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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죽음 이후의 삶이 과연 존재하고, 영혼은 영원할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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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무교회, 제4회 기독교변증 컨퍼런스 개최

 

2015년 10월 27일 기사

 

큰나무교회(담임:박명룡 목사)가 지난 10월 24일(토) '제4회 기독교 변증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컨퍼런스는 '영혼과 육체:죽음 후에도 삶이 있는가?'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큰나무교회 측에서 보도자료 및 이날 강의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그 내용을 옮겨 싣는다. <편집자 주>

 

죽음 이후의 삶을 신학·철학·과학적으로 설명하다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인간의 영혼이 영원하다는 믿음이 합리적이라고 확신한다”

 

 

10월 24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큰나무교회에서 열린 제4회 기독교 변증컨퍼런스는 죽음 이후의 삶을 신학적·철학적·과학적으로 종합 변증함으로써 기독교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영혼과 육체: 죽음 후에도 삶이 있는가?”를 주제로 한 이 컨퍼런스에서는 비교종교학자인 황윤관 목사(미국 LA 작은자교회 담임)가 <동양종교와 과학이 보는 의식과 영혼>을, 권영준 교수(연세대 물리학과)가 <영혼과 육체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이해와 한계>를, 기독교변증가인 박명룡목사(큰나무교회 담임)가 <영혼의 존재 :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를, 변증전도연구소장인 안환균 목사가 <영원한 삶 : 변증전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발표했다.

강사들은 죽음 이후에 과연 삶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특히 물리학자인 권 교수는 “태초 이전의 시간은 물리학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아니다”라고 설명해 주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뇌과학에서는 뇌의 활동과 자아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물질적 환원주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이란 단지 물질의 화학적 작용에 불과하고 본다.

 

이러한 물질적 환원주의 입장에서는 영혼은 없으며, 죽음 이후의 삶도 없다고 파악한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이런 환원적 물질주의가 타당한 것인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삶은 계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찰하고 토론했다.

 

 

이 컨퍼런스는 ‘지성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합리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변증(설명)하기 위해 지난 2011년 시작됐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기획한 이 컨퍼런스는 기독교를 ‘그냥 믿어보라’ ‘믿으면 이해가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성적으로 설명하는 국내 유일의 컨퍼런스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회자들이 참석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독특한 컨퍼런스가 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기 어려운 크리스천이나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기독교 지성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했으나 정작 현역 목회자들이 더 주목하는 컨퍼런스가 된 것이다.

올해 참석자는 400명이 넘었다. 중형교회에서 마련한 컨퍼런스에 이렇게 많은 참석자들이 토요일 하루 종일 강의를 듣고 토론한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현재 우리사회의 기독교행사는 계속적으로 참석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컨퍼런스는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로 토론의 장을 펼치고 있다.

컨퍼런스에 참석한 박승재 목사는 “불신자들이 가지는 신앙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과학적으로나 이성적으로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며, “이번에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음을 배웠다”고 말했다.

 

아내와 함께 참석한 이재광 목사도 “정신과 뇌라는 방대한 주제를 기독교적으로 잘 풀어주었다”며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주제발표 요약>

제1강, 동양종교와 과학이 보는 의식과 영혼 (황윤관 목사)

믿음은 강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지성적으로 생각하고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계의 자연과학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현재는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막대하게 지식이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의 신비는 알면 알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을 해도 ‘왜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일까’ ‘우주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 자연법칙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하는 질문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질문들은 과학과 신앙(종교)이 만나는 접점이 된다.

의식은 일차적인 감각의 경험이 아니다. 의식은 그러한 감각의 경험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곧 뇌인가? 우리가 물리적 환원주의의 입장에 있다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뇌세포들 사이의 전기화학적 반응들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청자의 귀에서 요동하는 공기 압력의 시간적 계열로 서술할 수는 있지만, 이런 서술만으로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그렇듯 인간의 의식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

 

물질과 구별되는 의식, 육신과 구별되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신경과학 혹은 뇌에 관한 연구들이 기계적, 결정론적인 틀에 갇혀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의 구현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강, 영혼과 육체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이해와 한계 (권영준 교수)

이해하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정신(mind)은 뇌(brain)의 기능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물질적 환원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어떤 과학도 뇌의 작용을 속속들이 다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뇌의 모든 작동을 다 이해한다면 인간의 존재는 결정론적으로 될 것이다. 바둑판과 바둑알을 잘 만든다고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아닌 것처럼, 물질만을 갖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

초전도체(superconductor)가 존재한다는 것은 1911년에 처음 발견됐지만, 그 이론적 이해는 그보다 훨씬 뒤인 1957년에야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는 세상 모든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물질 환원주의는 초기 조건이 조금만 잘못 계산되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뇌에 관한 연구도 비결정론적인 발전이 있을 가능성을 인식해야 한다. 현대의 자연과학은 세상에 대한 접근을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현대물리에 의하면 태초 이전의 시간은 물리학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아니다. 즉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우주론/천문학/물리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의식 내지 자유의지(나아가 영혼까지)의 문제는 생물학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사고의 틀이 하나님을 ‘God of the gaps’로 격하시키는 것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신학적, 철학적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제3강, 영혼의 존재 : 죽음 후에도 삶이 있는가 (박명룡 목사)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뇌의 기능에 불과하며,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교회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물리주의가 옳다면 물질적인 속성(physical property)과 정신적 속성(mental property)이 일치해야 하는데, 사실상 이 둘의 속성은 다르다.

 

물질적 속성은 공개적이고, 내적성찰이 불가능하고, 의도와 목적이 없고, 명제적 태도가 없다. 이에 배해 정신적 속성은 주관적이고, 내적성찰이 가능하고, 의도와 목적성이 있으며, 명제적인 태도(희망 두려움 생각 등)가 있다.

영혼은 뇌와 달리 존재한다. 영혼은 자아에 대한 기본적 자각이 있다. 1인칭의 자기지시적 관점이 가능하다. 육체를 초월한 정신적 자아가 없다면, 자기 정체성이 상실된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세상이 물질로만 존재한다면, 물질이 아닌 인간의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세상이 물질로만 존재한다면, 죄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임사(근사)체험(Near-Death Exprience)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많은 의학적 통계가 나와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살고,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무수히 많다.

 

인간의 영혼, 의식, 생각, 이성, 마음, 수학적 진리, 도덕성과 같은 생각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인격체인 하나님의 특성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 후에도 삶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삶과 목적과 방향을 재점검해야 한다. 대안은 인격체 하나님이다.

 

 

제4강, 영원한 삶: 변증전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안환균 목사)

요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표제가 시대에 맞지 않는 미개한 슬로건처럼 치부되어지지만, 사후의 천국과 지옥은 확실히 존재하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로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번째 근거로, 사후 세계의 존재 여부는 최종 권위로만 가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확신은 실제 가보지 않더라도 보도 매체의 권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사후 세계 또한 성경의 권위나 타종교와 신화 등 여러 권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두번째 증거로는 천국과 지옥의 구체적인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보는 첫째 하늘은 대기, 둘째 하늘은 우주,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성소로 일컬어지는데 이곳이 바로 천국이며, 바울의 묵시록에 담긴 천국과 지옥을 통해서도 그곳이 실재하는 공간임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국과 지옥의 실제는 몸을 떠난 영혼도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임사 체험의 여러 공통점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여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몸을 떠난 영혼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있다. 사도 바울의 임사체험 경우를 잘 분석해보면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더라도 그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의식과 가능을 갖고 활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는 결정적인 이유는 천국과 지옥 때문이며, 죽음 이후의 삶이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부조리한 세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편, 주제발표 후 진행된 질의응답시간에는 토론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영혼을 정보와 에너지로 설명을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임사체험과 입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부활 전의 영혼과 부활 후의 영혼은 무엇이 다른가?” 등의 흥미로운 질문들이 많이 나왔다. 컨퍼런스 강의영상과 강의안은 큰나무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컨퍼런스를 기획한 박명룡 목사는 “매 회마다 시대 조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한국사회 안에 신앙의 합리성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 기독교 변증 작업이 더 활발해지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앞으로는 세계적인 변증가를 초청하여 지성적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있다”며, “기독교변증이 한국교회의 선교와 전도에, 그리고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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