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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한국교회 개혁 위해 21세기 한국의 루터 나와야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14:58

한복협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개혁의 과제들' 월례발표회서 박명수 교수 강조 / 2014년 10월 10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10월 10일(2014년) 화평교회(담임:이광태 목사)에서 ‘종교개혁과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들’을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주최 측의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한국 교회의 개혁 과제 /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이제 2017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생각하며 다음의 몇 가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종교개혁의 유산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것을 계승해야 하는가?, 둘째, 종교개혁의 유산 가운데 무엇이 문제이며, 오늘의 우리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셋째, 현재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이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저는 오늘 이 세 가지를 간단하게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I. 우리가 지켜야할 종교개혁의 유산


지난 8월 교황의 방한으로 한국사회는 카톨릭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는 위축되었다. 물론 우리는 천주교에서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기독교가 갖고 있는 장점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기독교는 성경만을 주장하지만 천주교는 성경과 전통을 함께 강조한다. 기독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세운 종교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했던 원래 기독교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는 다르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경이 널리 읽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방문화가 기독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 숭배이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여신숭배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 와 보니 여신이 없다. 그래서 여신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는가를 찾았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리아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마리아를 신격화한 것은 없다. 우리가 필리핀이나 남미에 가게 되면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보다도 마리아를 더 섬기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번 교황이 한국에 와서 행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8월 15일 성모 승천축일이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성모무염시태설을 주장하고, 그 다음에는 성모가 승천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를 점점 신격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마리아를 하나님과 비슷한 반열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만 천주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비밀이다.

물론 천주교도 예수를 믿으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천주교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힘으로 선행을 하게 되며, 그 선행의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역시 선행이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바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천주교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기독교는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는 것이다.

천주교의 이같은 잘못된 교리는 또 다른 잘못된 교리를 낳는다. 그것은 얼마만큼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얼마만큼 선행을 쌓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대부분의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연옥에 가있다고 가르친다. 연옥은 훈련받는 곳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연옥에서 벋어날 수 있을까?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으로부터 공덕을 빌려 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인가?

그것은 순교자이다. 천주교가 복자를 만들고, 순교자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의 공덕을 빌려 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아무리 순교자라고 해도 자신의 공덕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온 교황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복자를 추대하는 시복식이다. 위대한 신앙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복자나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성경에는 없는 교리이다.

세 번째, 기독교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실 초대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 당시에는 오늘 날처럼 전적으로 교회일만 하는 성직자는 없었다. 사도들은 순회하는 지도자였고, 장로와 집사는 해당 공동체가 선출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로마에 있는 감독(혹은 주교)이 기독교의 대표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의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교회는 자신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더욱 발전해서 교황무오설로 발전되었습니다. 교황은 무오하며, 사죄권까지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전을 통해서 전달되는데, 이 성례전은 성직자만이 집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성직자가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같은 성직자 중심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II. 종교개혁과 오늘의 개혁: 그 차이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오늘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루터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16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오늘의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21세기 다종교사회인 한반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첫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 일어난 기독교 내부의 문제였다. 고대 로마가 붕괴한 다음에 유럽사회는 기독교적인 사회가 되었다. 기독교가 사회를 통합하는 힘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사회의 문제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힘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문제는 바로 국가의 문제였고, 어떤 기독교를 택할 것인가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 당시는 국가를 카톨릭국가 아니면 기독교(개신교)국가로 나누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21세기의 한국에 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종교문제는 주변문제에 불과하다. 종교개혁 당시처럼 교리적인 차이를 가지고 사회가 둘로 나뉘어질 가능성은 없다. 우리 기독교가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정부에 규제를 요청하지만 정부는 이런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교회 개혁의 문제는 국가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적인 문제이다. 루터시대처럼 국가의 힘을 빌어서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개혁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되는 대중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는 그가 봉건영주의 도움을 받아서 종교개혁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루터를 출교시키려고 했고, 루터는 여기에 대해서 보호막이 필요했다. 이 때 루터를 보호해 준 것이 바로 독일 작센영주 프레드리히였다. 그는 루터를 교황청에 소환하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루터에게 양심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 후 많은 독일 영주들이 프레드리히와 함께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다. 루터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서 종교개혁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봉건영주들의 지원을 받은 루터는 교회에 대한 권한을 교황에게서 빼앗아서 바로 영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최고의 책임자는 바로 영주였던 것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독일의 경우처럼 영주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스위스의 경우처럼 시의회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처럼 왕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종교는 완전히 개인의 자유에 속해있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교회의 근거를 국가나 사회에 두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처럼 개개인의 신앙과 경험에 호소하지 못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번역하여 좀 더 대중들에게 다가갔지만 아직 대중적인 종교로 나가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셋째,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는 그가 강조한 칭의의 교리에 있다. 우리는 루터와 함께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루터의 칭의의 교리는 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갖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을 충분하게 강조하지 못하였다. 루터는 “죄인임과 동시에 의인”(siu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역설적인 변증법을 주장했다. 하지만 성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성령을 통한 새로운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루터의 칭의의 교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가 아니라 현실을 합리화하는데 더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기독교는 곧 바로 루터의 한계를 이해하고 이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칼빈은 칭의와 함께 중생을 강조하였고, 18세기의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하였으며, 20세기의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강조는 모두 루터의 칭의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공헌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넷째, 루터의 사회인식, 곧 두 왕국설에는 한계가 있다. 루터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영적으로는 교회를 세우시고, 육적으로는 국가를 세우셨다고 보았다. 이것은 16세기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다. 필자가 독일의 성을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영주의 궁과 교회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바로 사회를 지탱하는 두 왕국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 과거 교회에 속해있던 문화, 교육, 복지와 같은 많은 분야들이 독립해 나갔고, 국가는 점점 더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과거 종교개혁시대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가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날 교회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단지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아 그들로 자신의 일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 종교개혁시대에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의 두 정부였지만 지금은 교회는 오히려 영적인 영역에 집중하며,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다른 분야 스스로 감당하도록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III. 21세기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지금 우리는 한가하게 과거 종교개혁을 논하고, 그 한계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만 있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 가운데 가장 빨리 성장했지만, 현재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것을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리하려고 한다.

첫째, 종교개혁의 핵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종교개혁의 핵심은 오직 성서, 오직 은혜, 그리고 만인사제설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다 흔들리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성서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성서의 권위 위에 존재해 왔다. 하지만 고등비평의 등장으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문서의 하나로 전락되었다. 현재 개신교의 가장 큰 신학적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는 칭의교리가 기독교인들에게 도덕적인 해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지만 더 근본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은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사회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고, 교회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

만인사제설도 마찬가지이다. 한편에서는 모든 신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사제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부정하고, 성직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직자가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의 권리를 내세워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세력도 있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같은 근본적인 고민을 겪고 는 것이다.

둘째,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 천주교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더욱 어려운 것은 종교개혁의 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동시에 과거 천주교가 빠진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질욕, 권력욕, 성욕의 세가지 측면이 있다.

종교개혁의 출발은 로마 교황청이 성 베드로성당을 지으면서 부족한 물질을 채우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고, 성직을 매매했다. 현재 한국교회도 교회건축으로 인한 빚이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빚을 갚지 못하여 이단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목사의 은퇴자금을 위하여 후임에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중세 천주교가 걸어갔던 길을 같이 걷고 있다.

중세 천주교는 교황과 공의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교회의 대표권을 놓고 서로 싸운 것이다. 이런 싸움 때문에 결국은 루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개신교가 출현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로 싸우고, 대표기관의 대표를 놓고 싸우고, 총회장선거를 놓고 싸운다. “중 벼슬은 닭 벼슬보다도 못하다”고 하는 속담이 있는데 한국교회는 그 벼슬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더 이상 천주교는 비판할 수 없다.

천주교의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의 독신제도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독신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동거하는 성직자가 많았다. 그래서 루터는 “교황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은 남자의 꼬리”라고 비꼬았다. 루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결혼제도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성직자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개신교성직자의 이성문제는 천주교나 불교보다도 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가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 기독교가 직면하지 않았던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받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과거 종교개혁시대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도전이다. 이 도전은 위에서 언급했던 도전 보다 더 어렵고 근본적이다. 여기에서는 다원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언급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에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고등종교가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각각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이들 사이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으며, 여기에 순응하는 불교와 천주교는 많은 호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상황 앞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타종교와의 갈등을 줄이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서구 문명을 소개하면서도 한민족의 독립과 민주시민 양성에 노력해 왔다. 사실 한국 기독교만큼 한국 근대사회에 영향을 미친 종교는 없다. 하지만 최근에 민족문화, 전통문화를 내세우면서 한국 기독교는 외래종교, 외래문화로 간주되고 결과적으로 정부와 국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심지어 황석영의 [손님]에서는 기독교는 원치 않는 손님, 즉 외부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민족을 위한 종교로 자신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
 
IV. 결론: 루터의 돌파

사실 중세 말 천주교의 타락에 관한 것은 널리 알려졌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글을 통해서 풍자적으로 비판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천주교가 강조하는 구원관 때문이다. 천주교는 카톨릭교회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천주교를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구원은 천주교와 사제가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두려움이 없어졌고, 천주교를 향해서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도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성실한 성직자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깨달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개혁이 좋은 뉴스거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개혁이란 세미나에서도, 기자회견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루터처럼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런 개혁을 위해서 21세기 한국의 루터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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