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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교회갱신을 위한 공공신학 활용 지침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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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갱신의 관점에서 본 공공신학 / 김병권 박사(침신대)

 

2014년 11월 24일 기사

 

아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지난 11월 22일(2014)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14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학회의 원문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서비스하지만 저작권을 비롯한 모든 법적 권한은 해당 학회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갱신의 관점에서 본 공공신학 논의
김병권 박사 (침례신학대학교)


I.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은 한국 교회의 갱신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공공신학을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한국 교회의 갱신 과제’란 한국의 교회 및 신자들이 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연구자가 이 논문의 목적을 위와 같이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네 가지 사실들이 상기됨으로써 촉발되었다. 첫째, 신앙의 공공성 및 교회의 공적 책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 사상들은 1970년 대 이후 한국 교계에 다양하게 소개된다. 해방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혹은 Missio Dei) 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2007년 7월 23일에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추구하기 위해 ‘공공신학 전문가 집담회’가 열리고, 이후 2008년 11월 29일까지 다섯 번에 걸쳐 공공신학 세미나가 개최된다. 이후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추구하는 ‘공공신학자들’의 연구 및 발표가 꾸준히 나타난다. 셋째, 2014년에 한국의 젊은 크리스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적 신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다.

 

 

2014년 4월 25일에 청어람 아카데미는 “공적신앙과 청년사역”이라는 주제로 제5회 청년 사역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동년 6월 12일에는 기윤실과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가 공동 주최한 “공적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특별 좌담회가 개최된다. 동년 7월 14일에 CBS 방송은 “크리스천 Now”라는 프로그램에서 “교회 건물의 벽을 넘어—공적 신앙을 위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45분 동안 방영하기도 한다. 넷째, 2014년 11월 22일에는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신앙의 공공성에 대한 요구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신앙의 공공성을 강조해온 기존의 신학들이 계속 미완(未完)으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미완을 ‘미완의 성공’으로 이해하든, ‘미완의 실패’로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한국 교계는 계속해서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의 질곡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러한 사실들은 그동안 한국의 신학계가 한국 교계에 제시했던 다양한 신학들이 사사화한 한국 교회를 갱신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하는 국면에 한국의 신학계가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신학계가 어떻게 해서 이런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이 논문을 구상하게 된 연구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된다. 신앙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한국 교회의 갱신 과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신학’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전에, 그러한 갱신 과제가 계속해서 완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른 바 ‘신학의 재고 조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자는 최근에 한국에 소개된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말하자면, 공공신학을 소개하거나, 그것을 한국 교회의 상황에 잘 적용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데 이 논문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공공신학은 이미 소개되었고, 적용 방법에 대한 모색 및 공공신학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이 논문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공공신학의 ‘소개-적용-비판’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한국교회의 갱신 과제에 긍정적으로 작동되도록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Ⅱ. 공공신학과 한국교회의 유형

이 섹션에서 연구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공공신학’의 특징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소개한다. 둘째, 공공신학에서 ‘공공’에 해당하는 부분을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연계시켜 설명한다. 셋째, 교회의 사회적 역할 수행 방식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 후, ‘공공신학’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설명한다.

하나의 학명(學名)으로 공공신학자로 분류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노영상은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을 공공신학자로 분류한다: 맥스 스택하우스(Max Stackhouse),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존 웨슬리(John Wesley),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등. 스택하우스는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을 자신의 공공신학 계보에 속하는 인물로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폴 틸리히(Paul Tillich),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 그리고 그는 독일의 공공신학자로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 칼 쉬미트(Carl Schmidt),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등을 주목한다.

이들이 언급하는 공공신학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노영상은,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 맥스 스텍하우스(Max Stackhouse), 몰트만(J. Moltmann), 로날드 티먼(Ronald Thiemann), 로버트 벤(Robert Benne) 등이 공공신학에 대해 정의한 것을 검토한 후, 클리브 피어슨(Clive Pearson)의 공공신학 정의 내용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공공신학의 특징을 설명한다:

공공신학은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변혁을 위해 영향력을 갖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공신학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실천적 도덕적 사유(universal practical moral reasoning)와 자연법(natural law) 및 공유된 도덕법(moral law)에 호소하려 한다. 이런 각도에서 공공신학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바의 공동 도덕(common morality)을 강조한다. 공공신학은 단지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 신학을 선포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그를 위한 이론적이며 지적인 논구를 하려 한다. 이에 공공신학은 다른 신앙이나 전통을 갖거나 다른 학문 분야의 사람들을 대화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며,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공공신학의 특징에 대한 노영상의 위와 같은 언급은, 스택하우스가 한국의 공공신학 연구자들을 위해 쓴 ‘추천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영원하고 참된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중한 신앙에 헌신과 섬김,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윤리적 요구가 따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소명을 받은 자요 말씀의 청지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삶의 현장인 공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인과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사적인 일(private affairs)로 제한하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은 공공의 영역에서 소명을 받은 청지기로 살아야 하는 윤리적 실천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 추구하는 핵심가치입니다.

 

 

노영상의 언급은, 공공신학의 이론 정립과 관련한 ‘공공성’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스택하우스의 언급은, 공공신학의 실천 대상(교회 밖)에 초점을 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강조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은 모두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 논문의 주제를 이끌어갈 ‘한국 교회의 갱신 과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신학의 이론 또는 선포와 관련한 공공성 확보의 문제보다는, 교회 또는 신앙인의 사회적 실천 문제 즉 “공공의 영역에서 소명을 받은 청지기” 삶의 공공성 확보 문제가 더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공공신학이 소개되어 거론되기 시작한 주된 이유가 신학 이론 또는 신학 담론의 내적 퇴행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 교회 및 신앙인의 삶이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으로만 퇴행하는 현상에 대한 염려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에서 전개될 공공신학에 대한 이 논문의 논의에서, 신학 이론 및 선포와 관련한 공공성 확보 문제는 취급하지 않고, 교회의 사회적 실천과 관련한 문제만을 주요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교회 또는 신앙인의 ‘사회적 실천’과 관련해서 한 가지 합의할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실천’은 단순히 사회적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존재’ 방식도 포함되어야 한다. 존재 그 자체가 갖는 사회 실천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사회가 안정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반드시 ‘어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때 ‘어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존경 받는 어른의 존재감이 갖는 사회 실천적 의미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른이 아무리 연로해서 직접적 행동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분의 존재감 자체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 실천적 의미는 직접적 행동의 유능함 못지않게 크다고 할 것이다.

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이유를 ‘사회적 행동’의 문제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 방식’ 즉 사회적 존재감의 문제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개신교가 불교나 가톨릭보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봉사 실적이 더 많지만, 사회적 신뢰도나 호감도에서 두 종교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 교회의 사회적 존재 방식의 문제가 사회적 행동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암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연구자는 이 논문에서 교회의 사회적 행동과 사회적 존재감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개한 공공신학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구가 공공신학에서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 수행 방식에서 행동과 존재 중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네 진영으로 나누어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교회의 유형을 아래와 같이 분류한 로널드 사이더는 공공신학을 에큐메니컬 교회 모델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노영상은 그 견해를 수용한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 수행 방식 유형>

위의 도표에 따르면, 모든 교회 모델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 수행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방식에서 직접적 행동의 역할을 중시하느냐, 사회적 존재감의 역할을 중시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네 유형에 해당하는 모든 신학은 교회의 공공성이나 믿음의 공공성에 대한 강조를 내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그 위기에 대한 반성 및 진로 모색을 계속 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공공신학이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공공신학 논의는 이러한 지평 위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Ⅲ. 복음주의 신학(신앙)의 공공성: 명시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적 복음주의 신학에는 공공성이 내장되어 있다. 이 섹션에서는 복음주의 신학에 내장된 공공성의 내용을 명시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에서 조명하고,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공신학에서 이 점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서 ‘명시적 측면’이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적으로 서술되고 가르쳐지는 신학의 내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적 측면’이란 그 신학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내용을 의미한다. 연구자가 굳이 ‘복음주의 신학의 공공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공공신학을 다루는 한국의 신학자들이 복음주의 신학 자체를 별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에는 공공성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다. 둘째, 공공성 회복의 주 대상이 되는 교회가 대체로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셋째, 연구자 자신뿐 아니라 이 논문의 담론 대상이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섹션에서 연구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는, 신학의 공공성 내용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을 공공신학과 비교하면서 논증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그 공공성의 신학은 명시적으로만 남아 있고, 실제적으로는 작동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1973년 11월, 복음주의 지도자들 50명 이상이 시카고에 있는 YMCA빌딩에 모여, 복음주의자들이 능동적으로 사회참여에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함된 선언문을 발표한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경제적, 군사적 힘에 대한 잘못된 신뢰--즉, 국내외에서 우리 이웃들을 희생시키는 전쟁과 폭력이라는 국가적 병폐를 부추기는 교만한 신뢰에 도전하여야 한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그 제도를 거의 종교에 가까운 충성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어떠한 유혹에도 저항하여야 한다.” 1974년 7월에 세계 150여개 국가의 복음주의자들이 참석한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는 로잔 언약을 승인하였는데, 그 언약의 제 5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책임 모두를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1977년 5월에는 가톨릭 복음주의자들과 개신교 각파의 복음주의자 45명이 시카고에 모여 시카고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 중 “총체적 구원에로의 부름”이라는 항목은 “기도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온전히 참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해방을 위해 힘써 싸울 것을 요청한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러한 선언들은 교회 또는 신앙의 공공성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을 한 주체들은 위의 유형론에 따르면, 개인적 복음주의 모델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선언에서뿐 아니라, 개인적 복음주의자로 분류된 존 스토트(John Stott)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도 신앙의 공공성을 촉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공공신학의 주요 테제들이 스토트의 책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훈은 “공공신학은 공적인 차원의 논의들이나 사회의 여러 영역들인 문화, 예술, 가족, 과학기술, 경제, 정치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적 시도로서, 비기독교 전통들이나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과학 등과 더불어 비판적인 대화를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스토트는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현대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다룬다. 전쟁의 문제, 생태계 위기의 문제, 국제 무역 관계의 문제, 인권의 문제, 노동과 실업의 문제, 비즈니스의 문제, 인종 문제, 생명공학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필요할 경우 비기독교 전통에 속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면서 자신의 기독교적 주장을 펼친다.

스택하우스는 “우리의 신앙을 사적인 일로 제한하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은 신앙인과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일한 의미의 주장을 스토트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의 중요성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분(하나님)의 관심사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신성한’ 것뿐 아니라 ‘세속적인’ 것도, 종교뿐 아니라 자연도, 언약백성뿐 아니라 모든 백성도, 칭의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 내의 사회 정의도, 그분의 복음뿐 아니라 율법까지도 다 포괄한다. 그러므로 .... 우리의 관심사 역시 그분처럼 광범위해야 한다.”

문시영은 스택하우스의 설명에 근거하여 공공신학에서 ‘소명’과 ‘청지기’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공공신학에 있어서 소명과 청지기는 말씀과 세상, 신학과 정치경제문제 사이의 연관성을 확보하는 매개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사회 제도 전반에 걸쳐 청지기적 실천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의 질서와 경제, 정치 제도들을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목적에 일치하도록 변혁시킬 책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스토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 세상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며, 그 참여에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는 ‘사회봉사’에의 참여뿐 아니라, 사회 구조를 변혁하려는 ‘사회 행동’에의 참여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위의 세 가지 내용 외에도, 공공신학의 주요 테제들과 개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테제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이 있다는 것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은 사회윤리적 특정 과제를 공공신학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검토해 보면 어느 정도 확인된다. 이를 위해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고령화 사회 문제를 다룬 이상훈의 논문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상훈이 이 논문에서 전개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고령화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조건을 진술한 후, 저자는 신앙 및 신학의 사사화 흐름과 공공신학윤리에 대해 소홀히 하는 흐름을 그대로 따를 경우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방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공공신학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후, 소명과 코이노니아에 대한 공공신학윤리적 해석을 시도하고, 고령화 사회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문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렇게 논지 전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주장되는 내용들은, 스타트의 사회참여 방법론에서도 추론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고령화사회 현실에 대한 사회적 현상이나 사회적 조건을 언급할 때, 관련 주제에 대한 교회 밖의 전문가 연구를 활용하는 것은 스토트의 논리 전개 방식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 문제, 생태계 위기 문제, 개발과 원조 문제, 인권의 문제 등을 다룰 때 스타트는 대부분 교회 밖의 학자들이나 단체들이 논의한 것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고령자들의 삶에 “영적인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데” 유용한 ‘소명’ 개념과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설득력 있는 통찰과 기여”를 하는 데 유용한 ‘코이노니아’ 개념은, 스타트가 일의 세 가지 성격—자기 성취, 공동체의 유익, 하나님께 영광—을 언급하는 데서 내용적으로 공통분모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앙 전통 안에 공공성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나 언급들이 이렇게 넉넉하게 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개인주의적 내적 퇴행을 보여 왔다고 비난받고 있다. 1970년대 한국 교회의 주류는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였다. 이 당시 한국 교회는 여의도 광장의 ‘맘모스 집회’로 상징되는 ‘대규모 구령 집회’에 몰두해 있었다. 신자 개인의 의식은, 영혼 구원의 중요성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탈사회적 의식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른 바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이 대중적으로 내면화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 신앙의 공공성을 내장하고 있는- 개인적 복음주의 신학 또는 신앙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해서 적지 않은 한국의 크리스천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현재까지 왜 한국 교회는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한국 교회 갱신의 과제로 삼고 씨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연구자는, 복음 또는 신앙의 공공성이 한국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명시적으로는 수용되었지만, 그 명시적 공공성이 교인들의 삶이나 교회의 에토스에 실제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명시적 공공성과 실제적 공공성 사이의 간극이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는 탓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의 판단이 타당하다면,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촉구하기 위해 공공신학을 논할 때, 그 주요 내용은 명시적 공공성과 실제적 공공성 사이의 간극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법을 간구하는 데 일차적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2007년부터 한국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를 검토해보면, 이런 점이 거의 경시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의 모든 논의가 공공신학의 이론적 측면에 국한되고 있다. 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분류하자면, 공공신학을 단순히 소개하는 글이 가장 많고, 그것을 특정 사회적 이슈에 적용하는 글이 조금 눈에 띄고, 공공신학을 평가하는 글이 소수 있는 실정이다. 물론 모든 글들에는 공공신학이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에 유용하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성격의 글에서도 한국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명시적 공공성과 실제적 공공성 사이의 간극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내용은 발견할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의 공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글임에도, 한국 교회의 주류에 해당하는 복음주의 신학 또는 신앙에 내장된 공공성 문제를 다룬 글도 없다는 점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복음주의 신학이나 신앙은 공공신학의 담론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느낌마저 든다. 이럴 경우, 공공신학에 대한 담론은 - 그것이 표방하는 바가 아무리 한국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유도하지는 못하고, 교회의 명시적 공공성에 대한 이론 논쟁으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그 결과 공공신학의 논의는 한국 교회의 갱신에 별로 기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의 갱신 과제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명시적 공공성의 정교화보다는 실제적 공공성의 내면화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 형태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점이 있다. 한국의 공공신학 담론에서는 - 복음주의 신학(신앙)의 공공성과 관련된 문제는 배제된 채 - 주로 ‘세속적 기독교 모델’과 ‘주도적 에큐메니컬 교회 모델’에서 발견되는 공공성 문제와의 관계가 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공공신학의 이론 정교화 작업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에는 별로 도움이 될 수 없다. 한 예로 서창원의 논문을 검토해보자.

서창원은 “지금도 계속되는 개인주의적이며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하며 내면적 칩거를 향해 퇴행하는 한국교회를 위한 바람직한 사회정치신학적 담론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정치신학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논문을 썼다. 거기서 그는 사회정치신학을 ‘정치신학,’ ‘해방신학,’ ‘공공신학’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서 ‘정치신학’은 1960년 이후 유럽의 일부 신학자 즉 요한네스 메츠(Johannes Metz),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도로시 죌레(D. Soelle) 등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안에 있는 인도주의적 요소와 그리스도교 정치윤리를 연결”시키려고 모색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 구원을 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한 제3세계의 모든 신학”으로 “흑인신학,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과 아시아종교해방신학, 아프리카신학을 포함하는 신학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사회정치신학’들과 공공신학을 비교한 후, “정치신학, 해방신학, 공공신학은 신학방법과 내용적 성격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신학이라는 공통적 목표를 통해 에큐메니칼한 친교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교회에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은 많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에 친화적이었던 소수의 교회들은, 서창원이 문제 제기한 “개인주의적이며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하며 내면적 칩거를 향해 퇴행하는 한국교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교회였다. 그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교회들은 오히려 ‘개인적 복음주의 모델’에 친화적인 교회였다. 그렇다면, 서창원의 논문은 한국 교회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남의 다리를 긁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범주에 들어가는 교회들이라 하더라도, 명시적으로는 교회의 공적 실천을 강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개인적 복음주의 모델’ 교회들처럼 개인주의적 퇴행을 보이는 교회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서창원이 그런 교회를 전제로 했다면, 그의 논지는 에큐메니컬 모델 교회나 세속적 기독교인 모델 교회 안에 있는 ‘명시적 공공성’과 ‘실제적 공공성’ 사이의 간극을 문제 삼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어야 할 것이다.

Ⅳ. 공공신학에 대한 평가 내용 검토

앞의 섹션에서는 공공신학을 논의하는 학자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담론의 대상에서 배제시킨 것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을 언급하였다면, 이 섹션에서는 공공신학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평가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이른 바 ‘공공신학 대 공공신학’의 논쟁 내용을 검토해보면, 한국교회의 갱신 과제를 해결하는 데 유익하게 작동되기보다는, 명시적 공공성에 대한 이론 논쟁에 그쳤다는 점을 연구자는 논증할 것이다.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공공신학은 크게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과 독일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의 공공신학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중에서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이 한국에서는 주로 논의되고 있다. 어느 쪽 공공신학을 논의하든, 그 출발점은 대체로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대안 모색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평가의 기저(基底)는 긍정적이다. 공공신학이 교회 및 크리스천의 개인주의적 퇴행 성향에 제동을 걸고 공공성 회복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의 흐름과 대비되는 입장을 보이는 세 사람이 있다. 노영상, 문시영, 손규태가 그들이다.

노영상은, 공공신학에 대해 유진 브라이텐버그(Eugene Harold Breitenberg)가 비판한 내용 일곱 가지 중 여섯 가지에 대해 공공신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답변을 한다. 그가 수긍하는 비판 한 가지는 스택하우스가 ‘덕의 윤리’에 대한 강조를 경시한다는 지적인데, 이에 대해서 노영상도 수긍하면서 “사회 정책적이며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기독교적 구원관과 교회론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채, 교회가 공공의 문제에 집착할 때, 자칫 천박한 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음도 경고한다.

 

 

공공신학에 대한 문시영의 평가에는 노영상의 문제의식을 포용하면서, 좀 더 넓은 틀에서 공공신학과 교회윤리의 상호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이 교회의 공공성 함양에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면,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교회윤리는 교회의 정체성 회복에 방향성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구현해야 할 교회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김현수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스택하우스와 하우어워스의 논쟁을 정리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위해서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과 하우어워스의 교회 윤리 사이의 상호 비판적 통합의 길이 모색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진정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의 대 사회적 소통과 책임이라는 두 날개를 놓치지 않는 통전적 교회론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논의 과정을 검토하다 보면, 두 사람 모두 스택하우스의 소종파주의 신학(또는 분파주의 신학, 고백신학)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 채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연구자가 보기에, 스택하우스는 자신의 공공신학의 정당성을 조명하기 위해 고백신학을 이용한다. 말하자면, 공공신학자가 만든 “공공신학 대 고백신학”이라는 논의의 틀 속에 들어가서 논의를 시작하는 격이다. 이 논의의 틀은 두 가지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를 담고 있다.

첫째, 소종파주의 신학 안에는 공공성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존재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배제되어 있다. 스택하우스가 이 논의의 틀을 짰기 때문에, 그는 먼저 이 두 가지 사항에 대해 납득할 만하게 설명하고 ‘고백신학’ 진영에 속한 신학자들로부터 합리적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 이 논의의 틀 속에서 공공신학과 교회윤리 사이의 ‘상호보완의 필요성’ 또는 ‘상호 비판적 통합의 길’을 수용하는 것은 진정한 평등성에 근거한 보완 및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의의 틀은 공공신학에 대한 소종파주의의 콤플렉스를 장착하고 있고, 그러한 콤플렉스를 교회윤리에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살펴보면, 그의 신학은 교회 및 신앙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지구촌의 세계화 현상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야말로 그 잠재적인 역량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제기하는 쟁점들을 다룰 수 있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의미하는 ‘세계화’는 ‘특정 콘텍스트 초월’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특정 콘텍스트를 포괄하고 상대화시키는 보다 광범위한 공중(public)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고 한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스택하우스는 유럽의 ‘정치신학’과 자신의 ‘공공신학’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는 “정치신학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정부를 사회의 포괄적인 제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특정 콘텍스트 초월’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자면 ‘세계화에 대한 인식’은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의 출발점이자, 주요 거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손규태는 스택하우스의 세계화 인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노영상이나 문시영과는 다른 차원에서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비판한다. 그는 스택하우스가 자기 신학의 착지점으로 ‘세계화’를 삼은 것은 잘 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스택하우스의 세계화 이해에 담긴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그의 세계화 이해에는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이고 신식민지주의의 요소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오늘날 전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행사와 세력팽창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는 면이 있다.

 

 

둘째,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천명한 반세계화 선언과 해방신학적 성경해석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회윤리적 성향에 반대한다. 셋째, 세계화 현상의 하나로 나타난 다국적 기업의 폐단을 인정하면서도, 시장 경쟁 시스템과 국제법 및 규약에 의해 그러한 폐단이 조절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다국적 기업을 옹호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손규태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현대판 제국신학의 전형이거나 자본주의적 신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손규태가 공공신학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공신학이 대두된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공신학은 세계적 공공성 구조의 변화에 잘 대응하여 나타난 신학의 흐름이며, 기독교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치료책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그가 긍정하는 공공신학은 위에서 소개했던 로널드 사이더의 유형론에 따르면 “주도적 에큐메니컬 교회 모델”에 속하면서도 “세속적 기독교인 모델”과 친화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스택하우스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에 기초한 해방신학적 세계해석과 그 운동들을 비판”한 것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회윤리적 성향에 반대”한다고, 손규태가 지적한 것을 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택하우스나 노영상, 문시영 등은 에큐메니컬 교회 모델 중 우파에 속하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공공신학에 대한 이상의 평가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공공신학에 대한 태도는 신학적 유형론에 입각한 ‘진영논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 및 신앙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해 공공신학이 갖는 현실 적합성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한다. 그러나 공공신학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속한 신학적 진영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가 배태된 한국 교회의 현실적 문제 즉 교회 및 신앙의 개인주의적 퇴행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교회 실천적 관점에서의 논의는 경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모색되기 시작한 공공신학이 또다시 신학자들 사이의 고준담론(高峻談論)의 대상으로만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Ⅳ. 결론: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한 공공신학의 활용 지침

공공신학에는 개인주의적 퇴행을 보이고 있는 한국 교회가 눈여겨봐야 할 좋은 내용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그 내용들이 한국 교회 안에서 제대로 꽃 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할 사항들이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확인한 사항들을 정리한 후,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한 공공신학의 활용 방식 몇 가지를 제안하고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신학의 공공성은 공공신학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신학의 대부분 유형에는 공공성이 내장되어 있다. 사회적 행동을 수행한다는 점에서의 공공성만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감을 통해서도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공공성이 발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따라서 각 교단 신학자들은 자기 교단 신학 속에 내장된 공공성의 내용들을 조사하고, 그 내용들이 현 한국 교계의 실정에서 갖는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공공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도입하기 전에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의 ‘재고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자기가 속한 교단 신학의 공공성이 교단 교회에 실제적으로 얼마만큼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교단 신학에 내장된 명시적 공공성과 교단 교회 안에 통용되는 실제적 공공성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 안에 명시적 공공성을 완벽하게 장착하는 것만이 신학자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그 신학이 교단 교회 안에서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신학자의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는 명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실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위의 세 가지 사항을 수행한 후에, 공공신학에 대해 논의한다면, 적지 않은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때 교단 신학의 틀 안에서 진영 논리에 따라 공공신학을 대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관심은,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성을 치료하기 위해서 공공신학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의 정체성에 입각하여, 공공신학에 대해 선택적 긍정과 선택적 부정의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공공신학을 다룰 때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공공신학의 주장과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의 주장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는,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을 회복하려는 교회의 갱신 과제의 ‘전체’와 관련해서 보자면, 작은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교회의 실제적 공공성을 고양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스택하우스가 언급한 ‘에토스’에 관심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스택하우스는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에토스(ethos)를 형성하여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에토스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추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교회 갱신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공공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작동되는 에토스를 교회에 새롭게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참된 갱신은, 교회의 에토스가 갱신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교회의 에토스를 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교인들 사이에 편하게 주고받는 작은 이야기(narrative)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스택하우스에 따르면 구성원 사이의 이야기는 그 구성체의 에토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작은 이야기는 큰 이야기가 작게 나타난 것임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강조되는 교단 신학의 거대 담론이나, 설교단 위에서 선포되는 성경적으로 합당한 설교가 아무리 교회에서 가르쳐지더라도, 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 비공식적 모임에서 편하게 나누어지는 작은 이야기들이 ‘개인주의적 퇴행’을 조장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면,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교회 갱신의 과제는 여전히 공허한 주장으로 한국 교회 위에 떠돌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교단 신학에 내장되어 있는 명시적 공공성의 내용들이 교우들의 실제적 삶의 이야기로 풀어져서 교우들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실제적 공공성이 교회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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