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01년 5월 14일 상동교회에서 진행된 감리교회 연회에서 집사였던 김창식과 김기범의 목사 안수식이 진행되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탄생했다.
이와 관련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김창식과 김기범 목사의 생애와 목회 활동을 되새기는 시간이 진행됐다.
1887년 한국기독교 최초로 신학교육을 시작하면서 올해로 개교 134주년을 맞이한 감리교신학대학교(총장:이후정 박사)는 지난 9월 6일 오후 2시 웨슬리채플 및 온라인(유튜브)으로 '제1회 아펜젤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국 최초 목사안수 120주년 기념과 미래 목자상'을 주제로 진행된 이날 학술대회에서 이덕주 박사(전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와 서영석 박사(협성대 교수/한국교회사)가 김창식, 김기범 목사의 목사안수의 의미와 목회를 고찰했다.
감리교 목회자 양성과 신학교육
'이날 김창식, 김기범 목사 안수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고찰한 이덕주 박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은 벧엘예배당에서 토착인 집회가 시작된 시기에 함께 출발하였다"라며 "아펜젤러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배우려 찾아온 배재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1887년 가을 배재학당 안에 '신학부'(theological department)를 개설하고 방과 후 시간에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토착인 목회자 양성과 신학교육의 출발이다(감리교신학대학교의 출발)"라고 설명했다.
1901년 5월 14일
최초의 목사 안수식
이 박사는 "지난 1901년 5월 9일부터 5월 14일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제17차 연회가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라며 "연회 5일 째인 5월 13일(월) 한국선교회 관리자 스크랜턴은 한국인 본처 전도사와 권사에 대한 과정심사 보고서를 감독에게 제출했고, 이 과정에서 남자 선교사 전원의 명의로 '김창식과 김기범을 본처 집사 목사로 안수할 것'을 천거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추천 과정을 거쳐 연회 마지막 날인 5월 14일(화) 오후 2시 상동교회에서 연회 마지막 순서로 김창식과 김기범, 두 전도사의 '집사(deacon)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라며 "집사 목사는 성찬례만 단독으로 집행할 수 없을 뿐 세례나 혼인예식은 집행할 수 있어 목회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인 최초
목사안수의 역사적 의미
이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김창식, 김기범 목사안수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한국 토착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에 대한 확증을 의미한다는 것.
이 박사는 "한국에서 첫 토착인 목사가 배출된 것은 개척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교에 착수한 지 16년 만이었다"라며 "주변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진척이었다. 이는 그만큼 한민족이 기독교 복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기독교 선진국 출신인 선교사들은 상당히 높은 도덕적, 신앙적 기준을 갖고 한국교회 전도자와 목회자를 선발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라며 "한국교회 전도자들에 대한 선교사들의 칭송과 극찬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뛰어난 신앙과 지도력을 지적한 것으로 김창식과 김기범은 이를 대표하여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둘째, 목사 안수를 받기 전과 받은 후,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회의 전형적인 '순행 목회자'의 본이 되었다는 것.
이 박사는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 직제 상 '본처 전도사'(자기 고향에 머물러 생업에 종사하면서 목회를 돕는 사역자)였다"라며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실제로는 감독이나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임지를 옮겨야 하는 '순행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순행 목회'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전도와 목회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감리교 전도자와 목회자는 감독이나 감리사의 파송에 '절대 순종'하여 파송된 지역으로 가서 다시 옮겨 줄 때까지 머물러 전도하는 것을 본으로 삼았다"라며 "이런 순행 목회를 통해 '교회를 내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으며 순종을 통한 겸비를 체득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셋째, 김창식과 김기범의 목사 안수를 계기로 한국 개신교회 목사 안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이 박사는 "두 목사의 안수 이후 감리교회는 지속적으로 ㅊ회병헌, 전덕기, 강인걸, 손승용, 홍승하, 권신일, 김우권 등의 목사 안수가 이루어졌다"라며 "이에 자극을 받은 장로교회에서도 1901년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등 4개 장로회 선교부 연합으로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후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실시하여 1907년 9월에 길선주와 한석진, 양전백, 이기풍, 송인서, 방기창, 서경조 등 제1회 졸업생 7명이 한국 장로교회 최초 한국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이덕주 박사는 "장로교 첫 목사가 나온 1907년부터 미감리회는 종래의 신학회를 발전시켜 남감리회와 연합으로 '협성성경학원'(후의 협성신학교 및 감리교신학교)을 설립한 후 체계적인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시작하였다"라며 "1901년 미감리회의 첫 번째 한국인 목사 안수는 한국 감리교회 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회 전체의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한층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김창식, 김기범의 목회는?
김창식, 김기범 목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발표한 서영석 박사는 두 목사의 목회와 선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열정적인 복음선교를 했다는 것.
서 박사는 "김창식은 25년간 목회하면서 이사한 수가 열 번이나 되고, 교회 없는 곳에 들어가 새로 설립한 교회가 48곳에 달했다"라며 "김기범은 다양한 재능과 열정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 인물이었다. 열정으로 전도하며 교회를 부흥, 발전시켰고 '웹웟청년회'와 영화남학생과 함께 국권회복에 항일 독립운동에서 앞장섰던 목사였다"라고 평가했다.
둘째, 검증된 전도자 및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유능한 인재였다는 것.
서 박사는 "김창식, 김기범 목사는 선교사와 교인들에게도 인정받는 전도자 및 일꾼으로서 한인 성도들을 이끌어갈 지도력을 검증받은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셋째, 고난과 박해를 이겨낸 용기있는 인물이었다는 것.
서 박사는 "1894년 5월 수구파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선교사를 돕던 김창식, 한석진 등을 평양관아로 압송하여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했지만,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다짐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두 목사는 복음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용감하게 한국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라며 "이후에도 평생동안 산골과 농촌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 설교하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로 인해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서영석 박사도 이덕주 박사와 동일하게 두 목사의 목사안수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자립적이고 토착적인 리더십 형성에 기여 △한국인의 기독교복음 수용의 전반적인 확대 △한국인들이 선교의 주체가 된 것 등으로 설명했다.
한편, 이어진 2부 강연에서는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가 '목사란 누구인가"-뉴노멀 시대의 목자상'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관련기사: (목사란 누구인가? - 뉴노멀 시대의 '목자상' (theosn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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