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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 교회는 ‘평화’ 말하지 못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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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튀빙겐대 캄프만 교수, ‘제2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주장


2015년 9월 7일 기사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 교회는 ‘평화’를 말하지 못했다. 교회생활의 영역에서도 ‘평화’는 사라져 있었으며, 전쟁이 가져다주었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평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평화는 현재에 유효하지 않은 희망으로만 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평화’는 독일 개신교 예배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주제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 튀빙겐대학교 신학부 학장인 캄프만 박사(교회사 교수)는 서울신대, 장신대 튀빙겐대가 지난 9월 4일 서울신대에서 ‘평화와 기독교의 과제’를 주제로 공동 개최한 ‘제2회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해 이같이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됐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 그 배경은 1900년 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 개신교 예배에서 사라진 주제:평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캄프만 박사는 “독일제국의 거대한 양쪽 기독교 교파인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에서는 전쟁 개입의 필연성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며 “사람들은 애국심을 입증하려고 애썼고, ‘조국을 져버린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888년부터 독일제국을 통치했던 빌헬름 2세 황제는 전쟁이 발발한 1914년 7월 31일과 8월 1일 베를린 궁전에서 진행된 소위 두 편의 ‘발코니 연설들’에서 많은 군중을 향해 임박한 군사적 갈등과 관련해 국가적 일치를 호소했다.

 

 

특히 교회와 종교인들을 향해 “비록 외국의 이웃들이 독일에게 어떤 평화를 베풀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훌륭한 독일의 무기가 이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를 일으킬 것이다”라는 희망을 선포했으며, 사람들은 이 전쟁을 방어전쟁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전쟁 기간 동안 교회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까? 어떤 신학적인 관점들이 제시됐고, 어떤 통찰들에 갇혀 있었을까?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전쟁기간에 독일 개신교 교회는 지속성을 갖고 있었다. 주일예배, 절기, 세례, 결혼, 장례 등의 예배와 예식들은 계속됐다. 물론 매우 빠르게 부차적인 과제가 첨가됐다.

캄프만 박사는 “전쟁 초반에 많은 교회에서 군사들을 위한 파송예배가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진행됐던 성만찬도 자주 진행됐다”며 “특히 도처에서 매주나 주중 저녁시간에 ‘전쟁기도 시간’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전쟁기도 시간에는 군사로 전쟁터에 나가고, 나가야 하는 교회 구성원들의 친족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로 인해 전쟁기도 시간에 교회 구성원들은 중보기도에 집중력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 ‘전쟁기도 시간’에 독일 교회는 어떤 기도를 했을까?

 


“… 당신이 지금까지 사방의 적들의 돌진에 맞서 우리를 도우셨던 것처럼 당신 손을 우리에게 거두지 마옵소서. 전장의 우리 형제들이 격렬한 싸움에서, 그리고 강하고 저항하는 적들로 인해 심각한 부상 가운데 씨름해야 할 때 … 당신의 도움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견디어 나아도록 우리를 전쟁의 변화하는 운명 속에서 도우소서 … 주여, 적의 백성의 군대가 우리의 동맹국에 반대해 일어났습니다. 우리를 민족들의 광란에서 썩지 않게 하시고 …적들이 돌진하는 상황에 처한 군사들에게 거룩한 용기와 좋은 계획, 힘찬 행동을 선사해 주소서. … 독일 병력을 보호하고 지켜주시옵소서.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용감한 담력과 그리스도인들의 남자다움으로 무장시키소서. …”(1916년 출판된 ‘부차적인 예배들을 위한 예배서’ 안에 제공된 13개의 ‘전쟁기도 시간을 위한 기도들’ 중 일부분).

 

캄프만 박사는 “당시 독일 교회에서 ‘평화’는 공공연한 중심주제가 아니었다”며 “평화라는 말은 기도 중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본문도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으며, 단지 ‘전쟁에 대한 출구’만 화제가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사건을 거의 비추지 않았다. 그리스도 자체가 평화이고, 그 분이 창조하는 평화에 대한 암시조차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기도 안에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집어넣는 일까지도 꺼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즉, 다양하게 출판된 ‘애국적 격언들’에서 인용된 말들을 기도 속에 포함시켰다는 것. 그는 “전쟁 경험과 승리에 대한 희망이 어떻게 예배로 들어오게 됐는지, ‘애국적’인 민족 관심사들을 어떻게 예배와 결합시켰는지 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위 당국자, 즉 각 주의 수장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당시 모든 일반적인 교회기도의 표준에 속했다. 이 기도는 모든 주일예배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빠질 수 없는, 전적으로 신뢰하는 구성요소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전쟁시절 예배에서 대체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한다는”는 아주 단순한 신학만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군사들이(자신의 가족, 존중하고 사랑했던 친구나 이웃 등) 정의로운 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했고, ‘정의로운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이 외면할 수도 있고, 성공(축복)과 전쟁 승리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뜨려 버렸다.

 

캄프만 박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단순한 선언과 같은 공허함과 신학적 무근거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교회 탈퇴를 가속화시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시대 쓰라린 신학적 결과로 고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복음적 선포가 얼마나 가깝게 결합하는지 보여줬다. 어떤 설교집은 빛줄기로 형성된 십자가를 칼이 둘러싸고 있었다. 독일 군대의 손실과 동프로에신 시민들의 고통을 예수의 고난의 길과 비교하는 설교도 있었으며, 신약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영’을 전쟁 군대로 이해하기도 했다.

캄프만 박사는 “신학논쟁에 있어서도 평화가 아닌 전쟁에 대해서만 부각시켰다”며 “일부 신학자들이 전쟁 발발은 기독교의 파산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소견들은 변두리 비망록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계속 결연히 죽는 이 끔찍한 전쟁과 관련해 민족들 간의 싸움 수단인 전쟁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양심을 느낀다’는 1917년 10월 17일에 5인의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선언한 소리들조차 완전히 산발적으로만 머물 수밖에 없었다.

캄프만 박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교회는 평화로 향하는 명확함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며 “기독교가 말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현재에는 유효하지 않는 희망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로 경험된 권력상실을 통해서도 실제적으로 평화를 배우지 못한 것이 독일 교회의 한계”라고 주장했다.

이어 “100년이라는 간격을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사적 회고는 복음이 아닌 현 정치적 관심들에 기초한 관점들에 의해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는 것이며,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평화의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들이 거의 표현되거나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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