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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의 한계점과 하우어워스의 사회윤리

by 데오스앤로고스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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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택하우스(Max I. Stackhouse)의 공공신학은 공동체적 교회의 교회 밖 사역과 참여에 정당성을 일부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21세기 민주시민 및 다원주의 사회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공공신학 개념의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기독교국가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 적용 또는 이식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다원주의적 국가를 경험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어느 종교도 지배적 위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역시 공공신학의 현실적 적용을 막고 있다."

 

 

권문상 박사(웨신대 교수/조직신학)의 주장이다. 권 박사는 "공공신학적 입장이 교회의 공동체적 속성의 교회 밖 확장을 절대적으로 강화시킬지는 의문이다"라며 "공공신학이 하나님의 주권적 우주 주재권에 근거한 공동체 신학과 교회가 교회 밖 여러 영역에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신학적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기독교국가 경험을 지닌 서구에서 출발한 공공신학이 우리나라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라는 입장을 밝힌다.

 

따라서 권 박사는 공동체적 교회의 공공신학은 제한적 의미로 적용 가능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하우어워스의 사회윤리 개념에 기초한 공동체적 교회가 세상에서 공동체적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공공신학의 중도적 의미를 제시한다.

 

* 이 글은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신학자들의 깊은 고민과 애정이 담긴 가치 있는 연구 결과물을 본지 독자들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일부 정리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연구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권문상 박사의 <공동체적 교회와 공공신학>,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성경과 신학', 제101권(2022년).

 

 

 

 

 

교회 공동체성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

 

권 박사는 신론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성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 각 위가 서로 구별하여 존재하지만, 영원한 사랑 안에서 상호 내주하며 상호의존적 관계를 이룸으로써 각 위가 구별된 신적 존재를 갖는 동시에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적 하나로 계신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인간이 개인의 자유만 추구하지 않고 타인과 조화의 삶을 미덕으로 삼는다면 이는 곧 인간이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인간이 피조될 때 삼위일체의 공동체적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특히 "교회가 공동체라는 사실은 성도들의 영적-도덕적 성장과 성도들 사이에서의 상호 내주로 한 몸을 구현하는 내면적 가치의 증대에 국한하지 않는다"라며 "공동체 의식은 원론적으로 교회 밖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삼위의 구별된 존재로 계시면서도 관계적 존재로서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교회 성도들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 역시 모두 공동체적 존재로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어 "온 우주의 창조주이면서 교회의 안과 밖의 세계 모두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갖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의식은 교회 안에만 가둘 수는 없다"라며 "교회의 안과 밖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영역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교회 밖의 세상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교회 밖 공동체성이 갖는 한계

 

하지만 권 박사는 교회 밖 세상에서의 공동체성 추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신론에 기초한 공동체성은 교회가 세상을 섬길 '근거'를 발견하게 하는 정도에 그치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우리는 교회 밖의 세상을 우리가 섬겨야 할 공동체로 인식하고 함께 사랑 안에서 교류하면서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상대와의 근본적 공감대를 공유할 수 없는 한, 세상의 주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 통치의 대행자로서의 교회는 세상에 대한 창조론적-신론적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한다.

 

공동체는 '상호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교회 밖 세상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철저하게 이해하거나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더군다나 기독교국가 경험을 한 번도 갖지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 주권자로서의 기독교적 하나님이 낯설기 때문에 서구에서 출발한 공공신학이 교회의 확장된 공동체 의식을 구현시키기 쉽지 않다는 주장이다. 

 

권 박사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매우 낯선 우리나라의 경우, 교회가 주도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표방하는 국가와 사회가 되도록 만들 수는 없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라며 "우리도 타 종교에 공감한다는 호혜적 이해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다원성을 전제하거나 내재주의 신학에 근거해야 비로소 세상과의 공동체적 교회의 참여가 가능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특히 "이러한 방식의 공동체적 이상적 가치의 외연 확장은 스택하우스 식의 공공신학적 원리의 결과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 집착하는 한 교회의 공동체성 확장을 현실화하기는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신론적 근거에 따른 공공신학은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

 

권 박사는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면서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의 신학적 기여와 함께 한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공공신학은 공적인 논쟁들이나 문화, 사회, 과학기술, 경제,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신학의 한 종류이며, 또한 비기독교 전통들이나 사회과학, 역사 과학들과 더불어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자 하는 신학의 한 종류다."

 

권 박사는 "스택하우스에게 있어 공공신학은 교회 밖의 영역을 기독교적 가치관 아래 논의하여 신학적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다"라며 "그래서 스택하우스는 타종교인 또는 비기독교인들과 신학적 윤리를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스택하우스는 교회가 이 세상 삶의 변화와 개혁, 특히 사회제도의 혁신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의 근거로서 교회를 공동체로 여기는 것에 두고 있다"라며 "스택하우스가 제시하는 교회의 확대공동체 의식은 그의 인간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을 때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의 한계

 

권 박사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은 신론/인간론적 공동체 신학에 기초한 교회 밖 세상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해석과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조하여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을 구체화시켜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변혁을 이루어 궁극적으로 피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실현되도록 한다는 것이다"라며 "하지만  그가 제시한 공공신학의 근거로 삼은 제반 신학적 논리가 어느 정도는 환영할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의 공동체성의 세속적 확장을 조심성 없이 제시한 점이 아쉽다"라고 주장한다.

 

즉, 스택하우스의 낙관주의는 교회와 세상과의 구별에 대해 무감각했다는 것, 이로 인해 교회 주도의 세상 변혁의 가능성을 상수로 보려 했다는 점, 다원주의적 세계관으로 점철된 현대사회 현상에 무감각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는 설명이다.

 

권 박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규범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사회의 기독교적 변혁 요구 역시 규범적으로 보려 했다는 점은 그의 공공신학이 순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라며 "무엇보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기독교역사가 서양에 지배적이었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이미 현대는 다원주의 세계관으로 급격히 기울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다.

 

즉, 세상은 공공신학적 목소리는 들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공공신학은 종교 간의 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기는 해도 이들 영역에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변혁이 가능하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WCC의 종교다원성을 수용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타 종교인이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여기고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변화를 거부할 경우, 공공신학은 타 종교에 대해 다른 형태의 기독교라고 선언하는 종교다원성 신학에 만족하게 될 것이라 여겨서이다"라고 주장한다.

 

 

 

 

공공신학, 한국사회는 힘들다?

 

권 박사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기독교국가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 적용 또는 이식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며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다원주의적 국가를 경험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어느 종교도 지배적 위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역시 공공신학의 현실적 적용을 막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어 "우리가 세상에 말한다고 해도 세상은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교회의 비윤리적 행태를 비꼬면서 ‘너나 잘 하세요’ 식의 비아냥이나 듣는다. 교회 밖의 세계에는 우리의 ‘거룩한 선언’보다 는 ‘거룩하지 못한 행동’에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라고 진단한다.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
"교회됨이 중요"

 

하지만 권 박사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 대신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사회윤리를 통해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 및 교회 공동체성의 세상에서의 확대 적용 가능성을 모색한다.

 

권 박사는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내면적 성숙이 곧 사회윤리라고 선언한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제, 곧 세상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의식과 행동에 구체적이면서도 강력하게 부응할지는 비판적 안목을 덧붙여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며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택하우스가 교회 밖 세상의 변혁을 위해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장한 반면, 하우어워스는 교회 안 기독교인의 성화를 통한 세상 변화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권 박사는 "하우어워스는 스택하우스와 달리 교회 밖으로 나가 사회변혁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이 교회의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교회 안에서의 기독교인의 정체성 확립을 통해서도 사회참여 방식이 된다고 여겼다"라며 "교회 됨이 사회활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통해 사회윤리를 배우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이야기가 곧 사회윤리다"라고 설명한다.

 

하우어워스에게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밖에 있지 않다. 따라서 하우어워스는 '교회 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

 

하우어워스의 기독론적/공동체주의적 공공신학, 예수 내러티브 실천 공동체 등을 설명한 권 박사는 "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교회 되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지 교회가 ‘사회적 기관이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덕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는지가 관건이다"라며 "하우어워스는 교회를 떠난 개인은 예수 없는 삶이기에 근본적으로 예수께서 세워놓으신 덕의 실체에 부합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예수 이야기에 충실할 공동체 곧 교회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인다"라고 분석한다.

 

 

예수 내러티브 실천공동체

 

권 박사는 "하우어워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무를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충실한 공동체가 되는 것, 그 이상의 다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다"라며 "하우어워스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에서와 같이 교회가 사회참여를 교회 밖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덕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담당할 영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라고 설명한다.

 

특히 "그는 교회를 사회정의나 여타의 선한 정책들을 위한 잠재적 대행 기관쯤으로 생각하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에 비판적이다"라며 "하우어워스는 예수를 따르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삶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 집단이 되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평화의 공동체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충실해지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의 한계
하우어워스 공공신학으로 해결

 

덕 윤리에 기초한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을 설명한 권 박사는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은 공동체적 교회 안의 내적 본질로서 사회 윤리적 삶을 살게 한다는 측면에서 스택하우스의 무모한 낙관론적 사회변혁 기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신학적 설득력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하우어워스에게서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교회 밖의 영역까지 물리적으로 공동체성을 확장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며 "교회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영역의 사회적 기관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시도는 실패한다고 본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권 박사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에 비판적이더라도 교회가 공공성을 완전히 상실하거나 공적 영역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라며 "비록 스택하우스에서와 같이 사회변혁을 교회가 주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물론 기독교윤리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하우어워스가 제시하는 공공신학이 교회의 사회 윤리적 자기 정체성을 제고시킴으로써 교회는 사회 참여적 행동을 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일종의 치적 행위도 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간접적이나마 교회 공동체성의 사회 영역에로의 확장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에서 교회는 세상과의 구별도 확보하면서 성화를 통해 내면적 성숙을 이루어 공동체성의 극대화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변화를 이룰 수 있음을 확인했고, 이러한 간접적 사회참여 방식 또는 세상 섬김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더욱 효율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내적 성숙의 환원주의와 산상수훈의 이상주의를 경계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즉, 예수 내러티브에 충실한 성화 공동체 또는 덕의 공동체의 능력이 사회적 검증을 통해 잘 드러나고 사회 참여적 실천이 객관적으로 확인하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

 

권 박사는 "교회 밖으로부터 ‘너나 잘하세요’라는 혐오성 발언을 듣는 것보다, ‘너 없어도 되거든’이라고 교회 무시의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위기일 수도 있다"라며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하지만, 교회 밖의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공동체 의식이 없는 무책임한 존재로 오해받지 않도록 어떤 구체적인 성화의 삶 양식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다른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진전될 필요가 있다"라고 당부한다.

 


[연구논문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공동체적 교회와 세상
  1. 공동체로서의 교회
  2. 만유의 주의 대행으로서의 교회
Ⅲ. 스택하우스의 공공 신학
  1. 공공신학의 필요성과 원리
  2. 공동체적 교회와 공적인 교회
  3.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의 한계
Ⅳ. 하우어워스의 공공신학
  1. 기독론적/공동체주의적 공공신학
  2. 교회 안과 밖의 구별
  3. 예수 내러티브 실천 공동체
  4. 교회의 직접적 사회참여 반대 근거
  5. 과제: 환원주의와 이상주의 극복
Ⅴ.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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