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6일 기사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4월 3일(2015년) '존 오웬의 영성'을 주제로 제45회 월례발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날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가 발표한 내용을 주최 측의 제공으로 원문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
<존 오웬과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가 청교도와 종교 개혁자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성공적이지 못한 복음 사역뿐만 아니라 신앙의 피상성 때문일 것이다. 목회 현장에서 가속화되는 탈신학화 현상은 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목회 사역의 피상성은 신자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 성경적 화두인 “거룩함”(holiness)을 상실하고 있는 교회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의 “거룩함”에 대한 성경의 요청은 이미 칭의를 통해 거룩하게 된 신자에게 성화를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가도록 부르는 요청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인격과 생활에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 바로 “죄”(sin)이다. 특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끊임없이 어긋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실효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오웬의 저작 중에서 인간의 죄를 다루는 대표적인 세 가지 저작이 있는데 『죄와 은혜의 지배에 관하여』(On the Dominion of Sin and Grace), 『내재하는 죄에 관하여』(On Indwelling Sin) 그리고 죄 죽임에 관하여』(On the Mortification of Sin)가 그것이다. 첫 번째 작품은 신자 안에서의 죄가 힘을 규합하고 발전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보여 준다면 두 번째 작품은 신자 안에 있는 내재하는 죄의 현존과 작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치유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앞의 두 작품 속에서도 각각 치유책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모든 치유책은 죄 죽임에서 개진한 교리들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그것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Ⅱ. 오웬의 인간론 맥락에서의 성화
존 오웬이 다루고 있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대한 교리는 그의 인간론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은 창조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창조론과 인간론 사이의 연결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된 자리가 인간의 본래 자리이지만 인간 스스로는 그 자리로 돌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즉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인간 존재의 신적 목적에로 인간을 되돌리기 위한 것이다.
A. 인간과 창조의 목적
첫째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지적인 행위자이다. 그는 하나님이 만드신 두 세상 곧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중 지상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통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창조 세계 속에서 펼치시고,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당신의 지혜와 사랑이 시간 세계 안에서 드러나게 하심으로 기뻐하신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지혜를 창조 세계 안에 구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탁월한 영혼은 하나님을 닮은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닮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닮은 통치로써 이 세계를 가꿀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타락과 함께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살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파괴된 영혼의 기능을 회복함으로써 그의 마음과 전 삶이 같은 목적을 향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한 객관적인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고, 주관적인 적용은 중생과 성화이다. 이처럼 인간의 구속은 인간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B. 타락과 인간의 무능
둘째로, 창조 목적을 벗어난 인간의 타락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고상한 목적을 가진 인간이 타락한 것은 곧 인간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이 본래의 인간 존재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함에 있어 철저히 칼빈주의적 전통을 따른다.
존 오웬이 그려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은 칼빈이 그려내고 있는 타락한 인간 못지않게 절망적인 인간의 상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은 철저한 어두움에 갇혀 있으며, 지성은 눈멂에, 정서는 죄악된 충동에, 그리고 의지는 완고함에 복종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오는 은혜의 구원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은 구원받은 이후의 성화 생활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려내는 밑그림이 되고 있다.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으나, 인간 존재를 당신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더욱 잘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일한 소망이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C. 구원과 신자의 성화
셋째로, 창조 목적으로의 회귀와 성화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본래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다. 존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중생한 신자와 성화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1. 중생의 변화: 존재와 인식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책에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 안에 심오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이다.
첫째로,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성이 생긴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영혼과 본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도입한다. 그것은 사랑의 경향성의 변화이다. 비중생자와 중생자 사이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변화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즉, 자기 사랑의 경향성을 가지고 육욕으로 살던 사람을 하나님 사랑의 경향성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경향성의 변화는 그의 마음의 성향의 변화로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 자체가 도덕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중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은 가변성을 가진 경향성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이 경향성이 결코 소멸되지 않으나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룩한 삶과 은혜의 원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 증진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는 중생과 함께 도입된 존재론적인 변화를 마음의 성향 안에서 사랑으로 증진하는 것이다.
둘째로, 인식론적으로는 중생하기 전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영적인 감각으로 사물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존 오웬은 인간은 중생과 함께 세 가지 감각을 일시에 회복한다고 보았는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감각이 그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은 중생과 함께 신자의 영혼 안에 도입된 이래로 결코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자가 불순종하고 은혜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내면의 세계 속에서 증진하는 죄의 영향력은 이러한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들을 무디게 만든다.
존 오웬의 이러한 해석은 플라톤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해석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새로운 감각(new sense)의 개념을 이용한『신앙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도 바로 이러한 지적 유산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는 중생과 성화를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생각하였다. 즉 중생 안에 성화의 경향이 있고 성화의 실행 안에 중생의 씨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경향성으로서 내재하고 있기에 그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지기까지는 끊임없는 죄와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끊임없이 내재하는 죄를 성령으로써 죽이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쇄신하는 일에 인간이 자신에게 지정된 의무를 다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다.
2. 성화의 주체: 성령
존 오웬은 어디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의무에의 참여가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참여 자체가 죄를 죽이는 일이 아님을 여러 차례 확인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그릇된 죄 죽임의 실천을 경계하고, 개신교 안에서 죄 죽임의 의무가 잊혀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탄식한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일의 주인공은 성령님 자신이시며 의무에 대한 인간의 순종은 도구일 뿐이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성화의 과정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데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과 성화에서의 진전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셨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그 인간 본연의 존재의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웬의 인간론의 맥락에서 보자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에 의도하셨던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본래 인간에게 위탁하셨던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다.
타락한 이후 스스로 이러한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을 위해 구속 계획이 성취되었으며 구원받은 인간은 참된 신자가 되어감으로써 참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웬의 인간론의 맥락에서의 성화는 이러한 명제로 집약된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참으로 창조 당시의 인간의 목적에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는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쇄신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이러한 성화의 목적은 성령을 통해 신자 안에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려 이 목적에 이르게 하는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가지고 계신다. 그는 이 점을 『죄 죽임에 관하여』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신자의 어떤 행실이나 공로, 종교적 의무의 실천 같은 것들로 죽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했던 오류가 로마가톨릭 교회 안에서 유행하였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3절을 해설하면서 그는 죄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단지 죄를 죽이는 일에만 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하며 죄와 싸울 수 있는 복음적인 동기를 제공하는 주체로 활동한다.
존 오웬이 이처럼 자신의 성화론에서 그려내는 인간관은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인간관이다. 스스로를 의지할 때 절대적으로 비참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러한 온전한 신뢰 안에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낙관하게 되는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오웬은 자신의 성화론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라”,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으라.”
3. 인간의 의지: 협력
신자의 성화는 중생과 함께 시작된다. 존 오웬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성화를 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논증하였다. 그는 중생이야말로 모든 성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성령은 중생을 통해 인간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데, 그는 바로 이 원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단지 신자에게 이러한 기초만을 제공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바로 그 원리 안에서 함께 역사하신다.
a. 도구인으로서의 의지
중생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회심은 인간의 협력을 통해 결실하며 성화에서도 이러한 성령의 주도권에 협력하는 인간의 의지가 강조된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작용인(作用因)은 성령이시고, 신자의 의지는 도구인(道具因)일 뿐이다. 영적인 선을 행함에 있어서 신자라 할지라도 그 의지는 작용인이 아니라, 도구인일 뿐이다. 비록 구원받은 신자일지라도 오직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써만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초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과는 또 다른 동기에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야 하는 것이 신자의 존재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 그리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온전한 성화에 이르고자 하는 신자가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재하는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수록 더욱더 하나님 의존적이 되며 그 반대의 상태가 될수록 하나님을 향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 의지의 한계는 성화론 안에서도 분명하다. 성화를 위한 선택에서는 인간이 자유롭지만, 영적 선을 행하는 자체에 있어서는 오직 성령의 은혜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한 성화를 위한 신자의 의지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 행사가 먼저인지 그 안에 역사하는 은혜 작용이 먼저인지에 대해 본격적인 담론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만 은혜 언약을 근거로 성화에 있어서 의지의 선택하는 행위가 신자의 의지 안에서, 의지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죄 죽임의 실천을 택하는 것도 은혜의 영향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 안에서 죄 죽임을 선택한다. 그러나 신자라 할지라도 그는 죄 죽임을 선택할 뿐이지 자신의 의지로써 죄를 죽이지는 못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죄를 죽일 수 없다. 그가 만약 믿음 안에서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죄 죽임의 실천이 없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 성공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재하는 죄를 남겨둔 채 자기의(自己義, self-righteousness)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존 오웬에게 있어서 죄 죽임이 없는 신자의 신앙생활은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삶이고, 성공하면 외식하는 삶이 된다. 죄 죽임의 주체는 오직 성령뿐이시다. 오직 성령만이 그 은혜 작용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죄 죽임을 선택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의 의지적 협력 안에서 죄 죽임을 실행하신다. 이처럼 그는 참된 죄 죽임은 오직 성령으로써 가능한 일임을 매우 빈번하게 강조한다. 이는 당시 로마가톨릭과 영국 국교회 안에 있는 그릇된 죄 죽임의 예들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그릇된 방식으로 죄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복음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부패와 외식 혹은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b. 의무로서의 언약 관계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에 대한 오웬의 강조는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을 기초로 한다. 중보자 모형 신학(theologia Christi)인 언약 신학을 기초로 언약 신학이 성립한다. ‘언약’은 본래 ‘계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계약 행위의 쌍방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요하네스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에 의해 발전된 언약 신학은 대륙에서의 해석과 영국에서의 해석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대륙에서는 이 사람의 언약 신학을 개혁 신학 속에 편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새로운 신학적 개념이 성경에 부합하다는 판단으로 기울어졌고 개혁 신학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그런데 대륙에서는 언약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언약의 편무성(片務性)을 강조하였고 영국에서는 언약의 쌍무성(雙務性)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였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탁월성을 입증하는 데 유용한 논리를 제공하였고, 후자는 은혜 언약 안에서 신자들을 거기에 합당한 의무로 불러내는 데 유용한 논리로 사용하였다.
존 오웬은 자신의 성화론에 있어 영국적 해석의 전통을 따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는 철저하게 언약 관계 안에서 해석된다. 인간에 대한 의무의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외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의무를 폐기하지 않는다. 대륙에서 전개된 언약 신학의 강조점들을 유지하면서 영국적 해석을 더하여 신자들을 거룩한 의무에로 불러낸다.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용서와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보증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시여는 결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는데,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언약 관계 안에서 쌍방의 당사자인 신자가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존 오웬은 자신의 성화론을 전개함에 있어 이러한 언약 신학적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한다. 그리하여 의무에 충실하는 신자들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자들이 언약의 은총적인 성격을 자신의 의무를 태만하게 여기는 구실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신학적 긴장을 조성한다. 이러한 그의 언약 신학적인 긴장은 성화와 관련한 그의 명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화에 있어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며, 우리 없이 우리를 거슬러 역사하시지 않는다.(He works in us and with u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불변하고 언약 백성들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은 쌍무적 언약(bilateral covenant) 속으로 들어와 그 언약 생활을 충실하게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신자라 불리는 사람이 그 언약에 충실하지 않거나 저버릴 때 그는 그 행동을 통하여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가 언약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아무리 뛰어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생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웬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의 쌍무성을 지키며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견인하고 계신 증거라는 것이다. 그는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한 생활은 복음적 거룩함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론적인 논증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다(마 7:18, 눅 6:44).
성화에 있어서 신자의 중생과 거룩한 삶과의 관계에 대한 결과론적 논증은 그의『전집』제7권에의『배교』(Apostasy)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참된 신자는 결코 배교할 수 없지만 신자인 사람이 배교하였다면 그는 그 배교를 통해 그가 진정으로 구원 얻은 사람이 아님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쌍방적인 것으로 해석하도록 이끌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언약 백성에 합당한 의무를 따라 살도록 가르치게 하였다.
Ⅲ. 죄의 형이상학
존 오웬은 어느 신학자보다도 더 명쾌하게 죄의 본질을 설명한 신학자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이러한 명쾌한 설명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되고 중세 철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정제된 방대한 층차의 형이상학적 담론들을 배경으로 이루진다. 인간의 죄에 대한 존 오웬의 담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존재론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윤리론과 관련된다.
A. 존재하는 경향성으로서의 죄
첫째로, 그는 죄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성향을 갖게 하며 이로써 마음 안에서 혹은 행동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오웬은 신자 안에 있는 죄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를 명확히 구분한다. 후자는 악에 속하는 인간 행위의 죄이며 전자는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신자의 죄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담론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여겨지며 존재와 죄를 직접 연결시키는 이러한 철학적 담론들을 방대하게 구축함으로써 계몽주의에 항거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로도 이어진다. 실제로 존 오웬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 중요한 원천 중 하나였다.
죄의 본질은 실재적인 면에서와 도덕적인 면에서 각각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실재적인 면에서 보면 죄의 본질은 경향성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 enmity)이다. 실재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죄의 본질은 경향성인데 이것은 도덕적인 면에서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즉 경향성으로서의 죄가 흐르는 물이라면 작용하는 적의의 성향으로서의 죄는 물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경향성은 그것으로 하여금 사물을 끊임없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게 하는 성질로 나타난다.
죄에 대한 오웬의 형이상학은 철학과 관련이 있다. 존 오웬은 추상적이고 올바른 이성이나 인간 지성의 생래적 원리로서의 철학이나 자연신학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의 활동 때문에 그것들은 오류가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그는 이성과 철학은 특별계시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존 오웬은 죄를 설명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존재론의 틀을 사용한다. 그의 죄의 존재와 작용에 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연관을 갖고 있다. 즉 죄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존재와 경향성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어 ‘헥시스’(ἕξις, 문자적으로 ‘실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어떤 상태 혹은 항구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것’)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흄(David Hume, 1711-1776)으로 이어지던 영국 경험주의를 거치면서 경향성이 단지 존재의 특성이 아니라 곧 존재의 본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존 오웬은 죄를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보는데 이 경향성은 도덕적으로 작용하게 하는 힘, 곧 마음의 성향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경향성은 그것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 사물의 고유한 작용은 이 경향성이 운동하는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에게는, 죄의 존재와 작용을 영혼과 마음 그리고 행동과 관련하여 설명함에 있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틀이 매우 유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틀의 사용은 이미 중세의 교부들을 거치면서 세련되게 기독교 사상으로 정제되어 있었다. 죄에 대한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청교도들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화에 관한 작품들이 탁월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성경과 복음적 신앙 경험의 질료를 이러한 틀을 형상으로 사용하여 개혁 신학의 성화론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의 사용이 존 오웬의 성화론에 준 큰 유익 중의 하나는 죄의 본질, 신자의 마음 그리고 외적인 삶과의 관련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B.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
둘째로,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이다. 존 오웬은 죄의 작용의 본질을 마음의 성향이라고 본다. 이러한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작용하는 성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다. 그리고 이 적의는 다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반감(aversion)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opposition)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역사한다.
이러한 죄는 다음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데 첫째로 미친 기운 곧 이성의 판단을 뿌리치고 역사하는 광기(madness)이다. 둘째로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데 있어 드러나는 맹렬함(rage)이다. 셋째로, 죄의 성향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그는 담대함(boldness) 내지는 무모함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특성들이다.
존 오웬의 성화론의 강조점은 이러한 죄의 역사하는 작용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물론이고 중생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죄의 강력한 작용과 역사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신자는 비록 구원받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죄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도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가지를 회복하고자 경륜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 안에서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화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며 이러한 사랑의 교통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되고 거기에 합당한 작용을 하게 되어 그의 모든 삶이 덕스럽게 되는 것이다.
Ⅳ.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 개념
존 오웬은 죄의 개념을 밝힘에 있어 장황하게 신정론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죄를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는가 하는 논쟁보다는 죄의 본질적인 개념을 밝힘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신자의 성화의 과정에 필요한 논리의 토대들을 놓고 있다.
A. 죄에 대한 적극적 정의
첫째로, 죄에 대한 적극적 정의이다. 존 오웬은 죄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인간의 반항과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이라고 규정한다. 율법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반역과 살지 못하는 무능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힘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미침으로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외적인 모든 행동과 삶은 그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이나 성향과 도덕적으로 필연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실을 율법에 맞추려는 노력이지만 복음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 율법을 기뻐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오웬의 입장이다.
사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과 삶에 미치는 복음의 효과의 총체성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오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신학에 나타나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존재와 작용에 있어서는 그 둘이 통합을 이루는 일원론적인 인간관을 제시한다.
B. 은혜의 결핍으로서의 죄
둘째는, 죄를 설명함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론과의 관련이다. 존 오웬은 죄의 실재성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담론을 따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영적 선을 행하는 것은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악한 의지를 통해서인데 이것은 곧 선한 의지의 결핍이며 은혜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적극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하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행하게 하는 그 요인이 결핍됨으로 악한 의지에 굴복하여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를 작용인(causa effectiva) 그리고 후자를 결함인(causa defectiva)라고 보았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플라톤의 해석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적 사유인 ‘선의 결핍’(privatio boni) 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이러한 부정 신학적인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전통을 따른 것이다.
1. 악: 선의 결핍(privatio boni)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모든 만물은 일자를 시점으로 하여 그 존재도에 따라 인간으로부터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층위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존재도의 개념이다. 하위의 사물은 상위의 사물에 비해 있음을 결여하고 있으며 있음을 결여한 것만큼 그것은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악으로 보는 것이다. 일자는 완전하고 무한한 있음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덜한 있음을 가지며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있음을 결여하여 그만큼 더 악을 지니게 되는데 신플라톤주의의 ‘모든 물질은 악이다’라는 견해 곧 물질개악설이 여기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이후 이 같은 명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점에 있어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선의 결핍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도입함으로써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모든 만물이 선하였다는 성경의 진술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즉 만물이 하나님만 못한 것은 하나님이 각각의 사물들에게 지정하신 바이며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피조물이 창조주만 못하지만 하나님은 있음의 정도의 다양성을 통해 당신의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하나님만은 못하지만 자신에게 지정된 있음을 존재 안에 소유함으로써 선함을 갖는다고 보았다. 사물에 있어서 악은 하나님의 있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지정된 있음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있음의 정도 안에서 선한 존재가 되며 그것을 상실할 때 악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악과 관련하여서는 자연적 사물이 지정된 있음을 결핍함으로 초래하게 되는 자연악이 아니라 영혼이 고유한 있음을 결핍함으로 이르게 되는 도덕악으로 설명된다.
2. 죄: 은혜의 결핍(privatio gratiae)
이처럼 존 오웬은 죄의 존재 원리를 설명함에 있어 그리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다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론적인 기초가 된다. 그는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자들의 전통을 따라 자신의 신학 속에 과다한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서 개진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내재하는 죄에 관한 교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모든 탁월한 교리의 진술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담론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성화론은 이러한 성향으로서의 죄를 어떻게 약화시키고 소멸에 가깝도록 무력화함에 있어서 복음과 성령이 어떻게 지혜롭고 능력 있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인간은 이의 촉진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존 오웬은 바로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부정 신학적 방법으로 죄를 설명하였다. 중세신학에 있어 부정신학이라는 방법론은 결코 신학적으로 긍정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존 오웬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죄를 은혜의 결핍으로서 설명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악론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토대로 은혜를 설명한 것인데 존 오웬에게 있어 ‘결핍으로서의 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 외적인 삶에 있어서 영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결핍된 것이다. 둘째, 내적인 마음에 있어서는 이러한 영적인 선을 가진 행위들을 산출하기 위한 힘의 결핍이다. 셋째, 영적인 생명의 원리의 결핍이다. 곧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생명을 누리고 영적인 힘과 행위들을 산출하는 성령의 원리가 결핍된 것이다. 따라서 이 셋째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결핍은 절대적인 결핍과 상대적인 결핍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비중생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원리가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반면에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원리의 활동이 약화되므로 상대적인 결핍 상태에 있는 것이다.
C.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죄
셋째로, 죄는 실효적인 힘이다. 죄는 영적인 선의 결핍이지만 그것은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오웬이 죄를 실효적인 힘으로 묘사하는 것은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존 오웬은 칼빈과 동일하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내재하는 죄를 필연성으로 설명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적 설명을 계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그 지성이 계명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마음이 선에 이끌리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이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성향화된 악한 욕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영혼의 무게’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악을 행함으로써 만족을 누리지만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속해서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성향이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악을 행하게 하는 필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은 물리의 법칙을 따르는 운동력이지만, 도덕적인 힘은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 안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힘이다. 따라서 물리적 필연성은 사물의 운동에 있어서 전건(前件)과 후건(後件)사이에 피할 수 없는 힘의 관계이지만, 도덕적 필연성은 마음의 운동에 있어서의 그것이다. 즉, 인간이 외부의 사물을 육체의 감관으로 감각하고 마음으로 지각하며 지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식한 것에 대해 행동으로 반응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죄는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바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의 크기가 힘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전건과 후건 사이를 필연성으로 연결하는데 이것이 지향하는 방향이 바로 악이다. 곧, 하나님께 대해 적의를 품고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하게 하는 경향성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힘이 아니라,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신자는 자신 안에 죄가 융성하게 될 때, 원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향하여 이끌리게 되고 그러면서도 또한 싫지 않은 상반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죄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모순율’(contradictions)을 반영한다.
마음의 성향이 악함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필연성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죄를 향하여 몰아붙이며 작용하는 힘인데, 의지 안에서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죄의 이러한 힘을 경험한다. 만약 이러한 죄의 힘을 전혀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오웬의 판단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죄가 악을 향하여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죄의 힘을 크게 경험했던 것이다(롬 7:22-24).
신자가 죄를 발견하고 거룩해지고자 할 때,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객관화된다. 이때 신자는 자신이 내재하는 죄의 힘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지만, 존 오웬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필연적인 성향은 그의 의지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신자가 자신이 선택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죄의 필연성을 자신 안에 스스로 형성한다고 본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 이러한 죄를 죽이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존 오웬은 죄가 가지는 실효적인 힘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보았다. 그 힘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으로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구체적인 힘을 행사하는데, 끊임없이 인간의 지성을 속이고 정서를 부추기며 의지의 동의를 받아 죄를 행동으로 산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오웬의 ‘의인화’(personification)의 설명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 의인화된 설명은 기독교의 전통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잠언 8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인격화의 설명은 같은 책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인격화된 죄의 화법을 통해 성경의 전통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은 이러한 묘사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D. 역설적 개념의 종합
존 오웬의 성화론의 토대가 되는 죄의 형이상학에는 종합하기 어려운 역설의 개념이 있다. 즉, 죄를 은혜의 결핍으로 보면서도, 결핍인 그 죄가 그토록 강력한 실효적인 힘을 인간의 마음 안에서 행사한다는 상반된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 안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존 오웬은 자신의 저작 다른 곳에서도 이 죄의 역설의 문제를 풀어보이지는 않았다.
이 결핍의 상태는 결핍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죄의 역설이다. 이처럼 은혜의 결핍은 오히려 강한 힘을 갖는다. 따라서 영혼이 죽어 있는 자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한 힘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비중생자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며 성화의 은혜가 결핍된 신자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재연된다. 은혜의 결핍으로서의 죄가 갖는 강력한 힘의 역설을 오웬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은혜의 결핍을 통해 역사하는 죄의 힘은 은혜의 결핍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죄 자체가 인간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강력한 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부패한 죄성이 남아 있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은혜가 거두어지거나 혹은 약화될 때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의 경향성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신자에게 가장 치열한 성화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도 오웬의 신학에서는 정당성을 얻는다. 왜냐하면 성화된 신자의 거룩한 생활과 선한 경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내재하는 죄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거룩하게 하는 총체적 작용이지만, 진전된 성화가 성령 없이도 그 거룩함의 결과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화된 신자의 본성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의 끊임없는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변화된 본성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존 오웬의 성화 신학의 틀 안에서 보자면 어떠한 성화의 진전을 이룬 신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덜 의지할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신자일수록 그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진전된 자신의 성화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화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오웬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의존을 통해 누리는 신자의 복음적 이점과 은혜의 유익이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인 설명을 근거로 오웬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접근을 뒤집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웬은 궁극적으로 실효적인 힘으로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은 성령을 통해 그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참된 구원과 영화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Ⅴ.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오웬의 인간론에 있어서 중생한 신자는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내재하는 법으로서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한다.
A. ‘마음의 틀’의 개념
존 오웬은 성화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강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 단지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성으로 알게 되는 계시와 감각을 통해 접하게 되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고유한 영혼의 반응을 보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인간의 영혼의 작용은 자신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경향성을 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1. ‘프로네마’(phronema)와 ‘마음의 틀’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은 작용하는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성향은 사물을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고 또 의지로써 행동하는 영혼의 모든 활동에 일관된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 존 오웬은 ‘마음의 틀’(the frame of heart)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있어서 ‘프로네시스’(φόνησις)의 개념을 차용한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프로네시스는 영혼의 기능에 속한다. 그는 자신의 책, 『영혼에 관하여』(Περὶ Ψυχῆς, De Anima)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하였는데 모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작용을 유지하는데 그 힘이 곧 영혼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도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곧 경향성이다.
그러나 신학자 존 오웬이 성화와 관련하여 프로네마의 교리를 진술할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따랐다기보다는 사물의 존재와 경향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놀랍게도 신약성경 안에 성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프로네마’(φρόνημα)인데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생각되어지는 성향’이다.
인간은 누구이든지 이러한 ‘프로네마’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 안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상상’(imagination)이나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말미암는 인식과 ‘정동’(情動, affection)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존 오웬이 성화론에서 자주 거론하는 마음의 틀의 개념이다. 이것은 외부의 사물들을 인식하거나 상상을 통해 건져 올린 인상들이 도덕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이다. 성화와 관련하여 이 문제들을 더 적극적으로 다룬 작품이 바로『신령한 생각의 틀』(On Spiritual Mindedness)이다.
존 오웬에게 있어 인간의 마음의 틀은 죄의 성향의 지배를 받으면 죄스러운 틀을 지니게 되고 은혜의 성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은혜스러운 틀을 지니게 된다. 전자는 자기사랑과 정욕을 통한 육욕의 만족을 지향하고 후자는 하나님 사랑과 거룩한 열심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을 지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원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이러한 마음의 틀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이러한 마음의 틀이 인간의 지성에 관여하게 되면 생각이 악한 것들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감정에 관여하게 되면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의지에 관여하게 되면 그 욕망에 굴복하기에 좋은 이점을 얻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틀은 결국 그 틀에 적합한 외적인 삶의 행동을 산출하게 된다.
2. ‘마음의 틀’의 심리철학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마음의 틀’ 개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신자에게 이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즉 인간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자기 밖의 외부 세계에 접하여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안의 내면세계에 접하여 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 두 세계는 만난다.
첫째로, 자기 밖의 세계와의 접촉이다. 이 세계는 둘로 나뉘는데, 감각적인 물질의 세계와 지성적인 사유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기 밖의 세계와 접촉하는 두 종류의 창문을 갖는다. 육체의 감관과 오성이 그것이다. 물질적 세계는 전자를 통하여 들어오고 영적인 세계는 후자를 통하여 들어온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의 진리는 영적인 세계를 만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며, 믿음의 행사를 통하여 이러한 인식이 활발해진다. 이렇게 들어온 인상들이 마음에 투영되는데, 이때 마음은 이러한 인상들을 파악하고 느끼고 인식할 때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성화론에 있어서 마음의 틀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성향적 작용을 도덕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신자의 마음 안에 죄의 성향이 우세하면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악을 지향하는 쪽으로 프로네마가 형성된다. 이 프로네마는 단지 생각에 영향을 주는 프로네마가 아니다. 생각뿐 아니라 감정, 의지에까지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력의 틀이다.
그러나 존 오웬이 ‘마음의 틀’로 표현한 프로네마는 본질적으로 여러 방향을 향해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두 방향, 즉 ‘육신’과 ‘영’이다. 여기에서 육신은 죄된 육체를 가리키는데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은 곧 성령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새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네마가 작용하는 방향으로서의 육신과 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인간의 사랑의 대상을 궁극적으로 둘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그 사랑은 자기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의 자기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없으니 영혼은 도외시하고 육체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에 깊이 동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당신의 얼굴에서 멀리 있음이 곧 캄캄한 욕정 속에 있음이니이다.”라는 명제는 존 오웬에게서 “인간이 죄의 속임에 떨어질 때 그는 필연적으로 죄의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라는 명제로 전환된다. 이 명제의 전환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를 벗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자기 안의 세계와의 접촉이다. 인간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마음의 프로네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만 독특한 정신의 작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이다. 존 오웬의 성화론에서 이 상상의 작용은 자주 언급된다. 왜냐하면 이 상상의 작용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결과들을 통해 그의 프로네마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를 거론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내용이 바로 상상의 방향과 관련한 것이다. 즉 어떤 특정한 죄가 신자의 사고 기능에 깊이 관여할 때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라는 것이다.
천상적인 것이든 지상적인 것이든 어떤 사물이나 가치에 대한 상상이 죄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한쪽으로 방해를 받거나 격려를 받을 때 그것이 악한 방향이라면 그 사람의 프로네마가 악으로 기울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이미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죄의 우세한 영향력의 결과이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틀의 작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부합하는 정서를 갖고 행동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B. 죄의 활동: 반감과 대적
이러한 마음의 틀은 죄가 적합하게 활동하게 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게 한다. 죄가 활동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이 형성되면 죄는 자신의 경향성을 발전시킬 좋은 환경을 갖게 된다. 죄는 신자 안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 간다.
1. 반감과 대적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활동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반감’(aversion)과 ‘대적’(opposition)이 그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다. 존 오웬은 죄의 일차적인 활동을 하나님을 향한 총체적인 반감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반감은 지성과 정서 안에서 작용하는데 동일한 감정 안에서 행동으로 산출하도록 내재하는 죄와 더불어 나타난다. 죄의 활동으로서의 반감은 신자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싫어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싫증내는 것을 가리킨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가 융성할수록 반감은 더욱 높은 강도로 나타난다.
신자 안에서 하나님을 혐오하고 싫증나게 하는 죄의 활동은 인간에게 주신 생각과 정서가 작용하는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인간의 영혼의 기능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며, 정서의 기능을 주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죄는 지성과 정서 양면에 있어서 총체적인 반감을 깃들게 함으로 인간 본연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의 반감이라는 활동이 의지와 함께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죄가 마음과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본질인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행동할 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도 작용한다. 어떤 생각들이 스쳐지나갈 때 그것은 대부분 인간의 의지의 선택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특정한 생각이 마음에 착상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의지작용을 거친다.
의지의 작용은 소극적으로는 선택하는 작용이고 적극적으로는 선택한 것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키는 힘의 행사이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대적하는 활동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정서를 지배한 죄의 성향은 의지를 밀어붙여 하나님을 향해 맞서게 한다. 이로써 신자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죄의 작용은 죄가 얼마나 뛰어난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하는지를 보여준다.
2. 반감과 대적의 대상
죄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본질이다. 존 오웬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특성과 활동 그리고 힘을 입증하기 위하여 비중생자들 안에 역사하는 죄의 능력을 예로 든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질은 불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본질과 동일하다. 배교자 안에 역사하는 죄와 동일한 본질의 것이 신자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대적하는 활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답변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대적한다. 내재하는 죄는 결국 신자의 자기사랑의 경향성이니 자기사랑의 최종적 목표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창 3:5). 인간은 의식 안에서 최종적 지위에 오직 하나의 존재만을 원한다. 자신이 최고의 존재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이신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이것은 지위와 관련이 된다. 최고의 존재는 최고의 지위이며 최고의 지위는 하부의 도덕적 질서를 만드는 원인자이다. 인간이 최고의 존재가 되면 이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통치의 질서들은 육욕을 따라 살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되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배척당하는 질서를 도입하게 된다. 이것이 내재하는 죄가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에 대적하는 이유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대적하게 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의 행하심과 필연적인 관계이다. 사랑의 성품에서 사랑의 베풂이 나타나며 공의의 성품에서 심판과 상급이 드러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바라볼 수 없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분의 행하신 개별적인 일들을 통하여 생겨난다. 내재하는 죄는 그분의 통치의 결과로 발생하는 개별적인 일들 안에서 죄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커다란 계획에 역행하는 것들을 탁월하게 발견해낸다. 그러한 역행의 방향이 크고 분명할 때에는 죄가 더욱 강력하게 대적하게 되고 그것이 작고 덜 분명할 때에는 죄는 적게 대적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질서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질서에 대해 반감을 품고 대적한다. 이 질서는 이미 이루어진 질서와 앞으로 이루어질 질서를 포함한다. 이 질서는 도덕적인 질서로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정위된다. 나아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한 추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재하는 죄는 이 모든 질서를 거스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서는 자신에 의해 수립된 질서가 아니며 죄의 욕망을 따라 살게 하고자 하는 죄의 계획에 전면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부의 질서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의 존재와 도덕적인 성품에 맞닿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감과 대적이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한 적의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구도에서 인간의 죄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찾는다. 그러므로 오웬에게 있어서 이 죄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어떠한 성화의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죄에 대한 관심은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신자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갈망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며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것만큼만 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또한 죽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C. 죄의 속임: 실재와 표상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속임’(deceit)은 인식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오웬은 사물의 ‘실재’(realitas)와 ‘표상’(phantasmata)을 구분하는 플라톤적인 인식론을 따르면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실재와 표상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존재론과 관련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론과 관련된다. 특히 데카르트(Descartes René, 1596-1650) 이후 사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넘어온 다음에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오웬은 이러한 철학사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성화의 교리를 사용할 때에는 죄의 속임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풀어간다.
존 오웬은 실재와 표상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경우에서처럼 그의 관심은 경건과 실천에 있다.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죄의 문제를 다루어간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가 영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인식할 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람 안에 내재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간다. 죄의 이러한 활동은 신자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마음의 악한 성향의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둘은 끊임없는 순환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마치 인간의 순종하는 행동과 은혜의 경향성이 순환관계를 이루는 것과 유사하다.
죄의 활동은 결코 객관적인 죄 자체의 작용일 수 없다.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죄는 항상 인간의 마음과 떨어져서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의 성향으로서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하였다고 치자,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하던 죄는 어디로 갔는가? 이런 질문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와 마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의 활동은 단지 객관적인 죄 자체의 활동이 아니라 -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지만 - 주관적으로 그것을 애호하는 신자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 작품 속에서 죄가 인간의 영혼을 속이는 것에 대해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하여 집도하는 것 같은 세심함으로 설명해 나간다. 그의 성경적인 경험 신학의 진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마음 안에서 작용하면서 정서를 육욕으로 물들게 하고 의지를 육욕에 굴복하게 준비시키는데, 이런 모든 파괴적인 작용의 첫 걸음은 ‘생각’(mind)을 속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인식론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성화론을 살펴보면 일관성 있는 논리의 틀로서 인간의 인식작용을 설명한다. 그는 ‘오성’(understanding)과 ‘이성’(reason), ‘생각’(mind), ‘정신’(spirit)등의 인식론적인 용어를 질서정연하게 제자리에 배치하며 성화론을 전개한다. 그래서 철학에서 정리된 인식론을 가지고 그의 성화론을 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과 심리작용에 대한 그의 설명이 놀라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존 오웬에게 있어 ‘오성’은 - 이 말은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자주 ‘총명’으로 번역되었다 -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지성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서가 육욕으로 물든 신자의 마음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사물들이 남긴 정욕적인 인상으로 더럽혀지게 되는데 그러한 더러움이 바로 신자의 총명을 흐리도록 오성에 작용하는 혼란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죄의 속임이다. 신자의 생각이 죄의 속임에 지배당하게 되면 마음은 신속히 죄를 향하여 경계를 풀게 되고 정서의 사랑을 받으며 거기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뿌리를 내린 악한 생각들은 정욕의 도움을 받으며 죄가 성향을 강화하도록 먹이를 제공한다는 것이 오웬의 생각이다. 그가 성화론에 있어 생각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지적되는 ‘바른 생각’의 중요성은 그의 신학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강조점이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의 모든 미끄러짐은 바로 생각의 이탈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 지킴은 곧 신자가 생각하여야 할 바를 생각하고 그리하지 말아야 할 바를 의지적으로 떨쳐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존 오웬은 이것이 마음지킴보다 앞서야 할 경건의 실천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잠시 마음의 자유를 위해 생각을 죄에 개방하는 신자는 자유보다 더 큰 구속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더 큰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하고 복음의 진리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죄의 속임으로부터 매 순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해야 할 신자의 의무이다.
D. 죄의 강압: 욕망론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강압은 곧 거칠게 신자를 밀어붙이는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신자의 욕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신자는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를 단지 내재하게 함으로써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실제의 삶에 있어서 산출될 때 가장 큰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희열을 향한 욕망은 증대되어 이 욕망을 사용하여 죄는 지성에서 용납되고 정서의 강한 후원 아래 의지의 동의를 조르며 산출되려고 신자의 내면을 몰아붙인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험했던 내재하는 죄의 법이다.
존 오웬은 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객관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으로 이것은 인간이 제정한 규칙이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객관적으로 주어진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는, 주관적인 성향으로서의 힘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에 있어 필연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이것이 다양하지 않고 한 가지 방향으로 일관되게 몰아붙이는 내적인 강제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신자 안에서 몰아붙이는 강제력을 지닌 이 죄의 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존 오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신자 안에는 거듭난 새 본성과 옛 본성이 내재하며 죄는 바로 이 옛 본성에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는 신자의 옛 본성에 기생하며 거듭난 새 본성에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 본성은 신자 안에서 중생하기 전과 같은 유리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중생과 함께 자신을 힘쓰게 하던 ‘죄와 사망의 법’이 괴멸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기 때문이다(롬 8:2).
내재하는 죄가 융성하여 신자를 밀어붙이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양심을 거스르는 강력한 욕망의 힘이다. 이러한 욕망은 앞에서 설명한 프로네마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마음 안에 악한 성향이 충분히 형성되었을 때 분출하는 욕망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지성 안에서 양심을 거스르며 정서와 의지 안에서 강압으로 작용한다. 이때 신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양심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죄를 산출하도록 ‘조르는’(agitating) 정서와 지성의 동의를 기다리는 의지로부터 총체적인 강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죄를 산출하고 나서야 일시적으로 강제력이 해소되는데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마음의 더 큰 악한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 오웬은 이런 갈등 속에 있는 신자의 존재를 결코 비관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충분히 부주의하고 게으를 정도로 낙관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작용은 끊임이 없지만 언약 관계를 토대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작용의 무한함 때문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은혜의 힘에 대한 무한한 공급이다. 신자는 믿음과 성령 안에서 온전한 순종을 통해 은혜 언약 안에서 약속된 유업들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다.
Ⅵ. 결론
오늘날 우리는 영적으로 보다 생명력이 넘치는 복음 사역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정신을 따라 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다. 성경적 거룩함과 경건에 대한 추구 대신 건전하지 않은 신비주의의 영성을 찾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목회와 설교의 탈신학화 현상과 맞물려서 교회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정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존 오웬은 종교 개혁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도 보편교회의 신학을 섭렵한 르네상스의 사람으로 자기 시대를 살았다. 그렇기에 그의 탁월한 신학과 깊이 있는 설교는 청교도 특유의 언약 신학과 거룩함의 추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신자 안에 내재한 죄에 대한 탁월한 통찰은 우리 시대의 교회에 영적인 활기와 복음적 순수성에 관해 도전을 준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신자가 내재하는 죄를 인식하고 성령으로써 그것을 죽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신자 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죄를 죽이는 주체는 성령이시지만 신자의 순종 안에서 그와 함께 그 안에서 일하신다.
오늘날 종교개혁의 대의인 “이신칭의”의 교리가 안일한 구원의 개념을 양산하고 성화에 대한 태만으로 오용되는 질병적 상황에 대한 치유책을 오웬의 성화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성화를 위한 신자의 소명을 언약 신학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언약적 헌신을 위한 긴장과 병치시킴으로써 성경적 구원을 이루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오웬의 신학은 숙고할 만하다.
죄는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서 신자의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역사한다. 반복되는 죄의 역사와 실천은 신자의 마음에 일정한 틀을 형성하고 이것을 통해서 죄는 적은 힘으로 신자를 굴복시켜 의의 열매를 맺는 대신 불의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지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만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우세해지는 것을 막고 오히려 은혜의 지배 아래 사는 일은 가능하다. 이를 위해 신자는 진리의 빛 아래서 명징한 지성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는 정동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충만한 의지의 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경건의 실천이 필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지혜로서의 성경적이고 통합적인 기독교 사상을 함양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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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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