리고 입시제도와 실업률, 아파트 가격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2. 그런데 좌우 이데올로기 모두에서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정치란 자본의 경제적 지배, 계급적 불평등을 은혜, 호도하기 위한 거짓 장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반면, 보수적 이론가들은 시장의 극대화에 따라 정치의 극소화, 특히 정치는 부담스러운 소비의 주체이고, 시장의 교란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완벽한 것이 아니며, 정치 또한 맑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3. 정치는 그것이 만드는 법, 제도, 관행을 통해 개인의 윤리적 판단, 선택, 삶 일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나쁜 정치는 개인들의 도덕심과 윤리의식을 집단적으로 마비시킴으로 그들로 하여금 부도덕한 선택을 하게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나쁜 정치는 선악의 구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모르고 죄짓기’의 일상화를 가져온다. 반면, 선한 정치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을 위한 선한 구조를 제공하며, 특히 시장이 발생시킨 문제들(빈곤, 불평등 등)을 교정할 수 있는 제도를 제공한다.

 

4. (자본주의와 정치)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노동도 시장에서 팔려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노동력을 적절히 상품화시킬 수 없는 무수한 시장탈락자들(실업자, 저임금노동자, 노약자, 장애인, 임시직, 파견직, 비정규직 등)을 체계적이고 대량으로 발생시킨다. 이들이 방치되면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규모는 늘어나고 사회적 불안은 고조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시장에서 구조적으로 기인하는 본질적 갈등을 완화, 교정, 해소하는데 있다.

 

 

 

 

 

 

 

5. (민주주의-정치의 선용을 위한 장치)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이 고조되는 시대다. 하지만 정치는 선용되어야 한다. 빈곤과 양극화가 야기하는 갈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정치가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다. 첫째, 정치적 무관심과 혐오를 키우며 아예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는 정치를 더욱 타락시키고,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며, 정치적 무관심의 악순환을 조장한다. 둘째, 잘못된 정치를 감시하고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는 정치의 신뢰를 회복하고 제고하는 일에 닿아 있다. 민주주의란 정치의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여건 혹은 장치다.

 

6. 정치와 정치의 선용을 위한 장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의의 두 차원, 즉 응보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의 실천통로라는 뚜렷한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정의의 이러한 두 내용은 성서에 나타난 정의 혹은 하나님의 정의 개념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7. 좋은 정치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복음주의’의 당연한 연장이다. 좋은 정치는 선한 구조(제도, 법, 관행)의 창출, 그리하여 응보적, 배분적 정의의 실현에 기여한다. 정치는 악하거나 선한 구조를 통해 사람들을 범죄자로도 선한 행위자로도 만들기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비탄에 빠뜨리기도 하고,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고통을 동시에 덜어줄 수도 있다.

 

8. 민주주의는 정의의 실천, 곧 좋은 정치를 위한 필요조건을 구성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위 결과에 따라 보상과 처벌이 적절히 취해질 때 법적(응보적) 정의가 실천됐다고 말한다. 법이서야 나라가 선다는 상식적 제언이 성립되는 대목이다. 죄에 대해 단호한 하나님은 응보적, 법적 정의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간청했던 모세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던 하나님이고,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계율을 주셨던 하나님이며, 결국 대속자 예수를 통해 죄에 대한 진노와 처벌을 선언하셨던 분이다.

 

9. 우리는 한 사회가 지닌 경제적(물적) 자원의 혜택과 부담의 배분구조와 관련해 분배적 정의를 요구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엇보다 분배적 정의의 하나님이다. 희년의 원칙이나 선지자들의 유대민족을 향한 무수한 외침, 복음서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듯, 신구약 전체를 통해 너무 직접적으로 지시됐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분배적 정의와 관련해 민주주의는 돈의 지배를 수(數)의 지배로 바꿀 수 있는 절묘한 장치다.

 

10.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숫자(다수결)가 지배하는 것이 물질(소수의 지배자)가 지배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며, 너나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타인을 통해 견제되고 보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1.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국가라는 현상도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점차 믿지 못하여 ‘정치’가 좀 본격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발상한데서 비롯됐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배분적 정의를 위한 EH 하나의 필요조건이며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12. (어떤 민주주의인가-사민주의적 지향) 자본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시장권력의 불평등은 어치피 시장 외부, 곧 정치를 통해 견제하고 제약되어야 한다. 이때 정치적 방식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는 전자를 논외로 친다면 만주적 방식에는 다시 개별화된 시민에 의존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종교, 인종, 지역 등을 불러들이는 보수주의의 정체성 정치, 그리고 계급적 연대와 동원에 의존하는 사민주의가 있다.

 

13. 사민주의는 시장과 정치를 계급적, 권력적 영역으로 파악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상쇄력을 시장 안팎에서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는 체제로 정의해도 무방하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집단적,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조직된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14. 사민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에 대한 계급과 집단으로서 노동의 대항권력이 국가와 시장이라는 양 영역에서 항시적으로 제도화될 것을 제1의 원리로 요구한다. 원자화되고 취약한 개인을 집단, 조직, 연대, 계급의 이름으로 다시 묶어내는 일, 그것이 모든 진보진영의 핵심적 과제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계급권력적 속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야말로 사민주의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와 차별화하는 지점이다.

 

15. 사민주의는 기본권들의 실질적 향유를 위한 사회적 요건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해 국가와 시장에서 대항권력 혹은 계급의 상쇄력을 제도화하는 일에 일차적으로 관련이 있다. 당연하게도 절차민주주의의 핵심은 약자의 목소리를 수렴, 표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곧 계급 간 권력적 기항의 제도화를 마련하는데 있다.

 

 

 

 

 

 

 

16. 이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진영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힘겹다. 부자들은 지연, 학연으로 분열된 것처럼 보이다가도 계급 앞에서는 쉽게 연대하며, 약자들은 계급문제에서 결속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각종 인연과 단기적 이해관계로 인해 쉽게 분열한다. 더욱이 이 땅의 진보는 역사적 유산과 제도화의 부재 속에서 싸워야 한다. 반세기 가까운 권위주의 정치의 결과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의 권력자원은 극도로 핍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선거법, 정당체제, 법 앞에 평등, 언론관계법, 노조관련법, 기업법, 기업지배구조, 허다한 분야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절차는 여전히 불완전하며, 그 마저도 실제로 퇴보하거나 퇴보의 조짐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17.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하나의 상식과 문화로서 내재화되어 왔지만 그도 역시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더욱이 기독교적 사회윤리와 현대인이 물처럼 공기처럼 마시고 숨쉬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측면을 안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의 자본주의는 수많은 체제적 문제들을 노정시켜 왔다. 공동체의식의 상실, 노동의 소외, 부의 분배왜곡 등의 문제들을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로 산출시켰다.

 

18. 우리는 위험스런 극단적 복음주의, 그 요란한 정치/종교의 분리사상, 믿음/행위의 이원론 등 반 성경적 무지 가운데 안주할 여유가 없다. 정치는 개인적 차원의 연민이 아닌 냉정한 구조적 권력투쟁의 장이다.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킨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그리고 정치의 선용을 위한 장치로서의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문제는 대규모적, 체계적, 구조적이며 사람(평등)의 원리에 기반한 민주주의(정치)만이 돈(불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자본주의(시장)을 제어하거나 교정해 낼 수 있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19. 자본주의 하에서 정치의 주된 책무는 사회의 본질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교정하고 해소해 구성원들 간의 공동체적 의식 혹은 연대를 최대한 회복하는데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법적, 정치적으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사회적 유대는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파편화된 개인은 해방된 개인이 아니며, 자본의 권력 앞에 외롭고 취약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특히 도덕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개체일 뿐이다. 일대일, 개인 대 개인이 되면 자본주의의 중심 갈등인 노/자의 대등한 관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20.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의 계급주의적 성격, 민주주의의 권력적 성격에 관한 첨예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치와 시장 양 영역에서 계급 간 권력의 상쇄력을 제도화하는 일을 그 중심적 내용(과제)으로 설정한다. 민주주의는 사민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민주화되는 길이다.

 

* 위 내용은 복음적 사회선교를 위한 새벽이슬이 지난 2011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세미나실에서 ‘성경적 국가론’을 주제로 개최한 ‘제7회 개혁과부흥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내용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단체에 문의하면 된다.

 

고세훈, “크리스천과 정치:사민주의적 지향을 위하여”, 사회선교를 위한 새벽이슬-제7회 개혁과부흥 컨퍼런스, 2011년 8월 16~18일, 서울:기독연구원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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