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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누가는 바울을 사도로 보지 않았다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21:19

바울과 누가:동지인가, 적인가? / 김경진(백석대, 신약신학)

 

“사도 바울에게 막대한 빚을 진 누가가 정작 그를 사도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참작할 때, 바울에게 있어 누가는 동지라기보다는 적이 아니었을까?, 누가신학의 사회주의가 바울신학의 신학 및 교리주의를 교정하기 위함이었다면 누가는 바울의 동지라기보다는 긍정적 의미에서 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김경진은 “기독교가 바울교라고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기를 회피한 것이나 교리 및 변증에 치우친 바울신학의 문제점을 수정하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누가는 결코 바울의 들러리가 아니라 그와 대등한, 혹은 그에 버금가는 위대한 신학자임이 분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들어가는 말
2. 왜 누가는 바울을 사도라 인정하기를 회피하는가?
3. 바울신학과 누가신학의 비교
1) 바울신학의 교리-변증적 성격
2) 누가신학의 사회주의적 성격
4. 왜 누가는 후 바울시대에 복음서를 저술하였는가?
5. 나가는 말

 

# 연구내용 중에서

1. 예수가 선택하신 사도도 아니고, 예수를 직접 따랐던 제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이방인이였던 누가가 저술한 책이 정경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함으로써 얻게 된 동역자로서의 관계 때문인 것이다.

2. 누가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바울이 예수의 사역에 친히 참여하고 목격한 증인으로서의 사도의 자격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누가의 이런 행동은 누가 자신의 소신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 증거를 사도행전 1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의 자격은 한 마디로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후 부활하실 때까지 그 모든 과정을 친히 목격한 증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자격으로서의 증인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자격 조건에 따르면 바울은 결코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활 후에야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3.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세 번씩이나 기록한 누가임으로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바로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울을 사도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지나가가다 그냥 두 번 정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행 14:4, 14). 게다가 그 두 번의 경우도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도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를 고려해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 파송을 받은 자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4. 누가야말로 참으로 공과 사를 구분 지을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사역의 동역자로서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사도라는 자격에 부합하지 않는 까닭에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누가의 성실함은 오히려 그의 저작 가치를 존중할만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어쩌면 바울은 누가를 동지가 아니라 적으로 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5. 바울서신은 첫째로 신학적-교리적이고, 둘째로 변증적이며, 셋째로 목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적대적이고도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두 종류의 박해를 받았을 것이다. 첫째, 이방 동포 이방인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 이방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적대적인 상황 아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생존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서신은 대체로 교리-신학적이여, 변증적이며 목회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6. 누가복음은 특별히 소외된 자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소외된 자의 대표적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고, 따라서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이 복음서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른다.

7.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에 동역했을 경험을 통해 누가는 바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사도가 쓴 서신을 포함해 그 안에 담겨진 신학과 사상을 누가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왜 누가는 또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할 의도를 가졌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바울신학의 보완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울신학의 수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8. 이 두 갈래 길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고자 한다. 즉, 누가가 단순히 바울신학의 내용을 보완할 의도로 두 권의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바울신학이 신학적 균형을 상실한 까닭에 이를 수정 혹은 교정하기 위한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이해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처럼 보인다.

9. “어느 계명이 큰 가?” 혹은 “어느 계명이 첫째인가?”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율법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는 구약의 가르침을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하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마가와 마태는 이웃 사랑의 범위와 성격을 별도로 특별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반면 사회적 관심이 많았던 누가는 이웃 사랑의 범위와 성격을 확실하게 사도 바울을 포함해 다른 성경 기자들과는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10. 그것은 한 마디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교회공동체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신학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누가복음의 보편주의와 맞물리면서 진정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11. 그런데 바울신학은 대체로 교리-변증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약한 편이며, 설령 그런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 내부, 즉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목회적 돌봄 및 관심으로 축소된 듯이 보인다. 누가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12. 결국 누가는 이러한 바울신학의 약점을 간파한 후 자신의 두 권의 저서에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나타내는 복음의 사회성, 즉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극명하게 시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의 중요함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치우친 바울신학의 문제점을 교정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13. 여태껏 우리는 바울과 누가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마치 누가를 바울의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면서 상대적으로 경시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는 수정되어야 할 편견이라고 판단된다.


* 위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지 ‘성경과 신학’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김경진, “바울과 누가:동지인가, 적인가”, 성경과 신학, 제66권(2013.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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