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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신학ㆍ경건의 실천(5) - 함석헌

역사와 신학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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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범재신론적 영성과 기도 / 김희헌 교수(성공회대) / 2015년 3월 3일 기사

 

바른교회아카데미가 지난 2월 9일부터 10일까지(2015년) ‘기도의 신학, 경건의 실천’을 주제로 제18회 연구위원회 세미나를 개최했다. 길선주, 이용도, 손양원, 한경직, 문준경, 함석헌, 이현필, 문익환 목사 등을 비롯해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볼룸 하르트, 본회퍼, 루터, 칼뱅, 카타리나 쉬즈 젤, 존 오웬, 슈페너 등 세계 및 국내 개신교 전통에서 기도의 신학과 경건을 실천한 신앙선배들의 신앙과 신학을 조명했다. 이에 본지는 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를 중심으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바라본 과거 신앙위인들의 기도의 신학과 경건의 삶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하며, 한국 교회에서의 적용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함석헌의 범재신론적 영성과 기도>
김희헌 교수(성공회대)

함석헌(1901~1989)은 그의 아호 신천(信天)이 가리키는 대로, 평생 동안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등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정갈했습니다. 새벽 4시경에 일어나서 2시간 남짓 좌정침묵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해가 뜨면 주로 노동을 하고, 오후 1시경에는 하루 한 끼 먹는 식사를 위해서 휴식을 했습니다.

종교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살았지만, 그의 손은 농부의 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영혼의 애탐과 삶의 몸짓이 하나요, 종교적 갈구와 정치적 행동이 하나요, 개인의 추구와 역사에의 참여가 하나였습니다. 삶의 전체적인 요소가 하나님을 향한 진심에서 하나가 된 전일적(全一的)인 삶의 영성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 함석헌(1901~1989)
그의 전일적인 영성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함석헌은 종교적 삶이란 특수한 능력에 의존해서 가능케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버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영성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만 유지되는 감정의 능력이기보다는, 생명이 지닌 지정의(知情意)의 모든 온도에서 통용되는 넓고도 상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기도 역시 자신의 정서적 강도에 의존하는 개인적인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와 이웃을 분별하는 종교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봤습니다.

함석헌이 전일적이고 통전적인 영성을 추구했던 것은 종교가 삶에서 유리되어 저세상적인 것이 되거나, 생존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세상적인 것이 되는 이중적인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노예상태에 빠지고,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거짓된 마술을 부리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기독교 역시 그 점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인생의 의무’를 지는 일과 ‘역사의 뜻’을 분별하는 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허울뿐인 종교인들에게는 그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삶과 글이 큰 가르침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종교적 믿음의 삶에서, 독단적인 태도를 버리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자신의 대표저작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단적인 태도를 버리고 어디까지나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 철학’과 ‘철학이 없는 종교’로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평생 동안 성경을 가까이 읽고 또 가르치며, 동양의 고전과 이웃종교의 경전을 배우고, 역사와 철학을 깊이 해석하고자 했던 모습은 드넓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그의 진지함과 철저함을 웅변해줍니다.

함석헌은 특정한 기독교의 교리에 충실하기보다는 광활한 종교사상을 펼치고자 했습니다. 상식적이지만 본질적이고, 친근하면서도 심원하며, 꾸밈없이 감동을 주는 전일적인 삶의 영성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 범재신론적인 믿음

함석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요,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었고, 깊이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면,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면, 이제까지 하나님을 증언해온 교리를 모두 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모두 대변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교리적 독단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술에 취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말 뿐입니다. 따라서 함석헌은 “종교와 진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와 생명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생명과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함석헌의 사상과 영성은 그가 가진 고유한 신관에 기초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기성품의 신’이 아니요, 하나님의 활동은 율법에 갇힌 법칙이 아니라 은총의 자유에서 행해지는 사랑입니다. 함석헌은 그 하나님을 가리켜 ‘뜻으로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심원하고도 비판적인 사유가 담겨있습니다. 전문적인 신학용어로 표현하자면,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을 위기에 빠뜨린 근대의 신관인 ‘초월적 이신론’(transcendental deism)을 비판하고, ‘범재신론’(panentheism)을 주장했다는 말입니다.

근대의 전통적인 신학이오랫동안 ‘초월적 이신론’이라는 신관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앙을 설명해 왔고, 그런 이해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통용되어왔기 때문에, 범재신론에 근거하여 종교사상을 전개했던 함석헌의 주장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근대 후기에 서구의 기독교 문명이 유물론과 무신론에 잠식당하고, 힘의 복음과 축복의 교리에 물들게 된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초월적 이신론’이라는 신관에 의해서 기독교의 ‘믿음의 체계(belief system)’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모색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해결방식을 범재신론에서 찾고 있는 신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함석헌의 종교사상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성과 기도를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어떤 분을 향해 있는’ 것이고, 기도란 바로 그 ‘어떤 분’과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해방식이 영성의 특질과 기도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1934년부터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글을 연재하였고, 그것을 모아서 1950년에 책으로 냈습니다(1965년 4판에서 제목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변경됨).

그는 한국 민족이 경험한 수난의 역사를 하나님의 심판이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원료를 가지고 마음대로 기계를 만드는 공예가”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종자를 심어 스스로 자라게 하는 농예가”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자를 가리켜서 “정적·기계적 신관(神觀)”이라 하고, 후자를 “동적·생명적 신관”이라고 말합니다(17:111).

함석헌이 주장한 ‘동적·생명적 신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지 “있는 이”라기보다도 “영원히 있으‘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불변하는 분이 아니라, ‘영원의 미완성’으로서 지속적인 창조를 하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려는’ 분이기 때문에 역사와 우주에도 변화와 운동이 있게 됩니다.

함석헌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신관(神觀)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관념에 머물지 않습니다. 신관은 우주론의 다른 이름이요, 역사관을 결정하며, 인생관과 신앙관을 주도합니다. 불변하는(immovable/impassible)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관념이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숙명론적인 인생관을 낳고, 역동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생명적인 세계관과 진취적인 인생관을 낳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죄악의) 법칙에 묶인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으로 본다면, 영성의 성격과 기도의 내용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영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영적인 갈망이라면, 영원히 새로운 분의 진리는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요, 영성 역시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이고도 약동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영성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고정된 기성품’이 아니라 살아서 자라나는 것이요, 기도는 살아있음의 지표요 자람의 통로로서 하나님과 세계를 호흡하는 총체적인 활동이 될 것입니다. 이 때 신앙인은 이원론적인 선악의 교리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면서 또 일어나면서, 찾으면서 또 깨달아가면서 나아가는 역사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 세계 속에서 생명의 의무를 다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속의 장벽을 넘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전체의 구원을 향한 새로운 종교

하나님이 새로움을 낳는 분이라면 교회와 신앙 역시 늘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함석헌이 제도적인 교회를 통렬히 비판한 것은 제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반동적 보수주의’를 믿음이라 하고, ‘타협적 추종’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기면서 새로움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찍부터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를 옹호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제도교회가 문명의 “지도자요 개척자”가 아니라, “소유자나 향락자”가 되어버린 사실을 한탄했습니다.

1953년 “대선언”이라는 시를 통해서 기성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은 교회가 인류를 변혁적인 삶으로 불러일으키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낡은 종교로 퇴락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대를 감시하고, 가르치고, 심판하는” 교회의 자격 즉, “하나님이 주시는 천작(天爵)을 내버리고 세속의 시장”에 들어간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낡은 종교는 벗어서 역사의 박물관에 걸어라! 그리고 무기는 지금 건너는 역사 일선의 냇가에서 주워드는 두서너 개의 조약돌이면 충분하다! 가톨릭의 조직이 훌륭하다고 해도 요컨대 봉건시대의 작품이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가 날카롭다고 해도 아무래도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 아닌가? 그것을 벗어라! 벗고 나서면 새 종교는 발 앞에 있을 것이다.”

이 선언은 ‘제도’나 ‘교리’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닐 것입니다. 대신 기독교 교회가 제도와 교리를 절대화하며 ‘힘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질서를 유지시킬 ‘힘의 철학’을 숭상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비판입니다. 따라서 그는 해방의 영성을 지닌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해방의 영성’이란 힘의 철학을 극복하고 ‘사랑의 철학’에 의해서 주도되는 영성으로서, 전체를 아우르는 사랑과 지혜를 가진 영성이요, 특히 고통당하는 생명/민중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영성입니다.

함석헌은 낡은 종교가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구원 받은/을 자와 받지 못한/할 자를 교리적으로 가르는 일에 관심하는 반면, 새로운 종교는 전체의 구원을 지향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가 독립적인 실체로서 개체화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범재신론적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도 인류적인 죄요, 선도 인류적인 선이다. 온 세상이 다 악해도 나 혼자 선을 행하여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낡아빠진 종교다. 세상에 그런 더러운 맘이 어디 있나? 인류 전체가 죄를 범하지 않고 내가 죄인됐을 리가 없고, 내가 선을 하려는 데 전체를 잊고 될 수 없다. 악을 하여도 세계 사람이 다 하나가 되어서 하면 그것이 선일 것이다. 하나가 참으로 하면 반드시 그것이 전체에 느껴진다. 그 힘이 곧 성령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종교가 추구해야 할 참된 영성이란 자기 안에서 전체를 느끼며 전일화(全一化)하려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전체를 보듬어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는 전체의 해방을 고려하지 않는 영성은 존재론적으로 잘못되었고, 윤리적으로도 나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함석헌이 이렇게 전체의 구원을 강조한 것은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의 거짓을 밝히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은 종교가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위험시했던 고질적인 잘못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에 대한 철저한 오독입니다.

# 기도, 고난에 맞선 생명의 거룩한 호흡


함석헌에게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과정이 결합된 하나님과의 깊고도 역동적인 대화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오래토록 깊이 침묵/명상 하였고, 몸을 움직여서 노동하는 수행자로서의 습관을 가졌으며, 일할 때나 쉴 때 찬송가를 즐겨 부르고, 수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서 믿음의 고백을 토해냈습니다.

그의 기도는 말과 글과 노래와 몸짓과 침묵이라는 다양한 형태를 가졌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향한 갈구와 죄의 고백,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 역사와 민중의 아픔에 대한 탄원과 애통, 깨달음을 통해 얻은 기쁨과 하나님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표현 등이 담겨있습니다.

그에게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으로서, 기도의 진실은 ‘요청’에 앞선 ‘갈망’에 있고, 그 목표는 ‘효력’보다 ‘깊이’에 있으며, 그 방식은 말의 ‘외침’보다 ‘묵상과 들음’이었습니다.

함석헌은 들음(listening)이 없는 일방적인 요청(asking)으로서의 기도, 신앙의 지성(知性) 없이 정서의 간절함에만 의존한 기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함석헌은 고난이란 “생명의 근본원리”요, 생명은 고난에 맞섬으로써 자유에 이르기까지 자라난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는 역사의 현실, 그 속에서의 종교적 믿음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고를 피하고 낙을 맞으려는 사람은 영원히 고를 못 면할 것이다. 천국에 가면 눈물도 한숨도 없는 데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줄만 믿는 사람이 참 종교가 무엇임을 모르듯, 모든 싸움을 다 싸워내며 무풍지대의 유토피아가 올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함석헌은 생명현실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인생에 눈물과 한숨이 있는 것은 저에게 목적 있는 증거다. 목적이 없다면 환난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도달하여야 할 목적이 있으니 고통이지, 목적이 없다면 고통당할 필요가 없다. 그목적이란 절대명령이다. 인생의 목적이라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것,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다.”

따라서 함석헌에게 기도는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받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생명이 취하는 모든 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투는 고난에 맞선 영혼이 지닌 자유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 자유가 생명의 본성이요 종교의 거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생동하는 종교정신은 영혼의 내면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외부로 육화되며, 개인적인 관심을 넘어 사회적인 영성으로 확대됩니다. 생동하는 신앙은 영성과 지성의 조화를 이루면서,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근본 동인이 됩니다.

이 때 기도는 맘이 길러낸 신앙의 숨결과 행위요, 고난을 딛고 일어선 혼이 얼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몸과 맘의 제사입니다. 함석헌에게 기도는 “하늘 우러름”이요,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으로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호흡하려는 생명의 간절하고도 거룩한 몸짓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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