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상태에 관한 논쟁 / 목창균 박사(전 서울신대 총장)
2015년 3월 11일 기사
“성경이 말하는 중간 장소로서의 ‘연옥’이라는 것은 비성서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영혼수면설과 영혼멸절설은 또한 성서의 교훈과 모순된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중간 상태의 기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의 인간 상태에 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다.
목창균 박사(전 서울신대 총장)는 육체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미래와 관련해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지만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육체적 죽음 후에도 인간은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목 박사에 따르면 기독교 신학은 ‘중간상태’(intermediate state)라는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육체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정통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 있는 개별적 존재로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되어 부활할 것을 믿고 있다. 따라서 전통신학은 중간상태의 개념을 근거로 영혼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조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간이 죽으면, 과연 어떤 상태에 있을까’라는 신학적 논쟁, 곧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를 둘러싸고 20세기 많은 신학적 논쟁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목 박사는 “정통주의는 영혼의 불멸과 육체 부활 모두를 견지한 반면, 자유주의는 전자는 견지했지만 후자는 거부했으며, 신정통주의는 영혼불멸 사상보다는 육체 부활사상을 선호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중간상태와 관련해 논란이 되는 질문들은 △중간적 장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 기간에 인간의 영혼은 과연 어떤 상태로 있는가 △의식을 갖고, 형태가 변하는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가, 거치지 않는가 등이다.
목창균 교수는 “개신교신학의 경우 중간적 장소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연옥설’을 통해 중간상태를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개신교 정통신학의 경우 중간상태의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제7일 재림교회와 여호와의 증인은 ‘영혼수면설’을 통해, 그리고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영혼멸절설’을 통해 그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최근 일부 성서학자들은 순간적 부활설로 중간상태를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개신교인들은 ‘중간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목창균 박사는 20여 년 전 목회와 신학(1995년 9월, 통권75호)에 ‘중간상태에 관한 논쟁:연옥설을 중심으로’라는 연구논문을 게재했다. 비록 오래된 글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 중에 남아 있는 문제이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읽어보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돼 연구논문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해봤다.
목 박사는 자신의 글에서 중간상태와 관련된 성서적 개념을 개괄한 후, 중간상태의 교리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교리사적으로 추적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일어난 ‘연옥교리’ 논쟁과 정통교회와 제7일 재림교회 및 여호와의 증인 사이에서 일어난 ‘영혼수면설’ 등 중간상태의 장소와 상태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아래는 ‘중간상태에 관한 논쟁:연옥설을 중심으로’라는 연구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 스올과 하데스
신구약 성서는 중간상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인간은 사후에도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약성서 저자들은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의인과 악인 모두 음부(스올)로 내려간다고 보았다. 의인에 대하여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시 89:48) 하였으며, 악인에 대하여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 16:33)고 하였다. 따라서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방법’이다.
스올이란 용어는 구약성서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벌코프에 따르면, 스올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죽은 자의 거처나 죽음의 상태를 나타낸다(삼상 2:6). 그 곳은 어둡고 컴컴한 곳(욥 74:13)이며, 적막하며(시 94:17) 망각의 땅이다(시 88:12). 둘째, 지역적인 의미로 무덤을 나타낸다(시 141:7; 창 37:25,42:38; 욥 14:13,17:13; 시 6:5; 전 9:10 참조). 셋째, 악인에 대한 형벌의 장소, 즉 지옥을 의미한다(시 9:17, 49:14; 잠 15:11,15:24). 벌코브나 뵈트너는 스올이 때로 지옥을 의미한다고 보는 데 비해, 안토니 후크마는 스올이 영원한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의인과 악인 모두 음부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들이 동일한 운명에 처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인은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데 반해, 악인은 그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시 49:14-15). 따라서 악인이 음부로 돌아가는 것은 파멸을 의미한다(시 9:17; 사 14:15). 특히 시편 49편과 73편은 스올의 형벌적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서 역시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음부(하데스)나 낙원 중 한 곳에 존속한다고 가르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신 것이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은 후 음부로 간 반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간 것(눅 16:19-31), 그리고 사도바울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한 것(고후 5:8)이 이를 말해준다.
하데스(hades)는 음부를 뜻하며 히브리어 스올을 번역할 때 사용된 헬라어다. 신약성서에서 하데스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한다(마 11:23,16:18; 행 2:27,31; 계 1:18). 그러나 또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사후에 간 곳이 하데스였다. 스올이 지옥보다는 무덤이나 죽은 자의 영역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었던 데 비해, 하데스는 오히려 후자보다는 전자를 나타내는 데 더 사용되었다.
중간상태에서 불경건한 자는 하데스에서 최후 심판 날까지 고통과 형벌을 당하게 된다(벧후 2:9).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낙원에 있게 된다. 낙원이란 말은 신약성서에서 세 번 사용되었으며(눅 23:43, 고후 12:4, 계 2:7), 하나님의 특별 처소인 천국(Heaven)을 말한다. 따라서 신자는 죽는 즉시 천국에서 완전한 의식을 가진 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안식과 축복의 상태를 누리게 된다(눅 16:19-31; 빌 2:21-23; 살전 5:10).
신약성서는 중간상태에 관해 독립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사람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이 비교적 짧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중간 상태는 잠정적인 것이므로, 천국과 지옥에서의 최종 상태만큼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상 외로 지연되자,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 중간 상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중간상태에 관한 교부들의 견해는 세 가지 흐름으로 정리된다. 첫째, 사후에 지하의 하데스에서 의인은 어느 정도 상급을 누리는 반면, 악인은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상급과 형벌은 천국과 지옥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이는 교부시대의 지배적인 견해였으며, 저스틴,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암브로스, 어거스틴 등이 이를 대변했다.
둘째, 중간상태는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의 과정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제시되었으며, 중세 교회에서 발전된 연옥 교리의 시작이었다.
셋째, 의인의 영혼은 죽으면 즉시 음부가 아닌, 천국으로 간다는 견해이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유세비우스 등이 이를 주장했다. 반면,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등은 그리스도께서 사흘 동안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영혼이 사후에 즉시 천국으로 간다는 견해를 비판했다.
중세시대에는 악인은 사후에 즉시 지옥으로 가는 반면, 죄 없는 의인은 천국으로 간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한편 지옥과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죄의 정도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연옥교리가 유행했다. 또한 두 종류의 림보사상이 발전했다. 선조림보와 유아림보가 그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고, 신자는 사후 즉시 천국으로 가는 반면, 불신자는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쳤다. 소시니안주의자들과 일부 재세례주의자들은 사후의 인간 영혼은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했으며 칼빈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 연옥 논쟁
중간상태와 관련해 일어난 신학논쟁 중의 하나가 바로 ‘연옥 논쟁’이다. 연옥교리는 죽음과 동시에 각 개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위가 결정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적 장소이다. 지옥과 천국으로부터 배제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것은 시련과 징벌의 장소가 아니라 정화의 장소다. 직접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통과해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하지만, 현세에서 지은 가벼운 죄로부터 정결함이나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다.
인간 영혼은 연옥에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통해 정화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연옥교리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교회 전통이다. 연옥교리는 1274년 리용(Lyon)회의에서 헬라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처음 제정되었으며 1439년 프로렌스(Florence)회의는 연옥교리를 지지하는 신조를 채택했다. “영혼들은 죽음 이후에 연옥의 고통을 통해 정화되는데, 그들이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구출받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신자들의 참여, 즉 미사의 제사와 기도, 자선, 그 밖의 다른 경건한 행위들에 의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성서적 증거다. 가톨릭교회가 연옥교리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마카비후서 12장 43-45절이다.
“… 그들은 그 우상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저들은 분명히 알았다 …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여 그 범죄한 바가 사죄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가장 용감한 유다는 … 부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잘 생각하여 각 사람으로부터 은 일만 이천 드라크마를 모금하여 그 죽은 자들의 죄를 위해 드릴 희생을 위해 예루살렘에 보냈다 …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거룩하고 건전한 생각이다.”
이 본문은 연옥과 연옥교리를 직접 가르치진 않지만 죽은 자를 위한 희생제사,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에 대해 언급하고, 우상숭배죄로 죽은 군인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신약성서에서 연옥교리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본문은 마태복음 12장 32절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본문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제외한, 어떤 죄는 오는 세상에서 용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외에도, 연옥설의 성서적 근거로 인용되는 본문으로는 이사야 4장 4절, 미가서 7장 8절, 스가서 9장 11절, 말라기 3장 2-5절, 고린도전서 3장 13-15절, 15장 29절 등이 있다.
그러나 연옥 개념이 성서나 기독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이교 사상의 영향으로 고대와 중세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불로 정결함을 받는다는 고대 인도와 페르시아 사상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불로 정결함을 받는다는 고대 인도와 페르시아 사상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집트와 헬라인들 역시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자녀들이 속죄제를 드림으로 죽은 부모의 수난을 경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속사도 교부에 속하는 『헤르마스의 목자』는 연옥교리를 시사한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헌으로 취급된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지하 세계에 가서 옥중에 있는 영혼들에게 설교했으며(벧전 3:19),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자 말시온 역시 이같은 주장을 했다. 오리겐은 영혼의 시련 과정인 중간 상태의 존재를 인정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후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개념이 오리겐이후, 교부들 사이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흔히 '연옥의 발명자'로 취급되는 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대심판 전에 가벼운 결점을 정결케 하는 불이 있다고 믿었다. 그레고리 시대부터 로마교회는 연옥교리를 주장해왔으며, 1274년 리용회의는 그것을 신조로 제정했다. 그 후 1439년 프로렌스회의와 1563년 트렌트회의는 그것을 재확인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연옥의 고통이 헌금, 신부의 기도, 미사로 단축될 수 있으며, 그것을 생전에 준비할 수도, 사후에 친척들이 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교황이 연옥의 관활권을 가지고 있어 그 고통을 사면, 경감 또는 종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옥교리는 때로 신부(神父)의 금광이라고 불리 울 만큼 로마교회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는 연보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할 정도로, 연옥교리와 면죄부 판매는 로마교회와 교황권 부패의 상징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세 말 종교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Wyclif)와 후스(Huss)가 연옥교리에 반대한 이래,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종교개혁자 가운데 연옥에 대해 제일 먼저 반대 입장을 표명한 사람은 쯔빙글리였다. 그는 연옥교리가 성서적 근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성서는 연옥에 대해서 이때까지 전혀 아는 바 없다.”
개신교회는 연옥설을 반대하고 이를 ‘로마주의자들의 조작물’ 또는 마귀가 만들어 낸 속임수로 간주했다. 연옥교리에 반대하는 개신교회의 입장을 정리하면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연옥교리는 성서적 근거가 없다. 그것의 주 근거로 제시된 것은 마카비후서 12장 43-45절이다. 그러나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라 외경(Apocrypha)이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마카비서 본문 자체도 연옥교리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상을 섬긴 죄로 죽은 병사의 구원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 역시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죄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연옥교리는 성서적 구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연옥의 불과 고통에 의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다(요일1:7).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갈16). 연옥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한 죄의 완전한 사유라는 복음진리와 모순된다.
셋째, 연옥교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목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교황이 연옥에 대한 관활권을 가진다는 주장은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인을 지배하려는 의도와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영혼수면설
중간상태의 인간 영혼은 의식이 있는가, 아니면 무의식 상태에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긴 수면 속에 있는가? 전통 신학은 인간의 영혼은 죽음이후에도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고 가르치는데 반해, 영혼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의식적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영혼 수면설이다. 현대의 저명한 신약성서 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역시 그의 저서 「영혼 불멸인가 죽은자의 부활인가」를 통해 이 이론을 암시하고 있다.
1) 영혼 수면설의 근거
첫째, 성서가 죽음을 잠이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에 대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24)고 하신 것이나 누가가 스데반의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행 7:60), 또는 바울이 다윗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 13:60)고 말한 것 등(요 11:11, 고전 16:51)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4장 13-14절에서 죽음 후의 영혼이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혼 수면설은 이러한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죽음을 영혼의 잠으로 간주한다.
둘째, 성서는 죽은 자에게는 의식이 없음을 암시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편 115:17).
셋째, 성서는 사람의 운명이 마지막 심판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또한 바울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고 한 것은 신자는 죽음 속에서 눈을 감은 후 몇 천년이 지나 의식을 되찾는 순간 주와 함께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영혼수면설은 특수한 인간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 또는 영과 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2분설이나 3분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을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한다. 따라서 육체가 기능을 중지할 때, 영혼도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고 본다.
제7일 재림교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에 대해 비판적이다. 영혼을 인간의 구성요소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자체로 해석한다. 따라서 인간이 불멸적 존재라는 것과 인간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속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를 반대하고, 인간은 생명의 원리와 결합된 육체로 이루어진 영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혼불멸의 교리를 ‘거짓 종교의 토대’로 취급한다.
2) 영혼수면설 논쟁
기독교 정통신학은 영혼수면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은 죽은 후에도 의식적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 교훈이었다. 따라서 전통교회와 영혼수면설 사이에 많은 충돌과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와 종교개혁자들의 논쟁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논쟁의 주제가 된 문제 중 하나가 죽음 후 영혼의 상태문제였다. 재세례파들은 영혼불멸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죽은 사람의 영혼은 마지막 심판 날까지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급진적 개혁주의자 가운데 영혼수면설을 최초로 가르친 사람은 보덴스타인(Andres B-odenstein)과 베스터부르그(Gerhard Wes-terburg)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영혼수면설을 반대하고 영혼불멸을 변호한 최초의 종교개혁자는 불링거(Heinrich Bullinger)였다. 특히 1542년 출판된 칼빈의 「영혼수면론(Psychopannych-ia)」은 영혼수면설을 주장하는 재세례파에 대한 반박논문이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로 대표되는 이 종파를 매우 위해한 것으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영생의 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세례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영혼수면론」에서 칼빈의 주요 관심사는 죽음 후 인간의 영혼은 의식이 있으며 살아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본질상 불멸이며 죽은 후 소멸되거나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를 변증하고 영혼수면설을 반박하기 위해 다양한 신학논증을 사용했다.
칼빈은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를 이중적으로 설명했다. 선택된 자의 영혼은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며 하늘의 평화를 누리는 반면, 유기된 자의 영혼은 마지막 심판을 두려움 속에 기다리며 결박당해 있다. 영혼수면설은 칼빈의 견해와 전적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그 근본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이를 논박하고 자신의 견해를 변증하기 위해 첫 신학서인 「영혼수면론」을 저술했다.
둘째, 제7일 재림교, 즉 안식교 및 여호와의 증인과 정통교회의 논쟁이다.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은 현대에 영혼수면설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하는 집단이며, 그것을 그들의 주요 교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제7일 재림주의자들은 “죽은 사람은 무의식이며,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죽음과 부활사이의 무덤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엘렌 화이트(ElIen G. White)의 초기 사상과 저술에서 발견된다. 화이트는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후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화이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제미슨(T.H.Jemison)이었다. 그는 전도서 12장7절에 근거하여 인간은 죽을 때, 모든 의식이 소멸되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한편, 럿셀(Charles Taze Russell)이 창설한 여호와의 증인은 제7일 재림교와 유사한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내세관은 영혼불멸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성경 어디서도 인간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영혼은 단순히 육체를 살게 하는 생명력 또는 원리로 보고, 그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죽음을 잠으로 간주하고 죽은 자들의 영혼은 잠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에 의해 영적 존재로 다시 창조되어 생명을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천년왕국 동안 악인들은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되는데 처음 백 년 동안 개선의 표시를 보이지 못하면 그들은 멸망당하고 만다. 그 기간 동안 개선된 삶의 증거를 보이면 그들의 시련은 계속되지만, 계속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지옥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옥은 항상 불이 붙어있는 뜨거운 곳도 끝없는 고통의 장소도 아니다. 죽은 자는 생명도 의식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헨나’는 예루살렘성 밖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며 통상적인 무덤을 상징한다고 본다.
제7일 재림교회와 여호와의 증인의 영혼수면설은 전통교회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Hoekema)는 제7일 재림교의 입장은 영혼수면설이라기 보다 오히려 영혼소멸(soulextin-ction)설로 간주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영혼수면설은 죽음 후에 영혼이 무의식적 상태로 존속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제7일 재림교는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사실상 완전한 무존재의 상태, 즉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인간의 본질이 단일하다는 인간론에 기초한 영혼수면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부적절한 이론으로 평가했다. 뵈트너 역시 인간이 죽으면 영혼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영혼수면설의 오류라고 비판했다.
뵈트너는 영혼수면설이 사후에 영혼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이 죽을 때, 영혼이 없어졌다가 부활 때 다시 창조된다면, 죽을 때의 영혼과 부활 때의 영혼이 동일한 영혼이 아니며 전자의 행위에 대한 상이나 벌을 후자가 받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소멸로 보는 영혼수면설을 비판하고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했다.
또한 죽은 사람은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주장 역시 비판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인격적이고 의식 있는 존재가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본문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이다(눅 16:19-진).부자와 나사로의 영혼들은 의식의 모든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쿨만의 견해에 대한 찬반논쟁이다. 오스카 쿨만은 1954-55학년도 하바드대학 개강 강연 원고로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부활인가」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쿨만은 인간의 사후 상태에 관해 두 가지 개념을 강조했다. 신약성서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가르쳤다는 것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인간 영혼은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쿨만은 영혼의 불멸을 기독교 본래의 교훈이나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큰 오해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헬라철학으로부터 기독교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서적교리는 영혼불멸이 아니라 부활에 의한 새로운 삶이다. 기독교의 부활신앙과 헬라의 불멸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쿨만은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죽음을 비교하여 이것을 논증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죽음이 영혼을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위대한 친구였던 반면, 예수에게는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존재를 위협하는 정복해야 할 마지막 원수였다. 따라서 죽음에 직면하여, 소크라테스는 태연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영혼의 미래에 대해 사고하고 다른 사람이 그의 시신을 씻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마지막 목욕을 하기도 했다.
반면,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피하기 원하는 기도를 했으며 제자들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 양자의 태도는 곧 불멸사상과 부활신앙의 차이점을 나타낸다. 불멸은 영혼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는 부정적 표현이라면, 부활은 실제로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새 창조사역에 의해 생명으로 소환된다는 긍정적 표현이다. 따라서 쿨만은 불멸과 부활은 서로 교환 될 수 있거나 보충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개념으로 간주했다.
# 연옥과 영혼수면설, 어떻게 볼 것인가?
중간상태는 뜨거운 신학적 논쟁의 주제다. 논쟁의 핵심은 중간장소의 존재문제와 중간기 영혼의 상태문제다. 중간장소로서 제시된 연옥개념은 비성서적이므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첫째, 그것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 근거를 외경에서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 둘째, 그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암시한다. 인간의 죄가 연옥의 불과 고통에 정화된다는 주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진리와 모순된다.
셋째, 그것은 내세에서 구원받을 기회와 가능성이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처럼 말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천국이 아닌, 연옥으로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내세에서의 또 다른 구원 가능성을 부정한 예수의 교훈과 맞지 않는다.
영혼수면의 개념 역시 비성서적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 죽음을 잠으로 언급한 성경본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생명의 중단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영혼수면설은 잠이란 표현을 오해하거나 확대 해석했다.
둘째,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무의식적 수면 상태에 들어가거나 영혼이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혼불멸과 중간기의 인간 영혼은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는 성서의 교훈과 모순된다. 셋째, 죽음 후 악인의 영혼 역시 안식을 누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축복을 누리지만, 불신자들은 고통과 형벌을 받게 된다는 성서 진리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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